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자 주요 외신들은 캄보디아의 야당이 훈센(Hun Sen) 총리의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과 타협할 가능성이나, 집권을 연장한 훈센이 변화를 보일 가능성을 염두에 두는 기사를 내보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예상을 하는 전문가나 언론인들 중에서, 어느 누구도 캄보디아의 야당이 지난 7월28일 총선에서 대대적인 약진을 하여, 이후 이토록 심각한 정치적 대치 국면에 접어들 것이라고 예상했던 이들은 거의 없었다. 그런데도 또 다시 그러한 전문가나 언론인들을 믿어야 한단 말인가?
작년(2012)에 치뤄진 '6.3 지방선거'가 끝난 후, 제1야당인 '삼랑시당'(SRP)과 제2야당인 '인권당'(HRP)이 필리핀 마닐라에서 야권통합을 논의한다는 보도가 나오자, 필자는 이 기사의 번역문에 다음과 같이 댓글을 통해 논평한 바 있다.
(2012년 6월 9일에 공개한 번역문에 필자가 단 댓글 논평) - 기사화를 위해 일부 문장은 윤문했음.
이번 지방선거 결과를 살펴보면서 저 역시 미묘한 가능성들을 보고 있었는데, '콤프렐'의 꼬울 빤하 사무총장이 그와 관련된 언급을 했습니다.
일단 집권 CPP가 압승을 거두긴 했습니다만, [선명성을 가진] 야당들의 합산 득표율이 무시하지 못할 규모의 증가가 있었습니다. SRP와 HRP를 합치면 30%가 넘었죠. 더구나 이러한 결과는 집권당의 각종 위협, 유권자 매수, 유령 투표 등등이 만연한 가운데 나왔다는 점입니다.
또한 투표 기권률이 거의 35~37% 달했는데, 이 역시 참여도가 높아질수록 야권에 유리해질 공산이 크다고 봅니다. 그럴 경우 내년 7월의 총선에서 정권교체까지는 몰라도, 상당히 팽팽한 접전이 될 가능성이 엿보인다는 점이죠.
그리고 보다 거시적인 관점에서 생각해볼 점도 있습니다. 저는 아마도 내년에 치뤄질 캄보디아의 총선이, 캄보디아의 21세기 전반의 역사에서 매우 커다란 분수령이 될 것으로 보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훈센 총리와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이 최근 몇년간 야당을 탄압해온 모습이라든지, 훈센의 아들 3형제 및 정권실세 2세들이 정치적으로 대거 약진하고 있는 현상을 보았을 때, 만일 내년(2013) 7월 총선에서 정권교체가 없다면, 아마도 형식적으로나마 남아있던 캄보디아의 민주주의 체제는 사실상 종언을 고하지 않을까 싶습니다.
아마도 그 점을 야당은 물론이고 훈센 정권도 느끼고 있을 겁니다. 따라서 내년의 총선은 야당들에게 주어진 사실상의 마지막 승부처인 셈이라 할 수 있습니다. 내년에 실시될 캄보디아 총선은 캄보디아의 정치 세력들 사이에 정말로 사활을 건 한판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어찌됐든 캄보디아가 지금은 조용하고 안정되어 보이고, 훈센과 집권당의 아성이 아주 튼튼해보이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 지방선거를 통해 왕당파 사이비 야당들이 확실하게 몰락한 것으로 나타났고, 이제 2개의 선명 야당들이 정말로 통합을 한다면, 저는 캄보디아의 내년 총선이 그야말로 대단한 정치적 분수령이 될 것으로 생각합니다.
다만, 주요 변수 중 하나가 경제인데, 이 문제가 아주 복잡하게 전개될 것입니다. 현재의 불확실한 세계경제 상황을 감안한다면, 아마도 캄보디아 경제는 경제성장률과 물가인상률 사이에서 상당한 딜렘마를 보이게 될 가능성이 엿보이고 있습니다.
일단 경제성장률 자체는 일정 정도 유지할 것이고, 선거를 앞두고서는 상당한 경기부양책도 사용할 것으로 예상됩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유럽 경제의 위기가 어떤 작용을 할지 아직 변수로 남아있고, 다른 한편으로는 경기부양책이 물가인상을 압박할 수도 있다는 점입니다.
