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상 콘텐츠 산업' 절망과 희망] [1] 지상파 횡포에 신음하는 독립제작사
외주제작 20년의 그늘… 제작비는 절반만 주고 광고수익·저작권 가져가
편성 따내려 출혈경쟁… 제작사 100개, 지상파 3개 불리한 조건 응할 수밖에
"드라마 제작하면서 집 한 채 날렸고 나머지 한 채도 담보로 잡혀 제2금융권의 대출을 받아놓은 상태입니다. 경영상의 과실도 있겠죠. 하지만 드라마 제작사 90% 이상이 이런 처지에 있다면 구조적 문제가 있다고 봐야 하는 것 아닙니까?"회사를 세운 지 5년된 한 드라마 제작사 대표의 하소연이다. 그는 "한국에서 드라마를 제작한다고 나섰다가 신용 불량자 된 사람이 하나 둘이 아니다"라며 "한국에서 가장 왜곡된 시장 구조를 갖고 있는 게 바로 지상파 위주의 방송 콘텐츠 시장"이라고 했다. 우리나라 대부분의 방송 콘텐츠 제작자들은 "지상파 방송사에 절대적으로 유리한 환경 때문에 여러모로 사업이 힘들다"고 말한다. 정부는 영상 산업 진흥 명목으로 91년부터 지상파 방송사에 의무적으로 일정 비율의 외주 제작 프로그램을 편성토록 해왔지만 20년이 지난 지금 제작사들은 '밑 빠진 독에 물 붓기'라며 허점 많은 정부 정책에 불만을 쏟아낸다. 대체 어떤 문제가 있는 걸까?
- ▲ 지난 2009년 11월 서울 광화문 광장 앞 도로에서 총격전을 촬영한 드라마‘아이리스’. KBS 2TV를 통해 방영되며 30% 이상 높은 시청률을 기록한‘아이리스’는 해외 판권문제로 제작사와 방송사가 첫 회 방영 직전까지 심각한 갈등을 겪었다. /오종찬 기자 ojc1979@chosun.com
드라마 제작자들은 "방송사의 비현실적 제작비 지급이 가장 아쉽다"고 말한다. 드라마제작사협회에 따르면, 미니시리즈의 경우 편당 실제작비가 평균 2억원 안팎인데, 방송사들이 주는 돈은 대체로 1억원~1억3000만원 선. 한국방송광고공사에 따르면, 평일 미니시리즈에서 앞뒤로 붙는 광고가 모두 팔리면 지상파 방송사는 4억~5억원대의 수익을 얻게 된다. 투자금의 3배에 가까운 액수다. '동이', '신데렐라 언니' 등 20% 이상 시청률을 기록하는 드라마가 주로 광고 완판(完販)을 달성한다. 에이스토리 최완규 작가는 "10년 전만 해도 방송사가 실제작비에 꽤 근접한 제작비를 지급했으나 지금은 절반 정도만 지급하고 나머지는 협찬, 간접광고 등으로 알아서 메우라는 식"이라며 "그러다 보니 제작에 참여한 스태프들 돈도 못 주고 드라마 한 편 찍고 망하는 회사도 나온다"고 말했다. 그러나 KBS 드라마국 김형일 CP는 "제작사들이 드라마를 찍으면서 방송사의 인력·시설·장비를 많이 사용하기 때문에 그런 무형의 비용도 감안해야 한다"며 "많은 제작사들이 드라마를 만드는 과정에서 어려움을 겪는 건 경영에 미숙하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광고 수익을 독점하는 지상파 방송사가 해외수출, 다른 매체를 통한 방영, 관련 상품 출시 등을 통해 부가 수익을 창출할 수 있는 근거가 되는 저작권마저 가져가는 경우가 많다는 점도 지적된다. 드라마 납품 계약을 맺을 때, 많은 제작사들이 콘텐츠에 대한 포괄적 권리를 지상파 방송사에 양도하곤 한다. 해외 판권의 경우에만 3년에 한해 수익을 절반씩 나누는데, 이 또한 지상파 방송사 자회사에서 해외 판매를 담당하면서 수수료 명목으로 전체 수익의 20%를 가져가 실제 제작사 몫은 40%에 불과하다. 한 제작사 대표는 "우리가 만든 작품의 인터넷 VOD 수입이 60억원이라고 들었는데 그걸 방송사에서 모두 가져갔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외주 제작 드라마, 왜 연출은 지상파 PD가?
최근 제작사들은 지상파 방송사의 입김에서 벗어나 저작권을 확보, 해외 마케팅을 하려는 목적으로 사전 제작 드라마를 잇달아 만들고 있지만 이 또한 쉽지 않다. 유통을 쥐고 있는 방송사가 이런 드라마의 편성에 소극적이기 때문이다. 70억원이 들어간 대작 '비천무'는 제작된 지 4년 만에 지상파에 편성됐다. 외주 드라마임에도 지상파 방송사들이 자사 PD들의 연출을 고집하는 것도 드라마 산업 전반에 대한 영향력을 유지하고 내부 PD들을 보호하기 위한 일종의 '텃세'로 해석된다. 드라마제작사협회 김승수 사무총장은 "지상파 출신 PD들만이 드라마를 연출할 수 있다면 우리나라 영상 산업의 발전은 계속 더뎌질 수밖에 없다"며 "제작사 입장에서는 투자 리스크를 안고 기획과 제작을 하고 있으면서도 막상 연출은 지상파 방송사 PD가 하고 있으니 더욱 제 목소리를 낼 수가 없다"고 말했다.
◆편성 따내기 위해 출혈 경쟁
스타맥스는 '막장' 논란 속에서도 시청률 40%를 돌파했던 '아내의 유혹'과 시청률 30%를 넘나들던 '가문의 영광' 등 '대박' 드라마를 동시에 제작한 회사. 1년 전만 해도 20여명 이상 직원을 거느리고 연 매출 100억원 이상을 올렸던 이 회사는 현재 직원 5명이 출근하고 있으며 매출은 전혀 없는 상태. 신병철 사장은 " '조강지처 클럽'의 시청률이 높아지자 원래 계획보다 6개월 더 방송됐고 그 과정에서 이미 제작이 시작된 우리 드라마 '가문의 영광' 편성이 늦어졌다"며 "당초 예정했던 시기에 제작비를 받지 못해 자금 사정이 악화됐다"고 말했다. 제작사들이 지상파 방송사들의 불합리한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간단하다. 채널은 3개에 불과하지만, 편성을 두고 경쟁하는 제작사는 100여개에 달하기 때문. 제작비·저작권 등에서 불리한 조건에 계약에 응하는 것은 물론, 예정된 편성이 수시로 바뀌어 피해를 보게 돼도 불평을 할 수 없다. 숙명여대 정보방송학과 박천일 교수는 "드라마 저작권을 제작사가 아니라 배급사라 할 수 있는 지상파 방송사가 갖는 상황이 가장 안타깝다"며 "이를 막을 수 있는 법적·제도적 조치가 마련되면 제작사들이 안정된 자본력을 바탕으로 더욱 좋은 작품을 만들어 새로운 한류 열풍을 만들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