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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
우표로 본 오늘~ 10/06
"우표에서 얻은 것이 학교에서 배운 것 보다 많다."
- 프랭클린 D, 루스벨트
- 1998, 부산국제영화제 기념
2005 -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 개막 (6~14일)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가 국내외 영화인과 관객 등 5천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6일 오후 부산 해운대 수영만 요트경기장에서 화려한 불꽃놀이와 함께 개막식이 열렸다.
10월6일부터 14일까지 열리는 제10회 부산국제영화제에는 역대 최대 규모인 73개국 307편의 영화가 초청됐다. 이 가운데 61편은 부산국제영화제를 통해 전세계에 처음으로 선을 보이는 월드프리미어이며, 인터내셔널프리미어(자국 아닌 다른 나라에서 첫 상영)와 아시아프리미어도 각각 28편과 87편에 이른다.
개막작은 대만 허우샤오시엔 감독의 <쓰리타임즈>다. 1911년, 1966년, 2005년 세 시대의 안타까운 사랑 이야기를 다룬 작품으로, 지난 5월 칸 영화제 경쟁부문에서 120분 버전으로 상영됐다. 이번 부산영화제에서는 전면적인 재편집을 통해 완성도를 높인 135분짜리 최종본이 처음으로 상영될 예정이다.
폐막작으로는 한국 황병국 감독의 <나의 결혼 원정기>가 선정됐다. 무거운 삶의 짐을 짊어진 채 묵묵히 자신의 인생에 출실한 변방 사람들에 관한 휴먼멜로드라마로, <태양은 없다>와 <무사>의 조감독을 지낸 황 감독의 장편 데뷔작이다. 감독이 한국과 우즈베키스탄을 오가며 직접 시나리오를 썼다.
/한겨레
- 서울지하철 개통기념, 1974
1999 - 인천지하철 1호선 개통
1999년 10월 6일 인천도 서울, 부산, 대구에 이어 전국에서 네 번째로 지하철 시대로 들어섰다. 1993년 7월 5일 착공한 인천 지하철 1호선이 6년 3개월간 공사를 끝내고 이날 개통한 것이다. 이날 낮 12시 개통식을 갖고 운행을 시작한 1호선은 계양구 귤현동∼연수구 동춘동간 24.6㎞에서 인천 시민들의 새로운 발 역할을 하게 됐다.
그동안 부족했던 인천의 남-북 방향 교통편을 상당히 보강해 줄 수 있는 노선이다. 1호선에는 정거장이 모두 22곳 있으며 부평역이 유일한 환승역이다. 이곳에서 기존 경인 전철과 바꿔 타 서울이나 동인천 쪽으로 오갈 수 있다.
인천 지하철의 특징은 첨단 설비와 장애인을 위한 배려가 강조되고 있다는 점이다. 전동차는 모두 200량으로 기관사 없이도 자동 운행할 수 있는 첨단식이다. 소음이 적고 객실 온도가 자동으로 조절되는 기능도 갖고 있다. 또 모든 역사에는 노인과 장애인들을 위한 승강기, 에스컬레이터, 휠체어 리프트가 설치돼 있다. 객실마다 인터폰이 설치돼 있어 급한 일이 있을 때 기관사와 통화할 수 있고 장애인을 위한 안전 손잡이 외에 휠체어나 유모차가 들어갈 공간도 마련해 놓았다. /조선
1989 - 고르바초프, 동독 방문
1989년 오늘 고르바초프(Gorbachyov, Mikhail S., 1931~ )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 동독을 방문한다.
에리히 호네커(Honecker, Erich, 1912~1994) 동독 서기장이 그를 영접한다.
고르바초프는 이번 방문 기간에 호네커 동독 서기장에게 정치 민주화와 경제개혁의 필요성을 역설한다.
그러나 고르바초프의 설득은 소용없었다.
호네커 서기장이 폐쇄적인 통치를 그만 둘 태세를 보이지 않자 라이프치히(Leipzig)를 중심으로 동독 주민들의 대규모 반정부 시위가 일어난다.
