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1910년 8월29일 일제가 이완용등 친일파를 앞세워 이 땅을 강제로 병탄한 지 100년이 되는 해입니다. 국새아닌 어새가 날인되어 있고 임금(순종)의 이름이 서명되어 있지 않아 국제법상 조약의 법적효력이 의심되는 한일병탄조약이 체결된 경술국치의 현장에서 오늘 한국.일본의 117개 시민단체가 모여 결성한 '강제병합 100년 공동행동 한일실행위원회’ 주관으로 '통감관저 터'표석 제막식이 거행되었습니다.
아래는 남산의 통감관저 터가 있던 위치입니다. (현 남산 서울유스호스텔 앞 공원위치라고 합니다.)
사진으로 남아 전해지고 있는 일제 통감관저 건물입니다. 1905년 을사늑약의 주인공이며 일본에서 외교의 신이라 일컬어진 이토 히로부미(초대통감)은 1909년 10월26일에 하얼삔 역에서 안중근 의사가 쏜 총알을 맞아 즉사하고, 다음 해 (1910년) 7월에 데라우찌가 통감으로 부임하면서 일본 제국주의자들의 한반도 병합 작전계획에 따라 친일파를 앞세워 이곳에서 1910년 8월22일 한일병탄조약을 맺고, 쉬쉬하다가 1주일 뒤인 29일 조약체결 사실을 발표했습니다. 조약 체결 후에 1939년 경복궁 터에 조선총독부 건물이 완성될 때까지 이곳은 총독부 건물로 29년간 사용됐습니다.
이렇게 한.일 시민단체에서 지금은 헐려 없어진 건물터에 아픈 역사의 흔적을 남기려는 이유는, 우리로서는 비록 수치스러운 장소이지만 이 수치를 두번 다시 겪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 아픈 역사를 잊지 말아야 한다는 역사적 교훈을 얻기 위함일 것이고, 일본으로서는 이웃 민족에 가한 폭력적 억압을 진정으로 반성하는 자리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에게는 "약자의 가장 강한 무기는 역사를 잊지 않는 것이며 아픈 역사를 잊는 순간 고통스런 역사는 되풀이된다'는 세계사의 진리를 마음 속에 되새기는 자리가 될 것입니다.
오늘 8월29일 오전 11시30분부터 열린 행사에는 허광태 서울시의회 의장 등 서울시 의원들과 김병상 민족문제연구소 이사장, 이이화 한국실행위 상임대표, 함세웅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야노 히데키 일본실행위 사무국장 등 표석 설치에 힘을 모아온 한·일 관계자들이 참석했습니다. 표석은 길이 190㎝, 높이 10㎝의 자연석 형태로 제작됐으며, 제작비 300여만원은 시민단체들이 십시일반으로 모았습니다. 표석에 새기는 글은 신영복 성공회대 석좌교수가 붓으로 썼습니다.
어제 오락가락하는 빗 속에서 과천의 호숫가(저수지)를 산책하다가 동물원에서 서울대공원 가는 길목에 세워진 독립운동가 네분의 동상을 카메라에 담았습니다. 소낙비가 오락가락하여 사진이 어둡습니다.
단재 신채호 선생님이십니다.
조명하 의사 동상입니다.
조명하 의사에 대해 잘 모르는 분을 위해 의거 내용을 소개합니다.
1928년 5월14일 오전 9시55분경, 무개차 한 대가 대만 타이중(臺中)시 다이쇼초(大正町) 도서관 앞을 지나고 있었다. 차가 커브길을 도는 순간 군중 속에서 한 청년이 차로 뛰어올랐다.
차 안에는 대만 주둔 일본군을 검열하기 위해 대만을 방문한 일본 천황 히로히토(裕仁)의 장인이자 육군 대장인 구니노미야 구니히코(久邇宮邦彦)가 타고 있었다. 청년이 독이 묻은 단검으로 구니노미야를 찔렀으나 독검은 그의 왼쪽 어깨를 스치기만 하고 운전사 손에 꽂히고 말았다. 다시 군인을 향해 독검을 던졌다. 역시 빗나갔다. `대한독립만세`를 외치고 현장에서 체포된 청년은 스물 세살의 조명하(趙明河)였다.