캄보디아의 경우 현재도 물가인상률이 상당히 높은 상태라서, 추가적인 인플레이션 요인이 발생한다면, 그것이 국민들에게 실제로 가하는 체감 압박은 상당할 것으로 생각됩니다. 즉, 생활고가 가중될 가능성이 있다는 것입니다.
또한 '크메르의 세계'가 매년 선정하고 있는 <2012년 캄보디아 10대 뉴스>(2012-12-23)에서도 다음과 같이 정리한 바 있다.
캄보디아의 제1야당인 '삼랑시당'(SRP: 26석, 1997년 창당)과 제2야당인 '인권당'(HRP: 3석, 2007년 창당)이 '역사적인 야권통합에 합의'했다.
(중 략)
삼 랑시 총재와 껨 소카 총재는 각각 CNRP의 총재 및 부총재를 맡았고, 저명 여성인권 운동가인 무 소쿠(Mu Sochua) 의원이 사무총장을 맡았다. 그러나 기존의 국회의원이나 지방의원들은 당적을 옮길 경우 자격이 박탈되기 때문에, 이들의 임기가 끝나는 향후 수년 동안은 SRP와 HRP 역시 등록 정당으로 남아있게 된다.
SRP와 HRP의 두 야당은 금년에 치뤄진 '6.3 지방선거'에서 집권 '캄보디아 인민당'(CPP: 1978년 이후 존속, 90석)의 각종 관권 금권 불법선거 행태에도 불구하고, 양당 합계 30% 이상의 득표율을 보이며 선전한 바 있다. 그리고 거물 정치인이었던 노로돔 라나릿(Norodom Ranariddh) 왕자가 8월 초에
정계은퇴를 선언하면서, 친여 성향의 군소 왕당파 정당들인 '푼신펙당'(Funcinpec: 2석)과 '노로돔 라나릿 당'(NRP: 2석)의 비주류 인사들도 통합야당으로 합류하고 있다.따라서 사상 최초로 민주 야당들의 통합이 이뤄짐에 따라, 내년(2012) 7월에 있을 총선에서는 기대 이상의 성과가 예상되고 있다.
캄보디아의 선거는 베트남계 유권자들(=친-훈센 집권당 성향)의 대거 등록으로 인한 인구학적 왜곡이 심각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고, 최근 그 추세는 더욱 강화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시점에서 치뤄지는 2013년 캄보디아 총선은 훈센 정권의 권위주의 행보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보인다.
필자는 이러한 인식의 연장선에서 캄보디아의 현 정세 및 향후 정치일정을 관찰하는 데 있어서 필요한 시각적 틀을 제시해보고자 한다.
'캄보디아 구국당'(CNRP) : 아시아에서 선도적인 중도적 민주 야당
캄보디아의 현 정국을 이해하기 위해선 통합야당인 CNRP를 이해해야만 한다. CNRP는 이전의 야당들이었던 '삼랑시당'(SRP: 26석, 1997년 창당)과 제2야당인 '인권당'(HRP: 3석, 2007년 창당)이 작년 7월에 야권통합을 통해 탄생한 정당이다.
SRP를 이끌었던 삼 랑시(Sam Rainsy, 삼랭시) 총재와 HRP를 이끌었던 껨 속하(Kem Sokha, 켐 소카) 총재(현재는 CNRP 부총재)는 '인권'과 '민주주의'라는 정치적 대의 면에서 볼 때, 처음부터 이념적으로 커다란 노선의 차이는 없는 상태였다.
하지만 이들은 캄보디아의 타협적 정치문화에서는 보기 드물게 출현한 선명성을 지닌 야당 인사들이었기 때문에, 훈센 정권은 이들이 단결하지 못하도록 지속적인 정치공작과 분열을 획책해왔고, 두 사람이 각기 지닌 정치기반의 흔들기도 수시로 자행해왔다. 특히 껨 속하 총재의 HRP에 대해서는 "여당 2중대설"(즉, 여당의 후원으로 창당된 정당이란 의미)을 지속적으로 유포시켜, 야권 내부의 불신을 증폭시키기도 했다.
