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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倭)란 누구인가? (2)
<* 1 편에서 계속입니다>
【12】 명사(明史) 열전 / 일본(日本) : <由是,浙,閩大姓素為倭內主者,失利而怨.紈又數騰疏於朝,顯言大姓通倭狀,以故閩,浙人皆惡之,而閩尤甚. : 본시부터 절강지방 및 민(閩)지방의 백의 대성(大姓)들은 내부에서 왜(倭)에게 협력하는 자들이며, 이로움을 잃어버리고 원망(怨望)하는 자들이다. 조정(朝廷)에서 여러 번에 거쳐 통하게 하여, 대성(大姓)들을 통해 왜(倭)에게 문서를 보내 알아듣게 하였으나 민(閩), 절(浙)인들 모두는 악인들이며, 또 민(閩)지방의 사람이 더욱 심했다. >
<三十二年三月,汪直勾諸倭大舉入寇,連艦數百,蔽海而至.浙東,西,江南,北,濱海數千里,同時告警.破昌國衛. : 32년 3월, “왕 직구”와 여러 “왜”들이 대거 입구하였는데, 연달아 수백 척의 배(艦)로,(가릴 폐 : 蔽) 바다를 가로 막고 <절 동(浙東). 절서(浙西). 강남(江南). 강북(江北)>지방의 빈해(濱 海) 수 천리에 다다랐다. 이와 동시에 경계(境界)가 발령됐고, 이들은 “창 국위(昌 國 衛)”를 무너뜨렸다.>
● 이러한 내용을 보고, <대륙 자생 왜(倭), 열도(列島)의 왜(倭)>를 구분하여 이분법적인 논리(論理)로 역사(歷史)를 창조(創造)적으로 재구성하려는 사람들이 있다. 【과거의 역사는 결코 창조(創造)될 수 없다. 우리들의 미래는 창조적일 수 있다. 착각해서는 안 된다.】
이들의 의도(意圖)는 “왜(倭)”는 열도(列島)에 있어야만 한다. 기존(旣存)의 역사해설은 『왜(倭)는 열도(列島)에, 조선(朝鮮)은 반도(半島)에, 중국(中國)은 대륙에 있어야만 한다. 』 조선(朝鮮)을 분할(分割)하면서 만든 그들만의 밀약(密約)이기 때문에, 이러한 구도(構圖)를 무너뜨리면 그동안 이들이 만들어 놓은 역사(歷史)구도(構圖)가 모두 깨지기 때문이며, 이것이 깨진다는 것은 ➡“조선(朝鮮)의 역사가 복원(復原)된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 왜(倭)의 활동(活動)지역이나 본거지(本據地)를 기록한 대륙사서는 기원전(紀元前)이나 기원 후(後) 16세기경이나 똑같은 지대로 설명하고 있다. 약간의 영역 축소, 확장이 있을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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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명사(明史) 열전. 조선(朝鮮) : <王 國 北 接 契 丹, 女 直, 而 南 接 倭, 備 御 之 道 : 그 왕국(王國)은 북(北으)로 글 란(契丹)과 女直(여직)과 맞닿아 있고(接), 또 남쪽으로는 “왜(倭)”와 맞닿아(接) 있어 나라를 방비하는 길이니 그것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 명 태조(太祖) 즉위 때를 말함이니, 고려(高麗)시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려(高麗)의 영토(領土)는, 북쪽으로 글란(契丹)과 여직(女直)과 『접하고(연하고)』, 남쪽으로는 “왜(倭)”와 『접하고(연하고)』있다.』는 기록은 『고려(高麗)가 반도(半島)에 존재하고 싶어도 존재(存在)할 수 없고, 열도(列島) 역시 왜(倭)가 살고 싶어도 살 수 없는 곳이다.』
● 이러한 지형적(地形的) 특색(特色)이나, 인접(隣接)국가들과의 경계(境界)등을 생각지 않고, 고려(高麗)의 영토(領土)에 대해 설명하는 반도(半島)인들의 무지(無知)는 참으로 대단한 것일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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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명사(明史)열전. 조선(朝鮮) : <行長紿曰:天朝幸按兵不動,我不久當還.以大同江為界,平壤以西盡屬朝鮮耳. ; “소서 행장”이 말하기를, 천조(天朝)의 군대는 움직이지 말기를 바란다. 我(왜를 칭)는 오래도록 돌아가지 않을 것이며, 대동강(大同江)을 경계로 할 것이며, 평양(平壤)의 서쪽은 조선(朝鮮)에 속하고.>
● 대동강(大同江)을 경계(境界)로,
1)『남쪽은 왜(倭)가 점령했으니 왜(倭)가 갖겠다.』는 것이고,
2)『북쪽의 땅은 천조(天朝)의 군대가 진주(進駐 : 주둔)하고 있으니, 천조(天朝)의 땅이나 마찬가지이며,
3)『평양(平壤) 서쪽 땅은 “조선(朝鮮)의 것”으로 하면 되지 않겠는가.』하는 말이다.
