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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샘추위에서 한결 누그러진 날, 특유의 봄기운이 느껴졌습니다. 문득 이런 분위기가 찾아오면 불쑥 풀꽃이 핀 것을 본 경험이 있어 그곳으로 발 길을 옮겨 보았습니다. 우선 접근하려면 동서울 터미널과 경안을 오고 가는 버스를 이용해야 합니다. 버스는 18분 정도 걸어가면 정류장이 있어 승차가 가능합니다. 승차 후 이동하는 시간은 40분이 소요되고 광지원에서 하차 길을 건너 산비탈을 올라서면 서서히 고도를 높여나가는 직선 길이 나옵니다. 광지원은 조선시대에는 교통체계의 하나였던 황교원(黃橋院)이 있어 광진교를 건너 하남의 덕풍역을 거쳐 경안, 이천, 여주, 장호원, 충주, 청주 방향으로 내려가던 관리나 역마가 쉬어 가돈 곳입니다 또한 정조대왕이 남한산성을 거쳐 여주 영릉 가던 중 이곳에서 쉬어가다 물이 맑아 햇빛이 반사되어 광채가 발하자 광지원(光池院)이라 칭하였다는 유래가 전해 오고 있는 곳입니다. 아직도 이 지역 사람들은 원의 터가 있는 곳을 원집이라 부르고 있습니다.
광지원 건너 언덕에 올라서면 용마산 주능 길이 시작됩니다. 옛적에는 용마산 지맥인 이 길은 남한산 자락으로 연결되어 있어 하남에서 경안으로 넘어가는 언덕이 있었으나 신작로가 뚫리면서 언덕길은 사라지고. 찻길로 바뀌었습니다. 그리고 중부고속도로 가 터널을 뚫어 차량 통행이 이어지는 곳이 바로 용마산 지맥입니다.. 터널 위를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너른 평지가 나오고 평지 곳곳은 계절마다 들꽃이 군락을 이루고 있는 곳입니다. 이 평지는 비탈로 이어지고 내려서면 물 맛이 기가 막힌 샘물이 있습니다. 이 샘의 영향으로 이 지역은 늪이 조성되어 있고 생태계가 잘 조성되어 숲 환경이 좋은 곳입니다. 샘을 지나면 조선국의 왕이 되지 못한 왕자의 신분을 대군(大君)이라 부르는데 대군의 무덤이 나옵니다. 이곳에는 할미꽃과 애기붓꽃이 지천으로 피는 곳입니다. 이 부근에서 쌓여 있는 낙엽 사이로 분홍빛 꽃을 발견하게 됩니다. 두 송이는 활짝 피었고 한 송이는 반즈음 핀상태로 있었습니다. 주변환경이나 꽃의 상태를 보아 짐작하건대 금방 핀 꽃 느낌이 다가왔습니다. 이 지점에서 작은 언덕을 오르다 수평으로 이어지는 오솔길을 걷다 보면 잠시 후 서서히 고도를 높여가는 길이 정상까지 이어집니다. 정상에 서면 팔당호에 합수되는 경안천 너머로 퇴촌일대와 천진암 뒤 앵자봉과 분원리와 마재까지 조망이 됩니다.
정상에서 검단산으로 가는 길로 내려서면 서어나무 고목이 거대한 모습으로 서 있습니다. 잠시 나무에 기대어 앉아 쉬었다 가도 정말 좋은 곳입니다. 나무 수피를 보면 잘 훈련된 운동선수 근육처럼 매끈하면서도 단단한 근육을 보여주는 것처럼 그런 모습을 하고 서 있습니다. 숲은 다양한 생태의 보고로서 각종 미생물과 곤충과 동식물과 새들이 통섭이라는 조건아래 살고 있는 곳입니다. 숲에 마지막으로 들어오는 수종(樹種)은 바로 서어나무랍니다. 극상림의 조건이 거의 완성된 무렵에 슬쩍 숲에 끼어들어 숲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우리나라 산림의 전이과정을 살펴보면 황폐화된 산에 양수성 침엽수 소나무가 숲을 뒤덮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소나무가 서서히 수명을 다해 사라지면 그 자리를 쪽 동백, 때죽나무, 진달래 등 음수성 관목들이 자라나기 시작합니다. 이 관목들의 특징은 토양을 비옥하게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키가 큰 교목 참나무가 자리를 잡아 숲을 풍성하게 가꾸다 수명을 다하면 그제야 서어나무가 들어와 숲을 지배하기 시작합니다. 그래서 서어나무를 숲의 지배자라 부르지요. 그리고 서어나무가 성목이 되고 나이가 차면 속이 비기시작합니다. 그리고 그 안에 가스가 차고 번개가 치면 폭발하여 자연발화가 되기도 하여 숲은 다시 처음으로 돌아가 새로운 숲을 가꾸기 시작하게 되는 경우도 있을 수 있습니다.
