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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창골산 봉서방 원문보기 글쓴이: 봉서방
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담임목사는 성도들의 가정과 일터를 위하여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간에는 ‘맥추 감사주일’로 드리게 되어서 특별히 감사에 대한 말씀을 전해 드리고자 합니다.
영국의 유명한 매튜 헨리(Mothew Henry)라는 목사님이 하루는 어떤 골목길을 가다가 매를 맞고 정신을 잃어버리게 되었습니다. 그러다가 정신을 차려 일어나 보니 온 몸이 상처 투성이고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간신히 집에 들어오니, 온 식구가 다 깜짝 놀랐습니다.
그러나, 그는 아무말도 하지 않고 서재에 들어가서 그 피투성이의 몸을 가지고 엎드려 감사의 기도를 드렸다고 합니다.
그는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생명만은 살아 돌아와서 가족들을 만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또 내가 예수를 안믿었다고 하면 나를 때린 저 강도와 같이 되었을 터인데 예수 믿고, 목사가 된 것을 감사합니다. 또 이 세상의 모든 것 다 잃어버린다 하더라도 내가 영원한 천국을 소유하게 되었으니 감사합니다" 하면서 감사의 조건만 찾아서 기도를 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일제의 신사 참배강요를 거부하여 5년여의 옥중고생을 한 손양원 목사님은 옥중에 있을 때, 그의 아들 동인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냈습니다.
"사람의 생사는 인의로 좌우됨이 아닌즉, 범사를 주께 맡겨, 자연스럽게 태연히 걸어가노라면 주의 권고가 있을지니, 너희들은 항상 기뻐하고, 범사에 감사의 생애를 보내라. 이것이 기독자니라. 평시 범상시에는 누구나 기뻐 안하리오. 고난 역경에도 감사 기뻐함이 신앙 생활이다. 고난을 피하려고 염려하지 말고, 도리어 감수하고 극복하라. 피하려 애쓰는 자는 근심이 더해지고, 감수하는 자는 진리 발견의 기쁨이 충만하리라"고 했습니다.
실로 기쁠때는 누구나 감사할 수 있는 것으로, 그런 감사는 참 감사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고난과 역경중에 하는 감사만이 참 감사인 것으로, 참된 그리스도인은 오히려 고난과 역경에 더욱 감사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모든 일에 감사하는 신자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룰 것이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는 온 가족이 성전에 나오셔서 ‘감사의 제사’로 하나님께 영광 돌리시는 복된 맥추 감사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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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은 10년전 20년전에 살던 사람들 보다 더 불행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더 외롭게 살고 있습니다. 현대인들의 60%정도는 정신 질환을 갖고 있으며 그 중에 또 60%정도는 치료를 받아야 할 정도라고 합니다.
모든 것이 더 풍족한 시대에 살고 있으면서도 이렇게 불행하게 사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못 먹고 못 가져서가 아닙니다. 너무 많이 가진 것이 문제입니다.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것이 우리를 더 불행하게 만들기도 합니다.
옛날에는 이사를 하면 이웃집에 떡을 나누어 먹었지만 요즘은 이웃집에 누가 사는지 조차도 모르고 삽니다. 더 많은 것을 소유하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는 시대이기 때문에 과거보다도 더 많은 것을 가졌음에도 불행한 것입니다.
우리는 더 많은 것을 소유하려는 욕심을 버려야 행복할 수 있습니다. 소유가 결코 행복일 수 없습니다. 욕심은 우리를 더욱 불행하게 만들 뿐입니다.
에덴 동산의 아담을 보십시오.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같이 되려는 욕심 때문에 범죄하고 말았습니다. 더 높아 질려는 유혹을 이기지 못했습니다. 결국 아담과 하와는 에덴 동산에서 쫓겨남을 당하고 말았던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서 많은 것을 가진 만큼 하늘나라와 거리가 더 멀어진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잠언 17:1 말씀에 “마른 떡 한 조각만 있고도 화목 하는 것이 육선이 집에 가득하고 다투는 것보다 나으니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 1:15 말씀에는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고 했습니다.
우리에게 소중한 것은 믿음과 사랑입니다. 욕심으로 얻어지는 것은 죄와 사망뿐이지만 믿음과 사랑으로 얻는 것은 무한합니다. 천국을 얻을 뿐 아니라 이 세상에서도 행복을 누리며 아름다운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주님을 만난 후에는 세상적인 모든 것을 다 분토와 같이 여겼다고 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주님을 만나시며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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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파스칼은 일찌기 말하기를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달나라에 인간이 착륙할 수 있는 것도 일찌기 그 누군가 그러한 것을 꿈꾸었기 때문에 가능한 것입니다.
날아다니는 새를 바라보면서 인간도 저렇게 날아보았으면.. 하는 생각을 하였기에 비행기를 발명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지금하고 있는 생각의 종류가 무엇인가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잠언23장7절 말씀에 보면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즉 그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의 생각 여하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인류역사에 기여를 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고 창조적인 것을 생각을 한 사람들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60만명 중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생각은 씨앗과 같습니다. 콩 심은데 콩나고 팥 심은데 팥 나듯이 좋은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좋은 사람이 되고, 나쁜 생각을 많이 한 사람은 나쁜 사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 창조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불가능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는 사람을 쓰십니다.
오늘 우리는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까? 나의 생각이 나를 죽이기도 하고 나를 살리기도 한다는 것을 알고 이제 믿음의 생각으로 바꾸어 보십시다. 긍정적인 생각으로 바꾸어 보십시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까?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죽은자를 보고도 죽었다 말씀하지 않고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만 있습니다. 할렐루야!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주님을 만나시며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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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전기 기구를 사용하다가 보면 고장이 나서 어려움을 당하게 될 때가 있습니다. 몇가지 깨닫게 되는 것은 아무리 좋은 기계라도 전원이 잘못되면 그 기계는 고철과 같을 뿐이라는 것이고, 유명회사의 제품이라도 전원이 잘못되면 쓸모 없는 것이 되고 만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잘 만든 제품이라도 전원을 잘못 꽂으면 못쓰게 된다는 것, 이 사실을 우리 인생에 비유해서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내 생명이 어떤 전원에 연결되어 있느냐 하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전원이 서로 맞아야 기계가 정상으로 작동하듯이 인간은 그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에게 연결 되어있어야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인생의 생명줄을 다른 곳에 연결하고 살고 있습니다. 우상에 연결된 인생이 있는가 하면 돈과 권력과 쾌락에 연결된 인생도 있습니다. 우리 인생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습니다. 하나님과 교제하며 하나님을 기쁘시게해 드리며 살도록 지음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연결된 인생이가장 행복한 인생이요 정상적인 인생인 것입니다.
