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벨라 가이드 투어에 나서고 있다.
지난 밤 도착해 묵은 코파카바나 해변도시의 3층짜리 호스텔은 좁고 복잡했다. 어느 정도 이력이 났다고는 하지만 여덟 명이 한방에서 오글거리며 지내는 일이 쉽지 않은 데다, 도시를 이동할 때마다 겪어야 하는 묘한 이국적 체취는 익숙해지기까지 다소의 시간이 필요했다.
여행이 막바지에 이르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낯선 도시는 늘 무엇인가 신선한 기분이 들게 했다. 리우는 어떤 모습일까? 숙소에서 느즈막히 아침 식사를 마치고 나서 인근의 지리도 익히고 브라질에서 쓸 돈도 인출하기 위해 도시 탐색에 나섰다.
숙소가 있는 지역이 코파카바나 해변 지역이어서인지 시즌이 지난 시기였지만 이른 아침부터 해수욕 차림을 한 사람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수퍼마켓은 어디쯤에 있고, 레스토랑과 피자집, 햄버거 가게는 어디쯤 있는지를 확인하다가 어느 네거리에서 과일 쥬스 코너를 발견했다. 브라질에 가거든 보라색 '아싸이 베리 Acai Berry'를 먹어보라는 누군가의 권유가 떠올랐다.
각자의 취향과 느낌대로 몇가지 과일향 아이스크림을 골라 맛을 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입 안에 가득 넣고 맛을 느껴보려는데 삼킬 엄두가 나지 않았다. 다른 일행들의 얼굴에도 같은 표정이 역력했다. 아싸이 베리는 이곳 브라질 국민들이 즐겨 먹는 인기있는 아이스크림이라는데 어찌 이런 맛이 나는지! 중간 사이즈 아이스크림 하나를 둘이서 먹기를 거듭하다 결국 반도 채 먹지 못하고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나 아싸이 베리는 그나마 양호했다. 먹성 좋기로 소문난 누군가는 이름도 알 수 없는 무엇인가를 주문했다가 딱 한 번 혀끝을 스치고서는 먹는 것을 포기했다. 그 맛이 궁금했던 다른 일행들이 도전했다가 모두들 고개를 젓고 말았다. 리우에 도착하자마자 시도한 아이스크림 도전은 처참하게 실패했다.
오후에는 무엇을 할까? 의견들이 설왕설래했다. 배낭 여행이니 누구의 간섭이나 제약없이 각자 하고 싶은 대로 할 수 있었지만 리우는 다른 도시와 달리 권총이 등장하는 지극히 위험한 도시였기에 안전을 위해 함께 가이드 투어를 하기로 했다. 리우에서 돌아볼 곳들은 대략 정해져 있으니 시간과 순서만 정하면 되었다. 일단 오늘 오후에는 라틴 아메리카의 최대 빈민촌인 리우의 '파벨라 호시냐 Favela Rocinha'를 가이드 투어로 돌아보기로 했다. 비용은 3시간에 100헤알.
호시냐 초입에서 바라본 코르코바두 언덕의 예수상과 고층 건물이 즐비한 리우 시내
파벨라 Favela, 브라질에서는 가장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빈민촌을 '파벨라'라고 했다. 하지만 파벨라는 어느 특정한 지역을 일컫는 것이 아니라 브라질 모든 도시에서 볼 수 있는 우리의 '달동네' 같은 곳이었다. 리우에도 있고, 상 파울루에도 있고, 그밖의 크고 작은 도시에도 이 파벨라는 존재했다. 리우에만 해도 이런 파벨라가 800여 곳이나 되는데 700만 리우 인구 중 30%가 파벨라에 산다고 했다. 그중에서 오늘 우리가 가이드 투어로 돌아볼 '파벨라 호시냐'는 리우 뿐만이 아니라 남미의 파벨라 중 가장 규모가 큰 곳으로 약 25만 명의 인구가 사는 지역이라 했다.
오후 2시 반, 숙소로 픽업 나온 투어 버스를 타고 호시냐 투어에 나섰다. 버스가 시내를 몇 구비 돌아 호시냐 언덕에 멈춰서자 뭇 시선들이 한꺼번에 몰려들었다. 예쁘장한 브라질 가이드는 조용조용한 말투로 사진은 마음껏 찍어도 좋지만 현지인들의 얼굴이나 생활하는 모습을 직접 대놓고 찍는 일은 삼가기를 강조했다.
