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 수필과 문학성
1) 말도 많은 수필의 문학성
한 편의 수필이 기도문처럼 쓰일 때, 그 애절한 내용이 눈물샘을 자극할 때, 독자의 아량을 기대할 수 있다. 한 편의 수필을 두고 몇 년을 고민하고 그리워하며 하늘을 볼 때도 있다. 조상을 생각하고 내 뿌리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교차될 때도 있다. 그 뒤, 마음의 균형을 잡고 쓴다. 이어서 고치고 다듬으며 단어에 확대경을 들이대며 뜻 이어짐을 구체적으로 확인한다. 언어의 색깔을 구별하여 선택하고 조화로운 문장의 숨결을 생각하면서 글의 숙성을 위한 자신의 성숙을 고민하는 경우도 있다. 작품에서 세월의 고개를 넘은 문장의 세련미와 경건함이 있으면 좋으련만 하는 생각도 곁들이게 된다.
시도 소설도 수필도 희곡도 순수문학으로서의 문학성은 전공필수이다. 사람으로서의 인간성 같은 것이 문학에서의 문학성일 것이다. 그런데도 유독 수필에서만 문학성 운운하며 시도 때도 없이 많은 사람들이 수필에서의 문학성을 시비하고 나선다. 그리고 싸잡아서 신변잡기 탓으로 돌린다. 사람으로 살아가면서 마음에 상처 입지 않고 살아가는 사람은 드물 것이다. 사는 것 자체가 흔들리면서 균형을 잡으려는 것이다. 순간순간 여러 가지의 감정을 억제하며 이것저것 선택의 문제를 결정짓는 것 자체가 삶이다. 그것들이 주변사요, 내 몸 가고 오는 둘레의 신변사이다. 그런데 이 내 몸 처하는 곳과 주변의 일들을 배제하고 무엇을 이야기해야만 신변잡기를 떠난 문학으로서 승리하는 수필이 될 수 있단 말인가? 이것이 수필을 쓴다고 써온 사람의 자존심 상한 고민이었다. 그리고 내 문학의 팔자인가 하고 생각할 때도 있었다. 단 하나, 나부터 그런 경솔하고 비아냥대는 것 같은 평을 덜 받기 위해 수필가다운 문인이 되기 위해 노력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더디 쓰되 객관적인 평가를 염두에 두고 쓰자는 생각이었다. 작가는 죽더라도 진정한 문학의 길에서 책상을 깨물고 죽어야 한다는 생각을 하면서.
2) 스토리텔링과 플롯텔링
요즈음같이 영어가 많이 사용되리라고는 생각 못하고 지내왔다. 신문·방송·잡지·드라마·전단지 등 전역에서 영어가 판을 친다. 세계화를 외쳐댄 정객들의 보은의 결과나 되는 것처럼.
같은 맥락에서 스토리텔링과 힐링이 급부상했다. 스토리텔링은 Story + telling의 합성어다. 그래서 ‘이야기하다’가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 이야기만 한다면 싱겁다. 역사 이야기라면 시간 따라 써 놓은 역사일기 성격이 될 것이다. 매우 평면적 구성이 된다는 이야기라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스토리텔링보다는, 플롯텔링 plot + telling 쪽을 더 살피게 된다. 플롯은 구성構成이요, 구도이다. 여기에서의 구構는 얽을 구, 얽어맬 구, 집을 지은다의 구이다. 이야기의 줄거리에 나오는 여러 가지 사건을 얽어 짜는 일, 그 수법을 구성이라고 하고, 도면 구성차원에서는 구도構圖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하여 구성은 조작적으로 만들어진 개념이 크다. 작품의 미적 효과를 얻기 위해 예술 표현의 여러 요소를 전체적으로 조화 있게 배치하는 도면 구성, 즉 설계도 성격이 플롯의 성격일 것이다. 그래서 플롯은 논리적인 인과 관계를 부여하여 사건을 유기적으로 펼쳐나가기에 스토리보다는 플롯이 위에 있다고 보아진다. 그리고 미적 가치와 예술적 완성도 또한 높고 수직 수평을 포함하게 된다고 본다.