요한복음 15장5절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 친히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니 저가 내 안에 내가 저 안에 있으면 이 사람은 과실을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이라”고 하셨습니다. 주님과 연결된 삶이 가장 복된 삶이요 열매가 있는 삶입니다.
또한 기계가 고장이 나면 곧바로 전문가에게로 가지고 가는 것이 가장 지혜롭다는 것입니다. 우리 인생에는 여러가지 문제가 생깁니다.
급한 일도 생기고 슬픈 일도 생기고 사고도 나고 병도 들고 억울한 일도 생기고... 갖가지 문제가 끊임없이 일어나는 것이 인생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러한 문제가 생길 때 자기의 노력과 힘으로 문제를 해결할려고 애를 씁니다. 때로는 훌륭한 상담자를 찾기도 하고 유명한 의사를 찾아가기도 합니다. 잠시의 위로는 받고 일시적인 치료의 효과는 있을지 몰라도 궁극적인 문제해결은 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누구나 다 죄인이요 다 같이 부족한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인간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시려고 오신 분 이십니다. 마가복음 5장 25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혈루증에 걸린 한 여인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12년동안 온갖 노력을 다 했지만 돈만 없어지고 건강은 더 악해졌을 뿐입니다. 인간의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나아와 주님의 옷자락만 만져도 12년간 고생하던 혈루의 근원이 순간적으로 깨끗해 졌습니다. 할렐루야!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주님을 만나시며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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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본능 가운데는 공간을 채울려고 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텅 빈 방안에는 가구로 채워야 하고 책장은 책으로 채워야 하고 냉장고는 음식으로 가득 채워져 있을 때 행복을 느끼는 것입니다. 은행 통장에는 돈이 채워지기를 바라고 열심히 저축을 합니다.
젊은이들의 가슴에는 사랑으로 채우기를 바라고 학자들의 머리에는 지식으로 채워지기를 바래서 열심히 연구를 합니다.
그런데 공허한 사람의 마음은 무엇으로 채워야 합니까? 어떤 사람은 술로 채울려고 합니다. 그것도 안되면 마약으로 채울려고도 합니다. 물질로 채울 수 없고 지식으로 채울 수 없고 권력으로 채울 수 없는 인간의 공허한 마음을 무엇으로 충만히 채울 수 있습니까?
사도 바울은 갈라디아서 2장20절에서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그렇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야 합니다.
내 생명은 이미 예수를 믿을 때 세례를 받을 때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 죽고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다시 살아난 생명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내게 있는 생명은 내 생명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생명이요 예수님의 생명입니다.
우리의 심령은 그리스도의 생명으로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의 정신으로 채워야 합니다. 성령으로 충만히 채워야 합니다.
예수님은 만물 가운데 충만하신 분이요 만물을 충만케 하시는 분이십니다. 주님의 생명으로 가득 채워진 삶은 주님의 온갖 풍성하신 모든 것으로 충만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내 뜻을 버리고 내 고집을 버리고 내 주장도 버리고 주님의 뜻을 먼저 찾고 주님을 내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내 모든 말의 주격으로 삼고 1인칭으로 삼아야 합니다.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내 삶의 주인되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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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33세의 젊은 나이로 나병 환자들이 모여 사는 하와이 근처에 있는 몰로카이 섬에 가서 일생동안 그들을 위하여 살았던 성자 다미엔의 이야기를 한편 들려드리겠습니다. 성자 다미엔이 아직 나병이 들기 전에 자기 손으로 지은 교회에 나가서 나병 환자들 앞에서 참된 자유와 평화에 대한 설교를 하였습니다. 그러자 나병환자들의 반응은 너무나도 충격적이었습니다.
“당신 같은 성한 사람이나 자유가 있고 평화가 있지 우리들 같은 나병환자들에게 무슨 자유와 평화가 있을 수 있겠느냐?”고 빈정대는 것이었습니다. 다미엔은 이 말을 들은 후에 자기 방에 들어가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드렸습니다.
“하나님, 저들을 구원하기 위하여 저는 문둥이기 되기 원하오니 저를 문둥이가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아무나 할 수 없는 기도를 드렸습니다. 얼마뒤에 하나님께서는 다미엔의 기도를 들어주셔서 다미엔은 문둥병 환자가 되었습니다.
문둥병에 감염된 다미엔은 자기를 선교사로 파송한 주교에게 보내는 편지에 이렇게 기뻐하며 글을 쓰고 있었습니다. “......지금 저는 문둥이가 되었습니다. 저의 빛나는 희망은 마침내 실현되었습니다”라고 말입니다.
다미엔은 그 후 16년 동안 그 곳에서 전도하다가 마침내 나병으로 엉망이 된 육체를 떠날 때까지 하나님께서 십자가와 영광의 면류관을 결합시킨 것을 믿었고, 세상의 부귀 영화는 그가 바라는 영원한 집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님을 더 깊이 깨달았던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이 무슨 뜻입니까?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의 길이요 제자의 삶임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를 위해서는 너무 관대하고 주위 사람들에게는 참으로 인색한 나의 모습을 고백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마태복음 10:39말씀입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사랑의 주 예수님을 만나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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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부귀영화를 가장 많이 누린 사람은 솔로몬을 능가할 사람은 아직 없습니다. “솔로몬”이라 하면 부귀영화의 상징으로 표현되기도 합니다(마6:29). 솔로몬은 행운아 였습니다. 축복 받은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지혜를 얻어 지혜 하나로 온 세계에 유명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그가 나이 들어 늙었을 때는 왕비들이 그의 마음을 돌이켜 우상을 섬기는데 빠지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은 믿음으로 시작하여 불신앙의 자리에 빠지고 말았습니다. 영광스러운 자리에서 부끄러운 자리로, 지혜 있는 자가 미련한 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솔로몬이 이렇게 넘어진 원인이 어디에 있습니까?