● 평양(平壤)의 서(西)쪽 지방은 어디를 말하는 것일까. 설마 대동강(大同江)의 북쪽에 있는 평안도(平 安 道)나 심양(瀋 陽)쪽을 가리켜 “서쪽”이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대동강(大同江)의 남쪽지대가 있으니, 강 건너는 “북쪽지대”임이 당연한 것이리라. 그러면 그 서(西)쪽 지대는 분명(分明) 바다(海)일 수밖에 없는 노릇일터!!!!!!!!!!!!!!!!!!!!!!!!!!!그 서쪽 바다 속에서 “조선(朝鮮)인”들은 어떻게 살았을까를 생각하면, 한숨만 나오는 것을?????????? 이렇게 어리석은 자들이 반도사관(半島史觀)관 식민사관(植民史觀)을 주장하는 무리들이다.
● 후한서(後漢書)에는 『평양(平壤) 서(西)쪽에 옥저(沃沮)가 있고, 그 옥저(沃沮) 서쪽에 개마대산(蓋馬大山) 곧 단단 대령(單單大嶺)이 있었다.』 말하고 있고, 그 후 1,900 여년 세월이 지난 뒤, 20세기에 편찬된 “고금지명대사전”에도 평양(平壤) 서쪽에 주 군 현(州郡縣)이 있었다고 했고, 실제 “녹주 (淥 州)”를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옛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볼 때 평양(平壤) 서쪽지방은 바다가 아닌 육지(陸地)였다는 것을 증명(證明)한다. 반도 평양(平壤)은 결국 짝퉁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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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3】명사열전(明史列傳) 暹 羅(섬라)편 ; <二 十 年,➡日本破朝鮮,暹羅請潛師直搗日本,牽其後.中樞石星議從之,兩廣督臣蕭彥持不可 : 20년, 일본이 조선을 파했다. 잠사【潛 師:전문적으로 자맥질을 하는 사람】들을 일본(日本)에 직접 이끌고 가자고 섬라(태국)에서 청하였다. 중추(中樞) “석성”은 의논하여 따르자 하였으나 양광【兩 廣 : 광동(廣東)과 광서(廣西)】의 독신(督 臣)이었던 “소언지”가 반대하여 이에 그만 두었다. >
● 일본(日本)이 현 열도(列島)에 있었다고 했을 때 섬라(暹羅 : 태국)에서 아무리 잠수(潛水)를 잘하는 자들을 뽑아 보낸다고 해도 현 열도(列島)까지는 신(神)이 아닌 이상 불가능한 말이다.
또 광동(廣東). 광서(廣西)의 독신【督 臣 : 총독(總督)】이 반대(反對)하여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말은 이 주위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왜(倭)가 있었다는 이야기다. 이는 곧 일본(日本) 즉 왜(倭)의 영토가 가까운 곳에 있었다는 말이 되는 것이다. 섬라(暹羅)가 어디인가?
“반도(半島) 조선(朝鮮)과 열도(列島) 일본(日本)”으로 보면, 현실 세계에서도 가고 싶다하여 내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먼 곳이다.