결국 호네커는 고르바초프가 방문하고 돌아간 지 얼마 안 돼 실각한다.
호네커는 같은 달 18일 서기장 직에서 물러나 이듬해 말 소련으로 망명한다. /YTN
- AOPU 창설 제1주년 기념, 1963.4.1
1982 - 아시아-태평양 우편연합(APPU) 집행이사회 개막
아시아-태평양 우편연합 [Asian Pacific Postal Union, APPU]
아시아 및 태평양 국가의 우편업무 관계의 확장·촉진·개선을 위해 우편업무의 협력 증진을 도모하고자 설립한 국제기구.
지역연합을 구성할 수 있도록 한 만국우편조약에 의거하여 1961년 1월 23일 필리핀 마닐라에서 한국을 비롯한 8개 국이 모여 창립총회를 갖고, 1962년 4월 1일 정식으로 발족하였다. 회장국은 필리핀이며 본부는 마닐라에 있다. 회원국은 한국·필리핀·타이·일본·오스트레일리아·라오스·뉴질랜드·인도·중국·인도네시아·방글라데시·파키스탄·말레이시아·파푸아뉴기니·스리랑카·싱가포르·몰디브·네팔 등이다.
회원국 상호간의 기술협력이나 우편요금 인하, 우편업무의 발전과 연구를 위하여 직원의 상호교환 또는 파견근무도 실시하고 있다. 기구의 운영을 위하여 총회·집행이사회·중앙사무국을 두고 있으며, 각 회원국 산하의 전직원에 대한 자질향상교육·훈련을 위하여 아시아 태평양 우정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다. /naver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 [The Asian and Oceanic Postal Union, AOPU]
"아시아-대양주 우편연합(AOPU) 창설 제1주년을 기념하고 이를 널리 알리기 위하여 4월 1일에 아시아, 대양주의 지도 및 AOPU를 표시한 봉투를 도안으로 하여 4원권 우표를 발행한다.
AOPU는 아시아, 대양주의 여러나라 간에 단일 우편지역을 형성하여 협약 체결국가 간의 우편관계를 확장, 촉진하고 개선하여 우편업무의 분야에서 협조를 증진함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
이 기구는 우리나라와 필리핀이 창설을 제안하고, 필리핀 정부가 18개국을 초청한 바 한국, 중화민국, 일본, 말라야 타일란드, 오스트레일리아, 뉴질랜드 등이 동 초청을 수락하여 8개국이 1961. 1. 10일부터 23일까지 마닐라에서 11차에 걸쳐 AOPU 협약에 대한 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를 마닐라우편회의라 하며 동회의에서 AOPU가 탄생되었고 비준된 전문 24조의 협약은 1962. 4. 1 부터 효력을 발생하게 되었다.
현재 정회원국은 한국, 중화민국, 필리핀, 타일란드, 일본, 라오스, 인도네시아, 호주 등이다." (우표발행안내) /k-stamp
1981 - 이집트 대통령 사다트(el-Sadat, Anwar) 피살
사다트 [el-Sadat, Muhammad Anwar, 1918.12.25~1981.10.6]
안와르 사다트 이집트 대통령이 1981년 10월 6일 열린 제4차 중동전 발발기념 군퍼레이드 참관도중 암살단의 저격으로 숨졌다. 암살단은 사다트의 친미정책과 이스라엘과의 평화노력에 불만을 가진 회교정통파 신도들로 현역 사병이었다.
암살 전 사다트는 이스라엘의 이라크 원자로 폭파와 베이루트에 있는 PLO 본부 폭격으로 3년전의 캠프데이비드 합의가 무위로 돌아가면서 아랍세계로부터 고립되어 있었다. 국내적으로도 많은 국민들이 팔레스타인인에 대한 사다트의 배신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 또한 민주화정책에 따른 경제적 불평등도 해결하지 못하고 있었다. 점점 불안해지는 정세속에서 사다트는 반대파 지도자 1300명을 체포했다. 이런 와중에 암살사건이 발생했다.