미리 파벨라에 관한 이야기를 들어서였을까? 모두들 조금쯤 긴장하고 있었다. 말도 크게 하지 않았고, 사진 찍는 일도 삼가고 있었다. 이전의 파벨라는 외부 사람들이 아무 때나 들어가 관광을 하며 사진을 찍을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가난과 마약, 무장 갱단과 범죄 단체가 장악한 지역이었기에 경찰마저도 함부로 들어가기 어려운 곳이었다. 리우에서 총기에 의해 사상을 입는 대부분의 인명들은 이들 파벨라 지역에서 경찰과 범죄조직들간의 교전에서 희생된 주민들이라는 것은 파벨라가 얼마나 위험한 지역인지를 실감하게 했다.
그러던 곳이 브라질 출신 감독이 리우의 파벨라를 배경으로 만든 영화 "신들이 버린 도시, City Of God"가 전 세계인의 이목을 끌면서 호시냐에 관광객들의 발길이 잦아지기 시작했다. 거기에다 2014년 월드컵을 계기로 브라질 정부가 호시냐의 치안 조직을 장악했고, 가난과 범죄의 온상이라는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어보려는 호시냐 주민들의 노력이 더해지면서 수익을 파벨라 주민들과 나누는 조건으로 파벨라 투어 상품이 만들어졌다. 그러기에 우리의 오늘 가이드 투어 역시 그런 조건이 따르는 투어였으며, 여행사에서 나온 가이드 외에 호시냐 안에서는 그 곳에서 나고 자란 젊고 잘 생긴 가이드가 따로 나와 유창한 영어와 유머로 우리를 안내했다. 그는 가는 곳곳마다 아는 이들과 인사를 나누며 어딘지 불안해 하는 우리들을 안심시켰다.
파벨라 호시냐의 전깃줄은 빈민촌의 대표적 상징물로 인식되었다.
'파벨라'는 포르투갈어로 "꽃"을 뜻한다. 빈민촌을 꽃이라 하다니,,,, 산허리에 빼곡히 들어앉은 집들의 모양이 마치 꽃처럼 보인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었다. 아이러니했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달동네니 빈민촌이니 하며 부르기가 뭐했던 모양이다. 빈부의 격차가 극심하기로 자자한 남미 여러 나라들의 깊은 속사정을 스쳐가는 여행자가 얼마나 알겠는가마는 브라질 정부에서 빈부 격차 해소와 빈민 구제를 위한 정책을 꾸준히 펼치고 있다는 소식은 반가운 일이었다.
그렇지만 이렇게 전봇대에 전깃줄이 얼키설키 얽혀있는 모습은 아무래도 이해하기가 어려운 모습이었다. 궁금해 하는지를 아는지 가이드는 우리를 전봇대 아래로 데려가더니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파벨라'의 전기는 전부 무료다. 돈을 내고 전기를 쓸 여력도 없거니와 돈을 내고 쓰려는 사람도 없다. 전기가 필요하면 저렇게 전봇대에 올라가 선을 연결해 전기를 끌어다 쓰면 그것으로 그만이라 했다.
호시냐의 삶
우리의 역사에도 '나랏님도 어찌할 수 없었던' 빈민의 시대가 있었다. 불과 100년도 채 안된 시기의 우리 상황을 굳이 들춰낼 것까지도 없겠지만 '나랏님도 어찌할 수 없다'는 그 가난을 우리는 강력한 리더십을 지닌 나랏님 (정부)님 덕분에 또는 산업화 시대의 불꽃같은 시대적 흐름을 잘 타고 열심히 일한 덕분에 훨훨 벗어던지고 지금에 이르렀다는 것은 자랑스런 일이다.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릴지는 모르겠지만, 얼마나 많은 노력과 비용이 들지 알 수는 없는 일이지만 언제가는 이곳에도 분명히 밝은 햇살이 가득한 시절이 올 것이라는 기대를 안고 투어를 계속했다.
지붕 위의 파란색 물탱크들이 결코 낯설지 않다.
호시냐의 저자거리쯤 되는 곳이다.
파벨라 호시냐 왼편을 감싸고 있는 거대한 암벽은 돌들이 무너져 내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시멘트로 보완을 해놓았다.
