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지간
육도(六道)에서 지금까지 지옥과 천상을 다녀보았다.
그렇다면 그 중간인 아귀(餓鬼) 축생(畜生) 아수라(阿修羅) 인간(人間)은
어떻게 되는 것인가.
당연히 궁금할 것이다.
바로 지옥과 천상의 중간계를 보통 천지간(天地間)이라고 부른다.
천지간코스의 무대는 지름만도 1203만 4500킬로미터에 이른다.
모양은 거대한 원반형태다. 그 원반위에 수미산을 비롯, 아홉산맥이 자리잡고 있다.
아울러 여덟 바다와 네 대륙이 얹혀 있다.
천초
단청 기법의 하나로 출초한 초지 밑에 융 또는 담요를 반듯하게 깔고
그려진 초의 윤곽과 선을 따라 바늘과 같은 것으로 미세한 구멍을 뚫어
침공을 만드는 것을 천초 또는 초 뚫기라 하고
초 구멍을 낸 것을 초지 본이라 한다.
천태종(天台宗)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은 대한민국에서 활동하는 교단(敎團)이다.
현재(2015) 종정은 김도용 대종사이며
역대 종정에는 1대 상월원각대조사, 2대 남대충 대종사 이다.
종립대학인 금강대학교를 운영한다. 교단(敎團) 대한불교천태종(大韓佛敎天台宗)은
1967년 1월 24일 충청북도 단양군 영춘면 백자리 118 소재 구인사(救仁寺)에서
박상월(朴上月)이 중창하였고 법화사상계에 속한다.
석가모니불을 본존(本尊)으로 하고 천태대사 지의를 종조(宗祖)로,
대각국사 의천을 개창조로, 《법화경》을 소의경전(所依經典)으로 삼는다.
대승불교의 한 종파로 인도의 용수(龍樹)에게서 발원되었다고 한다.
천태종은 이명(異名)도 아주 많다.
일명 태종(台宗) 태가(台家) 산가(山家) 법화원종(法華圓宗)
천태원종(天台圓宗) 천태법화원종(天台法華圓宗)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천태(天台)란 이름은 천태종의 중흥조라 할 수 있는 지의(智?)가
태주(台州) 천태산(天台山)에서 도를 폈기 때문이다.
천태법화종은 천태종이 법화경을 근본경전으로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원종(圓宗)이란 말이 들어 간 것은
법화경이 원만한 가르침을 전해준다고 해서 이다.
천태종은 용수를 이어 북제의 혜문(慧文),
혜사(慧思)를 개조와 2조로 하고 있다.
이것이 수나라 지의(智?)에 이르러 천태종으로 창종된다.
천태종은 선정(禪定)과 지혜의 조화를 종지로 삼고 있다.
아울러 천태교학의 특색은 실상론(實相論)이다.
이것은 법화경의 제법실상(諸法實相)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다.
이에 따라 실상의 진리를 나타내는 공(空) 가(假) 중(中) 삼제원융(三諦圓融)을 강조한다.
천태대사 지의(智?)는 천태삼대부(天台三大部)인
법화문구(法華文句) 법화현의(法華玄義) 마하지관(摩訶止觀)을 펴냈다.
한때 쇠락했으나 고려의 승려 체관(諦觀)이 뒤를 이어 크게 일으켰다.
963년 체관이 천태교학 관련서를 송나라에 가져가 다시 천태종의 붐을 일으켰다.
천태종 종정 "자유로움은 스스로 만드는 것"

천태종
고려시대와 조선초에 걸쳐 있었던 불교종파.
1097년 숙종 2년에 대각국사(大覺國師) 의천(義天)에 의해 창종되었다.
원래 천태종은 중국 불교 13종의 하나로 수나라 천태지의(天台智?)에 의해 개창되었다.
천태종이 우리나라에 전래된 것은 의천이 창종하기 훨씬 이전의 일이다.
이미 백제의 현광(玄光)은 중국으로 건너가 천태 2조인 혜사(慧思)의 지도를 받았다.
그리고 신라의 연광(緣光)도 수나라 지의(智?)의 가르침을 받았다.
뿐만아니라 신라의 법융(法融) 이응(理應) 순영(純英)도 당나라에 건너가
천태 8조인 좌계현랑(左溪玄朗)으로부터 천태교법을 배웠다.
원래 대각국사 의천은 화엄종의 승려였다.
그러다가 송나라 종간(從諫)으로부터 천태교학을 배운 후
지의(智?)의 탑에 참배하고 서원을 했다.
말하자면 고려에 천태교학을 크게 떨칠 것을 약속한 것이다.
귀국후 1097년 국청사(國淸寺)의 주지로 취임하면서 천태종을 창종했다.
이때 1천명이 넘는 학승들이 모여 들었다고 한다.
의천은 법화경의 회삼귀일(會三歸一)사상을 바탕으로 교관겸수(敎觀兼修)를 주창했다.
당시 천태종은 개성 국청사를 총본산으로
오대산 수암산 조연산 안락산 마리산 남숭산 등
전국에 6대본산을 둘 정도로 성세를 이어갔다.
의천이후 천태종은 교웅(敎雄) 덕소(德素) 승지(承智) 등 수많은 제자들이 배출되었다.
그러다가 크게 종풍을 일으킨 중흥조는 요세(了世)였다.
그는 1208년 희종4년에 월생산(月生山) 약사사(藥師寺)에서
천태교학을 일으켜 크게 깨달은 바가 있었다.
이후 강의와 설법을 통해 기울어 가는 교세를 일으키려 애썼다.
그러다가 1216년 만덕산(萬德山) 백련사로 옮기면서
천태종의 강진(康津)시대를 열게 된다.
말하자면 개성 국청사에서 강진 만덕사로 본산이 옮겨진 것이다.
결국 천태종도 유교라는 새로운 지배이데올로기를 앞세운 조선의 개창에 따라
쇠락의 길을 걷게 된다.
1424년 세종6년에 조계종 총남종과 더불어 선종이라는 이름으로 합쳐지게 된다.
이후 종세는 기울어져 갔다.
천태종은 최근에 와서 단양 구인사(救仁寺)를 중심으로 크게 종풍이 일어나고 있다.
지난 1945년 상월원각(上月圓覺)이
소백산 연화지에 구인사의 터를 닦은 이래 크게 대가람을 이룬 것이다.
이어 천태종은 부산 삼광사(三光寺)를 창건, 매머스 사찰의 뒤를 이었다.
천태종은 철저히 신도중심의 운영을 하고 있다.
이는 기존 사찰의 승려중심 운영과 궤를 달리 하고 있어 주목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