사다트는 육군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졸업한 뒤, 나세르가 이끈 1925년의 이집트 혁명에 자유장교단의 일원으로 참가했다. 그는 그 뒤 국무장관, 국민회의 의장, 부통령 등을 지냈고, 1970년 나세르가 사망하자 그 뒤를 이어 대통령에 취임했다. 1977년 이스라엘을 방문하고 중동 평화의 길을 연 공로로 1978년 이스라엘 수상 메나헴 베긴과 함께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사다트 사망이후 중동 전역에 한때 일촉즉발의 위기감이 감돌았으나 그를 뒤이은 무바라크 신임 대통령과 미국의 신속한 대응조치로 평온이 회복됐다. /조선
1977 - 육림의 날 제정
[1977.10.6 - 최초의 육림의 날]
- 박정희 대통령, 박근혜와 경기도 시흥군 지지대고개에서 그동안 심은 나무를 검목하고 비료를 줌
- 잡목은 경제림이 되지 않는다면서 20-30년 걸리더라도 수종개량을 장기적으로 추진하라고 지시
- 육림의 날은 국민식수운동을 효과적으로 넓히고 지속적으로 전개하기 위해 올해 처음 제정
- 나무를 심는 성의 못지않게 가꾸는 정신도 중요
- 왕릉 주변 산에 나무를 심는 모습
/영상역사관 ehistory.korea.kr/history
육림의 날 (11월 첫째 토요일) (제1회 육림의 날 - 1977.11.5)
... 또한 朴대통령은 한 걸은 더 나아가 조림의 사후관리를 영구히 지속시키기 위하여 1977년 4월 5일 植木日 현장에서 가을에 검목과 더불어 육림일을 하루 정하여 봄에 심은 나무를 가꾸는 날로 해 보라고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매년 11월 첫 토요일이 育林의 날로 결정되어 조림지시비 ․ 검목 ․ 병충해방제 ․ 잡목 솎아내기 ․ 가지치기 등에 많은 국민이 참여하여 큰 성과를 거두었다.
/박정희대통령 인터넷기념관 www.516.co.kr/board /Google
(1977년 10월 6일 처음 육림의 날 행사를 가진 뒤에 11월 첫째 토요일로 다시 정한 모양입니다. ^.@)
- October War against Israel,
25th Anniv.
1973 - 제4차 중동전쟁 발발
1967년의 ‘6일전쟁’이 이스라엘의 완전한 군사적 승리와 거대한 영토 획득으로 종결되었을 때 그것이 정말 종전으로 이어지리라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패배한 아랍인들은 굴욕감과 복수심에 1973년의 10월 전쟁을 준비했다. 6일전쟁으로 시리아는 골란고원을 빼앗겨 그들의 심장부를 이스라엘의 날카로운 칼날 앞에 드러내놓았고, 요르단은 이슬람 성지를 유태인 지배하에 넘겨주었으며, 이집트는 수에즈운하에서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러던 1973년 10월 6일 오후 2시경, 시나이 반도와 골란고원 양전선에서 이집트와 시리아가 일제히 이스라엘에 대한 총공격을 개시했다. 이날은 유대교도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국경일인 ‘정결 의식의 날’이었다. 다시말해, 이스라엘의 허를 찌른 것이었다.
바로 다음날 7일, 이스라엘은 예비역을 대동원해 반격태세를 갖췄다. 이어 9일에는 다마스카스와 레바논을 폭격, 시리아전선에서의 제공권(制空權)을 장악했고, 골란고원의 전차전(戰車戰)에서도 시리아군에 압도적인 공격을 전개했다. 이에 이집트ㆍ시리아를 지지하는 아랍 8개국까지 참전했지만, 전세는 이미 미국을 등에 업은 이스라엘에 유리하게 전개됐다.