벌집처럼 다닥다닥 붙어있는 수많은 집들과 지붕 위의 파란색 물탱크들, 암벽 아래로 길게 이어진 인공수로가 도시의 열악한 환경을 말해준다.
집들은 비록 저마다의 일정한 모양은 갖추었으나 어느 곳을 돌아봐도 미관이나 보건, 안전을 고려한 계획된 도시구획은 아니었다. 땅이 있으면 집을 지었고, 새로 들어오는 사람은 좁은 길 하나 띄우고 또 그 옆에 집을 지었다. 이곳 호시냐에 그렇게 집들이 지어졌고 집들 사이로 골목이 형성되었다.
파벨라는 19세기말 브라질 노예 해방(1888) 이후 마땅히 갈 곳이 없던 노예들이 하나둘 모여들면서 처음 형성되기 시작했는데, 브라질 역사상 가장 끔찍한 내전이었던 카누도스 전쟁(1893~1897)에서 돌아온 군인들과 그 가족들 2만명이 1897년 리우의 프로비덴시아 언덕에 정착하면서 그 세가 확장되었다.
이 언덕은 자연스럽게 카누도스 파벨라 언덕을 떠올리게 했고, 자연스럽게 '파벨라'라는 이름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하지만 일각에서는 빈민들이 언덕에 마을을 만들 때 그 속도가 마치 들꽃이 번지듯 빨랐기 때문에 "들꽃'의 포르투갈어인 '파벨라'라는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하고, 도시 언덕배기마다 집이 빽빽하게 들어찬 모습이 멀리서 보면 활짝 핀 꽃봉오리 같아 파벨라라는 이름이 붙여졌다고도 했다.
이렇게시작된 파벨라는 1940년대의 주택 대란과 1970년 이후 도시의 발전과정에서 수많은 농어촌 산간으로부터 사람들이 몰려들면서 그 규모가 확대되어 지금에 이르렀다고 한다.
빈부 격차의 극심한 현상이 한눈에 들어왔다.
가이드가 이끄는 손길을 따라 현지인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보기 위해 한 건물의 옥상으로 올라갔다. 이들의 살아가는 모습을 본다는 것 자체가 지극히 피상적이고 관념적일 뿐이지만 그럼에도 느낌은 분명했다. 가장 가난하다는 사람들이 산다는 파벨라 호시냐, 그리고 부자 중에서도 최상층 부자들이 산다는 남쪽지역 해변가의 아파트들이 한 화면에 들어왔다. 여행 초기에 들렀던 볼리비아의 라파스가 떠올랐다. 가난한 자들은 높은 곳으로 높은 곳으로 올라 가야만 했던 곳.
골목과 언덕 또 골목으로 이어지는 호시냐는 쉽게 표현하면 '달동네' 그것이었다.
귀에 익은 이름들, 펠레, 베베토, 로마리오,,,,
파벨라 호시냐의 신형 아파트
삶은 진화하기 마련이다. 우리에게 1960,70년대는 농어촌을 떠나 오직 꿈과 삶을 찾아 서울로 서울로 발길이 향하던 시절이었다. 도심 외곽의 구릉들은 이들에게 천혜의 주거지였고 벽돌과 루핑으로 하룻밤만에 뚝딱 집이 지어졌다. 그렇게 일단 집을 짓고 들어 앉으면 제아무리 소유권을 갖고 있는 당국이라해도 어찌하지 못했던 그런 시절이었다. 그러다 나라가 조금쯤 부유해지자 도시미관이라는 타이틀을 달고 이들 산동네 달동네에 시영아파트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
8평, 11평, 13평, 가장 크다고 해봐야 17평이 최대였다. 방 두 개에 연탄 부엌, 한 평도 안되는 거실이 전부였고 화장실은 층별로 한곳에 모여 있었다. 과연 그런 아파트가 존재하기는 했을까 하는 의심이 들겠지만 그때만해도 이 아파트들은 상당한 인기가 있었다.
그런데 이곳에도 그런 아파트들이 들어서 있었다. 규모도 아마 우리의 초기 아파트들과 크게 차이가 날 것 같지 않은 그만그만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의 아파트들이 단조로운 회색 일변도였다면 이곳의 아파트들은 화려한 원색을 갖추고 있다는 것쯤일까?
언제쯤이면 살기 좋은 세상이 올까? 때를 기다리는 것은 어제나 힘들고 버거운 일이다. 하지만 변화의 물결은 어느 순간 쏜살같이 달려와 한순간에 세상을 뒤집어 놓기도 한다.