첫째로, 솔로몬은 마음이 악해서가 아니라 마음이 약해서 넘어졌습니다. 솔로몬은 아합왕이나 헤롯왕과 같은 잔인함이나 포악한 성품은 없습니다. 그는 지혜를 사랑하고 문학을 좋아하고 예술을 사랑하는 성품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선천적으로 포악할 수 없는 성품을 가지고 태어났습니다. 그러나 솔로몬은 악한 사람은 아니었지만 마음이 약한 사람임에 틀림없습니다. 그러기에 왕비들의 유혹을 물리치지 못하고 우상을 섬기고 말았던 것입니다.
오늘날에도 마음이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악하고 포악한 사람들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축복 받은 성품임에는 틀림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선량함만을 믿고 방심해서는 안됩니다. 선량함이 약함이 되어서 타락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둘째로, 솔로몬이 넘어진 것은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입니다. 옛말에 가난이 원수라고 했습니다. 가난해서 도둑질도 하고 가난해서 못된 짓도 합니다. 그러나 솔로몬의 경우는 다릅니다. 없는 것이 없을 정도로 모든 것이 구비되어 있었습니다. 지나칠 정도로 모든 것이 풍족했습니다. 너무 많은 것이 실패의 원인이었습니다. 처첩이 너무 많았고, 재물이 너무 많았습니다. 권력과 시간과 지혜가 너무 많았습니다. 재물이 없었으면 우상을 위한 산당을 짓지는 않았을 것이요, 그렇게 많은 처첩을 거느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필요 이상의 소유는 오히려 인간을 불행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누가복음 12장의 어리석은 부자의 비유에서 볼 수 있듯이 너무 많은 소득은 하나님 없는 삶을 살게 될 뿐인 것입니다.
그러나 많이 가진 것 자체가 죄는 아닙니다. 가진 것을 바로 사용하면 축복이 되는 것입니다. 먹든지 마시든지, 살든지 죽든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살면 아무리 많이 가져도 가진 것 때문에 실족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는 주님의 말씀과 같이 범사에 감사하며 자족하는 은혜 가운데 사는 것이 끝까지 넘어지지 아니하고 승리하는 삶이 될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는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복의 근원이되시는 예수님을 만나시며 영광 돌리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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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건전한 가정을 만들기 위한 30대 원칙을 살펴 보면서 함께 생각했으면 합니다.
♥ 부부 싸움 없는 가정문화를 이루어야 한다.
♥ 부부만의 은밀한 문화를 개발해야 한다.
♥ 외도, 탈선 없는 성 문화를 지켜야 한다.
♥ 껸���생활화해야 한다.
♥ 배우자의 부모에게도 효를 해야 한다.
♥ 자녀에게 자애로와야 한다.
♥ 화내고 때리지 않아야 한다.
♥ 폭언이나 극단적인 말을 하지 않아야 한다.
♥ 사랑의 대화법을 실행해야 한다.
♥ ?돈 돈? 하지 않아야 한다.
♥ 가난을 부끄러워 하지 않아야 한다.
♥ 공짜를 배척해야 한다.
♥ 작은 집, 작은 차, 낡은 것도 함부로 버리지 않아야 한다.
♥ 값싼 옷, 헌 양말도 꿰메 신어야 한다.
♥ 소박한 음식을 정성으로 차려야 한다.
♥ 결혼식은 가족 단위로 치러야 한다.
♥ 첫 살림은 전세로부터 시작시켜야 한다.
♥ 가정의 전통을 전수시켜야 한다.
♥ 놀지 않고 ?휴식?을 취해야 한다.
♥ 술과 잡기를 절제해야 한다.
♥ TV 드라마를 보지 않아야 한다.
♥ 공동체에 피해를 주지 않아야 한다.
♥ 이웃 봉사에 나서야 한다.
♥ 나라 사랑을 실천하여야 한다.
♥ 힘든 일에서 보람을 찾아야 한다.
♥ 장인정신으로 일해야 한다.
♥ 1등주의 , 실적주의에서 벗어나야 한다.
♥ 늘 감사하고 불평, 불만을 하지 않아야 한다.
♥ 끝없이 착하고, 끝없이 강인한 정신을 연마하여야 한다.
♥ 매일 매일 반성하는 습관을 길러야한다.
돌아오는 주일에도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우리 가정의 주인이 되시는 주 예수님을 만나시며 영광 돌리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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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알래스카는 미국 땅입니다. 미국의 텍사스 주의 두 배가 넘고 미국 본토 전체의 5분의 1에 해당될 만큼 큰 땅입니다.
알래스카는 원래 구 소련의 영토였습니다. 그랬던 것을 1867년에 미국에서 720만 달러를 주고 사들였던 것입니다.
미국이 소련으로부터 알래스카를 사는 것은 국회의 동의없이 당시 미국의 대통령과 국무장관 둘만의 합의로 이루어졌습니다.
그 사실을 나중에 안 국회에서는 난리가 났습니다. “얼음덩어리 알래스카가 그렇게 필요했으면 겨울에 꽁꽁 얼어붙은 미시시피 강의 얼음을 깨다가 안방에 둘 것이지 아무 쓸모 없는 땅을 720만 달러나 주고 샀느냐?”고 퍼부어 댔습니다.
그때 국회에 나가 많은 국회의원들 앞에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이미 사 버린 것을 어떻게 하겠습니까? 국회에 통과를 시켜야 된다는 마음이 있었지만 그렇게 되면 매스컴에서 떠들게 되고, 소문이 퍼지게 되면 소련에서 팔지 않겠다고 하거나 값을 비싸게 달라고 할 것 같아서 국무장관과 의논해서 사게 된 것입니다”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그러나 그 뒤에 국회에서는 조사단을 조직했습니다. 그런데 조사해 본 결과 알래스카는 백금이 가득한 곳이었습니다. 또한 풍부한 어장이 있어서 고기잡이가 얼마든지 가능한 곳이었고, 삼림도 무성하였으며 석유가 무한정으로 매장되어 있었습니다. 이런 사실을 발견한 의원들은 코가 납작해졌습니다.