전투가 계속되자 16일, 아랍측이 정전을 제의했다. 그러나, 이스라엘이 이를 거부하자 아랍측이 17일 서방제국에 대한 석유전략을 발표함으로써 오일쇼크의 방아쇠가 당겨졌다. 20일에는 이스라엘 지원국에 대한 석유수출금지ㆍ산유랑 20% 감소ㆍ유가 인상 조치를 발표함으로써 ‘황금의 물’ 석유가 ‘공포의 물’로 변했다. 이에 22일, 유엔안보리에서 정전결의안이 채택되었고, 정전명령이 내려졌다. 그러나, 전투는 계속되었다. 결국, 사실상의 정전은 정전협정이 합의에 도달한 그해 11월에나 이루어졌다.
중동전쟁으로 인해 이집트와 시리아 양국은 총2천3백대의 전차를 상실했고 이스라엘은 2백대의 전차만 상실했다. 항공기는 이집트와 시리아가 475대를 상실한 반면 이스라엘은 115대를 상실했다. 병력손실도 아랍측이 1만6천명이었던 반면, 이스라엘은 2천5백명에 그쳤다. /조선
1972 - 서울 인구 600만 돌파, 세계 6위
서울특별시의 인구는 1960년 244만 5402명(인구밀도 9,112명/㎢)의 인구가 1963년 대대적인 시역확장과 함께 325만 4630명으로 늘어나 300만 명 이상의 도시가 되었고, 1970년 543만 3198명, 1976년 725만 명, 1983년 920만 명, 그리고 1988년 1028만 6503명으로 인구 1000만 명의 거대도시로 변모하였다.
1992년말에는 1096만 9862명(인구밀도 1만 8121명/㎢)으로 광복 당시 90만 1371명(인구밀도 6,627명/㎢)에 비해 1000만 명 이상 늘었고, 1960년 이후 전국인구 증가분의 44%를 서울이 차지하였다. 전국인구에 대한 비율은 1960년 약 10% 수준에서 1970년 17.6%, 1980년 22.3%, 1990년 24.4%, 그리고 1992년 25.1%로 최고를 이루었다. 면적은 전국의 0.61%에 불과하지만 인구는 전국 인구의 25%를 차지하여 4명 중 1명이 서울사람인 셈이었다. /naver
1955 - 조선왕조실록 간행 착수
각 사고의 모든 《조선왕조실록》은 조선 말까지 완전히 보관되었는데, 일제강점기에 들어 다시 큰 변화를 겪었다. 일제는 정족산·태백산 사고의 실록을 조선총독부로 이관하였다가 경성제국대학(현 서울대학)으로 이장하였고, 적상산 사고본은 장서각으로 옮겼으며, 오대산 사고본은 도쿄제국대학으로 반출하였는데 1923년의 간토대지진 때 대부분 불타 없어졌다.
장서각 소장의 적상산본은 1950년 6·25전쟁 때 북한으로 옮겨진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태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었다가 국가기록원에 이관되었고, 정족산본은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 중이다. 1929~1932년 경성제국대학에서 태백산본을 1/4축쇄판(縮刷版) 888책 한장본(漢裝本)으로 30절(折)을 영인(影印) 출간하였으며, 1958년에는 역시 태백산본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다시 1/8축쇄판(A4판) 48책 양장본으로 간행, 보급하였다.
북한에서는 1980년대에 조선왕조실록 번역을 완료하였으며, 남한에서도 1968년부터 세종대왕기념사업회에서,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72년부터 분담하여 국역작업을 시작하여 1994년 4월에 마무리지었다. /naver
1952 - 백마고지 전투 발발
1952년 10월 6일 6·25전쟁 중 강원도 철원 서북방 395고지(일명 백마고지)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백마고지는 광활한 철원평야 일대와 서울로 통하는 길목에 있는 군사지정학상 요지로, 이곳을 탈환하면 국군의 주요 보급로를 장악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중국인민지원군과 국군 간에 한치도 양보할 수 없는 치열한 공방이 전개되었다. 공격을 감행한 중국인민지원군은 장융후이[江擁輝]가 지휘하는 제38군단의 6개 연대에 지원부대병력을 합해 총병력 4만 4,056명이었으며, 각종 포 55문의 지원을 받고 있었다. 국군은 이에 대응해 김종오 소장이 지휘하는 병력에 미군의 지원을 받아 중국인민지원군의 공격을 성공적으로 격퇴했다. 9일 동안 12차례에 걸쳐 치러진 공방전에서 중국인민지원군은 약 1만 명, 국군은 3,500명의 사상자를 냈다. 국군의 승리 요인은 우수한 정보활동, 보병과 포병 간의 적절한 협동, 전투부대의 적절한 임무교대를 통한 충분한 휴식에 있었다. /브리태니커
1950 - 나비연구가 석주명(石宙明) 사망
석주명 [石宙明, 1908.11.13(30)~1950.10.6]
석주명(石宙明)은 오로지 나비밖에 몰랐던 사람이다. 한 줄의 논문을 쓰기 위해 3만마리의 나비를 만지고, 6·25 때는 15만마리의 나비를 지키기 위해 피란도 하지 않고 남산 국립과학박물관을 지켰다.