서어나무가 서 있는 비탈에서 내려서면 이곳에서부터 외길 주능 이어지면서 오르락내리락 서너 번을 거치면 봉우리가 나오는데 봉우리 이름이 바로 고추봉입니다. 주능 길섶에는 풀꽃이 계절마다 피고 있어 눈 길을 끌고 철쭉과 병꽃이 마중하는 곳이 바로 용마산 주능입니다. 고추봉을 넘어서면 용마산은 끝이 나고 산개나리와 병꽃에서 철쭉으로 바뀌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검단산으로 이어지면서 산곡동과 배알미 동을 넘어 다니던 고개가 나옵니다. 배알미 방향으로 내려가다 보면 한옥 식당이 나오고 더 내려가면 별서 같은 한옥이 또 나옵니다. 그 집 뒤 양지바른 언덕에 정약종의 둘째 아들 정하상의 묘가 있던 자리입니다. 그리고 다리 건너 우측으로 들어가는 장어집 전문식당으로 30m 들어 가 우측에는 정약종의 묘가 있던 자리가 있습니다. 천진암이 성지화되면 이전되기 전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산곡으로 내려가다 보면 폐광자리가 숲 속에 숨어 있습니다. 6.25 당시 모윤숙 시인 가족이 산곡으로 피난 왔다가 시인이 이 부근에서 국군장교가 총에 맞아 피를 흘리며 죽어가는 광경을 목격하게 됩니다. 훗날 그는 이 기억을 되살려 국군은 죽어서 말을 한다는 호국의 시를 남깁니다. 바로 종교의 역사와 문학의 역사가 숨어 있는 곳이 바로 용마산과 검단산 주변이고 조선시대의 암울했던 개국 후 왕자의 난에 희생된 방원의 이복동생들이 묻혀 있고 병자호란의 상처가 역사적으로 남아 있는 곳이 남한산 주변입니다.
특히 검단산 자락에는 세종대왕의 능을 만들다 포기한 지형도 남아 있습니다. 그래서 그랬을까? 검단산 서쪽 자락에 유명인사의 유택도 여럿 있습니다. 고대총장을 역임하신 헌법학자, 소설가, 청랑전기 수필가, 정치가로 사셨던 고 유진오박사님과 고 현대그룹 정주영 회장님, 고 고 한국일보 장기영 회장님과 조선말기 선각자 유길준 묘역도 있습니다. 그리고 문학적인 역사로서는 봄봄의 소설작가 김유정의 마지막 삶의 자취가 있는 곳이 바로 산곡 동수원이라는 마을입니다. 기계유 씨 집안으로 시집온 김유정의 누님이 살던 곳인데 폐결핵으로 고생하며 낙원동 부근에서 외롭게 투병하던 그를 매형이 둘러업고 동수원으로 옮겨와 함께 살며 간병을 해 보지만 끝내 죽음을 맞이한 곳도 바로 산곡이었습니다. 누님의 후손들이 도자기 공방을 산곡에서 운영했었는데 춘천지역에 김유정 역이 생기고 살던 집 중심으로 김유정 마을이 조성되자 공방을 그곳으로 옮겨 운영하고 있는 중입니다. 용마산과 검단산의 경계인 산곡재에서부터 본격적으로 검단산 종주능선이 시작되면서 정상까지 오름이 시작됩니다. 배알미로 내려가는 계곡에는 수량이 풍부하여 봄에는 노루귀와 양지꽃이 피고 이어서 능선 길에는 오래된 철쭉 고목나무에 다홍빛 철쭉이 아름답습니다. 6월 하순부터는 산수국 군락지가 있어 보랏빛 자태가 오솔길 양쪽으로 화사하게 꾸며 놓습니다. 물이 풍부하여 이 계곡은 수자원관리공사의 특별 보호구역으로 관리받고 있는 곳입니다.