그리고 대통령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각하, 의회에서 있었던 당신의 사과를 돌려드립니다. 우리가 잘 모르고 그랬습니다. 알래스카는 얼음창고가 아니라 보물창고였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대통령과 국무장관의 행동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기회는 발견될 수도 있지만 그것은 그렇게 눈에 띄지 않습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고 허무하기에 망설일 시간이 없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도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우리 주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가라사대 내가 은혜 베풀 때에 너를 듣고 구원의 날에 너를 도왔다 하셨으니
보라 지금은 은혜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 (고후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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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봅시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마치 손바닥과 손등과 같고,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즉, 바른 믿음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야고보서에는 ‘행동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약2:26). 우리 성도들은 “믿습니다”를 곧 잘 연발합니다.
그래서 “예수쟁이는 말쟁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습니다. 말이 많고 말을 잘하는 사람들이라는 바람직하지 못한 별명입니다.
오늘날 ‘되어가야 할’ 우리의 모습은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순종하는 모습, 말씀대로 사는 모습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순종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무조건적이지만 축복은 순종하는 만큼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복받고 잘되는 길은 순종과 관계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금생과 내생에 모두 다 유익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내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생만큼 금생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위하여 자신을 말씀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청천벽력같은 하나님의 말씀앞에 무조건 순종함으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 그 씨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크게 순종하니 하나님으로 부터 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열왕기하 13장을 보면 엘리사가 이스라엘왕 요아스에게 활과 살을 취하여 땅을 치라고 했을 때 요아스는 겨우 세번만 치고 말았습니다.이 때 엘리사 선지자는 노하며 말하기를 왕이 5-6번 쳤어야만 아람나라를 진멸할 수 있는 복을 받을 터인데 하면서 탄식을 했습니다. 요아스는 적게 순종했습니다. 그런고로 겨우 세번 정도 승리하는 복만 받는데 불과했습니다. 5-6번으로 순종의 정도가 컸으면 아람나라를 완전 진멸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도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구원의 주 예수님을 만나시며 영광 돌리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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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한번은 철학자 쇼펜하우어가 깊은 사색에 잠긴 채 길을 걷다가 앞에서 오는 사람과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그러자 상대편에서 화를 내면서 “하는 말이 도대체 당신은 누군데 앞도 보지 못하고 다니는 거요?”하고 말을 했습니다. 그러자 쇼펜하우어는 멋적은 표정을 지으면서 다음과 같이 대답을 했습니다. “내가 누구냐고요? 글쎄올시다. 나도 금방 그걸 생각하고 있는 중이랍니다....”
그렇습니다. 나는 누구입니까? 진정한 자아는 누구입니까? 사람들은 자기를 아는 것 같아도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자기가 누구인지도 모르면서 자기 자신을 끔찍이도 사랑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7백여년 전에 성자 버나드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나 자신을 제외하고는 내게 해를 끼치는 것이라곤 하나도 없다. 내 자신의 잘못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은 나 자신이다”라고 했습니다. 자기가 누구인가를 분명히 알았기에 남을 탓하지 않았습니다. 문제의 원인을 다른데서 찾지 않았습니다. 자기의 부족을 알고 자기와 싸웠고 이겼기에 버나드는 성자가 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님을 발견하기 전에는 자기자신으로 충만해 있었습니다. 모든 것이 자기의 뜻대로 되는 줄로만 알았습니다. 그러나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발견 되어지는 자기의 모습은 분토와 같았습니다. 쓰레기와 같았습니다. 배설물과 같았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의인 인줄로 알았는데 죄인중의 괴수임을 알았습니다. 지혜자인 줄 알았는데 가장 미련한 자임을 알았습니다. 바울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어 지는 자아를 위하여 뒤를 돌아보지 않고 앞에 있는 푯대를 향하여 계속 달음질 쳐 나갔습니다.
그렇습니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나 자신이 참 나 자신이요 가치있는 삶이 될 것입니다(갈2:20).
돌아오는 주일에도 거룩한 전에 나아와, 주 안에서 참된 자아를 발견하고 주님과 교제를 나누므로 복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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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미국의 아주 큰 부자였던 Jay Gould라는 사람은 백만장자로 한 평생을 살았지만, 생을 마감하는 날에 무슨 말을 남겼는지 아십니까? “나야말로 세상의 가장 처참한 천치 바보였구나!”라는 말을 남기고 죽었다고 합니다. 물질이 결코 행복일 수가 없다는 말입니다.
영국의 미남자요 걸출한 시인이요 일생을 향락적으로 살았던 Byron은 자기의 마지막 생일에 다음과 같은 침통한 말을 했습니다. “나의 인생은 말라버린 노란 낙엽과 같구나! 나는 버러지다! 나에게는 슬픔만이 있을 뿐이로구나!...”이런 말을 했다는 것입니다.
평생을 하나님이 없다고 주장하며 크리스챤들을 멸시하고 큰 소리치며 살았던 불란서의 철학자 Voltaire는 “나는 차라리 세상에 태어나지 않았더면 더 좋았을 것을! 나는 지옥에 가는구나!” 이런 처절한 마지막 말을 남기고 죽었습니다.
크리스챤들을 바보라고 하며 수많은 크리스쳔들을 신앙에서 떠나게 만들었던 토마스 페인(Thomas Payne)이 그 마지막 숨을 넘기기 전에 남긴 말은 “오, 하나님, 나를 도와 주세요. 오 예수그리스도여 나를 도와주세요”하고 부르짖었다는 것입니다.
참 행복은 어디에 있습니까? 물질에 있습니까? 쾌락에 있습니까? 학문에 있습니까? 권력에 있습니까? 그 무엇을 다 가졌다해도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 한 분 모시지 않으면 모든 것이 헛되고 헛된일들 뿐입니다. 세상의 것을 아무것도 갖지 못했다해도 우리 주님 예수그리스도 한 분 모신 것이 가장 큰 행복임을 맛보지 않은 사람에게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겠습니까?