삼 랑시 총재는 프랑스에서 교육을 받은 펀드매니저로서, 비교적 젊은 나이에 국제적인 투자회사의 회장(=이사회 의장) 겸 사장에 올랐던 경제통이다. 그는 왕당파 정당인 '푼신펙당'(Funcinpec)의 권유로 1993년 최초 총선 때 귀국한 후, 재무부장관을 지냈다. 하지만 공동 여당이었던 훈센의 '캄보디아 인민당'(CPP)은 물론이고 자신이 속해있던 '푼신펙당' 소속 인사들마저 부정부패에 여념이 없자, 당시 여성부장관을 맡고 있던 무 소쿠(Mu Sochua) 의원 및 '캄보디아 국립은행'(NBC) 총재를 맡고 있던 자신의 부인 띠오울롱 사우무라(Tioulong Saumura) 현 의원과 함께 자리를 박차고 나와 탈당한 후, 1995년에 독자적인 야당을 결성한 인물이다.
반면, 껨 속하 부총재는 정치권보다는 시민운동과 풀뿌리 민주주의에 더 많은 시간을 전념했다. 그는 인권을 주제로 하는 라디오방송과 포럼 활동을 통해, 캄보디아 전역에 1천개 이상의 '풀뿌리' 조직을 구축했던 인물이다. 또한 2007년에 창당한 HRP에 캄보디아 정당 역사상 최초로 상향식 공천제를 도입하여 당내 민주주의를 추구하기도 했다. 그러나 훈센은 그러한 껨 속하 총재에 대해 조작된 도청자료 폭로나 각종 루머를 유포시키며 이미지 왜곡을 시도해왔었다.
CNRP는 작년 7월 필리핀에서 야권통합 선언을 통해 탄생했다. 필자는 캄보디아의 야권이 필리핀에서 통합 협상을 했던 것을 2가지 상황 때문으로 생각한다. 한 가지 상황은 필리핀 정계가 캄보디아의 야권에 우호적이었다는 점이다. 필리핀은 작년에 중국과 남중국해 영유권을 둘러싼 분쟁에 휘말려 있었지만, 같은 아세안(Asean) 회원국인 캄보디아가 도리어 중국의 입장을 대변하고 나서자, 훈센 정권과 대사소환을 감수하는 외교적 갈등을 겪고 있었다. 그리고 다른 한 가지 상황은 삼 랑시 총재가 훈센 정권의 탄압을 피해 해외에서 망명생활을 하고 있었다는 점 때문이다.
삼 랑시 총재는 지난 2009년 베트남과의 국경지역인 스와이 리엉(Svay Rieng) 도에서 베트남이 캄보디아 영토를 잠식하기 위해 부당하게 표식을 설치했다며 임시 국경표식을 뽑아버렸다, 그리고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기 위해 구글맵 지도 정보도 유포시켰다. 이후 베트남이 외교적으로 반발하자 123명 중 90명이 여당 의원으로 구성되어 있던 캄보디아 국회는 그의 면책특권을 박탈했고, 훈센 정권의 통제 하에 있는 사법부는 그를 기소하려는 움직임에 착수했다. 삼 랑시 총재는 이러한 상황에서 해외로의 피신을 선택해 이후 약 4년간의 망명길에 올랐다.
캄보디아 사법부는 궐석재판을 통해 삼 랑시 총재에게 유언비어 유포 및 공문서 변조, 그리고 명예훼손과 인종차별 선동 등 각종 혐의를 부과하여, 최종적으로는 징역 11년형을 부과했다. 하지만 삼 랑시 총재는 자신에게 적용된 혐의들이 정치적 동기에서 부과된 것이라 주장하면서, 해외에서도 활발한 정치적 움직임을 보여왔다.
삼 랑시 총재의 해외망명 이슈는 캄보디아 정치를 바라보는 데 있어서, 주요한 스펙트럼을 보여주는 문제였다. 혹자는 차라리 삼 랑시 총재가 귀국하여 감옥에서 탄압을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더 낫지 않을까 하는 이들도 존재했고, 일부에서는 당찬 이미지의 여성운동가인 무 소쿠 여사가 캄보디아 야당을 이끌기에 더 적당하다고 보는 의견들도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이러한 외부 전문가들의 견해가 동남아시아의 정치, 사회적 환경에 대한 이해가 여전히 부족한 데서 기인했다고 생각한다. 아마도 삼 랑시 총재가 국내에 머물고 있었다면, 그가 감옥 안에서 의문사했을 가능성을 포함하여, 캄보디아 야권은 구심점을 상실한 채 이번 총선에서도 무기력한 모습을 보였을 가능성이 컸을 것이다.
