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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문홍의 아동문학 통신 / 110〕서평
무모한 질주에서 한 발 비켜서다
- 배유안의 장편소설〈스프링 벅〉
김 문 홍
(....... 전략)
낳았으되 소유하지 아니하고, 행하였으되 기대하지 아니하고,
길렀으되 마음대로 부리지 아니하니, 이를 일컬어 그윽한 덕이라 한다.
〈노자 도덕경 51장〉
목표 없이 질주하는 세상에 대한 연민의 시선
스테디셀러〈초정리 편지〉의 작가 배유안이 세 번째 장편소설〈스프링 벅〉(창비청소년문학 12, 2008. 10)을 세상에 내놓고, 부모들의 이기적 사랑에 내몰려 목표 없이 질주하는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아픈 연민의 눈길을 보내고 있다. 이 작품은 그들의 부모들을 그러한 상처와 고통으로 흔들리는 풍경 앞에 서게 함으로써 자신들의 얼룩진 내면을 응시하게 하는 반면교사의 역할을 톡톡히 해내고 있다.
이 책의 제목인 ‘스프링 벅’은 영혼을 저당 잡힌 채 대학입시라는 무한 경쟁의 원형 경기장에 내던져진 우리의 청소년들, 그리고 그들을 벼랑 끝으로 내모는 왜곡된 교육정책에 대한 시의 적절한 함축적 상징성을 드러내고 있다. 남아프리카 초원지대의 영양 스프링 벅. 그들 무리는 초원의 풀을 한 포기라도 더 먹겠다는 본질적 목표를 상실한 채, 앞선 무리는 뒤쳐지지 않으려 질주하고, 뒤쳐진 무리는 앞서기 위해 질주하면서 멈춤을 잃어버린다. 끝내는 가속도의 관성을 제어하지 못한 채 벼랑 끝 아득한 바다로 떨어져 본말전도의 생을 마감하게 되는 우둔한 영양 무리 스프링 벅.
이 작품에 나오는 주인공 동준의 형 성준이 바로 그런 슬픈 영양 스프링 벅에 다름 아니다. 그는 부모의 이기적 자존심과 출세지향의 대리만족에 놀아나는 슬픈 어릿광대이다. 결국 성준의 어머니는 의대생 과외교사 장근으로 하여금 대리 시험을 치르게 하는 극약 처방을 서슴지 않는다. 성준은 결국 벼랑 끝에 다다라서야 ‘타인의 삶’을 살고 있다는 자각을 하게 되고, 자신과 세상에 대한 부끄러움에 못 견디어 자살을 하게 된다. 부끄러움을 자각하게 된다는 것은 자신의 정체성과 삶의 본질적 속성에 대한 인식에 다름 아닐 것이다. 성준의 자살은 이러한 자기 인식인 동시에 이기적인 부모와 세상에 대한 모멸감으로서의 거부의 행위일지도 모른다. 결국 그의 죽음은 자본적 시장 원리에 휘둘린 이 땅의 교육에 대한 진혼곡에 다름 아닐 것이다.
그러나 이 책의 주인공 동준을 비롯한 몇몇 아이들은 우둔한 스프링 벅의 질주에서 한 발 비켜서는 현명한 선택을 하게 된다. 부모와의 불화로 가출하게 된 창제는 노인 복지관에서의 헌신적 봉사를 통해 자신의 목표를 비로소 발견하고 귀가한다. 동준의 커플인 예슬은 자신을 두고 떠난 친어머니에 대한 애증을 계모의 헌신적 사랑을 통해 씻어내고, 시를 쓰는 행위를 통해 스프링 벅의 무리에서 한 발 비켜서게 된다. 형을 잃은 동준 역시 연극 작업을 통해, 또한 주위 벗들과의 정서적 교류의 소통을 통해 상처와 고통을 치유해 나가면서 일찍부터 스프링 벅의 무리에서 비켜서는 행운을 누리게 된다.
작가는 이 작품을 통해 일그러진 풍경 속에서도 이 땅의 청소년들이 건강함과 생명력을 잃지 않고 있다는 믿음을 확신하고 있다. 시련과 장애를 극복해 가는 동준의 건강한 일상적 삶을 통해, 현실적 시련과 장애는 자신의 영혼을 담금질하는 성장통의 통과의례임을 인식시키고 있다. 이 땅의 청소년들에게 우둔한 스프링 벅의 무리에 휘둘림이 없이, 또 다른 곳에 있는 풀밭의 풀을 맛있게 음미하라는 은근한 충고도 잊지 않는다. 누구에게든지 자신만의 풀밭이 있다는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벼랑 끝 바다로 추락한 성준의 아픈 생의 여정을 조근조근한 어투로 속삭여 주고 있는 것이다.