주님은 나의 모든 것이 됩니다. 주님은 나의 지혜, 나의 복, 나의 건강, 나의 생명, 나의 행복입니다.
마리아는 예수님을 발견한 후에 가장 고귀하게 간직해 오던 옥합을 주님의 발 앞에 깨뜨렸습니다. 베드로 요한 안드레와 같은 사람들은 예수님을 발견한 후에 그들의 생명줄인 배와 그물과 모든 것을 다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다메섹도상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난 바울은 그의 학문과 가문과 지식과 지혜와 지금까지 가졌던 신앙적인 자만심까지 모두 다 배설물과 같이 버리고 주님을 따랐습니다. 바울은 죽기 전에 디모데후서 4장7-8절에서 이런말을 남겼습니다.
“내가 선한 싸움을 싸우고 나의 달려갈 길을 마치고 믿음을 지켰으니 이제 후로는 나를 위하여 의의 면류관이 예비되었으므로 주 곧 의로우신 재판장이 그날에 내게 주실 것이니 내게만 아니라 주의 나타나심을 사모하는 모든 자에게니라”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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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분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성도들이 믿음으로 승리하는 삶을 사시기를 위해서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인류역사에 크게 기여한 사람들은 한결같이 긍정적인 것을 생각하고 창조적인 것을 생각을 한 사람들입니다.
잠언23장7절 말씀에 보면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그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즉 그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의 생각여하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 60만명 중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다고 긍정적인 생각을 한 여호수아와 갈렙 두 사람만이 가나안에 들어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나안에 들어가면 죽는다고 했던 사람들은 모두 다 가나안에 들어가기 전에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 창조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불가능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는 사람을 쓰십니다. 믿음의 반대 개념은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만은 하지 맙시다.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우리 옛말도 있습니다.
빌립보서4장14절 말씀에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했습니다. 능력의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우리는 새 힘을 얻을 것입니다. 믿음의 주님을 바라보는 순간 모든 가능성을 얻을 수 있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면서 무슨 생각에 사로잡혀 있었습니까? 예수님을 바라보시며 부정적인 생각을 긍정적인 생각으로, 낙심했던 생각을 소망의 생각으로 바꾸어 보십시다. 가능성이 보이지 않습니까? 힘이 솟아나지 않습니까?
예수 안에는 언제나 소망이 넘치고 기쁨이 넘치며, 승리가 있습니다. 이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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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유명하고 능력있는 두 사람이 자리를 함께 하여 어떻게하면 그리스도의 진리를 파괴할 수 있을까를 서로 의논하게 되었습니다.
그 중 한 사람은 1756년에 영국의 재무장관을 지낸 리틀톤 경(Lord Littleton, Chancellor of the Exchequer)이었고, 또 한 사람은 그의 친구며 저명했던 법률가 길버트 웨스트(Gilbert West)였습니다.
이 두명의 무신론자들이 합의한 점은 그리스도의 복음 진리의 두 기둥이 예수의 부활과 사도 바울의 회심이니 이 두 가지를 연구하여 그것들이 거짓이며 허무맹랑한 속임수임을 책으로 펴내자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길버트 웨스트는 예수님의 부활을 조사 연구해서 그것이 거짓임을 증명키로 했고, 리틀톤은 사도행전에 나오는 바울의 회개와 변화가 엉뚱하게 꾸며낸 이야기임을 증명하는 책을 쓰기로 합의했던 것입니다. 그들은 얼마후에 서로 만나서 서로의 연구과정을 이야기 했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조사 연구했던 길버트 웨스트가 먼저 말을 했습니다.
“글쎄 말일세, 내가 예수의 부활에 대한 모든 자료들을 조사해 보니 복음서에 나타난 예수의 부활이 정말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네. 그동안의 연구 결과 예수님은 정말 죽었고 참으로 살아났다는 말일세. 나의 책은 오히려 부활을 증거하는 책이 될 것 같으네!” 이 말을 듣고 난 리틀톤이 이야기를 합니다.
“나도 자네와 똑같은 결론에 도달하여 은근히 고민을 하고 있었다네. 내가 바울에 대한 자료들을 전부 수집하여 연구하고 보니 사도행전에 나타난 바울의 회심과 그의 활동이 모두 사실임을 확실히 알게 되었단 말일세. 그래서 나는 바울의 회심과 그의 사도 직분만을 보아서도 그리스도교의 진리는 참되다는 내용의 책을 쓰기로 했다네!”
결국 이들은 기독교 신앙으로 돌아왔으며 믿음으로 큰 일을 한 신앙의 위인이 되었던 것입니다. 반대자가 돌변하여 진리의 증인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도 우리가 진리안에 거하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진정한 복은 진리 안에 거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도 거룩한 전에 나아와 진리의 주님을 만나며, 주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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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사람의 가치는 그가 가지고 있는 관심의 종류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근육발달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외모적인 아름다움에 관심을 가지는 사람, 많은 소유에 관심을 가진 사람, 지식에 관심을 가진 사람, 자기하는 사업에만 관심을 가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인간은 총체적인 존재라서 부분적인 것에만 관심을 가진다고 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생각할 줄 아는 마음이 너를 생각하는 마음과 조화를 이루어야 합니다.
더욱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사가 촛점이 맞아야 합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어떤 권력을 소유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영혼의 상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내 영혼 상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간은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믿지 않는 사람들도 인간을 일컬어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합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서로 촛점이 맞아 스파크가 일어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내 욕심이 결코 하나님의 복을 가져올 수 없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1장 17절 말씀을 보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다 위로 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필요한 아름다운 선물들은 모두 다 위로 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없습니다. 위엣 것을 찾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엣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원리 입니다.