일각에서 삼 랑시 총재를 다소 유약한 인물로 보는 것은, 아마도 그들이 삼 랑시 총재의 과거 행적을 알고는 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망각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삼 랑시라는 인물은 결코 유약한 인물이 아니다.
훈센은 이미 1997년에 삼 랑시의 목숨을 노린 바 있다. 삼 랑시는 '1997년의 야당 집회 수류탄 투척 테러사건'을 통해 죽음의 고비를 넘겼지만, 그 이후로도 결코 훈센과 타협하지 않고 선명 야당의 길을 걸어온 인물이다. 또한 4년간의 해외 망명생활 역시 자신의 자택이 있는 프랑스 파리에서 가만히 앉아 있지만은 않았다.
삼 랑시 총재는 지난 4년 동안 지구를 몇 바퀴나 도는 길고 긴 여정을 거쳐왔다. 비록 주요 언론에서는 그의 재판 관련 소식만 간간이 전할 뿐이었지만, 캄보디아 정치에 깊은 관심을 가진 이라면 인터넷을 통해 매일 같이 지구상 어디선가 활동을 벌이는 그의 모습을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었다.
그는 20세기 캄보디아의 불행한 역사 덕분에 탄생한 해외 교민 공동체를 찾아 유럽 각국과 미국,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등 주요 거점 지역들을 끊임없이 순회하며, 야당의 입장을 홍보하고 해외 교민들로부터 정치자금도 모금했다. 또한 캄보디아의 인권상황과 훈센 정권의 권위주의 통치를 알리기 위해 각종 국제회의장과 포럼장을 찾아다녔고, 서방국가들의 지지 획득을 위해 유럽연합 의회나 유럽 각국 의회, 그리고 미국, 캐나다, 호주 의회 등을 수시로 방문하며 각국의 정치인들도 만났다.
2011년 '아랍의 봄'이 들불처럼 번져나가자, 삼 랑시 총재는 아랍의 '피플파워'를 운동을 공부하겠다며 튀니지를 직접 방문하기도 했고, 아웅산 수치 여사와 만남을 갖고 미얀마 민주화 운동의 선례에서 배울 것이라고 다짐하기도 했다. 그가 귀국 후 보여준 야당의 군중동원 물결 현상 역시 금년 6월 초의 한국 방문 행사에서 이미 그 예고편을 보여줬다. 당시 한국에 체류 중인 캄보디아인 유학생과 노동자 수천 명이 행사장 안팎에서 그를 열렬히 환영했던 것이다.
캄보디아 총선을 꼭 20일 남겨둔 시점인 금년 7월8일, 삼 랑시 총재는 "야당 지도자로서 구국의 일념으로 총선을 이끌기 위해 선거 전에 귀국할 것"이라며 전격적인 귀국 선언을 했다. 그의 귀국은 투옥은 물론이고 신변안전이 보장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목숨을 건" 결단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한편 훈센 총리의 입장에서 볼 때, 그를 투옥시키거나 그의 신변에 위해를 가할 경우 선거 정국에서 여론이 악화되는 정치적 부담이 발생할 터였다. 그러나 삼 랑시 총재가 귀국한 후에 자유롭게 놔둘 경우에도 자신의 권위가 실추된다는 점에서 곤란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훈센은 자신이 어떤 위협을 가해도 이 시점에서라면 삼 랑시가 반드시 귀국할 인물임을 분명히 알고 있었다. 노련한 훈센은 노로돔 시하모니(Norodom Sihamoni) 국왕에게 삼 랑시의 사면을 요청하는 형식을 신속하게 채택함으로써, 삼 랑시의 '용기'를 자신의 '관용'으로 변화시키면서 곤란한 상황을 비켜나갔다.
7월19일, 10만 군중의 환영을 받으며 4년만에 돌아온 삼 랑시는 더 이상 과거의 군소 야당 지도자가 아니었다. 그는 독재자 훈센에게 정면으로 맞서 싸운 크메르인의 영웅이 되어 있었고, 불과 일주일 남짓한 기간에 전국적인 야당 돌풍을 일으킨 후 50만명이 열광한 프놈펜의 최종 유세로 선거운동을 마무리했다.
(사진: Demotix) 7월27일(금) 캄보디아 국회의원 총선 공식 선거운동 기간 마지막 날, 프놈펜에서 지지자들에 둘러싸인 삼 랑시 총재의 모습(상단 사진) 및 거리를 가득 메운 야당 지지자들의 모습(하단 사진).
