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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전도비(三田渡碑)를 아십니까?
- 제2부 : 청태종(淸太宗), 병자호란(丙子胡亂)을 일으키다.
청태종 홍타이지는 정묘호란(丁卯胡亂)이후 조선에 품었던 불만들을 일일이 열거하며
청(淸)의 힘과 역량이 명(明) 못지않게 커졌는데 조선은 명(明)만 편들고 자신들을 배려
하지 않고 무례하다며 정묘호란(丁卯胡亂)때 맺은 형제(兄弟)의 관계에서 군신(君臣)의
관계를 요구한다.
조선이 이를 거절하자 1636년 12월15일, 청태종이 12만 군사를 직접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조선을 침공한다. 이것이 병자호란(丙子胡亂)이다.
조선에서는 의주, 평양, 황주, 평산등 각 산성에서는 청군을 맞아 싸울 준비를 하였으나
청군은 각 산성에서의 전투를 피하고 곧바로 대로를 따라 한양으로 돌격해왔다. 조선의
의표를 찌른것이다.
각 산성에서는 청군(淸)軍)이 전투를 않고 그냥 지나가자 청군(淸)軍)의 뒤를 쫏아가는
이상한 전투 상황이 벌어졌다.
한양에서는 소현세자의 세자빈 강씨와 인조의 둘째 아들 봉림대군을 비롯한 왕가와 일부
노 대신들을 미리 강화도로 피신 시키고 인조도 만약의 경우 정묘호란때 처럼 안전한 강화
도로 피난을 가기로 계획을 하였으나 조정에서 우왕좌왕 하고 설마설마 하는사이 가공할
기동력을 가진 청군은 이미 한양에 도착해 정묘호란때 인조가 강화도로 피신하였던 사실을
알고 강화도로 가는길을 차단해 버렸다.
남한산성(南漢山城)으로 피신 하려하였으나 그마져도 시간이 없었다.
이때 조정에서는 명(明)과의 화친을 주장해서 나라를 망친자 라고 매도 당했던 이조판서
최명길이 적진에 직접 들어가 적장에게 술과 고기로 담판하며 시간을 버는사이 인조와
장남 소현세자 일행은 도성을 빠져나와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다.
피신하는 시간은 밤길이었다.
인조의 차거운 겨울 밤길은 멀고도 처참했다.
이후 남한산성에 도착하였으나 병력과 군량미등이 여의치 않아 다시 강화도로의 파천
(播遷)을 시도하였으나 추위로 길이 미끄럽고 한강물이 얼어 배를 띄울 수 없어 실행하지
못한다.
이후부터 남한산성 에서의 힘겨운 나날들이 시작된다.
남한산성 약도
남한산성을 포위한 청군(淸軍)은 청(淸)과 강화를 하려거든 임금의 동생과 조정대신을
인질로 보내라는 청군의 요구에 가짜 왕제자(王弟者)자와 가짜 대신(大臣)을 보냈다가
가짜임이 발각되어 일이 더 꼬이게 만들기도 하였다.
인조를 변장시켜 남한산성을 탈출 시키자는 의견도 있었으나 이루지 못했다.
여전히 이조판서 최명길을 중심으로 화친을 주장하는 주화파(主和波)와 예조판서 김싱헌
을 중심으로 결전을 주장하는 척화파(斥和波)의 의견대립 사이에서 인조는 갈피를 못잡고
하루하루가 지나는 사이 군량미와 말먹이 마초는 점점 줄어들었고 엄동설한 추위에 가마니
를 이불삼아 견뎌야하는 병졸들의 하루하루는 정말 힘들었다.
하루는 진눈개비가 내려 병졸들이 진눈개비를 온몸으로 맞고 추위에 떨자 인조는 하늘에
눈물로 절규한다.
“이 외로운 성(城)에 들어와 믿는것은 하늘 뿐인데,
찬비가 갑자기 내려 모두 흠뻑 젖었으니 끝내는 얼어 죽고 말 것입니다.
이 한 몸이야 아까울 것 없지만
백관과 만백성이 하늘에 무슨 죄가 있습니까?
