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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1 부
미스터리
미스터리의 마을
우리들은 조사를 시작하고 난 뒤에도 자신들이 찾고 있는 것 – 또는 더 정확하게 말해서
우리들이 보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우리들에게는 이론도 가설도 없었으
며, 증명해 내어야 할 대상도 없었다. 그와는 반대로 단순히 19세기 말의 기이하고 사소한
수수께끼에 대한 설명 방법을 찾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을 뿐이었다. 궁극적으로 우리들이 도달
한 결론이란 미리 가정 했었던 것이 아니었다. 마치 우리들이 쌓아 올린 증거들이 독자적인
정신을 갖고 있듯이 그 자체의 독자적인 의지에 따리 우리를 한 걸음 한 걸음 이끌어 나갔다.
처음에 우리들은 어느 지방에 한정된 미스터리 - 분명히 흥미가 있지만 남부 프랑스의 한
마을에 국한되어 본질적으로 사소한 의미 밖에 없는 - 를 다루고 있노라고 굳게 믿었다. 비록
이 고혹적인 미스터리가 몇 가닥 역사적 사실들을 내포하고 있기는 했으나, 우리들은 당초에
이 미스터리를 일차적으로 학문적인 관심의 대상에 지나지 않는다고 믿었다. 또한 우리들의
조사 연구가 서양사의 어느 측면을 조명하는 데 도움을 줄 수 있을지는 모르겠으나, 서양사를
다시 써야 할 사태가 벌어지리라고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나아가서 우리들이 무엇을 찾아
내건 현대와 절실한 상관관계가 있으리라 - 더구나 현대와 충격적은 상관성을 갖고 있으리라
고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우리들의 탐색 – 문자 그대로 탐색이었다 – 은 아무튼 직선적인 설화를 실마리 삼아 출발했다.
첫 눈에 이 설화는 시골 어느 곳에 가든 그 역사와 민간전승에 흔히 등장하는 ‘보물 이야기’나
‘풀리지 않은 미스터리’와 뚜렷이 다른 점이 없었다. 그와 같은 설화가 프랑스 국내에서 널리
알려져, 상당한 관심을 끌었으나, 당시 우리가 아는 범위 내에서는 비상한 반응을 일으키지는
않았다. 그런데 여기서 잠시 1960년대에 발표되었고, 우리가 처음 알게 된 그 설화를 되풀이해
야만 하겠다.
렌느 르 샤토와 베랑제르 소니에르
1885년 6월 1일, 프랑스의 작은 마을 렌느 르 샤토는 새로이 교구 신부를 맞았다. 그 주임
사제의 이름은 베랑제르 소니에르 였다. 그는 혈기 좋고, 미남에다 정력적이었으며, 나이 33세
에 매우 지성적인 사람이었던 것 같다. 얼마 전까지만 하더라도 신학교에 있으면서, 그는 사제
로서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었다. 확실히 그는 피레네 산맥의 동쪽 산기슭 외진 마을보다는
더 중요한 어느 곳으로 진출할 운명을 타고 난 사람 같았다. 그런데 어느 땐가 그는 윗사람들
의 비위를 건드렸던 것으로 보인다. 도대체 그가 저지른 일이 어떤 것이었는지 아직도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지만, 멀지 않아 이 사건이 온갖 승진의 전망을 깡그리 짓밟아 버렸다. 그리
고 윗사람들이 렌느 르 샤토 교구로 그를 보낸 것은 그를 제거하는 수단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 때만 하더라도 렌느 르 샤토에는 주민이 200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 곳은 카르카손느에서
25마일 가량 떨어진 가파른 산꼭대기에 동그마니 올라앉아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다른 사람이었다면, 그 장소는 유배나 다름 없었을 것이며, 당시 문명의 혜택에서 멀리 떨어지
고 열렬한 인간의 탐구정신이 제공할 수 있는 자극에서도 아득히 멀어진 이 마을 생활은 일종
의 종신형이기도 했다. 그렇지만 거기에는 보상이 없지도 않았다. 소니에르는 거기서 불과 몇
마일 떨어진 몽타젤 마을 에서 태어나고 자라난 이 고장 사람이었다. 그러므로 어떠한 결함이
있든, 렌느 르 샤토는 그에게 고향과 다름이 없었고, 어린 시절의 낯익은 온갖 푸근함이
있었다.