생전에 그가 정리한 한국산 나비는 모두 246종. 53년이 지난 현재까지 밝혀진 나비가 모두 251종인 점을 감안하면 그의 연구성과는 실로 놀라운 것이었다. 평생을 산과 들에서 보내며 75만 개체의 나비를 직접 채집·조사·분류해 한국 나비학의 초석을 세웠다.
그의 공적은 오늘날 세계 학계에서 통용되는 유리창나비의 아종명(亞種名)에 그의 성을 딴 ‘SEUK’으로 남아 있다. 그는 또 제주도학이라는 새로운 학문 영역을 개척한 사람이기도 하다. 2년간 머물렀다는 인연으로 10권의 저서와 30편의 논문을 펴내고 유채꽃을 일본에서 제주도로 들여온 것도 석주명이었다.
그런 그가 어느날 갑자기 죽었다. 1950년 10월 6일, 서울 충무로4가 개천가에서 인민군으로 오인받아, 술을 마시던 청년들이 쏜 총에 맞고 42세로 요절한 것이다. /조선
1943 - 부관연락선 곤린마루[崑崙丸(곤륜환)] 미국잠수함에 의해 격침, 1200여 명 사망
"1943년 10월 5일 시모노세끼(下關)항을 출발해 부산을 향하던 關釜연락선 곤린마루(崑崙丸, 7, 907톤)가 10월 6일 오전 1시 15분 경 오키노시마 동북 약 10해리 해상에서 미 잠수함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 이 사건으로 약 1,200여 명이 사망하였다. 이들을 기리기 위한 비가 崑崙丸犧牲者慰靈碑이고, 사망자 가운데는 다수의 한국인들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玄海의 여왕` 이라 불리면서, 당시 일본 최고의 속력(23.4노트)을 자랑했던 關釜연락선 곤린마루는 1943년 4월 12일 첫 취항한 이래 여객선으로서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다. 이름은 중국 곤륜산맥에서 왔다고 한다.
1943년, 대한해협에도 미국 잠수정이 출몰하기 시작하면서 관부연락선의 결항이 잦았다. 동년 10월 5일, 오후 10시 5분 시모노세키(下關) 항을 출발하여 부산을 향하던 곤린마루호는 다음날 오전 1시 15분 경 오키노시마 동북 약 10해리 해상에서 미 잠수함 어뢰를 맞아 침몰했다. 당시 일반승객 479명, 승무원 176명, 합계 655명이 승선했는데 한밤중이어서 구조활동이 어려워 75명만이 구조되었다. 관부연락선 사상최대의 비극이었다. 부산을 오갔기 때문에 다수의 한국인들이 탑승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위령비는 국철관계자와 유족들에 의해 1960년 10월 관부 항로의 기지 시모노세키항이 내려다 보이는 히요리야마(日和山)공원에 세워졌다. 공사비는 80만 엔이 들었다고 한다. 앞면에는 동그란 튜브모양 안에 崑崙丸이라는 글자와 그 윗면에 慰靈碑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다."
(곤린마루 희생자 위령비)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 정보시스텀
http://search.i815.or.kr/Ruin/RuinforeignView.jsp?id=JP134136
1927 - 첫 유성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 개봉
"기다려! 기다려! 넌 아무것도 듣지 못했잖아!