조금이라도 날을 개게 하시어 우리 신민들을 살려 주옵서소.“
명(明)에 대한 충성과 의리를 지키려다 조선(朝鮮)이 이토록 참담한 지경에 내몰렸는데
명(明)에 대한 조선(朝鮮)의 일편단심(一片丹心)을 명(明)나라는 알고나 있을까?
지방에서 지원군이 찾아와 도와 주기를 학수고대 하였으나 강원도,경상도,충청도 등에서
구원병이 올라왔지만 패전의 소식만 있을뿐 승전의 소식은 없었다.
12월 15일 남한산성에 입성한 이후 견딜수있는 식량은 45일치 뿐이었다.
남한산성에 입성하여 고단한 나날을 보낸지 벌써 17일, 병자년(丙子年)이 저물고 1637년
정축년(丁丑年)이 밝아왔지만 달라진 것은 없고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조선을 침략하기전에 청태종(淸太宗)은 장졸들에게 함부러 조선백성에게 약탈을 자행 하
지말라고 지시했지만 그것은 지시일뿐, 몽골병들은 보상을 바라고 청(淸)에 귀순했고 전
쟁에 참여한자 들이기에 이들은 약탈에 광분하였다.
성(城)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가 아무리 참혹해도 포위된 산성(山城) 안에서 조정이 할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걸전을 벌일 능력도, 화친을 이룰 전망도 불투명한 처지였다.
산성(山城)이 완전히 포위된 상태 이다보니 적(敵)에 대한 정보(情報) 부족으로 무엇하나
확신을 갖고 정할 수 가없었다.
남한산성 행궁 안내도
남한산성 행궁 (현 행궁은 2002년에 중건됨)
행궁내의 외행전
행궁내의 내행전 중앙 : 인조가 주로 거주 하였던곳(그러나 현 건물은 2002년에 중건된
건물이다)
좌승당
인조는 대신들을 불러놓고 토론을 벌였다.
논란 끝에 “나라가 보전된 뒤에야 와신상담(臥薪嘗膽)도 할수있다.”는 이조판서 최명길의
의견을 받아들여 결국 화친(和親)의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예상되는 청(淸)의 요구 중에 두가지만은 따를 수 없다는 방침이었다.
하나는 인조를 성(城)에서 나오라는 요구이고, 다른하나는 소현세자를 인질로 내 보내라는
요구였다.
이 두가지를 마지노선으로 정하고 과거의 형제관계를 유지하겠다는 뜻이었으나 이것은
조선의 희망 사항일 뿐이었다.
대표를 보내어 적진에 들어가 화친을 청했다.
그러나 이들은 청태종(淸太宗) 홍타이지를 만나지도 못하고 홍타이지의 유시문에 절을
네 번하고 가져가라고 강요를 하였고, 분위기에 압도되어 결국 절을 네 번하고 홍타이지의
유시문을 가져왔다.
유시문의 주요내용은 조선은 그동안 명(明)에 붙어 청(淸)을 배신했다는것, 그리고 1636년
자신의 청황제(淸皇帝) 즉위식을 알리기 위하여 보낸 사신단을 만나 주지않고 풋대접하여
돌려보낸 것이 전쟁의 원인이라며 그 이외에 여러가지를 조목조목 열거했다.
유시문을 접한 조정은 또 홍타이지의 유시문 회답에 대한 고민에 빠졌다.
인조는 다시 대신들을 불러 답서의 서식과 단어, 내용에 들어가는 글자 한자한자를 논란을
벌인 끝에 답서를 완성하였다.
주요 내용은 홍타이지의 질책은 대부분 인정하며 사죄하고, 청태종을 황제로 인정하되
칭신(稱臣), 즉 스스로 청(淸)나라의 신하(臣下)가 되는것은 거부하며 명(明)에 대한 충성
도 쉽게 포기 할수없으니 선처를 바란다는 내용이었다.
수백년동안 오랑캐로 멸시해온 여진족 추장에게 칭신(稱臣) 한다는 것은 생각하기조차
싫은 일이었다.
