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발굴은 2005년부터 3차례 이어졌다. 지하 2m 지점. 수천 점 나무막대기와 돌무더기, 일본 창이 발견됐다. 나무막대기는 적을 방어하려고 성 주위에 꽂았던 끝이 뾰족한 나무 울타리용이었다. 원형 그대로 녹슨 무기들도 쏟아졌다. 조선전기 철갑 비늘갑옷과 엄지손가락에 끼우는 활깍지가 한국 최초로 발굴되었다. 동래진(東萊鎭)이라 새긴 투구도 나왔다. 토기와 백자, 분청사기 파편 등 생활용품도 나왔다. 뜻밖의 지점에서 뜻밖에 얻은 유물이었기에 발굴의 기쁨은 컸다. 그러나 기쁨은 잠시였다. 곧 이어 쏟아져 나온 인골과 인골에 난 섬뜩한 상흔은 발굴 관계자 표정을 어둡게 했다. 이들 유골은 과연 무엇인가. 왜 여기 있는가. 상흔은 섬뜩했다. 발굴된 인골은 100여 구. 인골에 난 상흔은 대부분 두개골에 집중된다. 두개골은 예리하게 잘렸거나 구멍이 났거나 함몰됐다. 아예 훼손된 것도 적지 않았다. 칼이나 총, 활, 둔기가 무기로 쓰였다. 꿇어앉은 상태에서 세 번의 칼질을 받아 얼굴이 잘린 20대 여성 두개골, 뒤쪽에 총알구멍이 난 30대 여성 두개골, 두 번에 걸쳐 목을 베여 잘린 두개골, 도끼나 쇠뭉치에 맞아 함몰된 두개골, 뒤에서 총 맞아 구멍이 난 5세 미만 어린이 두개골…. 목불인견이었다. 눈 뜨고 보지 못했다. 왜군의 도륙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았다. 전투원 비전투원을 가리지 않았다. 저항할 수 없는 상태의 민간인까지 여러 번 난도질하고 여러 번 타격해 천인공노 도륙을 자행했다. 그걸 즐겼다. 동래교차로 유골 유물이 발굴된 자리는 동래읍성 해자(垓子)가 있던 곳. 해자는 적의 공격을 막으려고 성 주위에 판 도랑이다. 도랑에 물을 채워 적의 공격을 둔화시켰다. 동래읍성 해자는 성벽에서 30m 정도 떨어져 팠으며 폭 2m, 높이 1.7~2.5m다. 동래성을 점령한 왜군은 '조공유사기' 기록에 나오는 가득 쌓인 시신을 해자에 내던지고 흙으로 덮었다. 암장은 망자에 대한 예의라서가 아니라 피비린내와 역병 창궐이 두려웠기 때문이다. 음력 4월은 양력 6월 맹하(孟夏)에 해당돼 전염병 우려가 컸다.
1592년 임진년 4월 15일 왜군에 동래읍성 함몰
격렬히 맞섰던 선비의 고장, 한나절만에 초토화
2005년 도시철도 수안역 공사서 유골 무더기 발굴
남녀노소 인골에 난 상흔들 참혹했던 만행 증언
그 자리 역사관 지어 핏빛 전투 현장 또렷이 기록 동래는 고시(古詩)다. 오래된 한시(漢詩)다. 누각마다 석벽마다 고색창연한 한시가 꿈틀댄다. 서기 757년 지명을 얻은 동래의 역사는 조선 도읍지 500년 한양보다 역사가 훨씬 길다. 복천동 고분군은 역사에 등장하기 이전부터 동래가 역사의 중심이었음을 웅변한다. 당연히 한시 소재가 된 것도 동래가 한양보다 먼저였다. 정과정곡을 쓴 동래정씨 정서, 동국이상국집을 쓴 이규보를 비롯해 조선시대 이전 숱한 시인묵객이 동래를 읊었다. 1592년 용사의 난이 일어나지 않았다면, 용사의 난으로 목조건물과 서책이 화를 입지 않았다면 지금 남은 한시보다 훨씬 많은 양의 한시가 누각마다 석벽마다 꿈틀대며 동래를 선비의 고장, 풍류의 고장, 충절의 고장으로 묘사했으리라.