청소년 소설의 미덕을 고루 갖춘 전범적 사례
이 소설은 청소년 소설의 전범적 사례를 고루 갖추고 있다. 작가의 중 고등학교 교사로서의 체험이 작품 곳곳에 포진하고 있는데, 고등학교 또래 아이들에 대한 적확한 심리 묘사와 행동 특성에 대한 접근을 그 첫 번째 미덕으로 꼽을 수 있다. 이 작품은 1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진행되고 있지만, 이러한 시점이 갖는 주관적 묘사에 함몰됨이 없이 작품 속에 나오는 각각의 인물들을 객관적으로 조망하고 있다.
①
나에게 보내는 엄마의 안타까운 절규다. 그러나 나는 후횟거리인지 아닌지 확인하려고 노는 게 아니다. 게다가 엄마 눈엔 노는 거겠지만 나에겐 생명력 충전이고 우정 쌓기이고 사회생활인 거다. 공부야 스물네 시간 내내 안 한다 뿐이지 할 만큼은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 ‘할 만큼’의 기준이 엄마와 나 사이에 너무 차이가 날 뿐이다. 엄마와 형 사이에는 별로 안 나는 것 같지만. (p. 17.)
②
나는 교복을 입은 채 비 오는 운동장에 섰다. 옷이 다 젖었다 싶을 때,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빗줄기가 사정없이 얼굴을 때렸다. 한바퀴를 돌아오니 현우가 기다리고 있다가 옆에 붙어 달리기 시작했다. 철퍽철퍽, 운동화가 물을 차냈다. 우리는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며 말없이 뛰었다. 와와! 함성이 들렸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환호하고 있었다. 이 교실 저 교실에서 창문이 열렸다. 우리는 계속 달렸다. 헉헉, 숨은 찼지만 속은 후련했다. 흘깃 보니 현우는 표정 없이 앞만 보며 뛰고 있었다. 자연스레 둘의 다리가 박자를 맞추고 있었다. 이미 흠뻑 젖었다는 생각에 한껏 자유로워졌다. 머리는 말갛게 비워지고 그저 젖은 발소리만 들렸다. (p.107.)
위 인용문 ①은 엄마의 닦달질에 대한 주인공 동준의 가벼운 항의성 반항의 심리를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동준의 이러한 항의성 내적 독백은 엄마로 상징되는 성인들의 엄숙주의 사고방식에 대한 직격탄이나 다름없다. 진지한 거부의 몸짓이 아니라 유머가 스며든 항의의 의사 표시이다. ‘할 만큼’의 기준에 대한 엄마와 동준의 입장 차이가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바른 자세와 진지한 태도만이 그 내용을 결정한다는 유교적 엄숙주의와 자신만의 신체 리듬과 자유로운 행동을 통해서도 학습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감각적 패턴의 유머러스한 대비 묘사가 웃음을 자아내게 한다. 주어와 술어의 정형화된 문장 패턴으로서의 고전적인 서술 방식보다는, 주인공 동준의 내성적 독백 형식으로서의 대화체 서술이 읽는 이에게 친근감을 주고 있다. 이러한 내성적 독백체 형식의 묘사와 서술 방식은 사건과 장면 전개에 유연함을 제공해 가독성에 리듬감을 부여해 주고 있다. 이 작품이 묵직하고 진중한 주제를 다루고 있으면서도 읽는 이에게 심리적 부담감을 주지 않는 근본적 이유는 바로 이러한 대화체 형식의 내성적 독백의 서술 때문이다.
인용문 ②는 지학 선생에게 ‘이제 수업 좀 합시다.’라는 항의성 불평으로 체벌을 당한 현우의 울적한 심사를 달래주기 위해 주인공 동준이 비 오는 교정을 현우와 함께 달리는 장면이다. 이러한 그들의 우중 달리기는 이중적 함의를 지니고 있는데, 하나는 뒤틀린 현실 속에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자신들의 어정쩡한 태도에 대한 자기 학대이며, 다른 하나는 미숙한 어른들에 대한 항의 표시로서의 무언의 거부의 몸짓이다. 유교적 엄숙주의에 젖어 있는 성인사회의 갑갑함 속에서, 거부하지도 못하고 순응해야 하는 자신들에 대한 혐오감과 성인들의 미숙함에 대한 안쓰러운 감정이 뒤섞인 돌출 행동일 것이다. 이러한 우중 해프닝은 감수성이 예민한 청소년들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행동 특성이다. 작가는 어느 쪽이 옳고 그른 것인가에 대한 가치 판단은 유보한 채 독자로 하여금 이러한 행위의 근저에 있는 심층적 의미를 파악할 수 있게 모든 것을 열어놓는 태도를 취하고 있다.