회답 내용중 한 구절을 소개하면,
“죄가 있으면 치고, 죄를 뉘우치면 용서하는것이 대국(大國)의 도리입니다.
정묘년(丁卯年)의 맹약을 생각하고 생령을 불쌍히 여겨 소방에게 새로워질 수있는 기회를
주십시오. 하지만 대국이 용서하지 않고 기어이 병력으로 추궁하려 한다면 소방은 스스로
죽음을 기약하고 싸울 뿐입니다.“
개과천선(改過遷善)할 기회를 달라고 부탁하되, 여의치 않을 경우 맞서 싸우다가 죽을수
밖에 없다고 하며 청(淸)의 감성에 호소하고 있다.
그러나 홍타이지는 다시 거부했다.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을 출성(出城)하고 청(淸)나라를 반대했던 척화파(斥和波)
대신(大臣) 2-3명을 결박하여 성(城)밖으로 함께 내보내라는 것이다.
인조를 성(城) 밖으로 출성시켜 자신앞에 무릎을 꿇게하므로서 자신이 황제 즉위식때
조선에 파견했던 사신을 풋대접하고 거부당했던 그때의 분노(忿怒)를 복수 하고샆은
것이었다.
그러면서 남한산성 안으로 대포를 쏘아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며 인조(仁祖)의 출성을
요구하는 무력시위를 하였다.
인조는 청(淸) 진영에 다시 국서를 보냈다.
홍타이지를 폐하라고 부르고 연호도 명(明)나라 연호가 아닌 청(淸)나라 연호를 사용하
므로 사실상 청(淸)의 요구룰 모두 수용하는 항복 문서 였다.
그러나 단 한가지 끝까지 거부한 것이 있었다.
인조의 남한산성(南漢山城) 출성 문제였다.
인조가 남한산성 출성을 끝까지 회피하려 하였던 데에는 두가지 이유가 있었다.
첫째는 홍타이지가 자신을 심양으로 끌고 갈지도 모른다는 공포심.
둘째는 인조가 반정(反正)으로 광해를 몰아내고 자신이 임금에 오를때 광해가 친명배금
(親明排金)의 국시를 어기고 명(明)과 후금(後金) 사이에서 중립외교를 취한것을 비판하며
광해를 임금에서 내 쫏아낸것이 명분중의 하나였는데 이제 그 홍타이지 앞에서 무릎을 끓
으면 지존으로서의 위신을 잃어 왕 노릇하기 힘들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대표적 척화파(斥和波) 2-3명을 결박하여 함께 출성(出城)하라는 요구도 사실 실행
하기 힘든 조건이었다.
-. 강화도(江華島)가 무너지다.
이 절박한 상황에 또 다른 비보(悲報)가 날아들었다.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이다.
이 추운 산성에서 버틸 수 있었던것은 그래도 피 붙이들이 있는 강화도 만큼은 안전할거라
는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인조(仁祖)와 소현세자 일행이 남한산성에 입성하기 앞서 며느리인 세자빈 강씨와 인조의
차남 봉림대군,그리고 노 대신들 일행이 강화도로 피신갈 때 강화도 방어를 책임질 검찰사
를 물색하였다.
이때 인조가 영의정이면서 체찰사를 겸직하고있는 김류에게 묻자 김류가 자신의 아들
김경징이 임무를 잘 수행 할것이라고 추천하여 인조가 이를 받아들여 김경징을 검찰사로
임명했다.
그런데 이 김경징의 검찰사 임명이 비극의 씨앗이 되고 말았다.
김경징은 강화도 방어를 책임지고 그곳으로 들어간 왕실 인척들의 안위를 책임질 그릇이
아니었다.
권한을 위임받은 김경징은 김포에서 강화도로 가는 배를 띄울때 부터 세자빈(世子嬪)이나
봉림대군등 왕가 일행은 제쳐두고 자기의 가족과 재물등을 실어나르기에 급급했고 강화도
에 들어가서도 방어대책은 커녕 매일 술잔치를열고 주변 고을에서 곡식을 운반해 오는데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그러는사이 청군(淸軍)은 한강과 임진강에 있는 100여 척의 배들을 모두 끌어모아 수리하
여 강화도를 침공할 준비를 철저히 하였다.