용사의 난은 임진왜란의 다른 표현이다. 당시에는 임진왜란과 함께 일반적으로 쓰이던 용어였다. 용사지변으로 불리기도 했다. 다대포 윤공단 시비, 1740년 발간 동래부지 서문에 언급된다. 난중일기처럼 용사일기, 용사일록이 전해진다. 왜란 7년 가운데 가장 전쟁이 격렬했던 해는 1592년 첫 해 임진년과 다음해 계사년. 임진년이 용띠 해고 계사년이 뱀띠 해라서 용사(龍蛇)의 난이라 부른다. 피해가 가장 막심했던 때가 첫 두 해다. 움직이는 것은 죽이거나 납치했다. 섬나라로 가져갈 수 있는 것은 약탈했고 가져갈 수 없는 것은 불태웠다.
피해가 막심했던 첫 두 해, 가장 피해를 본 곳이 동래였다. 부산이었다. 부산의 목조건물은 모조리 불태워졌다. 현재 부산에 남은 목조 고건물은 임란 이후 것이다. 피해가 극심했던 이유는 저항이 격렬했기 때문이다. 부산진성과 다대포성, 그리고 동래읍성 민관군 남녀노소는 중과부적으로 왜군에 맞섰다. 군은 칼과 창과 활로, 이민(吏民)은 괭이와 몽둥이로, 아녀자는 지붕에 올라가 기왓장으로 맞섰다. 맞섰던 자는 모두 죽었다. 거의 모두가 맞섰으므로 거의 모두가 죽었다. 죽은 자를 제사지낼 사람마저 죽어 선비의 고장, 풍류의 고장, 충절의 고장은 초토가 되었다.
1592년 임진년 4월 15일. 통한의 날이었다. 동래읍성 전투는 4월 15일 하루 한나절로 끝났지만 한국판 킬링필드라 불릴 만큼 참혹했다. 진저리났다. 왜군은 백년 내전을 치른 백전노장에다 신무기 조총까지 갖추었다. 수적으로도 열세였다. 동래는 군인과 성민을 다 합쳐 평소 3500 명이 거주한 반면 소서행장이 이끄는 왜군 정예군은 1만8700 명이었다. 속수무책이었다. 왜군과 함께 참전했던 포르투갈 선교사 프로이스는 조선군 전사자 5000 명, 일본군 전사자 100 명으로 기록한다.
5000 명이 전부 군인은 아니었을 터. 민간인은 더 많았을 것이고 그 중에는 전쟁이 터지자 성 바깥에서 성 안으로 피신해 온 민간인도 적지 않았을 것이다. 1740년 발간 동래부지를 보면 부산 전체 가구는 5641호였고 인구는 남녀 합쳐 2만1475명이었다. 한 가구당 4명이 되지 않았다. 삼사대가 함께 사는 대가족 생활방식임에도 가구당 인구는 3.8명밖에 되지 않았다. 전쟁 끝난 지 150년이지만 인구가 그것밖에 안 된다는 건 전쟁으로 인한 부산지역 인명피해가 그만큼 극심했음을 방증한다.