1885년에서 1891년 사이에 소니에르의 평균 수입은 한 해에 6파운드에 상당했으니까 결코
풍족하지는 않았지만, 19세기 말의 프랑스에서 시골 주임사제가 받는 금액으로는 괜찮았다.
교구 신도들이 마련해 주는 선물과 합쳐서, 호사스러운 생활은 할 수 없다 하더라도 살아가기
에는 모자람이 없었던 것 같다. 그러던 6년 동안에 소니에르는 즐겁고도 평온한 생활을 했으리
라 짐작된다. 그는 어린시절의 산과 냇물에서 사냥을 하고 물고기도 잡았다. 방대한 독서를
했으며, 라틴어를 완벽하게 갈고 닦았을 뿐만 아니라 그리스어를 배우고 히브리어 공부를 시작
했다. 그는 집지기겸 시녀로 마리 드나르노라는 18세짜리 시골 소녀를 들였는데, 이 여인이
한평생 그의 반려가 되고 가슴을 터놓는 벗이 되었다. 그는 친구이며, 이웃마을 렌느 레 뱅의
사제인 앙리 부데 신부를 자주 방문했다. 그리고 부데의 개인지도를 받아 소용돌이쳤던 이곳의
지방사(地方史) – 그 역사의 잔재가 언제나 그의 주변에 있었던 - 에 깊이 빠져 들어갔다.
이를테면 렌느 르 샤토 동남쪽 몇 마일 되는 곳에은 베쥐라는 봉우리가 우뚝 솟아 있는데, 그
정상에는 한때 성당기사단(예루살렘의 성묘와 그 순례자들을 보호하기 위해서 1119년에 편성
한 군사. 종교 집단)의 지방지부였던 중세의 성채 잔해가 남아 있다. 렌느 르 샤토의 동쪽
1 마일 남짓한 곳에 있는 제 3의 봉우리에는 성당기사단의 제 4대 단장인 베르트랑 드 블랑슈
포르의 조상이 살던 고향집인 블랑슈포르성의 폐허가 서 있다.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12세기 중엽에 저 유명한 기사단을 주도했다. 렌느 르 샤토와 그 부근은 북부 유럽으로부터
스페인의 산티아고 데 파스텔라에 이르는 고대 순례통로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전지역이
온갖 전설에 깊이 잠겨 있었다. 풍요롭고도 극적이며 때로는 피에 젖은 과거가 메아리지고
있었다.
한동안 소니에르는 렌느 르 샤토의 마을 성당을 복원할 생각을 하고 있었다. 1059년 막달라
마리아에게 헌당했던 이 퇴락한 건물은 그보다 더 오래된 6세기 비지코트, 즉 서고트족의 건축
물을 기초로 하여 서 있었다. 12세기말에 이르러 이 건물이 거의 손을 댈 수 없으리만큼 훼손
되었다고 해서 놀랄 이유가 없었다.
1891년 친구 부데의 격려를 받으며 소니에르는 마을 기금에서 얼마간 돈을 빌려 검소하게
복구 사업에 착수했다. 이 작업과정에 그는 제단석(祭壇石)을 옮기게 되었다. 이 돌은 고색창연
한 2개의 비지고트 돌기둥 위에 있었다. 이 2개의 돌기둥 가운데 하나는 속이 비어 있었다.
그 안에서 소니에르 신부는 밀봉한 둥근나무통 속에 들어 있던 4개의 양피지 문서를 발견했다.
이들 중 2개는 가계보(家系譜)였다고 하며 하나는 1244년, 다른 것은 1644년으로 되어 있었다.
나머지 2개의 문서는 1780년대에 소니에르의 선임자였던 렌느 르 샤토의 사제 안토완느 비구
신부가 작성한 것이 분명했다. 한편 비구는 귀족 블랑슈포르 가문의 개인 사제였으며, 이 가문
은 프랑스혁명 전까지만 하더라도 가장 쟁쟁한 지방 지주로 손꼽혔다.
비구가 작성했다는 2개의 양피지 문서는 경건한 라틴어 문서, 신약성서의 발췌문으로 보였다.
적어도 외관상으로는 그런데, 양피지문서 하나에는 낱말들이 조리없이 뭉쳐 있고, 그 사이에
공백이 없었는데다, 불필요한 글자들을 적지 않게 삽입해 놓았다. 둘째 문서에는 자행(字行)을
무차별하게 잘라 버렸고 - 고르지 못하게 낱말 중간을 떼어 놓기도 했다 - 어떤 글자는 눈에
띄게 다른 글자보다 높이 올려놓았다.