마침내 강화도를 침공하는 소식이 알려지자 그때야 병력을 배치하는등 대치하였으나 제대
로 싸움한번 못해보고 순식간에 무너지고 말았다.
강화도를 점령한 청군의 노략질과 살상은 너무나 처참했다.
많은 아녀자들은 목메어 자결을하고 또 많은 남편들도 처와 자식을 죽이고 자신도 자결하
는등 많은 참상이 이루어 졌고, 이 비극은 김경징의 여자들에게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경징의 모친, 아내, 며느리 등도 모두 자결했다.
이 참상을 기록한 사서에는 “시체는 쌓여 들판에 깔리고 피는 강물을 이루었다.” 고 쓰여
있다고 전한다.
그런데 그후에 김경징은 어떻게 되었을까?
이 와중에 김경징는 배를타고 도망쳐 강화도를 빠져나왔다.
그러나 그후 결국 김경징은 지난날의 행적이 알려지면서 사형을 받게된다.
- 남한산성(南漢山城)도 무너지다.
청군(淸軍)은 강화도에서 사로잡은 세자빈 강씨와 봉림대군 을 비롯한 왕실 고관들을 남
한산성으로 인질로 데리고와 이들을 앞세워 인조의 남한산성에 대포를 쏘며 인조의 출성
을 더욱 압박한다.
처음에는 소현세자만을 출성시키려 하였으나 홍타이지는 이것도 거부한다.
드디어 인조는 남한산성(南漢山城)에서 나가기로 출성(出城)을 결심한다.
강화도 마져 함락되어 피붙이들이 인질로 끌려와있는 상황에서 더 버틸 여력이 사라진
것이다.
인조가 출성한다는 국서를 홍타이지에게 보내자 홍타이지의 조유문이 왔다.
그 내용은 “ 지난날의 그대의 죄를 모두 용서하고 군신관계를 유지하되” 향후 지켜야할
사항들을 조목조목 열거하였다.
-. 명(明)나라 와의 모든관계를 끊는다.
-. 명(明)나라 연호대신 청(淸)나라 연호를 사용한다.
-. 조선의 상국을 명(明)나라에서 청(淸)나라로 바꾼다.
-. 소현세자와 봉림대군 그리고 고관대작들의 자식을 인질로 보낸다.
-. 향후 청(淸)이 명(明)을 공격할 때 군대를 동원하여 청(淸)을 원조한다.
-. 청(淸)의 주요 기념일에 대신을 파견하고 예물을 바친다.
-. 사로잡힌 포로들이 도먕쳐오면 반드시 체포하여 보낸다. 만약 포로들을 데려가려거든
돈 을내고(속환) 데려가라. (그런데 이조항이 나중에 큰 사회 문제로된다.)
-. 해마다 일정량의 조공을 한다. 이조항도 사실 감당하기 힘든 조항이다.
-. 기타 항복조건을 통해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인조를 왕의 자리에서 끌 어 내릴 수
있는 이중 삼중의 그물망을 쳐 놓았다.
이상의 장치들이 나중에 소현세자가 심양에서 9년간의 볼모생활을 마치 고 돌아왔을때,
왕권 유지에 급급한 인조에게는 청태종(淸太宗) 으로부터 인정받은 소현세자가 이제는
뜨거운 감자, 정적(政敵)이 되었다.
인조는 소현세자가 원수인 청(淸)나라를 멸망시킬 북벌(北伐)을 기대하는데 반해 오히려
청(淸)나라의 문물을 배우는 북학(北學)에 힘쓰는것이 못 마땅하였다.
결국 소현세자는 귀국 두달만에 의문의 죽음을 당하고 인조는 차남 봉림 대군을 세자로
책봉한다.
소현세자의 죽음에 대하여 독살이라는 공식 기록은 없지만 역사학자들은 거의 100% 인조
의 독살로 여기고 있다.