두 번째는 인물의 내면적 정황에 걸맞은 심리 묘사의 탁월함이다. 작가가 작품 속에 얼굴을 들이밀고 인물의 심리적 정황을 묘사하는 태도를 지양하고, 그 인물 자체가 자신의 정황과 심리적 풍경을 어떤 대상에 이입하는 내성적 묘사로 일관하고 있어 읽는 이의 가슴을 저리게 하고 있다.
①
창제는 어디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이들이 가방을 쌓아둔 책상 위로 햇살이 내리꽂혔다. 빛줄기 안에서 먼지가 둥둥 떠다니고 있었다. 마치 이 교실에서 거기만 먼지가 날고 있는 듯, 아니 먼지가 모두 빛을 찾아와 그 안에서 춤추고 있는 것 같다......고 생각하는데 귀가 찢어졌다. (p. 12.)
②
엄마의 움직임이 딱 멈췄다. 수도꼭지에서 물이 철철 흘렀다. 나는 엄마가 뭐라고 해주길 기다렸다. 그 시간이 얼마나 잔인한지 옆으로 보이는 엄마 얼굴이 하얘지고 입술이 바르르 떨리는 걸로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엄마는 발을 질질 끌며 소파로 가서 쓰러지듯 앉았다. 나는 수도를 잠그고 엄마를 돌아보았다. 이런 침착함이라니, 나는 나 자신에게 진저리를 쳤다.
“부끄럽고 괴롭대.” (p. 133.)
위 인용문 ①은 연극부 ‘제1막 1장’의 책읽기 연습 과정에서 동준이 엄마와의 불화로 가출을 단행한 같은 연극부원 창제를 생각하는 장면이다. 창제가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을까에 대한 염려와 걱정으로서의 정신의 멍한 상태를 가방에 내리꽂히는 햇살 속의 먼지의 유영을 통해 상징화하고 있는 대목이다. 햇살은 모든 일상적 풍경이 뒤로 물러난 적요의 침묵이고, 햇살 속의 먼지의 흩날림은 그러한 침묵 속에 잠겨드는 창제에 대한 동준의 간절한 그리움과 외로움을 상징하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주위의 어떤 대상과 일상의 미세한 현상에 대한 정밀한 묘사를 통해 인물의 내면적 심리적 충경을 그것에 이입시키는 묘사를 즐겨 사용하고 있다.
인용문 ②는 동준이 장근이 형을 만나 듣고 온 형의 죽음에 관한 이야기를 심리적 공황 상태에 다다라 넋을 놓고 있는 엄마에게 하려는 순간의 긴장된 분위기를 묘사하고 있는 대목이다. 물이 ‘철철’ 흐르는 소리도 듣지 못한 채 맥을 놓아버린 엄마의 절망감, 어떤 위로의 말도 하지 못한 채 엄마의 옆얼굴을 지켜보아야 하는 데에서 오는 시간의 잔인함, 그런 중에서도 수도꼭지를 잠그는 엄마의 현실적 행동에 대한 몸서리, 그리고 형의 죽음이 자살이었다는 것을 밝혀야 한다는 어떤 의무감 등이 읽는 이에게 서스펜스에 가까운 묘한 긴장감을 형성해 주고 있다.
이처럼 작가는 인물의 내면적 심리 상황을 일상적인 풍경에 이입시켜 잔인할 만큼 차갑게 묘사하여 인물의 고양된 감정을 극대화시키고 있다. 이러한 묘사 역시 작가의 시점을 지양하고 인물의 시점으로 밀착시켜 묘사하고 있는데, 이는 작품을 읽는 독자가 작품 속의 인물과 동일시되는 착각을 불러일으키는 효과로 작용하고 있다.