당시 참상 기록물은 숱하다. 왜측 기록인 요시노일기(吉野日記)는 '여자를 비롯하여 아이들과 개, 고양이 할 것 없이 피를 흘릴 수 있는 것은 모두 살해하였다'고 떠벌린다. 동래부사 민정중(1628~1692)이 쓴 '임진동래유사'(1668년 간행)는 '성은 협소하고 사람은 많은데 적병 수만이 일시에 성으로 들어오니 성중은 메워져 움직일 수 없었다'고 기록한다. '조 군수 아들 정노가 부친의 유해를 찾으려 동래성에 가니 시신이 가득 쌓여 부친의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는 기록은 동래부사 송상현과 함께 순절한 양사군수 조영규를 기리는 '조공유사기(趙公遺事記)'에 나온다. 동래읍성 참상을 가장 적나라하게 표현한 기록은 이안눌(1571~1637)이 동래부사로 재직(1608· 2~1609·7)하면서 쓴 한시 '동래맹하유감(東萊孟夏有感)'이다. 충렬사지(忠烈祠誌)는 '임진맹하유감'으로 표기한다. 다소 길지만 전문을 인용한다. 왜란이 끝나고 10년. 당시 동래 정황이 손금 보듯 생생하다. 원문은 동래문화원 발간 국역 동래부지 '제영잡저' 95쪽 참조.
4월 15일 새벽 집집마다 곡을 하니
천지가 온통 쓸쓸하게 변하고 스산한 바람이 숲을 뒤흔든다.
놀라고 기괴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었지
"통곡 소리 어찌 이리 참혹한가?"
"임진년 왜구가 이르러 이 날 성 안이 함몰되었지요.
다만 이때 송 사또만 있어서 성벽을 굳게 닫고 충절을 지키니
경내 사람들이 성 안으로 몰려들어 동시에 피바다를 이루었지요.
쌓인 주검에 몸을 던졌으니 천 명 중에 한두 명만 살아났지요.
이 때문에 이 날에는 술잔을 바치고 죽은 자를 곡한다오.
아버지가 자식 위해 곡하고 자식이 아버지를 위해 곡하고
할아비가 손자 위해 곡하고 손자가 할아비를 위해 곡하고
또 어미는 딸 때문에 곡하고 또 딸은 어미 때문에 곡하고
또 아낙네는 남편 때문에 곡하고 또 남편은 아내 때문에 곡하고
형제와 자매까지 산 자는 모두 곡을 한다오."
찡그린 채 차마 다 듣지 못하는데 눈물이 문득 뺨에 가득하네.
아전이 앞에 나와 다시 말하기를
"곡할 이 있으면 그래도 슬프지 않지요.
얼마나 많은데요, 퍼런 칼날 아래
온 가족이 다 죽어 곡할 이조차 없는 사람이."
/이안눌 시 '동래맹하유감' 킬링필드였다. 피바다였다. 그럼에도 핏자국은 서서히 옅어졌다. 곡할 이조차 없이 온 가족이 다 죽었던 1592년 임진년 4월 15일 그 날의 참상은 세월이 지나면서 영영 묻히는가 싶었다.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조직적인 은폐작업마저 벌어졌다. 60년 한 주갑이 지나고 두 주갑 세 주갑이 지나고 다섯 여섯 주갑이 지나도록 실상은 좀체 드러나지 않았다. 1731년 동래부사 정언섭이 동래읍성을 보수하면서 격전지 남문터에서 유골과 유물을 발굴했지만 소규모였다. 그렇지만 통한의 세월은 결코 묻히지 않았다. 묻힐 수가 없었다.
