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인돌 시기에 관한 여러가지 견해들이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첫째, 파주 옥석리와 제원 황석리의 고인돌에서 발견된 인골을 방사성탄소측정(放射性炭素測定)으로 얻은 연대를 활용하여 탁자식의 경우 서기전 8세기, 기반식의 경우 서기전 7세기로 추정한 견해가 있다(김제원·윤무병).
둘째, 서기전 2,000년 후반기까지 올려보는 북한학계의 견해가 있다(『조선고고학개요』).
셋째, 청동기가 많이 출토된 전라남도 지방 고인돌의 연대를 서기전 8∼7세기로 추정하는 견해가 있다(이영문).
네째, 일본학계에서는 연대를 많이 내려 보는데, 침촌리고인돌은 서기전 5∼4세기, 황석리는 서기전 3세기, 대봉동고인돌은 서기전 3∼2세기로 각각 추정하였다(甲元眞之).
이러한 제 견해가 제시되었는데, 이것들은 상한연대(上限年代)이고, 하한연대(下限年代)는 서기전 3세기, 서기전 2세기, 서기전 1세기 등이 있다.
또 예외적인 견해로 신석기시대 중기까지 올려 보려는 견해도 있다(박희현)."
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따르면, 고인돌의 용도에 관한 견해들이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첫째, 무덤의 기능, 둘째, 제단(祭壇)의 기능, 셋째, 묘표석(墓標石)의 기능 등이 있다."
또 무덤방에 사체를 안치하는 형태에 관하여 아래와 같이 정리되어 있다.
"고인돌은 거대한 돌로 만들어져 있어서 외관상 어마어마하게 보이지만, 고인돌의 하부 매장시설은 대부분 소형으로 되어 있어 성인의 시체를 펴서 묻기[신전장(伸展葬):바로눕혀묻기(仰臥伸展葬)]에 부적합한 것들도 많다.
탁자식 고인돌은 석실과 석관의 규모가 충분하지만 그 수가 적고, 석관·석곽·토광·옹관(甕棺) 등의 형식은 대부분 소형이어서 신전장(伸展葬)을 하기에는 규모가 작다. 규모가 작다는 것은 시체를 굽혀서 묻기[굴신장(屈身葬)], 또는 두 차례의 장례[이차장(二次葬):육탈(肉脫) 후 취골(取骨), 화장 후 골회장(骨灰藏)]를 한 것으로 추정하게 한다. 실제로 신전장한 예는 드물다."
즉,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 정리된 내용들에 따르면, 고인돌의 시기와 용도에 관하여 구체적으로 밝혀진 내용이 없다. 고인돌이 사용된 시기도 정확하지 않으며, 용도에 관해서도 이렇다고 할 만한 연구결과가 분명하지 않은 실정이다.
그러나 홍산문화(서기전 4,700~2,900년 경) 우하량 유적에서 발견한 제단과 적석총을 고인돌과 비교해 보면, 고인돌은 규모로 볼 때 상대적으로 매우 초라한 고대 유적으로 보인다.
더우기 고인돌 유물에 대한 방사성탄소 연대 측정결과가 서기전 800~700년이라면, 홍산문화의 시기와 비교할 때, 물경 4,000~3,000년의 시차가 있지 않은가?
홍산문화가 발굴된 현재의 요령성 서부 지역에서부터 우리나라 남해안 지역까지 약 1,300~1,400km 정도가 되는데, 그 정도 거리에서 약 3~4 천 년간의 문화의 차이가 일어날 수 있겠는가?
만약 피라미드식 대형 적석총과 고인돌이 같은 시대에 함께 사용된 유적들이라면, 대형 적석총이 발견된 지역에 고인돌이 함께 출토되어야만 할 것이다. 마치 청(淸) 또는 조선 시대 성곽 주위에 수많은 민가들이 지어졌듯이 제단 또는 적석총 인근지역에 수많은 고인돌 군집이 발견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즉, 고인돌시대에 관한 연구결과들을 의심하지 않을 수가 없다.
오히려 고인돌시대는 홍산문화의 시기보다 훨씬 이전 시대의 유적으로 볼 수도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고인돌의 용도가 단순히 묘지로 사용된 경우라면, 모든 고인돌에서 인골이 출토되든지 인골이 삭은 흔적이라도 나와야 할 게 아닌가?
그러나 고인돌에서 인골이 발견된 사례는 별로 없고 제단으로도 사용했을 것이라는 추측만 나돌고 있는 실정이다. 또 고인돌에서 인골이 발견된 경우에도 무덤방이 좁아 사체를 쪼그려드려서 묻은 경우가 많은데, 그게 가능한 일일까?
즉, 홍산문화 유적에서 발견된 대략 6,000~5,000년 전의 묘지에서도 [그림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사체를 반듯하게 눕히고 묘지를 조성했는데, 불과 2~3,000년 전 유적이라고 하는 고인돌시대에는 무덤방을 좁게 만들고 사체를 구부려뜨려서 매장하기도 한 것인가?
[그림 1] 홍산문화 우하량 유적지 적석묘
그런데 그간 우리나라 고인돌 발굴 연혁에 따르면, 국립중앙박물관이 1962년에 우리나라 최초로 충북 제천시 황석리에 있는 고인돌 18기를 발굴 조사하였다.
1962년에 발굴한 18기의 고인돌 중에서 제13호 개석묘에서 거의 완전한 상태의 매장인골이 발굴되었다. 또 부장품으로 마제석검 1개가 출토되었다.
서울대 의대 해부학실은 미국 Geochronological Laboratories Inc.에 의뢰하여 발뒤꿈치 뼈조각에 대한 방사성탄소 년대를 측정한 결과, 2,360±370년(B. P.)이 나왔다. B. P. 는 1950년을 기준으로 한 년대를 의미하므로 서기전 780~40년에 해당한다.(근거 자료: 『한국지석묘연구』, 김재원·윤무병, 1967년; 『충주댐수몰지구문화유적발굴조사략보고서』, 1982년; KBS1 TV 역사스페셜 1998. 12. 5.)
또 82~83년 기간 중에 충북대 박물관이 충주댐 수몰예상지구에 대하여 황석리 고인돌 8기를 추가 발굴한 결과, 4기의 고인돌에서 인골이 출토되었다.
한편, 『위키백과』에 따르면, 남한강 유역의 양평 양수리 고인돌에서 출토된 유물을 방사성탄소로 연대측정한 결과, 약 4,000년 전에 만들어졌다는 결과가 나왔다고 한다.
즉, 양수리 ‘두물머리 고인돌’의 덮개돌 밑 15cm 지점 무덤방 안에서 채취된 숯(탄소)을 상대로 1984년에 한국원자력연구소에서 방사성탄소 연대를 측정한 결과, 4,100~3,700년(MASCA 계산법으로는 4,140~4,240년)으로 나왔다고 한다.
비록 양수리 고인돌은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 대략 서기전 2,000년경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여기서는 김해식 토기 파편과 청동기시대 반달돌칼이 함께 나왔다고 한다.
그런데 김해식 회청색 경질토기는 기원후 1~3세기 유물이라고 하니 방사성탄소 연대측정 결과와 서로 상충하고 있다.
따라서 고인돌의 시기와 용도 등에 관하여 전면적으로 다시 연구해야만 하지 않겠는가?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