하지만 CNRP는 단순히 삼 랑시 총재라는 한명의 영웅 때문에 존재감을 갖는 정당이 아니란 점이 더욱 중요할 것이다. CNRP에는 껨 속하 부총재와 무 소쿠 의원을 비롯하여, 꺼져가던 캄보디아 민주주의의 미약한 불씨 속에서도 결코 타협하지 않고 의로운 길을 걸어온 중량급 정치인들이 다수 포진해있다. 만일 민주적 야당의 선명성을 "착한" 정치인들의 존재에서 찾을 수 있다고 한다면, 아시아에서 현재의 캄보디아 야당만큼 선명성을 가진 민주적 정당을 찾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CNRP의 정당적 가치는 단순히 선명성이나 도덕성에만 머물지 않는다. 훈센 정권은 기본적으로 공산당 정권에서 출발한 전력이 있기 때문에, 캄보디아의 야당에는 아시아에서는 보기 드물게도 좌파나 사회주의적 이념을 가진 인사들이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또한 무슬림이나 불교 등 특정 종교에 편향된 색깔도 보여주지 않는다. (물론 좌파의 이념들이 무조건 과격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그러므로 이들은 상당히 정통적인 자유주의 중도 민주 정당(=중도 우파)의 면모를 갖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캄보디아의 야당은 '인권'이나 '민주주의' 같은 보편적이고도 상식적인 정치 철학을 기반으로 비교적 극단적인 성향을 배제하면서도, 약자의 편에 선다는 기본적인 도덕적 가치를 강조한다.
또한 캄보디아 현대사의 굴곡 속에서 해외로 피난을 했던 수많은 난민들이 있었던 만큼, 삼 랑시(=프랑스에서 성장) 총재나 무 소쿠(=미국 '버클리 대학' 출신) 의원 같은 해외파들이 다수 합류해있다. 이들 해외파 정치인들은 <1991년 파리평화협정>이 체결된 후, 새로운 조국을 위해 일생을 바치겠다는 각오로 귀국을 했던 이들이다. 또한 이들은 귀국 전부터도 '1979~1984년 사이에 태국 국경지대에 위치했던 난민촌들'에서 자원봉사 활동 등을 통해 애국심을 길렀으며, 그러한 각오들은 이후 미미한 세력을 갖고도 반-훈센 정권 투쟁의 길을 걷는 데 많은 힘이 되었다.
CNRP에 해외파 정치인들이 많다는 점은 이들이 상당한 국제적 감각과 더불어, 서구사회에서 보편적으로 수용되고 있는 정치적 가치들에 충실한 합리적 집단이란 것을 짐작케 만들어준다.
따라서, 캄보디아에는 이미 자유주의적 민주주의를 선도해나갈 인적 자원과 조직으로서 비교적 좋은 야당을 갖고 있었던 셈이다. 하지만 집권 여당이 방송과 언론을 완벽하게 장악하고 심지어는 청부살인을 비롯한 정치적 폭력까지 난무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그 안에서 겁을 먹고 있거나 정치적 상황에 무지한 국민들이 깨어날 때까지 인내를 갖고 좀 더 기다려야만 했다.
(동영상) 선거운동 마지막 날인 7월26일 오후, 껨 속하 부총재와 함께 껌뽕짬에서 프놈펜으로 귀환한 삼 랑시 총재가 '프리덤 파크'의 집회장으로 행진하기 직전, "프놈펜 시민 모두가 함께 '변화'(=쁘도우)를 위해 행진하자"며 가두에서 도착 연설을 하고 있다. 삼 랑시와 껨 속하의 정치적 연대에 대해 일각에서는 끊임없이 불화 가능성을 제기했지만, 이제는 이들 듀엣의 트레이드 마크가 된 "함께 손을 잡아 치켜올리는 제스처"와 함께, 현재까지는 굳건한 유대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스마트폰이 몰고온 정보화 혁명
필자가 2009년 초 캄보디아 시골의 어느 허름한 피시방에서 '크메르의 세계'를 만들고 처음으로 캄보디아와 동남아시아를 공부하기 시작하던 무렵, 캄보디아 인구 1,450만명 가운데 인터넷 접속이 가능한 인구는 고작 2만명을 조금 넘고 있었다.