신체의 7구멍마다 피가 흘러나왔고 시신은 검은색이 되었다고 한다.
소현세자에게는 세자책봉 1순위인 12살 석철이라는 장남이 있었는데
인조는 소현세자의 동생, 즉 자신의 차남 봉림대군을 세자로 책봉하고
이후 17대 임금 효종 이된다.
세자빈 강씨 까지 죽이고 소현세자의 아들 3명을 모두 제주도로 유배 시
킨다.
이후 막내를 제외하고 두아들은 제주도에서 풍토병으로 죽는 비참한 상 황이 벌어진다.
오늘날 많은 역사학자들이 소현세자의 죽음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한다.
- 만약 소현세자가 죽지않고 정상적으로 인조의 뒤를이어 왕이 되었더라면
우리나라 역사가 바뀌었을 것이라고 말한다.
소현세자는 심양에 있을때 청(淸)나라 문물은 물론, 독일 선교사 "아담샬 “을
만나 서양 문물을 많이 전수받고 처신을 잘해 청태종(淸太宗)으로 부 터도 인정
을 받았다.
이것이 인조에게는 소현세자가 눈의 가시가 되었다.
소현세자는 청(淸)나라에 있으면서 처음으로 오늘날의 지구본과 같은 지구의(地球
儀)를 보게된다.
이 세상은 오직 중국만이 다 인줄 알았는데 아시아 대륙은 물론 유럽, 남,북아메리
카, 아프리카등 여러나라가 있고 중국은 그중의 일부라는 사 실을 처음 알았을때 많
이 감격하고 놀랐을 것이다.
소현세자가 왕이되어 서양문물을 일찍이 개방하여 받아 들였더라면 우리 나라는
지금쯤 아마도 일본보다 더 발전 하였을 지도 모른다는 것이다.-
다시 본론으로 돌아가 인조가 남한산성(南漢山城) 출성(出城)을 결정한 뒤, 인조가 항복
의식을 어느수준에서 행할것인지가 문제였다.
이 문제를 논의하기위해 최명길등이 청(淸軍) 진영에 갔을때 이것은 논의가아닌 일방적인
통고였다.
함벽여츤(銜壁輿櫬) 만은 면하게 해준다는 것이다.
함벽여츤(銜壁輿櫬)이란, 인조의 손을 뒤로 묶은채 구슬을 입에물고 관을 메고 앞으로 나
아가는 항복의식 이란다
.
이 의식은 목숨을 포함한 모든 것을 청(淸)에 마낀다는 상징의 뜻이란다.
함벽여츤(銜壁輿櫬) 의식은 면하였지만 이후 항복의식 순서를 일방적으로 전하고 의식
재현까지 연습하였다.
삼전도(三田渡)에 9계단의 의식제단을 만들어놓고 1637년 1월 30일을 항복의식 날자로
통보해 왔다.
1월 30일 인조가 남한산성을 출성할 때 용포를 입어서도 안된다고 하여 인조와 소현세자
는 푸른색의 옷을 입고 죄인은 남한산성의 정문(正門)인 남문(南門)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하여 서문(西門)을 통해 나왔다.
南門 (至和門)
서문(友誼門) : 인조(仁祖)가 이 문을 통하여 출성(出城)하였다.
삼전도에는 9계단의 높은 수항단을 설치하고 군사들을 도열시켜놓고 장막을 가려놓은채
기다리던 홍타이지는 인조가 도착하자 배천(拜天)이라는 의식을 통해 조선이 한 집안이
되었다고 하늘에 고한다.
이어 홍타이지가 9계단의 수항단에 오르자 인조(仁祖)는 그 아래 무릎을 끓고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의 예를 행했다.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란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는 여진족의 의식
이다.
실제로는 한번 절하고 세번 머리를 땅에 조아리고 두번째 절하고 세번 머리를 조아라고
다시 세번째 절하고 또 세번 머리를 조아리는 의식이다.