그 날의 진상이 마침내 만천하 드러났다. 4월 15일 그 날의 참상이 백일하 드러났다. 임란이 일어난 지 7주갑, 420년이 다 돼 가는 2005년 6월 도시철도 4호선 수안역 공사현장은 일순 긴장감이 돌았다. 동래교차로 지하를 파내려 가던 인부들에게 몇 백 년은 돼 보이는 유물이 무더기로 발굴되었다. 학계와 관계기관이 즉각 조사에 나섰다. 유골도 무더기로 출토되었다. 관계자들은 처음엔 몰랐다. 유골과 유물이 왜 거기 묻혔는지. 유골과 유물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조사는 2008년까지 꼼꼼하게 이어졌다. 부산교통공사는 진실규명을 위해 수안역 개통을 3년 미루었다. 조사 결과는 경천동지 세상을 놀라게 했다. 유골과 유물은 임진왜란 동래읍성 전투에서 희생된 군인과 양민의 그것이었다. 역사의 진실이 밝혀지기를 바라며 400년 통한의 세월을 견뎌 낸 옛 부산사람 유골과 유물이었다. 무방비 아낙과 어린아이 인골에 남은 섬뜩한 칼자국은 왜군의 만행을 오늘 여기에서 벌어진 일인 듯 또렷하게 증언한다
"저기 선이 둘 보이지요? 선과 선 사이가 해자 자리입니다." 수안역에는 전국 도시철도 유일하게 전시관이 들어서 있다.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사관이다. 유골 유물이 발굴된 자리에 그것들을 전시하는 역사관을 지어 동래읍성 전투 참상과 400 년 전 부산에서 살았던 선조들 분기탱천을 두고두고 기억하고자 함이다. 역사관 입구 바닥에는 5m 간격 평행선이 보인다. 역사관 안내와 해설을 담당하는 동래구 문화재사랑봉사단 박기환 선생은 평행선 안이 해자였다고 귀띔한다. 그러니까 역사관은 동래읍성 참상의 현장이다.
임란 당시 동래읍성 길이는 1.2km. 해자도 제법 길었을 것이다. 하지만 서기 2000년 도로를 걷어 내지 못해 건물을 허물지 못해 발굴된 해자는 겨우 50m에 불과하다. 발굴된 유골 또한 고작 100여 구에 불과하다. 동래를 걸을 땐 그래서 늘 발뒤꿈치를 들어야 한다. 발꿈치 아래 우리들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가 묻혀 있음을 상기하며 걸어야 하고 내 나라 내 강토 내 후손들을 위해 한 목숨 기꺼이 바친 우리들 아버지의 아버지의 아버지가 묻혀 있음을 상기하며 걸어야 한다.
임진동래의총도 발꿈치 들고 찾아가야 할 성소다. 금강공원에 있다. 앞서 언급했듯 동래읍성을 보수할 때 발굴된 순사자들을 모신 합장 무덤이다. 동래부사 정언섭은 형골이 완연한 시신 12구와 무수한 유골을 거두어 베와 종이로 싼 후 상자에 넣어 현재 내성중 인근 야산 구릉지에 6총으로 모시고 비석 '임진전망유해지총(壬辰戰亡遺骸之塚)'을 세웠다. '오호차육총(嗚呼此六塚)'으로 시작하는 비석 뒷면 묘갈명은 정 부사가 썼다. 1788년 이경일이 동래부사로 있을 때 샘을 파다가 유골이 또 발굴되었다. 이를 거두어 모시면서 7총이 되었다. 일제강점기 도시근대화를 명분으로 7총 자리에 도로가 났다. 민족정기 말살 의도가 다분한 도로 내기였다. 총은 헐리고 유해는 복천동 영보단 부근으로 옮겨져 작고 초라하게 합분됐다. 현재 자리로는 1974년 옮겼다.
수안역에서 의총까지는 한 시간 남짓. 가는 길에 도시철도 동래역 2번 출구 맞은편 삼거리 모서리 서천교터에서 사진 한 컷! 조선시대 동래읍에서 구포로 가려면 온천천을 건너야 했다.
동래와 구포를 잇는 유일한 온천천 다리가 서천교였다. 롯데백화점, 유락여중, 부산전자공고, 이주홍문학관, 온천교회, 부산학부모지원센터, 고려오층석탑, 수가화랑, 금강공원 이영도·최계락 시비, 차나무단지, 부산민족예술보존협회, 부산해양자연사박물관 등이 의총 가는 길 이정표다.
동길산 시인
※ 공동기획: 부산동래구청, 국제신문, (사)부산스토리텔링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