그러나 '캄보디아 인권센터'(CCHR)가 금년 4월에 발표한 보고서 <캄보디아의 표현의 자유 및 인터넷 검열 현황>(Freedom of Expression and Internet Censorship in Cambodia)에 따르면, 캄보디아 정부는 이미 올해 초에 캄보디아의 인터넷 사용자를 최소 270만명 이상일 것으로 내부적으로는 추정하고 있었다. 아마도 여기에는 보다 손쉽게 인터넷 접근이 가능한 스마트폰의 대량 보급이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필자는 캄보디아에서 인터넷 사용가능 인구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는 현상을 보면서, 금년 7월28일의 국회의원 총선이 훈센 정권의 권위주의 행보가 약간의 제동이 걸리는 수준을 넘어, 결정적인 타격을 받게 될 가능성까지 조심스레 예상해보는 단계로 옮겨가게 되었다.
캄보디아의 인터넷 접근가능 인구는 2010년 말까지도 전체 인구의 불과 1.5%에 불과했다. 하지만 스마트폰이 출시된 이후, 특히 2012년부터 인터넷 접속가능 인구는 폭발적으로 증가했고, 그것은 훈센 정권이 집권의 오만감에 빠져 안하무인의 만행들을 저지르고, 자신의 자녀들에 대한 권력승계에 가속도를 높이던 시기와 정확하게 일치했다.
인터넷 사용 인구를 270만명만 잡아도, 그것은 실제 투표 유권자의 거의 절반에 해당하는 수치이다. 이 정도 규모면 2010년에 '레드셔츠'(UDD: 반독재 국가민주 연합전선) 운동이 '대규모 반정부 시위'를 일으켰던 당시의 태국보다도 훨씬 정보화가 진전된 상태로 인식됐기에, 필자는 금년의 캄보디아 정국이 국제면을 장식하는 이슈로 부상하리라 예상하게 되었다.
2010년의 태국 레드셔츠 농민들은 한국에서 1980년에 민주화운동에 참여했던 광주의 농민들보다 훨씬 더 정치적 자각이 높았던 시위대였다. 1980년의 광주 시민들은 유선전화와 석간신문을 통해 정보를 공유했지만, 2010년의 태국 시위대는 휴대폰과 자가용 픽업트럭들을 소유했고, '트위터'를 통해 탁신 친나왓(Thaksin Shinawatra) 전 총리의 소식을 들었다. 그러나 2013년의 캄보디아 국민들은 2010년의 태국 농민들보다도 다시금 한걸음 더 진보했다. 이들은 스마트폰을 사용하며, '페이스북'의 보다 복잡한 정보들도 실시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제 캄보디아의 준비된 야당에 힘을 보태줄 거대한 국민들의 집단이 출현한 것이다. 그들은 훈센의 전쟁 발발 협박에도 속지 않았으며, 신속한 정보 교류를 통해 야당의 집회장에 모습을 나타내고 있다.
(동영상) 야당의 대규모 시위 이틀째인 9월16일(월) 저녁, 삼 랑시 총재가 '프리덤 파크'의 집회장 무대에서 향후의 투쟁에 관해 연설하는 모습. 상당한 열기를 보여준다.
새로운 분석틀
캄보디아의 현 정국이 보여주는 특성은 비교적 명료하다. 준비된 야당과 자각된 대중이 결합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제부터 캄보디아 정국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분석의 틀이 필요하게 되었다.
7월28일 국회의원 총선을 기점으로, 캄보디아는 이전의 캄보디아와는 전혀 새로운 국가로 변했다. 이 점을 인정하지 않는 전문가나 분석가들은 앞으로도 계속해서 오류에 빠지게 될 것이다.
게다가 중동 각국의 복잡한 분쟁이나 아시아 여러 나라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는 달리, 캄보디아의 정치위기는 비교적 명료한 전선을 갖고 있다.
훈센 정권이 지난 30년간 보여준 정치행태는, 여러 형태의 독재정치 중에서도 가장 저열한 모습인 부패한 도둑정치(kleptocracy)의 전형이었다. 훈센 정권의 도둑정치 방식은 심지어 그들의 정권을 '한 국가의 통치세력'이라 부르는 일조차 어색하게 만들 정도이다. 훈센 세력은 하나의 정부라기보다는 특정 지역을 장악한 '군벌 산적 집단'에 더욱 가까운 행태를 보여왔다. 필자는 훈센 정권의 정책적 특징을 표현하기 위해, 종종 다음과 같이 '쓰리엠 정책'(3M Policies)이라는 용어로서 풍자하곤 했다.