이제 우리의 관심을 보다 더 근본적인 것에 둡시다. 영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해 봅시다. 여기에 진정한 복이 있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도 거룩한 전에 나아와 주님을 만나며 영적인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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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옛날 구 소련에서 있었던 실화입니다. 철도국에서 일하는 한 직원이 냉장고가 달린 화차 속에 들어간 후에 실수로 인하여 문이 밖에서 잠겨버렸습니다. 아무리 빠져나갈려고 해도 나갈 수가 없습니다. 소리를 질러도 힘껏 두들겨 보아도 냉장고 안에 일어난 일을 아무도 알리가 없었습니다. 우연히 누가 지나가다 문을 열어보기 전에는 구원받을 아무런 희망이 없었던 것입니다. 그 사람은 기운이 빠지고 모든 희망을 버리고 자포자기한 상태에서 얼어죽기를 기다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드디어 그의 몸이 져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다가오는 죽음을 바라보며 그는 냉장고의 벽에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점점 몸이 차가와진다.. 그래도 기다리는 수밖에 없다...나는 점차로 몸이 얼어옴을 느낀다...나는 이제 몽롱해진다..아마도 이것이 나의 마지막일는지도 모른다...”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다른 직원들이 그 냉장고 화차의 문을 열었을 때 이미 그는 시체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그 냉장고는 오래 전부터 고장이 나 있었던 것이고 그 안에는 공기도 충분했고 실내 온도가 섭씨 13도 정도의 쌀쌀한 온도에 불과했다는 것입니다. 그를 죽게한 것은 공기가 부족한 것도 아니고 온도가 낮은 것도 아니었습니다. 그의 생각이 그를 죽게한 것입니다
파스칼은 일찌기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했습니다. 인간은 생각하는 존재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되는 것이 인간입니다.
잠언23장7절 말씀에 보면 “사람의 생각이 어떠하면 위인도 그러하다”고 했습니다. 즉 그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의 생각여하에 달려있다는 말씀입니다.
하나님이 쓰시는 사람은 긍정적인 사람, 창조적인 사람을 쓰십니다. 불가능 속에서도 가능성을 찾는 사람을 쓰십니다. 믿음의 반대 개념은 좌절하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오늘이 힘들고 어려워도 낙심만은 하지 맙시다.
빌릴보서4장14절에 “내게 능력 주시는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고 말씀했습니다.
예수님은 죽은자를 보고도 죽었다 말씀하지 않고 “잔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리스도 안에는 생명만 있습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도 거룩한 전에 나아와 주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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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기도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성경 말씀을 통하여 얻을 수 있는 선물 중에서 가장 귀한 것은 믿음과 영생입니다(요20:31). 믿음과 영생은 세상 어디에서도 얻을 수 없고, 무엇을 주고 살 수 없고, 누구에게서 얻을 수 없는 하나님의 특별한 축복인 것입니다.
영생의 확신, 구원의 확신이 없으면 감사가 없고 기쁨이 없고 만족함이 없게 됩니다. 신앙생활이 피곤하고 짜증스럽게 됩니다.
그러면, 영생이 무엇이기에 이렇게도 소중한 것입니까?
영생이란 영원한 생명을 말합니다. 그러나 영존 한다는 것과는 다릅니다. 지옥에도 영존은 있습니다. 그러나 영생은 없는 것입니다.
영생이란 하나님과 함께 영원히 산다는 것이요, 천국에서 영원토록 복락을 누리며 산다는 것입니다.
이 영생은 우리가 예수를 믿는 순간부터 새롭게 시작되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요한복음 5:24에 말씀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도 나 보내신 이를 믿는 자는 영생을 얻었고 심판에 이르지 아니하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었느니라”고 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영생을 얻은 사람임을 믿고 이 유한한 세상에 얽매여 살아서는 안될 것입니다.
한걸음 더 나아가 영생을 얻은 자로서의 확신을 가지고 그 증거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더 이상 세상에서 죄를 짓지 아니합니다. 요한일서 3:9 말씀에 “하나님께로서 난자마다 죄를 짓지 아니하나니 이는 하나님의 씨가 그 속에 거함이요 저도 범죄치 못하는 것은 하나님께로서 낫음이라”고 했습니다.
혹, 이 말씀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면 오히려 영생의 확신에 의심이 생길지도 모릅니다. “나는 죄를 많이 짓고 사니까 영생을 얻지 못한 것이 아닌가?”라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죄를 짓지 아니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죄를 짓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우리가 어쩌다 실수를 하는 것을 가지고 말씀하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도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실수도 하고 죄를 범할 수도 있습니다. 영생을 얻은 사람은 그 생명이 살았기 때문에 혹시 죄를 지었더라도 즉시 회개하고 용서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영생이 없는 사람은 죄를 지어도 화인 맞은 양심이 되어 회개할 마음을 갖지 못하는 것입니다. 회개할 수 있는 자는 영생을 얻었다는 증거가 될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도 거룩한 전에 나아와 영생의 주님을 만나며, 주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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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위해 담임목사는 기도하며, 몇자 적어 소식을 전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것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는 행동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되어가야 할’ 우리의 모습은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순종하는 모습, 말씀대로 사는 모습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순종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무조건적이지만 축복은 순종하는 만큼 받습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복받고 잘되는 길은 순종과 관계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금생과 내생에 모두 다 유익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내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생만큼 금생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위하여 자신을 말씀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청천벽력같은 하나님의 말씀앞에 무조건 순종함으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그 씨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크게 순종하니 하나님으로 부터 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에는 말이 필요없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이런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상15장 22절에서 불순종하는 사울왕을 향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거역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주일이 돌아오면 거룩한 전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약속된 축복을 누리시며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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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위해 담임목사는 기도하며, 몇자 적어 소식을 전합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 나름대로 어떠한 것에 관심을 가지고 살아 갑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에 촛점이 맞아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나를 향한 하나님의 관심은 내가 얼마나 잘 먹고 잘 사느냐? 얼마나 많이 배우고 어떤 권력을 소유했느냐가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 내 영혼의 상태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우리들도 내 영혼 상태에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인간은 육적인 존재가 아니라 영적인 존재입니다.
하나님의 축복과 은혜는 하나님의 관심과 나의 관심이 서로 촛점이 맞아 스파크가 일어날 때 주어지는 것입니다.
