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열의 힐링여행] - 강진 하멜기념관(2014.09.03. 금강일보]

[정승열]

문화

<정승열의 힐링여행>(54) 강진 하멜기념관

데스크승인 [ 10면 ] 2014.09.02

정승열 | admin@ggilbo.com

전라병영성 진남문 전경.

전남 강진군 병영면(兵營面)은 조선시대 전라우수영의 병영이던 곳을 행정구역 명칭으로 삼은 지역인데, 전라도병영성은 조선 태종 17년(1417) 남해안에 창궐하는 왜구들의 노략질을 막기 위하여 초대 병마도절제사 마천목 장군을 임명하여 축성한 것이다.

이후 500년 동안 전라도 53주 6진을 총괄하는 육군사령부였던 전라도병영성은 1894년 전라도 일대를 휩쓴 동학농민항쟁 때 소실되었다가 이듬해 갑오개혁으로 신군제가 시행되면서 완전히 폐쇄 되었다.

 1991년부터 병영성 복원에 나서 약 9만 3000㎡의 면적을 둘러 싼 둘레 1060m, 높이 3.5m의 성곽과 남문(鎭南樓), 동문의 복원을 마치고, 현재는 서문과 성벽 위를 덧댄 여장(女墻)의 공사 중이다(사적 제397호).

그런데, 병영성 동문 앞에는 조선 효종 5년(1653) 일본으로 항해하던 중 태풍으로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13년 동안 억류생활 중 탈출한 네덜란드의 무역선 선원 헨드릭 하멜(Hendrick Hamel; 1630~ 1692)을 기리는 하멜기념관이 있다.

하멜기념관 내 풍차

하멜기념관 전경

 2007년 12월 개관한 하멜기념관은 2002년 한일 월드컵 때 한국을 세계 4강이라는 신화창조로 유명한 네덜란드 출신 히딩크 감독이 네덜란드에 크게 소개되면서 두 나라의 인연과 우정을 강화하기 위한 사업의 하나로 계획된 것인데, 사실 네덜란드에서는 최근까지도 하멜에 대해서 거의 알지 못하다가 한일 월드컵 이후 하멜의 고향 호르큼(Gorcum)시에 하멜의 동상을 세웠다고 한다.

350여 년 전 한 서양인이 조선에서 13년 동안 억류생활을 하면서 보고 겪은 조선의 풍습과 문물들은 어땠는지에 대한 호기심은 강진을 향하게 하지만, 하멜이 억류생활 중 마지막 7년을 살았던 전라도병영성 앞에 하멜기념관을 세운 것은 조금은 지자체의 숨겨진 의도가 엿보였다.

하멜 동상

하멜이 만든 신발

 입장료와 주차비가 거저인 하멜기념관은 장방형 서양식 목조건물 2동과 야외 전시물은 수도권과 멀리 떨어진 시골에 낯선 서양식 건물과 테마파크를 보는 느낌이 색다르다.

 2개의 목조건물 중 타원형 건물은 하멜이 표착한 제주도를 상징하며, 오른쪽 사각형 건물은 하멜 일행이 타고 온 무역선 스페르베르호(Sperwer)를 상징한다고 한다.

하멜기념관 내 풍차

야외전시장에는 네덜란드의 상징인 풍차가 인상적이고, 중앙에 세워진 동상의 하멜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그의 고향 네덜란드 쪽이라고 하다. 또, 전시물 중 무역선이 항해 중에 해적선을 만나면 사용했을 대포를 전시하고 있는 것은 당시 무역선의 위험한 항해를 말해준다.

내부 전시실로 들어서면 하멜이 귀국 후 무역회사에 보고한 보고서 영인본을 비롯하여 하멜 일행이 사용했을 당시의 물건들, 그리고 하멜의 생애와 350여 년 전인 17세기 조선과 네덜란드의 사회·문화·역사적 자료 210점이 5개의 전시실에 나눠서 전시되어 있다. 하멜 표류기 복사본 등은 모두 네덜란드에서 기증받았다고 한다.

강진군에서는 하멜기념관 개관에 그치지 않고 하멜이 7년간 억류생활을 하던 당시의 초가집을 재현하는 등 테마파크를 추진하고 있는데, 이 프로젝트에는 하멜의 고향인 네덜란드 호르큼시와 하멜 재단도 참여한다고 했다.

하지만, 하멜의 발자취는 이곳 이외에 무역선이 난파되어 표착한 제주도 모슬포 해안에 1980년 무역선을 복원하여 전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멜 일행의 표착을 기념하는 기념탑을 세웠으며, 또 하멜 일행이 한양으로 압송될 때 첫 기착지였던 여수항에도 하멜공원과 기념탑이 있다(2014.03.05. 산방산과 용머리 해안 참조).