조명하가 독립운동에 투신하기로 결심한 것은 6ㆍ10만세운동을 겪고 나서였다. 대만은 조명하가 일본에서 상하이로 가던 중 일시 체류하고 있던 곳이었다. 조명하는 `항일을 위해서는 우선 일본을 알아야 한다`는 생각으로 현해탄을 건너 낮에는 공장ㆍ상점에서 일하고 밤에는 학교를 다니며 기회를 노렸으나 좀처럼 기회가 오지않자 상하이에서 뜻을 펼칠 생각이었다.
구니노미야는 이때 입은 상처로 이듬해 1월 사망했고, 조명하는 황족위해죄로 그해 10월10일 이국땅에서 "조국광복을 보지 못하고 죽는 것이 한스러울 뿐이다"는 유언을 남기고 처형됐다.
유석 조병옥 선생님 동상입니다.
앞의 독립운동가 세 분은 모두 좌대에 힘차게 서 계신데... 소나무가 우거진 명당 자리에 떡~~ 하니 앉아계신 이 분은 누구실까? (사진 찍는 동안 비가 세차게 내렸습니다.)
민족민제연구소에서 발간한 4,389여명의 '친일인명사전' 과 정부에서 여야합의 특별법으로 2005년 설립된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진상규명위)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자 1,005명의 명단에 불명예스럽게 동시에 이름을 올린 인촌 김성수 동상입니다.
친일행위자에 대한 규정으로 민족문제연구소는 '일제에 협력한 행위를 한 자'를 포괄적으로 친일행위자로 규정한 반면, 진상규명위는 특별법에 따라 '일제에 협력해 우리 민족에 해를 끼친 행위'라는 좀더 엄격한 잣대를 적용했습니다. 이에 따라 민족문제연구소가 발간한 사전(4,389명)보다 훨씬 적은 1,005명만 보고서에 실렸습니다. 다시 말해서 2009년 11월에 진상규명위가 밝힌 친일 인물들은 ‘공문서 위주의 확실한 친일 증거’가 확보된 인물들이라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런 엄격한 잣대에도 불구하고 인촌 김성수는 반민족행위자에 당당하게 이름을 올렸습니다.
인촌 김성수의 반민족 친일행위는 오래전부터 밝혀졌었는데, 과천동물원이랑 국립현대미술관이랑 서울대공원이 있는 이 곳 도로변 눈에 잘 띄는 곳, 그 것도 가장 명당 자리에 동상을 세울 수 있었던 배경이 궁금합니다. 어쨋거나 김성수의 친일행위는 이제 문서로써 명명백백 밝혀졌으므로 지금에라도 저 동상은 철거해야 마땅합니다. 이곳은 가족단위로 또는 청소년들이 즐겨 찾는 명소인데 저 동상은 이들 젊은이에게 가치관의 혼란만 불러 일으킬 뿐입니다.
경술국치 100주년을 맞이하여, 치욕스런 과거 역사현장을 보존하고 그 앞에서 왜 우리 민족이 백년전에 이런 수치를 겪게 되었는지 우리 잘못을 통렬히 반성도 해야 하지만, 해방이후 혼란기와 한국전쟁을 겪으면서 대한민국 역사에서 정의가 뒤죽박죽이 되버려 친일파가 독립운동가로 행세하고 국가의 훈장도 받은 거짓된 역사도 반성하여 반드시 제자리에 갖다놔야만 합니다. 가을맞이 집안 대청소이고 집안을 더럽히고 있는 껍데기를 쓰레기통에 버리는 겁니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를 둘러싼 대륙과 해양 강대국에게 당하는 아픈 역사는 반복될 뿐입니다.
* 이 글은 제 동네 카페인 '과천사랑' 카페 토론방에도 올렸습니다.
첫댓글 잘 읽고 또 깊이 공감합니다. 현대사의 비극의 원인도 친일파를 청산하지 못한 것이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