골로새서 3장 1절 이하의 말씀을 보면 위엣것을 찾으라, 위엣것을 생각하고 땅의 것을 생각하지 말라고 했습니다. 야고보서1장 17절 말씀에도 보면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다 위로 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 오나니”라고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필요한 아름다운 선물들은 모두 다 위로 부터 주시는 하나님의 축복입니다.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위엣 것을 찾고 구할 때, 하나님께서는 위엣 것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땅에서 필요한 모든 것들도 풍성하게 부어 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의 원리 입니다.
그러므로 이제 우리의 관심을 보다 더 근본적인 것, 영적인 것에 관심을 집중해야 합니다. 말씀 위에 세워진 신앙,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믿음인가를 점검하면서 하루 하루를 살아가십시다. 여기에 진정한 복이 있는 것입니다.
복된 주일에는 모든 가족들이 거룩한 전에 나아와 주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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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위해 담임목사는 기도하며, 몇자 적어 소식을 전합니다.
인간은 누구를 막론하고 죽기보다 살고자 합니다. 잃지 않고 얻을려고 합니다. 그러나 사는 방법에 있어서 인간과 하나님과 차이가 있습니다. 정반대의 방법을 가지고 있습니다.
즉, 세상에서는 살려고 발버둥쳐야 합니다. 돈을 모을려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아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방법은 역설적입니다. 상식을 초월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 10장39절에서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의 이 역설은 역설이 아니라 진리요 참된 삶의 길이요 영생을 얻는 방법입니다. 한 알의 밀알을 보십시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을 때 비로서 100배의 결실을 내는 것은 자연계의 삶의 진리입니다. 세상에는 나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사람들도 많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사람도 있고 자식을 위하여 목숨을 버리는 부모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이 보다 더 귀한 것은 “주님을 위한 죽음”이요 “주님을 위한 삶”입니다. 주님을 위하여 죽을 각오가 되어 있는 사람을 주님이 왜 책임져 주시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누가복음17장33절에서 “자기 목숨을 보존코자 하는 자는 잃을 것이요 잃는자는 살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주님의 말씀대로 따라가는 길은 평탄치가 않습니다. 이떤이에게는 주일을 잘 지키는 것이 어렵습니다. 눈앞에 있는 이익을 보고도 주일이니까 사업을 쉬어야 한다는 것은 세상적인 이치에 맞지를 않습니다. 또 어떤 이는 십일조를 드리는 것이 생활에 손해가 되는 것 같고 살아가기가 힘들것만 같아서 시작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을 따라가 보면 죽을 것 같으나 사는 길이 있으며, 잃는 것 같으나 얻는 길이 있으며, 손해보는 것 같으나 가득차고 넘치는 축복을 받게 될 것입니다.
진정한 삶은 주님을 위하여 나를 희생하고 헌신하는데 있습니다. 주님을 위한 “잃음”은 잃음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차고 넘치도록 주시는 축복이 될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는 거룩한 전에 나아와 주님께 영광 돌리므로 놀라운 은혜와 축복을 누리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
*****
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요나에게 임하였습니다. “큰 성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쳐라. 그 악독이 내게 상달되었음이니라”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으나 순종할 마음이 없었습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멀리 도망을 가고 있었습니다. 우리는 요나의 이러한 불순종의 모습을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방 원수의 나라에서 복음을 전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던 것입니다.
요나는 다시스로 도망을 가면 하나님 낮을 피할 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그냥 두시지 않고 그가 타고 가는 배가 큰 풍랑을 만나게 하였던 것입니다. 요나가 탄 배는 파선 직전에 있었습니다. 사공들은 배를 가볍게 하기 위하여 물건을 바다에 던졌습니다. 그런데 배 밑창에 보니 어떤 낮선 사람이 이 풍랑 중에 깊은 잠에 빠져 있는 것이었습니다.
선원이 잠을 깨웠습니다. 우리가 다 죽게 되었으니 일어나서 하나님께 기도하라고 소리를 칩니다. 자기 때문에 배에 탄 사람들이 모두 다 죽게 되었는데 요나가 지금 잠을 잔다는 것은 용서받지 못할 죄가 아닐 수 없습니다.
우리들도 때로는 요나와 같은 잠에 빠져 있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 우리가 깨어나야 할 잠은 어떤 것입니까?
첫째, 우리는 육신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이러한 육신의 안일과 편안함을 추구하는 유혹에서 이겨야 합니다. 육신의 잠을 줄여 가기를 힘쓰는 것은 복된 성도의 삶에서 참으로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양심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현대인들은 양심이 마비된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과거에는 죄로 여겨지던 일들이 오늘은 죄가 되지 않습니다. 과거에는 끔찍하던 사건이 오늘은 보통입니다. 작은 죄는 죄로 여기지를 않습니다. 무디어진 양심이 회복되어야 이 사회가 살 수 있고 소망이 있습니다.
셋째, 사명의 잠에서 깨어나야 합니다. 요나는 그의 사명을 잊었으며 잊으려고 했으며 회피했으며 핑계했습니다.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곳에 풍랑이 있으며 사명을 다하는 곳에 축복이 있습니다.
다시 생명을 얻은 요나는 니느웨로 가서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으며 니느웨는 뜻밖에 회개의 역사가 일어나기 시작하였던 것입니다
가정에서, 직장에서, 사회에서, 교회에서 우리에게 주어진 사명에 대하여 최선을 다해야 모두가 살 수 있습니다. 잊었던 사명이 있었다면 다시 일깨웁시다! 할렐루야!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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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믿음으로 사는 성도는 이 세상을 사랑할 수 없습니다. 우리가 세상을 사랑하면 안되는 이유는, 요한일서 2장 15-17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리라”고 했기 때문입니다. 세상도 사랑하고 하나님도 사랑할 수 있을 것 같은데 그것은 불가능한 것입니다.
예를들면 병 속에 물과 공기가 동시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물이 없으면 공기가 들어가고 물이 들어가면 그 만큼의 공기는 빠져나가는 것입니다. 신앙의 원리도 마찬가지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사랑할 수 없다.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길 수 없다”고 가르쳤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사랑하면 세상은 자연히 멀어지게 됩니다. 내가 세상을 사랑하면 하나님의 사랑은 내 속에 머무를 수가 없습니다.