산곡재에서 시작되는 오름을 이겨내고 정상에 서면 사방이 호쾌하게 다가옵니다. 서울의 내사산과 외사산이 다가오고 북쪽으로는 천마산, 백봉, 운길산, 국수의 청계산, 예봉산, 예빈산, 유명산, 화야산, 동쪽으로 앵자산을 비롯하여 수많은 산이 펼쳐지고 남한강과 북한강이 합수되는 두물머리와 정약종 형제들이 살았던 마재마을도 손에 잡힐 듯 다가옵니다. 이런 환경적인 조건 때문이었을까? 7살의 어린 약용은 다음과 같은 시를 남깁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는 것은 멀고 가까움의 지리적 위치가 다르기 때문이다.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이 시를 노래 부르듯 남기고 검단산 작은 봉에 내려섰습니다. 그리고 암릉지대를 지나면서 펼쳐지는 두물머리와 미사리 사이 협곡인 두미강의 물흐름을 보면서 생강나무 꽃을 발견하게 됩니다. 봄 전령사 격인 나무꽃이지요. 그리고 다시 내려서서 잠시 머뭇거립니다. 유길준 묘지 방향으로 하산할까? 아니면 검단산 종주 끝자락까지 걸을 것인가? 잠시 생각하다 직진을 선택합니다. 생강나무 꽃 군락지가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걸음 여행이 거의 끝나갈 무렵 거칠지만 나무 몸통을 반을 갈라 설치해 놓은 장의자에 앉아 있으면서 주변 풍경 속에서 찾아낸 생강나무 몸통에 붙어 피며 새로운 가지를 만들기 시작한 생강꽃이 다가왔습니다. 사진으로 남겨 놓고 잠시 역사의 뒤 안 을 살펴보았습니다. 사람들은 산과 물을 배경으로 촌락을 만들고 정주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세월이 쌓이기 시작하면 지식인들은 규합의 힘을 빌려 공유하는 학문의 배경을 만들기 시작하여. 결국 권력과 연결해 가며 성장해 나가지만 한 순간에 나락에 떨어지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변화가 없는 것 같습니다.
다산이라 부르는 정약용은 성호학파였습니다. 지방 현감을 지내고 있던 정재원은 정약현 큰 아들을 낳고 사별 후 부인을 해남윤 씨 처자와 혼인하여 딸과 약전, 약종, 약용을 낳습니다. 그들이 살던 곳은 경안이라 부르던 광주군 초부면 현재 마재에서 살았습니다. 약용은 21살 이후 순조가 되는 세자 책봉 때 실시된 중광감시(增廣監試)에 합격하게 됩니다. 합격자들과 창덕궁으로 입궐하여 사은(謝恩) 인사를 드리면서 정조와 첫 만남을 갖습니다. 성균관시절 시험마다 좋은 실력을 거두는 약용에게 정조는 서적과 종이오, 붓 등을 선물하며 격려를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후 약용은 국가를 새롭게 할 경세유표(經世遺表) 지었으며 범죄를 다른 흠흠신서(欽欽新書)를 지었고 12편 72조로 된 수령의 규범과 행정처리 업무와 관련된 목민심서(牧民心書)를 지었습니다. 그러나 약용은 천주교 박해로 1801년 형 약전과 함께 귀양을 떠나 형은 흑산도로 약용은 강진으로 가 18년간의 유배생활 중 해남 외가의 도움으로 문집 267권과 경집 232집 등 500여 권의 문집을 남기게 됩니다. 또 한 그의 업적으로는 정조를 도와 기중기를 만들어 수원화성 축성에도 큰 공을 세웁니다. 그리고 해금 후 귀향하여 여유당전서를 남기고 1836년 결혼 60주년을 맞아 사흘 전부터 시름시름 앓다 죽어 생가 뒤 언덕에 안장됩니다.
조선 후기 두 개의 전란인 왜란과 호란 겪습니다. 임진왜란 당시 명나라로부터 많은 지원을 받은 조선은 그 은공에 대하여 절대적인 명분에 집착하고 있었습니다. 순조 다음으로 대를 이은 광해군은 실리적 외교로 만주에서 태동하여 명나라를 누르고 대륙의 주인이 되어가던 청나라를 견제하였지만 인조반정으로 실각한 광해군 대신 인조는 명분 론에 집착하다 끝내 병자호란을 겪습니다. 두 번의 전쟁으로 전통적인 신분제가 붕괴되고 유랑민이 넘쳐나면서 가치관의 붕괴와 함께 사회혼란이 가속되기 시작합니다. 이에 따라 다양하게 밀려오는 문제점을 해결책으로 제시된 사상과 학문이 바로 실학입니다.