1600년대 초 네덜란드는 영국의 뒤를 이은 해상강국이 되어 해외무역에서 큰 부를 축적했는데, 1630년 호르쿰 시에서 태어난 하멜은 큰 꿈을 품고 20살이 되던 1650년 11월 동인도회사가 있는 바타비아(Batavia; 현재의 인도네시아 자카르타)로 갔다.

3년 뒤인 1653년 6월 18일 하멜은 무역선 스페르베르호의 서기가 되어 바타비아를 출발하여 포르모사(Formosa; 현재의 타이완)를 거쳐 7월 30일 일본 나가사키로 항해하던 중 8월 11일 제주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온갖 사투 끝에 8월 16일 새벽 가까스로 제주도 서귀포 모슬포 바닷가에 표착했다.

하지만, 선원 64명 중 28명이 죽고 살아남은 36명은 붙잡혀서 제주목사에게 끌려갔지만, 대화가 통하지 않아서 조사에 애로를 겪던 중 한양에서 내려온 관리를 통해서 조선에서는 이들이 네덜란드 무역상인 것을 알게 되었고, 또 하멜 일행도 조선의 해금정책(海禁政策)으로 자신들이 귀국할 수 없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러자 탈출을 시도하던 하멜 일행은 다시 체포되어 이듬해 5월 서울로 압송되었는데, 하멜은 제주에서 배를 타고 전라도 해남에 도착해서 강진~나주~장성~전주~공주~천안~수원~과천을 거쳐 한양까지 압송과정을 상세히 기록했다.

그리고 하멜은 제주도에 억류되어 있는 동안 조선의 관복을 입고 자신들의 취조겸 회유하던 관리가 자기들과 같은 네덜란드인이었지만 오랜 이국생활 탓에 모국어를 잊어먹고 머뭇거렸다고 기록했는데, 그 사람은 하멜보다 27년 전인 1626년 무역선을 타고 일본으로 가던 중 풍랑을 만나 제주도에 표착했다가 붙잡힌 베테브르(Wetervree)이다.

베테브르는 1628년(인조 6년) 서울로 압송된 뒤 훈련도감에서 총포 제작을 하다가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고, 그 후 조선에 귀화하여 한국인 박연(朴堧)이 되어 조선여인과 결혼하고 두 자녀를 낳았으며, 하멜 일행이 제주도에 표착하자 통역을 맡고 이들이 서울로 압송되었다가 다시 전라우수영으로 이송될 때까지 3년간 조선말과 풍속을 가르쳤다.

훈련도감에서 대포 만드는 작업을 하던 하멜 일행은 조선에 온 청 사신에게 구원을 요청했다가 2명이 처형되고, 1명은 병사했다. 그 후에도 몇 차례 탈출을 시도하자, 조정에서는 1656년 3월 하멜 일행 33명을 전라우도병영에 배치하여 엄격한 감시 속에 잡역을 맡겼다.

 전라우수영이 있는 강진에 배치된 하멜 일행은 몹시 궁핍해서 거지처럼 구걸하며 살았는데, 이때 11명이 굶어죽기도 했다. 그러나 1660년에 부임한 전라병사 구문치(具文治)는 이들에게 비교적 관대하여 병영성 옆에 살 집과 텃밭을 주었으나, 1663년(현종 4년) 큰 흉년이 들자 남원 5명, 순천 5명, 전라좌수영인 여수에 12명을 분산 배치했다.

여수의 전라좌수영에서 문지기 생활을 하던 하멜은 동료들과 탈출을 계획하고, 한 어부로부터 어선 한척을 구입했다. 하멜 일행은 1666년(현종 7) 9월 6일 약속날짜에 도착하지 못한 동료선원 14명을 놔둔 채 8명만이 탈출하여 천신만고 끝에 일본 나가사키에 도착했다가 이듬해 본국으로 귀국했다.

하멜은 회사로부터 밀린 임금을 받기 위하여 조선에 표착했다가 억류생활을 했다는 ‘난선(蘭船) 제주도표류기’를 기록하여 제출했는데, 뜻밖에도 표류기 부록에 소개한 조선국기(朝鮮國記)가 서양인들에게 미지의 나라 조선을 알게 하는 계기가 되어 프랑스·영국·독일 등에서 번역, 발간되기도 했다.

평생을 독신으로 살았던 하멜은 1692년 2월 12일 62살로 죽었으며, 한국에는 1934년 이병도 교수가 진단학보에 처음 번역하여 소개했다.

한편, 하멜과 함께 탈출하지 못했던 선원 14명은 전보다 더 엄격한 통제를 받다가 네덜란드 정부의 요청을 받은 일본 막부정부의 교섭으로 1667년에 풀려나서 일본을 거쳐 본국으로 귀국했다. 350여 년 전 서양인의 눈으로 본 은둔의 나라 조선을 보는 느낌이 감회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