(Wait a minute! Wait a minute! You ain’t heard nothin’ yet!)”
1927년 10월 6일, 주인공 알 졸슨의 목소리가 뉴욕 워너 브러더스 극장에 울려퍼졌을 때 관객들은 자신의 귀를 의심해야 했다. “영화에서 배우의 목소리가 들리다니….” 영화사에 길이 기록될, 최초의 유성 영화 ‘재즈 싱어(Jazz Singer)’의 첫 대사는 이렇게 시작됐다.
관객들은 비록 두 장면에서만 배우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만 이 사실만으로도 그들에게는 경이(驚異)였다. 사실 영화에 소리가 등장한 것은 이 영화가 처음은 아니었다. 한 해 전에 워너사가 바이터폰(vitaphone)이라는 장치를 이용, 영상에 영화음악을 합성한 ‘돈 주앙’이라는 영화를 소개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배우들의 육성까지는 담아내지 못했다.
결국 영예는 ‘재즈 싱어’로 넘어갔고, 워너사는 350만달러라는 기록적인 흥행수입을 거둬들여 파산 직전에서 기사회생, 메이저 영화사로 발돋움했다. 영상과 음악과 목소리가 완벽하게 조화를 이룬, 진정한 의미의 최초의 유성영화 자리는 이듬해 제작된 ‘뉴욕의 등불’이 차지했다. /조선
1926.10.6 - 미국에서 토키(발성)영화 성공
토키는 영화 발명 후 얼마 뒤부터 시험 제작되고 있었는데, 본격적인 토키의 등장은 라디오의 증폭기가 사용되고부터 이다. 1926년 미국의 워너 브라더즈사가 파산 직전으로 몰렸을 때 시험삼아 바이터폰(Vitaphone)을 사용한 디스크식 부분 토키 작품인 <돈 쥬앙>을 만들었고 이것의 성공으로 이듬해 거의 완벽한 토키 작품인 <재즈 싱어(1927)>를 만드는데, 이와 함께 토키 영화의 시대가 도래하게 된다. 1929년 이후 유럽의 여러나라 영화도 잇달아 토키영화 시대를 맞는다.
http://tiny.britannica.co.kr/bol/topic.asp?article_id=b16a0030b037
1914 - 노르웨이의 민속학자, 탐험가 헤이에르달(Heyerdahl, Thor) 출생
헤이에르달 [Heyerdahl, Thor, 1914.10.6~2002.4.18]
'콘 티키(Kon-Tiki)'(1947), ' 라(Ra)'(1969) 등 유명한 대양항해 과학탐사를 조직했다. 이 두 탐험은 원거리의 상이한 고대 문명 간의 대양항해 접촉 가능성을 증명하기 위해 시도되었으나, 그의 이론은 보다 아카데믹한 학자들에게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947년 그와 몇몇 대원들은 원시 뗏목인 콘티키호를 타고 남아메리카의 태평양 연안에서 폴리네시아까지 항해함으로써 폴리네시아인이 남아메리카에서 기원했을 가능성을 증명했다. 이 항해에 얽힌 이야기는 그의 저서 〈콘 티키 Kon-Tiki〉(1950)와 동일 제목의 다큐멘터리 영화에 묘사되어 있다. 1969년 다양한 국적을 가진 대원들과 함께 세밀하게 제작된 고대 이집트의 갈대 보트를 타고 모로코에서 대서양을 건너 약 1,000km 떨어진 중앙 아프리카까지 항해했다. ... /브리태니커
이스터섬((Easter I.)에 대해 처음으로 학술적인 조사를 한 사람은 노르웨이 인류학자 헤이에르달이었다. 그는 마르키즈제도의 거석상(巨石像)과 남아메리카의 거석문화(巨石文化)는 서로 연관된 것이라고 생각하고, 잉카시대의 콘티키호(號)를 복원하여 1947년에 페루해안에서부터 투아모투제도로 항해하였다. 그리고 1955~1956년에 걸쳐 이스터섬의 모아이가 서 있는 아후라고 하는 종교유적을 조사하였다. 아후는 돌을 앞쪽으로 쌓아 올려서 바다 쪽을 높게 만든 30m×100m의 대좌(臺座) 위에 1~15개의 석상을 일렬로 세워 놓은 것인데, 200개 이상 확인되었다. 석상 중에는 높이 약 10m가 되는 것도 있다. /yahoo
1903 - 미국의 법률가, 정치인 맥마흔(McMahon, Brien) 출생
맥마흔 [McMahon, Brien, 1903.10.6~1952.7.28]
Brien McMahon(1903~1952) was an American lawyer and politician who served in the United States Senate (as a Democrat from Connecticut) from 1945 to 1952. McMahon was a major figure in the establishment of the Atomic Energy Commission, through his authorship of the Atomic Energy Act of 1946(the McMahon Act).