머라를 조아릴때 청 관리가 이마를 땅에 세게 부딪치라하여 이마에서 피가 났다고 한다.
우리 조선의 한 임금이 오랑캐라 부르던 나라의 수장에게 행한 이 굴욕적인 장면을 상상
하니 너무 비참하고 안타갑다.
의식이 끝난후 강화도로 피신갔던 소현세자 빈과 봉림대군도 재회하는 기회를 주어 삼전
도는 순식간에 통곡의 바다로 변했다.
인조가 항복의 예를 마치고 환궁하므로서 공식적으로 전쟁은 끝났지만 조선 사람들의 참
혹한 고통은 이제 막 시작되었다.
볼모로 끌려가는 소현세자 부부와 봉림대군 부부,그리고 전국 각지에서 잡힌 수십만명의
포로와 피로인들이 청군의 감시속에 심양을 향해 걷고 또 걸어야했다.
군인이나 전투요원들이 청군에게 잡힌 사람을 포로라하고, 민간인들이 청군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피로인 이라고 했다.
이 포로와 피로인들의 정확한 인원을 알수없지만 2-3십만명, 많게는 5십만 이라고 되어
있고 이들의 행열이 하루종일 이어졌다고 한다.
그들 앞에 과연 어떤 운명이 기다리고 있었을까?
심양의 남탁거리에는 노예 매매시장이 열렸다고 한다.
조선사람이 자기의 자식을 데려오려면 속환(贖還)이라하여 돈을 주고 데려와야했다.
처음에는 1인당 30량 정도였는데 나중에는 몸값이 올라 1500량 까지올라 조선의 고관대
작이나 부자들의 자식들은 돈을 주고 데려왔지만 일반 사람들은 꿈도꾸지 못했다.
여인들의 삶은 더욱 비참했다.
많은 여인들이 청 관리들의 첩살이를 하다보니 본처로부터 갖은 학대와 멸시를 받아야했
고 학대에 못이겨 도망쳐오거나 청(淸)나라로 끌려가는 과정에서 도망쳐온 여인들도
조선(朝鮮)에서도 환영을 받지못했다.
이 여인들을 “환향녀(還鄕女)”라 하였으나 나중에 변질되어 이들을 지조를 지키지 못한
여인이라하여 이들을 “화냥년” 이라고 불렀다.
청군에게 겁탈당하여 낳은 아이들을 호로자식(胡奴子息),또는 후레자식이라 하여 이들은
평생 천대를 받으며 살아야했다.
청군에게 끌려가지전에 혀를 깨물거나 목메어 자결하면 열여(烈女)가되고, 그렇지 못하고
살아돌아오면 화냥년으로 비난받아 본 남편들이 재결합을 거부하여 사회적 문제가 되자
이들은 어쩔수없는 국난에서 빚어진 일이었다며 이렇면 안된다고 이번에도 최명길이 나섰
다.
최명길은 홍제천을 회절강(回節江)이라 이름짓고 이 환향녀(還鄕女)들을 이회절강에서
몸을 씻으면 절개를 회복 시켜주자고 하였으나 반대여론에 밀려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인조가 환궁 했을때 당장 눈앞에 펼쳐진 전쟁의 상처는 참혹했다.
도성의 관아와 인가는 불타고 여기저기 참혹한 시신들이 나딩굴었다.
인조는 백성들에게 유시문, 즉 오늘날의 대 국민 사과문을 발표한다.
그 내용중 일부를 발췌해 보면,
“돌아보건대 백성을 기르는 자리에 있으면서
나 한 사람의 죄 때문에 모든 백성에게 화를 끼쳤다.
백성의 부모가 되어 이 책임을 누구에게 돌릴 것인가.
이 때문에 고통과 괴로움을 머금고 오장이 에는 듯하여
뜬 눈으로 밤을 새운다.“
이후에 나라를 이지경으로 만든 책임론이 대두되어 척화파(斥和波)들의 처벌이 단행되
었고 한동안 온 나라가 어수선해진다.