● 이러한 옛 역사서의 기록은 『조선(朝鮮)과 왜(倭)를 반도(半島)와 열도(列島)에 놓고는 절대로 이해(理解)할 수 없다.』는 점이다. 결과적으로 역사서(歷史書)를 제대로 이해(理解) 못하는 무리(群)들에 의해 고의적(故意的)으로 왜곡(歪曲), 조작(造作)된 해설(解說)이 판을 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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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진실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조차 분별(分別)할 수 없는 한국(韓國) 사회(社會)는, 『독립(獨立)투사(鬪士)와 그 후손(後孫)들, 친일(親日)분자와 그 후손(後孫)들』의 삶의 질을 생각하면 대한민국(大韓民國) 사회(社會)는 정의(正義)가 실종(失踪)된 곳이다. 이런 삶을 이어온 대한민국(大韓民國)은 친일(親日)파와 친미(親美)파간의 경쟁사회가 되어버렸다. 그러나 이들의 가장 큰 문제(問題)는 무엇이 진실(眞實)이고, 무엇이 거짓인지 판별(判別)할 능력(能力)이 없다는 것이다. 사실은 사실대로 밝혀 거짓됨을 반성하는 자세가 있어야 함에도, 아래의 예를 하나 들어보자.
『경성(京城) 제국대학(帝國大學)』!!!!!!!!!!!!!! 현 “서울대학교”의 모체가 아닌가!!!!! 해방 후 미군정은 “경성제국대학”을 그대로 "국립서울대학교"로 이름만 바꿔서 계속 그 명맥(命脈)을 유지시켜 나가게 했다.
서울대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면,
● 기원(起源) : 최초의 국립고등교육기관. 대한제국건립기에 최초의 고등교육기관들이 세워지면서 서울대학교 설립의 토대를 제공했던 시기이다.
● 1단계 : 개교기((開校 期) : 1,946년 개교부터 6.25 한국전쟁의 피난 기를 거쳐 1,963년 9월 환도 후 복교할 때까지가 이 시기에 해당한다. <1,963년은 1,953년의 오기가 아닐까?>
● 2단계 : 전후 민족의 대학 건설기로, 서울 대학이 환도한 1,953년 9월부터 1,975년 2월까지가 이시기에 해당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분명 경성(京城)제국대학(帝國大學)이 모체임에도 위 ‘국립서울대학교’ 홈페이지 소개에는, 이러한 말이 전혀 없다는 점이다. 아래의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설명을 보면 분명 현 “국립서울대학교”의 전신은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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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처] / 네이버 백과사전 / 경성제국대학 [京城帝國大學] 1924년 일본 정부가 서울(당시 京城 府)에 설립한 관립 종합대학.
1924년에 경성제국대학 관제가 공포된 후 예과(豫科)가 먼저 개설되고 1926년 법문학부와 의학부가 설립되면서 초대총장으로 핫토리 우노키치[服部宇之吉]가 취임하였다.1926년 2월에 법문학부 교사가 준공되어 학부가 개강하였으며, 같은 해 5월 청량리에 예과교사, 1927년에 의학부 교사가 준공되었다. 1928년에는 법문학부 본관을 준공하고 조선총독부 병원을 의학부 부속병원으로 이관하였다. 1929년 4월 처음으로 법문학부 1회 졸업생을 배출하였고, 1934년에는 학부의 수업연한을 2년에서 3년으로 연장하였으며, 1938년 이공학부를 증설하였다. 8·15광복과 더불어 경성대학으로 바뀌었다가, 1946년 '국립서울대학교설립안'이 공포되어 경성법학전문학교· 경성경제전문학교· 경성치과전문학교· 경성이학전문학교· 경성광산전문학교· 경성사범학교· 경성여자사범학교· 경성공업전문학교· 수원농림전문학교 등 9개 전문학교와 통합되어 지금의 “국립 서울대학교”로 바뀌었다.