McMahon served as chairman of the Special Committee on Atomic Energy, and the first chairman of the Joint Committee on Atomic Energy. McMahon was a key figure in the early years of atomic weapons development and an advocate for the civilian (rather than military) control of nuclear development in the USA. Also, in 1952, McMahon proposed proposed an "army" of young Americans to act as "missionaries of democracy", which sowed the seeds for what would later become the Peace Corps. /wikipedia
맥마흔법 [McMahon Act]
1946년 8월 1일에 성립한 미국의 원자력 국내관리에 관한 최초의 법. 공식적으로는 ‘1946년 원자력법(The Atomic Energy Act of 1946)’이다. 상원의원이자 원자력특별위원회 위원장인 B.맥마흔이 이 법안을 제출하였는데, 이를 계기로 미국의 원자력사업은 육군의 손에서 떠나 미국원자력위원회(U.S. Atomic Energy Commission:AEC)라는 문관관리(文官管理)로 옮겨져 전시체제에서 평화체제로 전환되었다.
이 법에는 원자력 평화이용에 관한 규정도 두었는데, 당시의 원자력사업은 거의 원자폭탄의 제조였다. 그리하여 AEC는 원자력에 관한 연구·개발·생산·허가 등의 여러 분야를 비롯하여 모든 원자력물질·원자력시설 등을 관리하였다. 또 이 법에서는 군사연락위원회를 두어 AEC와 군과의 긴밀한 연락을 꾀하는 한편, 국내에서나 과학정보교환에서도 엄격한 금지조항을 두었다. 그러나 맥마흔법은 원자력사업을 문관관리로 전환시키는 데 성공하였으나 무관관리파(武官管理派)와 타협한 결과의 산물이기도 하였다. 그 후 ‘1954년 원자력법’이 맥마흔법과 대치되었다. /naver
1892 -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시인 테니슨(Tennyson, Alfred) 사망
테니슨 [Tennyson, Alfred, 1809.8.6~1892.10.6]
영국 시인. 중부 잉글랜드, 랭카셔의 서머스비 출생. 목사의 아들로 태어나 엄격한 아버지의 교육을 받았다. 1828년 케임브리지대학의 트리니티 칼리지에 입학하여, 시 《팀북투 Timbuctoo》(1829)로 총장상 메달을 받았다. 이미 형 찰스와 《두 형제 시집 Poems by Two Brothers》(1827)을 익명으로 내놓았는데, 실은 장형 프레드릭까지 포함한 3형제 시집이다. 이어 《서정시집 Poems, Chiefly Lyrical》(1830)을 발표, L.헌트에게 인정을 받았고, 1831년 아버지가 죽자 대학을 중퇴하였다.
