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V문학관 - 임철우의 <사평역(1985)>
1. 앞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눈보라가 심하게 불어오는 날, 막차는 연착하고 사람들은 추위를 피해 대합실 톱밥 난로 앞에 모여 마음을 조이며 기차를 기다리고 있다. 그들의 얼굴은 짙은 피로와 알 수 없는 슬픔이 서려있다. 어색하게 곁을 내주며 앉아있는 그들의 얼굴 위로 카메라가 클로즈업되면서 각자의 사연이 펼쳐진다. 그 이야기는 1980년대 우리가 감내해야 했던 아픔의 모습들이다. 소설가 임철우는 1983년에 단편소설 <사평역>을 발표했다. 소설의 소재는 아름답고 슬픈 곽재구의 시 <사평역에서>를 배경으로 한다. 임철우는 소설을 다시 극본으로 옮겨 TV문학관에서 보여준다. 우리들의 슬프도록 애잔했던 그 시대의 현장 속으로 안내하는 것이다.
2. 대합실 막차를 기다리는 사람들 중에는 낡은 시계처럼 늙어버린 시골 역장, 아픈 아버지를 병원으로 데려가려는 아들, 봇짐을 이고 장사 다니는 여인네들과 같이 일상의 삶 속에서 지쳐있는 모습들이 우선 눈에 들어온다. 그들은 특별한 삶을 살고 있지는 못하지만, 누구보다도 열심히 현재의 고통에 담담히 맞서는 자들이다. 이제 조금은 특별한 사람들의 사연들이 펼쳐진다. 오지인 시골에서 유일하게 대학에 갔지만 정치적 분노 때문에 학생운동에 참여한 젊은이, 감옥에서 만난 무기수인 좌익사상범의 어머니를 찾으러 온 사내, 가난 때문에 돈을 벌기 위해 서울에 갔지만 유흥업소에서 일할 수밖에 없는 젊은 여성, 동생처럼 돌보던 식당 종업원이 몰래 돈을 들고 도망친 것에 분노하여 그녀를 찾으러 온 서울 여인, 하지만 그들의 아픔 또한 누구에게나 익숙한 일상적이며 시대적인 현상이었다.
3. 그러나 그 아픔의 강도가 더 커질 수밖에 없는 것은 슬픔을 정직하게 말할 수 있는 상대가 없으며 스스로의 내면에서 삭일 수밖에 없기 때문일 것이다. 카메라는 화면 가득히 그들의 절망과 좌절을 응시한다. 용돈을 쥐어주는 어머니에게 정직할 수 없는 학생, 서울에 취직을 부탁하는 동생에게 아무 말도 할 수 없는 여인, 무기수의 어머니에게 어떤 말도 건네지 못하고 돌아선 사내, 분노 때문에 갔지만 비참하고 파괴된 종업원의 모습에 오히려 돈을 쥐어준 여인, 그들은 돌아가기 위해 기차를 기다리고 있지만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막차의 연착이 길어질수록 그들을 둘러싼 공기는 무거워지고 톱밥 난로만이 불을 밝힐 뿐이다.
4. 한참을 지나서야 막차가 도착하고 사람들은 하나씩 기차를 타고 출발한다. 그들의 이어지는 삶이 어떻게 될지는 아무도 알 수 없다. 기다리는 시간 속에서 누군가 독백처럼 물었던 ‘사는 게 무엇인지’라는 질문에 묵묵히 살아갈 뿐일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든, 그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오든, 삶은 끊임없이 이어지는 길을 가는 것일테니까 말이다. 기차가 떠나간 자리는 어쩌면 진한 허무감만이 남을지 모른다. 희망도, 기쁨도 그곳에는 남아있지 않기 때문이다.
5. 그러나 우리의 삶은 살아있음으로 인해, 서로에 대한 작은 관심으로 인해 이어지는 것이다. 모두가 힘겨운 삶을 살아가야 하지만 모두가 떠난 역 대합실에는 공허만이 남아있지 않았다. 실성한 여인은 대합실에 여전히 누워있었지만 역장은 그녀를 위해 톱밥을 더 챙겨 넣기로 결정한다. 무기수의 어머니를 찾아온 사내는 그녀에게 주려 사온 ‘굴비’를 전달하지 못했음을 알고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진다. 그때 역장에게 한 통의 전화가 온다. 같이 근무하는 젊은 동료가 자식을 얻었다는 소식이다. 그렇게 삶은 이어지는 것이다.
6. <사평역에서>라는 시가 아름답듯이, 임철우의 소설 <사평역> 또한 매력적인 작품이었다. 따뜻하고 깊은 인간적 감정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이다. TV문학관 <사평역>은 두 개의 아름다운 작품을 또다른 아름다움으로 전환시켰다. 생생하게 살아있는 영상 속에서, 작고 초라한 역을 둘러싸고 내리는 엄청난 폭설과 거대한 운명의 틀 속에서 탈출하지 못하지만 그럼에도 대합실의 톱밥 난로 속에서 온기를 나누는 사람들의 모습을 통해 힘들고 어려웠던 그 시대에 대한 따뜻한 위로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흥행의 부담 때문에 영화에서는 삽입되었을 불필요한 요소가 제거된, 인간 내면 그대로를 향한 시선은 그 자체로 담백해서 좋았다. 80년대 초반 TV문학관은 영상연출자들의 작품적 실험을 시도하던 공간이었다. 영화의 음란함이나 폭력성에 대한 집착없이 인간 그 자체의 내면적인 감정과 다면적인 요소를 재현하려 했던 작품들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사평역> 또한 TV문학관의 아름다운 걸작이었다.
<곽재구 시 – 사평역에서>
막차는 좀처럼 오지 않았다
대합실 밖에는 밤새 송이눈이 쌓이고
흰 보라 수수꽃 눈 시린 유리창마다
톱밥 난로가 지펴지고 있었다
그믐처럼 몇은 졸고
몇은 감기에 쿨럭이고
그리웠던 순간들을 생각하며 나는
한 줌의 톱밥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내면 깊숙이 할 말들은 가득해도
청색의 손바닥을 불빛 속에 적셔 두고
모두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산다는 것이 때론 술에 취한 듯
한 두름의 굴비 한 광주리의 사과를
만지작거리며 귀향하는 기분으로
침묵해야 한다는 것을
모두들 알고 있었다
오래 앓은 기침 소리와
쓴 약 같은 입술 담배 연기 속에서
싸륵싸륵 눈꽃은 쌓이고
그래 지금은 모두들
눈꽃의 화음에 귀를 적신다
자정 넘으면
낯설음도 뼈아픔도 다 설원인데
단풍잎 같은 몇 잎의 차창을 달고
밤 열차는 또 어디로 흘러가는지
그리웠던 순간들을 호명하며 나는
한 줌의 눈물을 불빛 속에 던져 주었다
첫댓글 기차역이 바라보는 사람들의 애환적인 삶...