"내 자식들!"(My children!)
"내 조카들!"(My nephews!)
"내 부하들!"(My men!)
따라서 국제사회가 캄보디아의 여야 정치세력 중 어느쪽을 지지해줘야 할지 그 대답 역시 비교적 분명한 편이다. (그런 점에서 전세계 민주국가 정상들 중 최초이자 아직까지는 유일하게도, 박근혜 대통령이 훈센 총리에게 선거승리 축전을 보낸 일은 놀라움을 넘어 말문조차 막히게 만들 정도이다.)
영국의 BBC 뉴스는 캄보디아 야당의 2박3일간의 시위가 가시적 성과 없이 끝난 후인 9월18일(수) 자 보도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서두를 열었다.
"지난 20년간 캄보디아 정치를 관찰하는 업저버들에게는 한가지 황금률이 있었다. 그것은 '훈센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울노님, 좋은글을 써 주셔서, 제가 읽는데 머리에 앤돌핀이 도는 경험을 했어요. 감사합니다. 글이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네요. 캄보디아의 변화된 상황을 정치적 차원에서 특히 삼랑 시, 껨 속하, 무 소쿠 등의 정치적 동선을 중심으로 분석하셨어요. 다음 번에도 좋은 글을 기대하면서 캄보디아 국민들의 민생 문제로서 경제적 변화를 분석하시면 좋겠다는 생각.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향하여 장기적 독재자로서 억압과 부패를 심화시킨 훈센을 교체하려는 국민들의 경제적 삶, 그동안 어떻게 빈곤 문제와 빈부의 격차 심화가 기득권 세력에 저항을 촉발시키고 이것이 개혁세력과 연계되었는지를 살피면 어떨지 ... 감사감사
첫댓글 좋은 분석이 담긴 글 잘 읽었습니다. 고맙습니다.
마지막 구절이 인상적이군요. 하지만 저는 그 마지막 구절을 이렇게 바꾸면 더 좋지 않을까 싶습니다.
"캄보디아의 국민을 결코 과소평가하지 마라"
그냥 운율상 대구를 맞추다 보니 그렇게 됐습니다만..
상선약수 님 말씀이 더 맞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국민들"이라는 한 단어를 추가했습니다..
이래서 역시 윤문할 때는
반드시 타인의 눈을 거쳐야 하는 것임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네요. ^ ^
'명문' 정말 잘 읽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쑥스럽네요.. ;;;;
저명한 학자의 정세분석 논문을 보는것 같습니다. 결코 국민을 과소평가하면 않되지요. 지금 우리나라처럼요.
그러게 말입니다.. ㅠ.ㅠ
올해 크세 최고의 명문입니다.^^*
솔직히 말해서 작년(2012.6.3) 지방선거가 끝나고 울-노 님이
캄보디아 미래 정치에 대한 예언했을 때 고개를 갸우뚱했는 데
미래가 현재가 되고 나니, 정확하게 적중하고 하고 있습니다.
대단한 혜안에 찬사를 보냅니다.
이런 명문을 크세 회원님들만 본다는 것이
아깝다는 생각입니다.
^ ^
울노님,
좋은글을 써 주셔서, 제가 읽는데 머리에 앤돌핀이 도는 경험을 했어요.
감사합니다. 글이 논리적으로 설득을 하네요.
캄보디아의 변화된 상황을 정치적 차원에서 특히
삼랑 시, 껨 속하, 무 소쿠 등의 정치적 동선을 중심으로 분석하셨어요.
다음 번에도 좋은 글을 기대하면서
캄보디아 국민들의 민생 문제로서 경제적 변화를 분석하시면 좋겠다는 생각.
자유와 민주주의의 가치를 향하여
장기적 독재자로서 억압과 부패를 심화시킨 훈센을 교체하려는
국민들의 경제적 삶,
그동안 어떻게 빈곤 문제와 빈부의 격차 심화가 기득권 세력에 저항을 촉발시키고
이것이 개혁세력과 연계되었는지를 살피면 어떨지 ...
감사감사
선생님, 귀중한 격려 말씀과 조언에 감사드립니다.
또 기회가 있으면,
한번 시도를 해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