※ 남편이 죽었다. 그리고 아내가 죽었다. (스토리텔링이 되고)
남편이 교통사고로 죽자 슬픔을 못 이긴 아내가 아파트 옥상에서 투신자살을 하였다. (플롯텔링이 될 것이다.)
여기에서 밑줄을 긋게 하는 부분이-주제의 사실적 설득력을 높인다. 감동적인 수사적 표현으로써 문장의 완성도를 높였다. 이런 것이 ‘문학성’일 것이다.
나는 어렸을 때, 어머니에게 들은 말이 있다.
※ “쟤는 균이 있고, 얘는 하는 짓이 구성지다.”라고.
여기에서 균均은 조화調和 즉 하모니와 가지런함을 품고,
하는 짓이 구성지다에서 ‘구성’은 플롯의 다른 이름이다.
연극에서는 몇 막 몇 장으로 이야기가 꾸며진다. 두 시간의 장편 영화는 대개 3막 8개 시퀜스로 구성되어 있다. 즉 8개의 핵심적인 이야기로 나누어져 있다는 것이다. 어머니가 앞서 말한 아이의 마음속에 있는 뜻(구도)이 몸짓으로 나타나는데 있어 어머니 보기에 볼 맛(의미)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표현들이 예술성이요, 평자들이 말하는 문학성 같은 게 아니겠는가.
내 어머니는 일제강점기에 태어나 학교를 못 다녔다. 하지만 어린 내게 커서 문학과 수필을 공부하려거든 사물과 사람의 평범함 속 비범함(다름)을 발견하라고 일찍 가르쳐 주셨다.
3) 힐링수필과 21세기 문학
수필은 순정純正문학이다. 그러므로 수필 쓰기의 이유는 ‘착한 삶을 위한 성찰’이다. 그래서 하는 말인데 월평이나 발문(해설)에서 함량 미달의 글을 ‘명수필’이라고 추켜세우고 얼려대는 것을 보면, 쓴 사람에게 몽혼주사를 놓았는가 하는 생각이 들 때가 있다. 수필을 쓰는 이들도 철학을 공부하고 인생을 고민하는 과정과 세월도 없이 일상의 작은 느낌에 의지한다거나, 가족관계와 이웃사람들 이야기를 수필이란 이름으로 드러내 자기 얼굴을 내겠다는 속셈에서의 탈출을 권면하고 싶다.
‘문학 본래의 기능이 영혼을 치유하는 것’이라고 말한 사람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리고 ‘무의식의 세계를 발견한 사람은 내가 아니라 시인’이라고 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드이다. 또 예부터 아폴로 신이 의신醫神이면서 시와 예술의 신이었다는 것도 예사롭지 않다. 그래서인지 근래에는 ‘힐링’이란 말이 유행을 타고 있다. 심적 생태계의 안녕을 뜻하는지 문학치료라는 말과 함께 ‘힐링수필’이 가장 적합한 장르처럼 이야기되기도 한다.
시 쓰기와 수필 쓰기, 자서전 쓰기, 일기 쓰기 등으로 참 자아를 회복하자는 것이요, 자아성찰의 문학인 수필쓰기로서 손상되었던 마음을 치유해 온전한 심신을 회복하자는 뜻일 것이다. 수필의 ABC는 진실한 자기 고백이며 건강한 미래 세계로의 마음 길이다. 그래서 독자가 작가의 고백론에 귀기울여 마음에 온기를 느끼고 스스로의 영혼에 포근한 마사지를 받은 기분이라면 힐링수필로서 성공작이 될 것이다. 그러기에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를 수필적으로 표현한다면 ‘너의 내면세계를 제대로 읽고 진솔하게 써라.’는 뜻이 될 것이다. 이 고장 말로는 ‘네 꼬락서니를 제대로 알거라.’가 될 것이다.
수필은 어느 부류의 글보다 가장 인간적인 따뜻함을 느낄 수 있는 문학 분야이다. 수필은 어느 장르보다 진실의 순도가 높다. 예술이란 결국 자기 사랑이다. 그래서 수필인구가 늘어나는 만큼 좋은 수필을 기대할 수 있다. 21세기 그리고 더 먼 인간의 미래에 걸맞은 위대한 작가군 속에 내가 알고 있는 수필가가 많아졌으면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