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하간에 제가 이 글을 쓰는 것은 바람의 나라에서 어느 분의 표현대로 '고구려를 통해 다른 나라도 말하고 있다'에 대한 '좀 삐딱하게 보기'의 어설픈 시도라 하겠습니다.
조금 다른 시각에서 야그를 풀어나가 보지요.
보통 우리가 생각하는 적군이란 말 그대로 아군측 사람들을 몰살 시키거나 '노예'로 만들려는 아니면 그 정도는 아니어도 '아군 측의 나라'나 단체를 멸망시키려는 '못된 집단'임에는 틀림없습니다.
한데 이러한 법칙이 최씨 낙랑국에게는 그대로 통용될 것인가?
이 경우라면 저는 감히 확신할 수 없습니다.
더구나 최씨 낙랑국이 과연 고구려를'병탄(병합)'하려는 '의지'가 있었는지에 대해서라면 더더욱 확신할 수 없습니다.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 당할 수 밖에 없는 시대'라는 말의 경우 최소한도 동부여 전쟁 '이전' 시대의 한반도와 만슈리아에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최씨 낙랑국 전쟁의 경우 이러한 '공식'은 한계에 부딪힐 수밖에 없습니다(어디까지나 저만의 시각입니다).
대략 동부여 전쟁을 기점으로 한반도와 만슈리아(만주 혹은 부여벌)는 대 여섯개의 세력으로 고착화됩니다.
즉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 당할 수밖에 없다'는 말이 '약효'가 떨어지는 시대가 온 것도 사실이라는 말입니다.
바람의 나라건 역사건 최씨 낙랑국이 고구려를 '지배'하기 위해서 전쟁을 벌인 적이 있습니까?
적어도 이점에 관한 한 '천만의 말씀'입니다.
나라의 이익을 '냉정히' '저울질'하는 충 조차도 무휼 같이 선명한 고구려 정벌의 마스터 플랜을 가졌는지에 대해서는 저로서는 '회의적'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중국과 손잡고 있는 최씨 낙랑국이 고구려의 안위에 '적지 않은' 위협이 되고 있음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최씨 낙랑국이 적어도 고구려라는 국가 자체에 대해 욕심이 별반 없었다는 것도 분명 타당한 말일 것입니다.
제가 이렇게 말하는 근거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만약 최씨 낙랑국의 위치가 평안도와 황해도 일대라면) 남부 전선의 백제가 상당히 강력한 국가였다.
비록 공세는 (최씨) 낙랑국이 취하고 백제를 상당히 궁지에 몰아넣기도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모두 격퇴되었습니다.
더구나 상대국 지도자는 '뼉다구'가 확실하여 유리왕과 달리 신하들과
'백성들의 지지'를 얻기 비교적 '용이한' '온조왕'과 그 태자였던 다루왕입니다.
비록 충과 운이 당대의 지략가들임에 틀림 없음에도 그들이 싸웠던 상대들은 산전수전 다 겪은 상대인 온조왕과 그 아래서 만 17여 년 간 제왕 교육과 군사 교육을 쌓은 다루왕을 '완전히' '제압'한다는 것은 너무나도 지난한 일이었을 것입니다.
최근에 발견된 '풍납 토성'의 경우를 보더라도 백제는 시작부터 그 국력이 절대 만만치 않은 나라였음이 확인됩니다.
남방 전선이 이런 마당에 최씨 낙랑국이 고구려를 친다는 것은 꿈 같은 야그일 것입니다.
충과 운이 자기 손으로 목을 조르는 일 따위를 할 리 없었겠죠.
2. 당시 중국의 사정이 충과 운에게 여의치만은 않았다.
비록 광무제 유 수가 황제에 즉위하여 중국의 상당 부분을 진압하기는 하였지만 아직도 감숙성의 외 효와 사천성의 공손 술등 '강적들'이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고 거기에다 동흉노의 호도이척도고 선우도 동한에 대항하여 세력을 확장하던 시기였습니다.
이런 마당에 최씨 낙랑국이 섣불리 고구려를 '먼저' 건드릴 리도 없고 더구나 바람의 나라에서 조차 최 리 왕의 고구려의 대한 '야심'보다는 충과 운의 '수비론'이 더 많이 언급되는 실정이니만큼 '먹지 않으면 먹힌다는 전제'에 대한 '재고의 여지'는 적어도 최씨 낙랑국의 경우 충분하다고 봅니다.
3. 최씨 낙랑국은 '중국과의 무역'이나 고구려보다는 그래도 '온난한
영토'를 가지고 있었으므로 굳이 고구려를 삼킬 필요가 없었다.
가지면 더 가지고 싶은 것이 부자들의 심리라지만 자기 재산 위태롭게
하면서까지 남의 것을 탐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최소한도 경제적으로는 제가 감히 판단하건대 고구려보다는 최씨 낙랑국이 다소 여유 있는 상태였다고 봅니다.