사실 이 양피지 문서들은 일련의 정교 치밀한 암호문이다. 그 중 일부는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복잡하고 예측불가능하여, 컴퓨터를 동원하더라도 필요한 열쇠가 없으면 풀리지 않는다.
렌느 르 샤토를 연구한 프랑스의 저술과 우리들이 BBC방송국에서 방영할 같은 소재의 영화
두 편에 다음과 같은 암호해독 결과가 나왔다.
BERGERE PAS DE TENTATION QUE POUSSIN TENIE-
RS GARDENT LA CLEF PAX DCLXXXI PAR LA CROIX
ET CE CHEVAL DE DIEU J’ACHEVE CE DAEMON DE
GARDIEN A MIDI POMMES BLEUES
(양치기 소녀, 유혹은 없다. 푸생, 테니에를 열쇠 쥐고 있다.
평화 681. 하나님의 십자가와 이 말(馬)로 정오에 나는 수호
의 악마를 완성 – 또는 파괴한다. 푸른 사과들.)
그런데 이 판독문의 일부가 복잡하여 감질나게 하는 대목이 있는 것과는 대조적으로, 다른
것은 손에 쥐어주듯, 너무 노골적으로 드러내놓고 있다. 제 2문서에 치켜올려 놓은 글자를
차례대로 적어 나가면 조리있는 메시지가 나온다.
A DAGOBERT II ROI ET A SION EST CE TRESOR ET IL EST LA MORT
(임금 다고베르 2세와 시온에 이 보물은 귀속되고 그는 그 곳에서 죽었다.)
이 특수한 메시지가 소니에르에게는 식별 가능했을 것이 확실하지만, 한층 더 착잡하게 얽혀
있는 암호를 풀어내었을는지는 의심스럽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뭔가 중대한 것에 부딪쳤
음을 깨달았고 촌장의 동의를 얻어 자기가 발견한 것을 상사인 카르카손느 주교에게 갖다
바쳤다. 그 주교가 어느 정도 이해했는지는 분명하지 않지만, 주교는 자기 비용을 들여 즉시
소니에르를 파리로 파견했으며, 어느 중요한 사제당국자를 알현하고 그 문서를 바치라는 지시
를 내렸다. 그 가운데에도 중요한 인물은 생 쉴피스 신학교의 총감독 비에유 신부와 그의 조카
에밀 오페였다. 당시 오페는 신부 수업중이었다. 아직 20대 초반이었지만, 그는 이미 학문으로
서는 당당한 명성을 얻었고 특히 언어. 암호작성법과 고문서학에 조예가 깊었다. 비록 천직은
성직자였으나, 그는 비교사상(秘敎思想)에 침잠해 있었고, 각종 무속집단, 종파들과 비밀결사 등
당시 수도 파리에 널리 퍼져 있던 결사 및 집단과 친교를 맺고 있었다.
이로 말미암아 그는 클로드 드뷔시를 비롯하여 스테판 말라르메와 모리스 메테를링크 같은
인물을 포함한 문화계의 정상급 명사들과 교제가 있었다. 또한 그는 에마 칼베를 알고 있었다.
그녀는 소니에르가 파리에 나타났을 때 런던과 윈저에서 공연하여 대성공을 거두고 막 돌아온
참이었다. 프리마돈나로서 에마 칼베는 당대의 마리아 칼라스였다. 동시에 그녀는 파리의 비교
적(秘敎的)인 하위문화권의 대제사장이었으며, 영향력있는 다수의 무속신앙가들과 허물없는
관계에 있었다.
비에유와 오페를 만나고 나서, 소니에르는 파리에서 3주일을 보냈다. 고위 성직자와 만난 자리
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다만 이 시골 신부가 즉각 오페가 이끄는 명성
드높은 그룹에 따뜻이 영입되었다는 것만은 알려졌다. 심지어 그는 에마 칼베의 연인이 되었다
는 사실마저 확인되었다. 당시 떠돌던 풍문에 따르면 그들 사이에 정사가 있었다고도 했으며,
그 여가수를 잘 아는 어느 친지는 그녀가 신부에게 ‘맥을 못춘다’고 했다. 아무튼 그들이 친밀
하고 지속적인 우정을 나누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뒤 몇 년 동안. 그녀는
렌느 르 샤토 부근으로 가서 뻔질나게 그를 방문했다. 그 곳에서는 최근까지 산비탈 바위에
그들의 이름 첫글자를 담은 사랑의 하트모양이 새겨진 것을 볼 수 있었다.