이후에 청(淸)은 조선(朝鮮)을 길 들이기 위해 인조(仁祖)에게 입조(入朝)와 왕위교체
(王位交替)라는 두가지 카드로 조선을 계속 압박하였다.
입조(入朝)란 인조(仁祖)를 심양으로 불러들여 청(淸) 황제(皇帝)를 직접 알현토록 하는것
이고, 왕위교체(王位交替)란 말 그대로 맘에 안들면 언제라도 왕을 교체한다는 뜻으로, 청
(淸)은 이 두가지 카드를 슬쩍 흘리는 것 만으로도 인조에게 상당한 두려움을 불러일으켜
자신들의 요구에 순응토록하는 효과를 보았다.
청(淸)은 또한 조선(朝鮮)의 “고관대작들의 자식을 인질로 보낸다”는 항복조건문을 전제
로 고관대작들 을 압박하여 사람들은 조정의 높은 벼슬하기를 기피하는 현상이 나타나기도
하였다.
그 이후 척화파(斥和波)의 대부 김상헌은 청(淸)나라 심양으로 압송되었고, 주화파
(主和波)의 대부 최명길도 심양으로 압송되었다.
그런데 주화파(主和波)의 최명길이 왜 심양으로 압송되었을까?
최명길은 영의정으로 있으면서 1644년 명(明)나라가 멸망하기 전까지는 아직 명(明)나라
가 존재하고 있어 명(明)나라와 연결고리를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광해가 명(明)나라와 후금(後金)사이에서 이중외교를 한 것과 같았다.
이 사실을 청(淸)에 투항한 명나라 장수 오삼계가 청(淸)에 폭로하자 최명길을 심양으로
압송하게 되었다.
김상헌과 최명길은 심양의 한 감방에서 마주하게 되는데 처음에는 서로 떨떠름 하였으나
서로 자기의 의중을 드러내는 시를 주고 받으며 서로의 사람 됨됨이를 알고 그대도 결국을
나라를 위한 충정에서 비롯하였구려 하며 서로 이해하고 화해 하였다고 한다.
역사란 승자의 기록이라서 김상헌은 나중에 60여년의 동안 이어진 노론파 안동김씨 세도
가의 후예들에 의하여 부각되었으나 반대파인 소론파 였던 최명길의 명성은 뭍혀버렸다.
그런데 한 역사학자는 최명길을 가르켜 조선시대의 전 제상들을 통털어 시대 감각이 뛰
어나고, 빼어난 판단력으로 매사를 국가와 백성을 먼저 생각하고 어려울때 몸소 몸을
던져 해결하고 나중에는 결과에 대하여 책임지는 최고의 테크노크라트(전문적 지식이나
기술을 소유한 관료)였다고 인물평을 하였다.
최명길은 선조와 광해시절 “오성과한음”으로 우리에게 명제상으로 잘 알려진 이항복과
이덕형에서 오성에 해당하는 이항복의 제자이기도하다.
본인과 본관은 다르지만 같은 최씨 성의 인물(최명길은 전주최씨, 본인은 강능최씨) 이고
보니 한결 자랑스럽게 생각된다.
참고서적
- 병자호란(2) : 한명기 지음
- 남한산성 : 김 훈 지음
- 만화 박시백의 조선왕조실록(인조편)
- 기타 인터넷
북문 (全勝門)
동문 (左翼門))
]
서문(友誼門)에서 내려다본 전경 : 비교적 경사가 급하다.
南門 (至和門)에서 내려다 본 전경 :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연주봉 옹성(甕城)
남한산성 내 암자 국청사(國淸寺)
병암남성신수비(屛岩南城新修碑)
수어장대(守禦將臺)
남한산성 성벽(城壁) 일부
남한산성비석군(南漢山城碑石郡)
행궁 입장 매표소 ( 65세이상 경노자는 무료)
남한산성 종각의 천흥사 종각
연무관(演
침 괘 정 (枕괘亭)
♣ 남한산성(南漢山城)에는 한옥형태의 음식점들이 많이 있다.
첫댓글 배꼽사진 1장, 역사공부 많이하세요.... 건강하게 보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