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밤에 무섭게 비가 내렸다.
근래에 볼 수 없을 정도로 비소리가 요란했다.
그러나 오늘 아침에 스마트폰에 표기된 일기예보를 바라보니 흐린 후 점점 갠다고 되어 있었다.
미세 먼지도 없다고 되어 있었다.
그래서 아침식사를 마친 후 포이 동 사거리에 위치한 동원 산업 앞에서 양재천 변으로 내려갔다.
오늘은 양재천을 따라 반포대교까지 걸어보고 싶었기때문이다.
천변에 내려가니 사람들은 벌써부터 익숙하게 몸을 놀리며 운동에 전념하고 있었다.
하늘은 어제처럼 구름이 텅빈 하늘을 메우고 있었다.
그래서 인지 날씨가가 더욱 쓸쓸하고 스산하게 느껴졌다.
양재천은 하안 저변에 자전거 전용도로가 설치 되어 있고 양쪽 하안 중간에 산책로가 갖추어져 있다.
산책로는 봄부터 가을까지는 수목이 울창해서 마음의 평화를 얻을 수 있고 녹음이 울창해 언제나 신선하고 상쾌한 공기를 제공해주기도 한다.
그래서 발길을 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오늘은 정취가 예전같지 않았다.
전날에 뿌린 비때문에 낙엽이 산책로에 수북하게 쌓여 바람에 흩날리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아낌없이 볼거리를 제공했던 환상적인 가로수들이 차츰 색갈이 변색되어가더니 급기야는 나뭇잎이 유체에서 이탈해버렸다.
무게를 감내하지 못했기때문일까?
나무가지에 달라붙어서 바람에 발버둥치는 나뭇잎들도 피곤에 지친듯 삶의 끈을 노아 버리고 있었다.
자신의 화려했던 시절을 생각해볼 겨를도 없이 자연의 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나무들은 내년이라는 미래가 있다.
그래서인지 자신의 소생 들을 홀연히 던져버릴 수 있었던 것 같다.
나뭇잎을 밟으니 사각사각 소리가 났다.
그 소리의 여운이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상쾌했다.
그리고 향긋한 내음은 나를 행복하게했다.
때문에 양재천을 잊지못하고 오늘도 양재천 녹음사이를 헤매고 있다.
우주의 삼라만상은 우주의 법칙에 따라 변화하기 마련이다.
나뭇잎도 여기서 외에일 수 없었다.
그래서 나뭇잎들이 변화를 시도하고 있었는데 다음에는 더 화려하고 아름다운 모습으로 태어났으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러한 무렵이면 사람들은 신체리듬의 이상 현상을 느낀다.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신체의 이상신호를 느끼지 못했다.
몸이 자연에 동화되고 적응되어가는 증거인 것같았다.
이것은 그동안 운동을 꾸준히했던 탓일 것이다.
아무튼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채 양재천을 계속 걸었다.
스페인 “까미노 데 산티아고” 순례길을 완주하기 위하여 연습삼아 자주 걷는 길이다.
수녀가 묵언 수행을 하는 것처럼 입을 봉한 채 양재천을 걸었다.
양재천은 길이가 18.5 km다.
과천시 중앙동의 관악산 남동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서울 서초구∙강남구를 가로질러 탄 천으로 흐른다.
그러나 원래는 한강으로 흘렀다.
양재 천과 탄천의 물길이 조우한 것은 1970년대 초 수로변경공사때문이었다.
탄천은 과거에 숯과 같은 시커먼 물이 흘렀다.
그래서 “탄천”이라고 했다.
어느덧 탄 천에 다다랐다.
탄천은 우리말로 숯내라고 한다.
시커먼 목탄물이 흐르고 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 지금은 천지가 개벽된 듯싶었다.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기때문이다.
탄천은 성남시의 옛 지명인 탄리에서 유래되었다.
탄리는 지금의 성남시 태평동∙수진동∙신흥동 일대에 해당되는 곳으로 숯을 굽는 사람들이 옹기종기 모여서 살았던 자연 촌이다.
그래서 이곳을 “숯골 또는 탄리”라고 부르기시작한 것이다.
조선 경종 때 남이 장군의 6대손인 남영이 이곳에 살았다.
그의 호가 탄수인 것은 자신이 살았던 마을이 숯골 이었기때문이다.
탄천을 바라보니 맑은 물이 흐르고 있었다.
숯골에서 흘러내리는 시커먼 물은 볼 수 없었던 것이다.
탄천을 끼고 하류쪽으로 계속 걸었다.
전날 내렸던 비때문에 수량이 늘었을 것으로 생각했으나 평상시와 다름없었다.
그런데 잉어들이 수면으로 떠오르고 있었다.
산소를 흡입하기 위해서다.
한 마리도 아니고 떼를 지어 유영을 즐기고 있었다.
환상적이고 장관이었다.
양재천 수원이 탄천과 만나서 흐르다가 다시 한강과 합류했다.
탄 천이 한강과 만나는 지점은 오수를 여과시키기위한 시설이 설치 되어있었다.
오수때문에 역한 냄새가 났다.
그러나 환경청결을 위해서는 반드시 거쳐야하는 과정이다.
여과되어 한강으로 유입되는 물은 깨끗했다.
조선시대 세곡을 운송한 종착지는 한강이다.
그래서 한강 가장자리에 많은 창고를 지었다.
이것이 경 창이다.
지방 수령이 징수한 세곡은 일시 이 경 창에 저장해 두었다가 왕실과 정부기관에 납품했다.
그러나 지금은 개발에 밀려 그 흔적을 찾을 수 없었다.
당시만해도 운송수단이 발달하지 못했다.