실학은 유교사상 안에서 국가를 경영하고 민초들의 삶을 개선하고자 하는 뜻을 지니고 출발하였으며 철학적이며 추상적 이론에 매몰되었던 성리학에서 벗어나 현실을 직시하여 개혁안을 제시한 것입니다. 실학자들은 박학과 서학인 천주학과 청나라의 고증학을 통해 새로운 눈을 뜨기 시작한 것입니다. 실학은 농촌사회 개혁을 위한 경세치용과 대외무역을 중시하고 새로운 기술 도입을 중요하게 여기는 이용후생 그리고 청나라의 고증학을 이용하여 역사, 지리, 금석문 연구에 관한 실사구시 계열의 학자들로 분류되며 발전되었습니다. 실학의 거두 성호 이익(1681~1763)은 스승 없이 아버지가 남긴 책으로 ‘학문적 대성을 이룬 거목이었습니다. 이익의 학문적 자세는 꼴 베는 아이에게도 물어 알 것은 알아야 한다는 고사를 인용하며 제자들에게 하문(下問)하는 것을 장려했습니다. 이익은 청빈한 선비였으며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남겼습니다. 아들 이 맹휴가 현감으로 재직 때 아버지에게 고기를 선물로 보낸 적이 있습니다. 그러자 이익은 “나는 집이 있고 땅이 있어 때에 맞춰 농사를 지어 굶주림과 추위에 견딜 수 있지만 백성들로부터 거둔 재물로 부모를 봉양한다는 것은 잘못된 일이다.”라고 몹시 꾸짖었다고 합니다. 이익은 40세부터 60세에 이르는 20년간의 학문 활동 성과를 집대성하여 ‘성호사설’을 비롯한 100권이 넘는 저술을 남겼으며 그의 학문을 따르는 제자는 윤동규, 신후담, 안정복, 이중환, 이가환, 권철신, 권일신, 정약전, 정약용, 이벽 등이 두각을 나타냈습니다.
특히 이들은 경기도 경안에서는 안정복, 마재에서는 이벽, 약전, 약용 양근에서는 권철신, 권일신 등은 서로 인맥을 맺어가며 실학에 정진해 나갔습니다. 권일신의 사위가 안정복이며 이벽의 누님과 약현은 혼인을 맺습니다. 이용후생 학파로서는 박지원, 박제가, 이덕무, 홍대용 등이 대표적인 학자이며 국학을 통해 중국 중신의 세계관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노력한 이들은 이수광, 이익, 이긍익 이중환, 정약용이 대표적인 학자입니다. 특히 이수광이 저술한 지봉유설의 지봉은 낙산의 한 봉우리 이름을 따서 저술한 최초의 백과사전으로서 마태오 릿지의 천주실의 내용을 실어 많은 학자들의 관심을 불러 모았으며 천주교를 태동시키는 단초가 되기도 합니다. 이렇게 경안지역을 중심으로 이 일대가 실학의 중심이 된 이유는 한강을 이용한 수로는 문류의 이동수단으로 활용되었고 한양의 배후의 지리적 여건으로 각종 임산물을 포함하여 농산물 공급처가 되었으며 분원리에 관청 도자기를 납품하는 곳 등이 있어 활발한 교통 요충지와 더불어 문류의 중심지였기에 남인들 중심으로 모여 살기 시작하면서 실학이 성행할 수 있는 조건이 된 것입니다. 특히 동사강목의 저자로서 순암 안정복(1712-1791)은 35세 때 이익의 문하로 들어갔으며 1759년도에 이미 東史綱目 초고를 완성한 후 수정보완을 거듭하다 1778년 완성하게 됩니다. 동사강복과는 다른 임관정요(臨官政要)가 있는데 이는 지방관리들이 백성을 통치하는데 참고할 지침서였는데 훗날 정약용의 목민심서(牧民心書) 저술에 적지 않은 영향을 끼치게 됩니다. 주역(周易)에 함께 나란히 있는 연못 중 한 못이 물이 마르면 다른 못의 물로 보충하면 된다는 뜻이 있는데 이를 일러 이택( 麗澤))하였는데 이를 이용하여 재자들을 학문에 연마시킨 분이 바로 성호 이익이었습니다. 안정복은 스승의 뜻을 받들어 혼자서 풀지 못하는 문제를 여럿이 함께 토론하며 푼다는 뜻으로 이택재( 麗澤齋)를 경안에 건립하게 됩니다. 날이 조금 길어졌지만 어둑해지는 저녁빛을 감지하고 서둘러 산에서 내려섰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