● 이러한 것들을 당당히 밝히고, 『다시는 인접국의 침략으로 인한 비극적인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과거의 치욕을 교훈삼아 당당하게 일어날 수 있는 참교육의 장으로 다시 일어나자.』는 정도의 설명 소개를 해야 되는 것이 아닐까? 숨긴다고 진실이 없어질까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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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4】명사(明史) 열전(列傳). 유구(琉球) 편 : <四十年,日本果以勁兵三千入其國,擄其王,遷其宗器,大掠而去。浙江總兵官楊宗業以聞,乞嚴飭海上兵備,從之 : 40년, 일본의 용감하고 굳센 경병 3,000이 그 나라에 입구하여 그 나라 왕을 포로로 사로잡고는 (중략). 『절강 총 병관』 “양 종업”이 이러한 사실을 듣고, 해상방비를 엄하게 해야 한다고 청하자 제(帝)는 이에 따랐다. <四十四年,日本有取雞籠山之謀,其地名台灣,密邇福建,尚寧遣使以聞,詔海上警備 : 44년, 일본이 계 롱 산【福건성 민 후 현 서남에 있다】의 모의로 취하여 갖은, 그 땅의 이름이 대만(台 灣)이며, 복건에서 아주 가까워서, 상념의 파견사가 듣고, 해상경비를 해야 한다고 고하였다.>
《 열전(列傳)을 보면 ; 이곳이 그들의 거점지가 되었다. 인하여 이름이 여송【呂 宋 : 필리핀 루손 섬】이다. 실은 “불랑기【포르투갈 또는 프랑스】” 이다. 전에 민인【閩 : 복 건성 민 현】들이 그 지방이 가까워서 장차 풍요로움과 풍성함에 물건을 사고파는 상인들 수만(數萬) 인이 그곳에 왕래(往來)하였는데, 왕왕 돌아오지 않고 그곳에 살아 손자(孫子) 대에 이르렀다. 그 땅에는 대나무가 많고, 두발을 벌려 켜 안을 만큼 크며, 높이는 10 장이다. 가옥(家屋)은 이 대나무 구조로 되어 있고, 지붕은 띠를 역어 만들었으며, 넓고 길어 가족 모두가 이곳에서 산다. 가정 말, 왜구(倭寇)가 민【閩 : 복건 민 현】지방을 어지럽힐 때 대장 “척 계 광”에게 패하여 왜(倭)가 숨고 살았는데 “당 림 도건”을 따랐다. “도건”이 두려워하여 왜구(倭寇)와 함께 했는데 또 관군(官軍)이 추격(追擊)하자, 두려워서 배에 돛을 달아 바람을 타고 “발니(浡 泥)”로 가 그곳의 변(邊) 지대에 살았으며, 이름을 “도건 항”이라 하였다. 숭정 8 년, 급사중 “하 개진”이 “정 해(靖 海 之 策)지 책”으로 이르기를, 『 원 진. 이 충. 양 록. 양 책. 정 지룡. 이 괴기. 종무. 유 향 』등이 계속 서로 난(亂)을 일으켜 바다 위가 편안한 날이 없다. (중략). 대만(台 灣)이다. “대만(臺灣)”은 “팽 호 도”밖에 있으며, 장주【漳 州 :복건】, 천주【泉 州 : 복건】 모두에서, 양일(兩日) 야(夜)정도 떨어져 있으며, 땅은 넓고, 기름지다. 》
● 이러한 일련의 기록(記錄)을 보면, <유구(琉球)>는 현 대만(台 灣) 땅을 말하는 것이며, 이 台 灣(대만)은 또 다른 이름으로 유구(琉 球)=東 影(동영)=東瀛(동영)으로 불리기도 했었다. 특히 무협지에서 말하는 “동영(東瀛)의 무사(武士)”는 <열도(列島) 왜(倭)>의 무사(武士)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대만(臺灣) “왜(倭)”의 무사(武士)를 가리키는 말이다.
● 또한 위 기록을 보면, 왜(倭)는 ; 현재의 <복건 성. 절강성. 광동 성. 광서 성. 운 남성 남부. 베트남. 태국. 캄보디아. 인도네시아. 말레이시아. 필리핀 등>의 여러 섬과 연안(沿岸)지대에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2011년 07월 20일 <글쓴이 : 문 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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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친일파, 친미파들이 권좌를 잡는 한 우리의 미래는 암울할 것입니다. 정말 걱정입니다. 그리고요, 갑자기 떠오른 생각입니다만, 베트남의 똥낑이라는 지역이 있습니다. 똥낑만 사건으로 유명한 곳이지요. 이곳을 한자로 표기할 때 동경(=동쪽 서울)이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혹시 베트남의 똥낑이 신라의 동경... 저의 서투른 상상이었습니다.
하지만 불교융성지인 신라라는 점을 고려해볼 때 베트남 지역은 불교 문화가 융성한 곳으로서 신라와 연결시켜 볼 만 합니다. 섣불리 단정하는 것 역시 위험합니다. 하지만 베트남 쪽이 신라의 영토일 가능성이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의 생각에 캄보디아와 말레이시아, 인도네시아, 인도 남부쪽에 왜국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맞습니다. 그곳이 "동경"일 가능성도 있습니다. 또 그곳이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무너뜨린 후의 영토는 신라의 영역이기 때문에 님의 말씀대로 신라의 영토일 가능성이 많은 곳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