무역에도 농업에도 최씨 낙랑국이 다소간 혜택받았기 때문이죠.
물론 만슈리아는 우리의 생각만큼 척박한 곳은 아닙니다.
적어도 동부여 지역은 초기 고구려 지역에 비하면 나름대로 목축에도 농업에도 적응할 수 있는 좋은 땅입니다.
그렇다해도 평양 지방처럼 상업과 농업을 겸비한 지방은 못 되었던 것 같습니다.
여하간 바람의 나라에서 제가 나름대로 발견한 것은 최씨 낙랑국의 입장이나 여타 쥬신 열국들의 입장보다는 고구려의 입장이 훨씬 많이 반영되었다는 점입니다(그런 점에서 저는 바람의 나라에서 주인공이 따로 없다는 점은 다소 부정하는 입장입니다.)
보기에 따라서는 가만 내버려두면 잘 먹고 잘 살 나라를 고구려가 '평지풍파 일으켜 가면서' 점령했다는 관점도 '충분히' 도출해낼 수 있습니다.
바람의 나라에서조차 최씨 낙랑국은 백제와 신라를 공격한 적은 있어도 (필자 주: 최씨 낙랑국이 강원도에 있다는 전제 아래 나온 상황입니다)고구려는 공격한 적이 없습니다.
만약 마음만 먹었다면 유리왕이 즉위했을 때에 나라가 찢어지고 분열
되어 허약해진 고구려쯤 최씨 낙랑국이 간단히(?) 병합할 수도 있었을 것 입니다.
그것도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 당할 수밖에 없다는 시대'를 배경으로
해서도 말이죠.
간단히 야그해서 적어도 최씨 낙랑국이 고구려의 영토에 대해 어떤 야심이 없었음은 분명한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무휼의 정책이나 이상에 대해서는 '상당히' 지면이 많이 할애된 반면 '충과 운의 입장' 더 나아가서 '최씨 낙랑국의 입장'에 대해서는 무휼에 비해 다소 빈약함을 보여줍니다.
주인공이 따로 없고 선악을 나누지 않았다 하지만 제 눈에는 그러한 구별이 분명히 보입니다(아닌 분들이 아마도 더 많으시겠지만 적어도 저에게는 그렇게 보입니다).
무휼의 대내 정책에 대해서는 저는 별 할말이 없습니다.
'바람의 나라'에서의 그는('역사'도 그렇기는 하지만) 뭐든지 다 하려고 하는 용렬한 제왕도 아니고 선선히 송옥구, 을두지, 추발소와 같은 신하들에게 위임할 줄도 아는 영민한 군주입니다(물론 그렇다 해도 무휼의 정책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이 있는 줄로 압니다).
다만 대외정책에 대해서는 할 말이 많습니다.
사실 제가 보기에 최씨 낙랑국의 병탄보다도 무휼이 먼저 '손썼어야'
했을 정책은 동흉노의 '호도이척도고 선우', 감숙성의 외 효, 사천성의 공손 술과 손을 잡아 '부상하는' 광무제 유 수를 재빨리 포위하고, 후대의 태조왕이 그랬던 것처럼 중국을 수시로 습격하여 인구를 많이 빼앗아 와서 국력을 충실하게 다지는 작업이 우선되어져야 했을 것입니다.
실제로 충과 운이 죽고 최 리 왕이 항복했음에도 최씨 낙랑국은 이백 하고도 수십년을 더 지탱했고 이 시기에는 중원통일을 이룩한 광무제 유 수의 '개입'으로 인해 무휼이 '곤란한' 경우를 만났기 때문에 그가 '유능한 군주'일망정 그의 정책을 '지지'한다고까지 말하기는 좀 쉽지 않을 것 같습니다.
한마디로 요약하면 '긁어 부스럼'낸 꼴만 되었다는 것입니다.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 당한다'는 전제는 상당한 고려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물론 국가의 세를 불리기 위해 정복을 하는 것은 필요합니다.
그러다보면 앞의 것과 같은 전제도 나오고요.
그러나 그것이 다는 아닐 것입니다.
적어도 무휼의 외교는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것은 분명합니다.
물론 바람의 나라에서는 광무제 유 수 외에 '호도이척도고 선우'나 '백제(白帝) 공손 술', '외 효' 등의 존재는 논외 밖입니다.
다만 제가 말씀 드리고자 하는 것은 '대내' 정책은 몰라도 '대외' 정책에서 '바람의 나라'든 '역사'든 '무휼의 방식'이 반드시 '지지'를 받을 만한 것은 아니었다는 점입니다.
우리가 사는 시대를 기준으로 무휼을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한 만큼 제 판단이 섣부른 감도 있을 것입니다.
하나 '자국의 처지'가 '굳건하지 못하고' '빈약'할 수록에 외교의 중요성은 더욱 커지는 것임은 예나 지금이나 마찬가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