우마차를 이용하곤했는데 이것은 한계가 있었다.
많은 양을 운송할 수 없었기때문이다.
그래서 선박을 이용할 수밖에 없었다.
이 선박을 조운 선이라 했다.
조운은 해운과 수운으로 나뉜다.
해운은 바다를 이용한 것이고 수운은 내륙 수로를 이용한 것이다.
조운 선이 한강에 입항 하면 서울 경제가 활기를 띄었다.
선상이 급히 이동하고 사선도 이에 뒤질 수 없었다.
조선시대 지방 수령은 지역 백성 들로부터 토지 세를 걷는다.
반드시 곡물과 같은 현물 이어야 했다.
현물은 운송이 불편했다.
그래서 바다나 내륙 수로를 이용한 것이다.
백성들이 세곡을 완납할때까지 수령은 창고에 임시 보관했다.
이것이 조 창이다.
따라서 조 창은 해안가나 내륙 수로주변에 건립해야했다.
세곡이 모두 수합 되면 조운 선에 실고 서울로 운송했다.
한강은 이러한 조운 선의 입항이 끊일 날이 없었다.
때문에 서울 한강은 해가지지 않았다.
조운 선이 한강에 입항 하면 세곡을 다시 경 창으로 운반했다.
경 창에 일시 보관해 두었던 세곡은 다시 우마차를 이용하여 왕실과 관청으로 운반되고 일부는 오일장으로 운송되었다.
일반인들에게 판매하기 위해서다.
강 남북을 오가며 세곡을 판매 하기란 쉬운일이 아니었다.
선박을 소유하고 있어야 했기때문이다.
따라서 부유한 상인 들만 가능했다.
이들이 경강 상인이다.
경강 상인외에도 규모가 작은 소상인도 있었다.
이들이 사상이다.
조운 선은 승무원으로 선장격인 사공과 선원이 있었다.
선원은 조운 선의 규모에 따라 인원이 각각 달랐다.
그러나 대부분 25명 안팎이었다.
조운 선이 목적지인 한강에 도착하면 사공과 선원은 하선한다.
오늘날 대부분 선원이 그렇듯 이들도 제일 먼져 찾았던 곳은 술집이다.
서울 도심에 내노라 하는 술집도 있었으나 선원들은 한적한 곳을 선호했다.
이것이 주막집이다.
주막집은 신분이 낮은 사람이라 할지라도 목청을 높이며 마음껏 떠들 수 있었다.
주막집은 서울시 한적한 곳이나 외딴 곳에 위치하고 있었다.
오늘날과는 비교할 수 없는 초라한 술집이다.
그래서 서민들이 자주 찾곤했다.
이곳 만이 가지고 있는 서민적 정서때문이다.
이곳에서 만큼은 상전에게 허리를 굽실거릴 필요가 없고 따뜻한 대화를 나눌 수 있었다.
선원들은 주막에 도착하기도 전에 술에 취한듯 덩실덩실 춤을춘다.
물론 육자베기도 빠질 수 없다.
주모가 손님들을 맞이한다.
주모의 눈빛이 예전과 다르다.
반반한 여자가 있다는 증거로 보였다.
선원들은 대포잔을 각자에게 돌리고 막걸리를 따라 벌컥벌컥 마셨다.
갑자기 안방에서 화사한 여자가 북을 가지고 나왔다.
덩실덩실 춤을 추기 시작하였다.
선원들도 일어나 어깨춤을 추었다.
이것은 조선사회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서민들의 풍경이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밤이 깊어갔다.
막걸리 한잔에 그동안 쌓였던 시름을 잊었다.
그러나 자꾸만 가족들이 생각나 눈가에 어른거렸다.
한 선원이 휘청거리는 몸을 가누고 일어나 가게로 향했다.
명태꿰미를 사서 봇짐에 얹었다.
늦었지만 이제야 사랑하는 가족에게 걸어갈 수 있었다.
정겨운 풍경이다.
그때의 풍경을 연상해보려고 했다.
그러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서울은 빌딩속에 파묻혀있었다.
그래서인지 인정이 메마르고 삭막하기 그지없었다.
한강을 따라 반포대교쪽으로 이동했다.
도로는 자전거 전용과 도보 전용도로로 엄격하게 구분되어있었다.
그러나 위험했다.
혹시라도 자전가 갑자기 달려들지 않을 까 해서다.
그래서 긴장을 노을 수 없었다.
한강의 산책로는 세계적이다.
그러나 자전거족의 일부는 규정된 교통법규를 비웃고 있었다.
자전거족의 의식수준을 의심스럽게하였다.
대부분 자전거 족들이 빠르게 질주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산책로를 자주 침범하고 있었다.
두려움이 엄습했다.
기왕에 걷기를 시작했으니 마무리를 해야했다.
멀리에 북한산 백운 대가 보였다.
한강 또한 강물이 잔잔하여 요트경기가진행되고 있었다.
뒤늦게나마 햇살의 포화가 폭발하기 시작했다.
이렇게 깔끔한 서울시의 풍경은 근래에 볼 수 없었다.
가을의 정취가 물씬 풍기고 있었기때문이다.
신선하고 상쾌한 바람이 얼굴을 스치고 지나갔다.
이미 15km를 통과하고 있어서 잠수교가 한눈에 보였다.
오늘은 잠수교까지 만 걷기로 했다.
지금까지 걸었던 거리를 계산해보니 17.17km를 완주한 것같다.
걸음은 22,114보였다.
설악산 대청 봉을 오른 것만큼이나 가슴이 뿌듯하고 성취 감을 느꼈다.
이것을 계기로 부산 해파랑길을 걷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