둘째로, 16절 말씀을 보면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다 아버지께로 부터 온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이 세상의 것들은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자랑과 이생의 자랑들 입니다. 이런 것들은 모두 다 마귀가 가져온 미끼에 불과 합니다. 우리는 세상으로 부터 온 것을 취하는 자가 아니라 위로부터 온 신령한 것들을 취하며 살아야 할 것입니다.
세째로, 17절 말씀을 보면 이 세상도 그 정욕도 다 지나가 없어지는 헛된 것들이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할 가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이 세상 것들은 강물이 흘러가듯 새가 날아가듯 꽃이 시들듯... 한 순간에 다 지나가는 것들입니다. 이 세상에는 영원한 것들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고백과 같이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영광은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하나님의 말씀은 영원토록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사랑하지 말라”고 하는 말을 오해해서는 안됩니다. 세상을 도피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속세를 떠나라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는 세상을 떠나서 살 수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보내신 곳이 바로 이 타락한 세상으로 보내셨습니다. 그러나 방주가 물 위에 떠 있을 때 그 가치가 있듯이 이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물들지 않고 오히려 소금이 되고 빛이 되어 어두운 세상을 환하게 밝혀야 할 사명이 우리에게 있는 것입니다. 이런 큰 사명이 있기에 우리는 세상을 사랑하는 자가 되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는 복된 주일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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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염려하며, 담임목사는 늘 기도하고 있습니다.
여름철이 되면 비가 많이 오고, 태풍도 불어 닥칩니다. 태풍의 위력은 히로시마에 떨어진 원자탄의 수천 배에 달하는 힘을 가지고 있기에 태풍이 한번 불고 가면 많은 인명 피해와 재산 피해를 남기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태풍은 유익한 면도 있습니다. 태풍은 하나님께서 친히 만드신 대 자연을 청소하는 일입니다. 큰 바람과 많은 비를 동반하는 태풍이 불면 바다는 밑바닥부터 소용돌이쳐서 오염된 바다의 밑바닥을 완전히 뒤집어 엎어서 대 청소를 하며, 많은 비를 내리게 함으로 산과 강과 들에 펼쳐진 인간이 버린 수많은 쓰레기를 다 씻어 가 버리는 것입니다. 사람의 손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태풍이 대신하는 것입니다.
태풍 후의 하늘을 보십시오. 얼마나 맑은지 모릅니다. 태풍 후의 골짜기를 보십시오. 이전 보다 더 맑은 물이 흐릅니다. 우리가 자연을 많이 오염시키면 시킬수록 큰 태풍이 오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자연을 오염시킨 댓가로 받는 채찍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채찍만이 아니라 그 채찍 속에는 하나님의 축복이 함께 있음도 알 수 있습니다.
우리 인생에도 태풍이 불어올 때가 있습니다. 가난의 태풍, 질병의 태풍, 불화의 태풍, 갖가지 문제와 어려움이 우리 인생을 슬프게 만듭니다. 우리가 범한 죄의 대가로 받는 고난도 있고 애매히 받는 고난도 있습니다. 어떠한 형태의 고난과 환난이든지 그 공통점은 우리가 고통스럽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또 하나의 공통점은 그 고난 속에 하나님의 축복이 감추어져 있다는 것입니다. 환난은 어려움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 환난의 날을 믿음으로 잘 견디면 놀라운 하나님의 축복으로 변한다는 것입니다.
태풍이 온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그 태풍의 피해를 최소화하기 위하여 만반의 대비를 합니다. 유비무환이란 말이 있듯이 철저히 대비하면 그 피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와같이 우리는 어려움을 당할 때를 위하여 평소에 믿음으로 충만한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욥은 큰 시련을 당했습니다. 재산과 자녀가 하루 아침에 다 몰사 당하고 자기 자신마져 병들어 버렸습니다. 이런 엄청난 재난 속에서도 욥은 원망하지 않고 믿음으로 잘 이겨 결국은 처음보다 갑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욥에 환난 날에 믿음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평소에 그는 경건한 삶을 살았기 때문입니다.
돌아오는 주일에 온 가족이 성전에 나아와, 주 안에서 참된 안식을 누리시므로 언제나 믿음으로 승리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충만하시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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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렐루야!
주 안에서 승리하시며 평안하셨는지요.
지난 주간에도 여러가지 형편과 사정으로 인하여 참석치 못한 가정들을 위해 담임목사는 기도하며, 몇자 적어 소식을 전합니다.
믿음과 순종은 불가분리의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손바닥과 손등과 같은 것입니다. 수레의 두 바퀴와도 같은 것입니다. 바른 믿음은 가만히 앉아있는 것이 아니라 행동이 수반해야 합니다. 야고보서에는 행동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고 했습니다.
오늘날 ‘되어가야 할’ 우리의 모습은 행동하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입니다. 순종하는 모습, 말씀대로 사는 모습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구원은 믿음으로 받지만 축복은 순종으로 받습니다. 구원은 무조건적이지만 축복은 순종하는 만큼 받습니다.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길은 오직 믿음으로 됩니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복받고 잘되는 길은 순종과 관계있습니다. 믿음과 순종은 금생과 내생에 모두 다 유익한 것입니다. 크리스챤의 삶은 내생만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내생만큼 금생도 중요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순종하는 삶을 위하여 자신을 말씀 앞에 복종시키지 않으면 안되는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100세에 얻은 아들 이삭을 바치라는 청천벽력같은 하나님의 말씀앞에 무조건 순종함으로 “여호와이레”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복의 근원이 되었습니다.그 씨에서 메시야가 태어날 것을 약속받았습니다. 아브라함이 크게 순종하니 하나님으로 부터 큰 복을 받았던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순종에는 말이 필요없습니다. 조건이 없습니다. 이런 순종이 필요합니다. 사무엘상15장 22절에서 불순종하는 사울왕을 향하여 “순종이 제사보다 낫고 듣는것이 수양의 기름보다 낫고 거역은 우상숭배”라고 했습니다.
주일이 돌아오면 거룩한 전에 나아와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시므로, 약속된 축복을 누리시며 살아가는 믿음의 권속이 되시기 바랍니다.
여호와 샬롬!(하나님의 평강이 임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