1832년의 《시집》에는 고전을 제재로 한 《연(蓮)을 먹는 사람들 The Lotos-Eaters》《미녀들의 꿈 The Dreams of Fair Women》, 중세(中世)에서 제재를 얻은 《샬럿의 아가씨 The Lady of Shalott》, 그의 예술관을 보여 주는《예술의 궁전 The Palace of Art》등의 가작(佳作)이 들어 있다. 이 해 친구 아서 핼럼과 함께 유럽을 여행하였고, 이듬해 핼럼이 죽자 애도의 시를 쓰기 시작하였다. 1842년의 2권본 《시집》에는 《아서왕의 죽음》《율리시스 Ulysses》《록슬리 홀 Locksley Hall》《두 목소리 Two Voices》《고다이바 Godiva》등의 명작 외에 《정원사의 딸》《도라》등의 전원시(田園詩)가 실렸다. 이것은 T.칼라일, 에머슨, E.포 등에게도 애독되었으며, 다시 1847년의 《왕녀(王女) The Princess》로 명성을 떨쳤다.
1850년에는 걸작 《인 메모리엄 In Memoriam》이 출판되었으며, W.워즈워스의 후임으로 계관시인(桂冠詩人)이 되었다. 이 해에 그는 약혼녀 에밀리 셀우드와 결혼하였다. 《인 메모리엄》은 17년간을 생각하고 그리던, 죽은 친구 핼럼에게 바치는 애가(哀歌)로, 어두운 슬픔에서 신(神)에 의한 환희의 빛에 이르는, 시인의 ‘넋의 길’을 더듬은 대표작일 뿐만 아니라,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시이기도 하다. 그 후에도 《모드 Maud》(1855), 대작 《국왕목가(國王牧歌) Idylls of the King》(1859∼1885), 담시(譚詩) 《이녹 아든 Enoch Arden》(1864) 등을 써서 애송되었으며, 여왕으로부터 영작(榮爵)을 받고, 빅토리아 시대의 국보적 존재가 되었다. /naver
- 'Steeple'
1890 - 미국의 사진작가 스트랜드(Strand, Paul) 출생
스트랜드 [Strand, Paul, 1890.10.6~1976.3.31]
그의 작품들은 20세기 미국 사진에 추상과 객관성을 강조하는 데 공헌했다.
17세 때 후에 공장 노무자들과 이주민들에 대한 사진으로 유명해진 사진작가 루이스 W. 하인으로부터 사진을 배우기 시작했다. 하인의 권유로 뉴욕의 '291'화랑에 드나들게 되었고, 그곳에서 사진분리파의 지도자이며 피카소·세잔·블라크 등 전위파 회화에 심취해 있던 앨프레드 스티글리츠를 만났다. 스트랜드도 전위파 화가들의 작품에 영향을 받아 〈그림자 유형과 뉴욕 Shadow Pattern, New York〉(1915)·〈월스트리트 Wall Street〉(1915) 같은 사진에서 추상적 형태와 패턴을 강조하게 되었다. 당시 가장 대담한 작품 가운데 하나인 〈하얀 담장 White Fence〉(1916)에서 스트랜드는 색조(色調)의 단계들과 율동적인 패턴으로부터 강력한 구성을 만들었다. ... /브리태니커
1889 - 폴란드의 작가, 문학평론가 돔브로프스카(Dabrowska, Maria) 출생
1889 - 중국공산당 공동 설립자, 사상가 리다자오[李大釗, 이대쇠] 출생
1889 - 물랭 루주 개장
1887 - 스위스 태생의 프랑스 건축가 르 코르뷔지에(Le Corbusier) 출생
1887 - 멕시코의 소설가 구스만(Guzman, Martin Luis) 출생
1869 - 스웨덴의 서정시인 베리만(Bergman, Bo Hjalmar) 출생
1866 - 캐나다 태생의 미국 무선공학자 페선던(Fessenden, Reginald Aubrey) 출생
1831 - 독일의 수학자 데데킨트(Dedekind, Richard) 출생
1769 - 영국의 군인, 캐나다의 행정관 브록(Brock, Isaac) 출생
1742 - 노르웨이 태생의 덴마크 작가, 해학가 베셀(Wessel, Johan Herman) 출생
1552 - 중국에 그리스도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Matteo Ricci) 출생
1459 - 독일의 항해가, 지리학자 베하임(Behaim, Martin) 출생
671 - 신라, 당군을 격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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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너에게로 가는카페 원문보기 글쓴이: 인간문화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