호시냐의 골목을 현지 가이드가 앞장서 걷고 있다.
호시냐의 골목길을 걷다보면 집을 짓다 말고 그대로 사는 현장이 흔하게 눈에 들어온다. 한쪽 벽은 그냥 텅 비워둔 채로, 창문은 천으로 가려 놓고 그냥 살고 있다. 당장 가진 돈이 없으니 먹고 살면서 한두 푼 모아지면 집을 짓고, 멈췄다가 또 지으면서 그렇게 살아간다고 했다. 집을 짓고 있다는 분명한 목표 의식은 삶을 지탱해주는 가장 중요한 요소 아닐까?
파벨라 호시냐의 아랫동네는 제법 번화했다. 노란색 가운을 입은 바이크는 언덕지대인 이곳의 교통수단이다.
완충지대?
이 도로를 중심으로 빈부가 갈렸다. 어쩌면 라파스의 상황과 이리도 똑 같을까? 그곳에서도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부자와 가난한 이들의 삶의 터전이 나뉘어 있었는데,,,,
사진의 스포츠 시설은 정부당국이 호시냐 주민들의 복지를 향상시키고 빈부 격차를 해소하기 위한 정책으로 호시냐 주민들을 위해 지어준 무료 스포츠 시설이라고 했다. 투어 중 스포츠 센터 수영장에서는 어린 아이들이 강사의 지도를 받으며 수영에 열중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는데 수영이외에도 다양한 종류의 스포츠가 전문가의 지도 아래 이루어지고 있다고 했다.
파벨라 호시냐. 집들이 들어선 모습이 활짝 핀 꽃처럼 보이는지 다시 한번 돌아봤다.
호화스런 부촌의 고급 아파트.
아니러니하게도 빈민촌 투어를 했으면서도 마무리는 이 고급 아파트 아래에서 매듭되었다. 파벨라는 현존하는 브라질의 두 사회, 극심한 삶의 격차가 드러나는 현장이었다. 물도 전기도 정부가 지원을 해주는 곳이지만 파벨라 호시냐는 두 개의 공식적인 도로 외에는 지도 상에 존재하지 않는 곳이라 했다. 세계 7위의 경제 대국 브라질의 양극화가 어디 쯤에서 균형을 이루게 될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첫댓글 아름다운 해변의 모습니다
세계적으로도 유명하죠
날씨가 오락가락한게 흠이었군요
그래도 즐겁게 보내는이들과
신나게 식사준비를 해주는 현지 마담을 보면 여행자의 마음을 즐겁게해주는데 한몫하네요
이번 남미 여행에서 '여행의 진정한 즐거움은 기대하고 예상했던 것으로부터가 아니라 지극히 우연한 것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라는 사실도 배웠습니다. 브라질 숙소의 마담이 그런 즐거움을 주리라고 어찌 예상이나 했겠습니까. 말이 없어도 그렇게 대화가 이루어지더군요. ^^*
지구촌 어딜가나 서민과 어려운 빈민들은 있지만 파벨라투어는 독특하고 여러가지 생각도 들게하네요.
우리나라 70년대처람 급속한 산업화에 따른 후유증을 가지고 투어로 까지 승격시켯네요 흥미롭습니다
우리는 깔끔히 쓸어버렸는데....ㅠ
그랬습니다. 우리에게는 완전한 과거의 기억으로만 존재하는 '한 때의 사회상'이었고, 브라질에서는 여전히 오늘을 이어가는 '현존하는 사회상'인 거지요. 아마도 브라질의 이런 사회 구조는 당분간 쉽게 사라지지는 않을 것 같더군요. 우리와는 사는 방법에서부터 생각하는 것 자체가 커다란 차이가 있으니까요.
파베라가 그런뜻이군요
처음으로 알았네요
여행을 하면서 알지 못했던 많은 것들을 경험하였습니다.
그로 인해 어떤 때는 새로운 세상을 만난 듯한 기분이 들기도 했고, 어떤 때는 내 자신의 세계가 지나치게 좁고 편협한 것을 안타까워 하기도 했습니다. 그런 면에서 여행은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하는 가치 있는 과정이 아닌가 합니다. 저 역시 이번 여행이 아니었다면 '파벨라'를 이렇게 상세하게 기억하지 못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