파리에 머무르는 동안 소니에르는 루브르에서 시간을 보내기도 했다. 이것은 그가 떠나기 전
그림 3점의 복사품을 구입했다는 사실과도 연관이 있음직하다. 그 중 하나는 확인되지 않은
화가가 그린 초상화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그 주인공은 13세기말에 잠깐 교황에 오른 셀레스틴
5세 (1294)였다. 다른 하나는 다비드 테니에르의 작품인데, 같은 다비드 테니에르 중에서 아버
지냐 아들이냐는 분명하지 않다. 셋째 그림은 니콜라 푸생의 가장 유명한 작품 <아르카디아의
양치기들>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렌느 르 샤토에 돌아오자마자, 소니에르는 마을 성당 복원 작업을 재개했다. 그러다가 그는
이상하게 조각된 판석을 발굴했다. 시기는 7 ~ 8세기로 추정되었고 그 밑에는 뼈가 묻혀 있다
고 전해지는 납골당이 있었음직했다. 또한 소니에르는 한층 더 진기한 작업에 착수했다. 예를
들어 성당 묘지에는 블랑슈포르 대부인 마리 후작부인의 바위무덤이 서 있는데 그녀의 무덤을
표시하는 머릿돌과 판석은 앙토완느 비구 – 문제의 신비로운 양피지 문서 2개를 작성했고,
1세기전 소니에르의 선임사제였다 – 가 설계하고 세웠다. 머릿돌의 명문 – 띄어쓰기와 활자를
여러 군데 일부러 틀리게 해 놓았다 – 은 푸생과 테니에르를 언급하고 있는 문서에 감추어진
메시지에 대해서 완벽한 글자 수수께끼였다. 거기에 담긴 글자들을 다시 간추려 놓으면, 앞에
나온 다고베르와 시온을 가리킨 암호문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여기서 저질러 놓은 잘못이
그 두가지가 맞아 떨어지도록 정확하게 짜 놓았다.
후작부인의 무덤에 있는 명문을 이미 복사해 놓았다는 사실을 모르고 소니에르는 그것을 지워
버렸.. 그가 보여준 기이한 행동은 이것만이 아니었다. 그의 충실한 집지기며 하녀인 마리를
데리고 그는 농촌지대를 도보로 오랫동안 돌아다니며 가치가 있어 보이거나 관심을 끄는 돌을
모으기 시작했다. 한편 그는 프랑스 전역에 있는 미지의 사람들과 엄청남 분량의 서신연락을
시작했고, 나아가서는 그 대상지역이 독일. 스위스. 이탈리아. 오스트리아와 스페인으로 확대되
었다. 그런가하면 전혀 가치없는 우표를 무더기로 모아 들였다. 그리고 여러 은행들과 정체
불명의 거래를 트기 시작했다. 심지어 어는 은행은 파리에서 직접 대표를 보내어, 렌느 르
샤토까지 먼 길을 찾아와 오로지 소니에르의 업무만을 봐주고 돌아갔다.
우표수집만으로도 소니에르는 벌써 상당한 금액을 투입하고 있으며, 종전의 한 해 수입으로
그걸 지탱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다가 1896년에 그는 전례없이 어마어마한 돈을 본격적으
로 쓰기 시작했다. 1917년 그의 일생이 저물어 갈 무렵에는 그 경비가 줄잡아 몇 백만 파운드
에 상당하게 되었다. 출처불명인 이 재산의 일부는 찬앙할 만한 공익사업에 쓰였다 ---
마을에 이르는 근대식 도로가 개설되고, 수도시설을 마련 했다. 다른 지출은 그보다 황당무계
한 것이었다. 막달라탑을 낭떠러지를 내려다보는 곳에 세우기도 했다. 베타니아라고 이름지은
호화판 별장을 짓기도 했는데, 소니에르 자신은 단 한 번도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고 성당을
다시 단장하는 데 그치지 않고, 그럴 수 없이 기괴하게 모습을 바꾸어 놓았다. 입구 위 현관의
임방돌에 라틴어로 명문을 새겼다.