물 흐르듯 조근조근한 어조로 슬픔을 이야기하다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은 물 흐르듯 조근조근 속삭이는 독특한 문체의 힘이다. ‘문체는 곧 그 사람이다.’라는 말처럼 이 작가에게서는 자신만의 체화된 독창적인 문체의 유려함이 느껴지고 있다. 1인칭 주인공시점이되 관찰자적인 시점으로서의 각 인물들에 대한 조망과 인물의 몸과 마음에 밀착된 내성적 독백으로서의 대화체 형식의 서술 문장이 사건과 장면 전개에 묘한 리듬감을 부여하고 있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작가는 무겁고 진중한 주제의 이야기를 무거운 톤으로 들려주지 않고, 물 흐르듯 조근조근한 어조로 슬픔을 이야기하고 있다. 즉, 슬픔을 주관화하지 않고 객관화하여 들려주고 있기 때문에 더 큰 감동을 주고 있는 것이다. 이 작가에게 있어서 문체란 억지로 꾸며 쓴 듯한 작위적인 요소가 아니라, 몸에 착 달라붙어 행동이 가뿐한 옷차림처럼 리드미컬한 유려함이 느껴진다.
섣부른 해결 방안을 제시하지 않고 있는 것도 이 작품의 큰 미덕이다. 주인공 동준을 비롯한 각 인물들의 방황은 성장통으로서의 하나의 통과의례란 것을 넌지시 이야기하고 있다.
우리는 모두 너무, 너무 아파서 지금은 이 상처를 건드리지 못하고 덮어들 수밖에 없다. 그러나 사는 동안 상처는 깊숙한 곳에 파묻혀 있다가 틈만 나면 올라와 나도, 엄마도, 아빠도 신열을 내며 쓰리도록 울게 할 것이다. 언젠가는 엄마의 이 지독한 통증도 조금은 가라앉겠지. 나도 조금은 더 성숙해 있겠지. 그때는 지금 덮어둔 이 깊고 깊은 상처를 보듬어서 다독일 수 있을까? 그리고 아프지 않고도 형을 생각할 수 있을까? 아, 형, 나의 형! (p.213.)
위 인용문은 이 작품의 마지막 대목이다. 주인공 동준에게 다가오는 이러한 시련과 고통은 그들을 불행에 빠트리는 현실적인 장애가 아니라, 참다운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에서 만나는 하나의 신열 같은 것이므로 시간의 법칙에 맡기는 수밖에 없다는 낙관적인 운명론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즉, 성장과정으로서의 통과의례는 어느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인생의 한 과정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평자는 이 작품을 숙독하면서 두어 차례 눈시울을 훔치는 아릿한 순간을 마주했다. 그러한 비극적 카타르시스를 통해 우리 시대의 아픈 풍경을 마주해야 하는 서글픈 현실에 눈시울을 훔쳤고, 그러한 통한의 아픔을 흥분하지 않고 조근조근 물 흐르는 듯한 어조로 이야기하는 작가의 놀라운 장인적 솜씨에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작품에서 연극부 ‘제1막 1장’이 공연하려고 하는 희곡 텍스트인 ‘스프링 벅’은 작품의 구성에서 대단히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극중 인물인 ‘미키’의 지난한 여정과 그 배역을 맡은 동준의 통과의례는 서로 병치되어 묘한 극적 긴장감을 형성해야 한다. 그러나 희곡 텍스트의 주제가 너무 드러나 있을 뿐 아니라 극적 내용 역시 평범한 수준에 그쳐, 동준의 성장통으로서의 상처와 아픔이 강렬한 효과를 이루어내지 못하고 있다. 보다 더 동준의 아픔과 고통에 적합한 극적 긴장이 뚜렷한 희곡 텍스트였어야 할 것이다. 또한, 연극 공연을 만들어 가는 연습 과정이 구체화, 전문화되지 못해 그저 사건을 전개하기 위한 단순한 요소로 등장하고 있다는 작위성이 짙게 느껴지고 있다. 또한 성준이 대신 의대생 장근이 형이 수능시험을 대신했다는 것은 어딘가 미심쩍어 보인다.
배유안의 청소년 소설〈스프링 벅〉은 왜곡된 교육정책 때문에 영혼을 저당 잡힌 채 경쟁에 내몰려야 하는 ‘지금 이곳’의 청소년들에게는 자신들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는 연민의 시선에 큰 공감을 줄 것이며, 또한 부모와 어른들에게는 자신들의 이기적 자존심이 야기하는 비감함이라는 내적 성찰의 아픔에 직면하게 되는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