TERRIBILIS EST LOCUS ISTE
(이 장소는 무섭다)
입구 바로 안에는 흉측한 조상이 서 있었는데, 비밀의 보관자, 숨은 보물의 수호자이며, 고대의
유대전설에 따르면 솔로몬 성전의 건설자인 악마 아스모데우스의 울긋불긋한 신상이었다. 성당
벽에는 십자가 행렬의 가기도소(假祈禱所)를 그린 음산하고도 번들거리는 회화 액자들이 걸려
있었다. 그런데 그 하나하나가 모두 공인된 성서의 기록과는 이상하게 일치하지 않고, 설명할
수 없는 내용을 추가했으며, 노골적으로 혹은 미묘하게 탈선하고 있는 특징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제 8 기도소에는 스코틀란드의 격자무늬 어깨걸이를 한 소년이 하나 있다. 그리고 예수의
시체를 무덤으로 운반해 들어가는 제 14 기도소의 그림에는 보름달이 떠 있는 시커먼 밤하늘
이 배경을 이룬다. 소니에르는 무엇인가 암시하려는 것 같다. 그렇다면 무엇을?
성서의 기록과는 달리 예수의 매장은 그보다 몇 시간 뒤 밤에 했다는 말인가?
혹은 그 시체는 무덤 안으로가 아니라, 무덤 밖으로 들어내고 있다는 뜻인가?
이 기괴한 장식을 하면서 소니에르는 계속해서 아낌없이 돈을 썼다. 그는 진귀한 도자기, 값진
직물, 고대의 대리석 조각들을 모았다. 또한 귤밭을 꾸미고 동물원을 만들었으며, 굉장한 장서
를 수집했다. 그가 사망하기 직전 바벨탑 같은 거대한 탑을 만들어 책을 진열해 놓고, 거기서
강론을 할 계획이었다는 말도 있었다. 한편 그는 교구주민들을 결코 소홀히 대하지 않았다.
풍성한 잔치를 베풀고 그 밖의 여러가지 시혜를 하여 그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었으며, 난공
불락의 산악영지를 다스리는 중세의 영주와 같은 생활양식을 지켜나갔다.
이 외지고 사람이 접근할 수 없는 높은 성채에서 그는 수많은 명사들을 손님으로 맞이했다.
그 한 사람이 에마 칼베였음은 말할 나위도 없다. 또한 프랑스 문화상이 들어 있었다. 하지만
이 무명의 시골 신부에게 가장 위엄있고 중대한 방문객은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사촌, 요한 폰 합스부르크 대공이 아니었을까. 그 뒤에 밝혀진 은행거래에 비추어 보면 소니에
르와 대공은 같은 날 잇달아 은행 구좌를 개설했는데, 후자가 전자에게 거액을 넘겨주었다.
처음에는 교계 고위층들이 못 본 척했다. 그러나 소니에르의 상사인 카르카손느 주교가 죽고
새 주교가 오자, 신부를 불러 해명을 시키려고 했다. 소니에르는 대담하게 툇자를 놓아 주위를
놀라게 했다. 자기 재산을 설명할 수 없다고 거부했다. 게다가 주교의 전근 명령마저 깔아뭉개
고 말았다. 별달리 실질적인 제재방법이 없는지라, 주교는 미사를 불법 판매했다는 성사매매로
그를 고소했고, 지방법원이 그럴 정직시켰다. 소니에르는 교황청에 항소했으며, 무죄선고를
받고 다시 직위를 찾았다.
1917년 1월 17일, 65세였던 소니에르는 갑자기 심장마비에 걸렸다. 1월 17일이란 날짜는 아무
래도 수상하다. 블랑슈포르 대부인 마리 후작부인의 비석 – 소니에르가 지워버린 바로 그 비석
– 에도 똑 같은 날짜가 나타난다. 그리고 생 쉴피스의 축일 역시 1월 17일인데 나중에 알게
되지만, 이 성자는 우리 이야기에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한다. 소니에르가 그의 양피지 문서를
신부 비에유와 에밀 오페에게 몰래 전달한 곳이 바로 생 쉴피스 신학교였다. 하지만 소니에르
가 1월 17일 심장마비에 걸렸다는 사실을 가장 의심스럽게 만들어 주는 것은, 그보다 5일전
1월 12일 그의 고구 주민들이 나이 치고는 부럽도록 건강해 보였다고 말한 점이다. 그런데도
우리들이 입수한 영수증에 따르면 1월 12일에 마리 드나르노가 자기 주인이 쓸 관을 주문
했다.
소니에르가 임종의 침상에 누워 있을 때, 마지막 고해를 비롯한 종부성사를 집전할 신부를
이웃 교구에서 불러 들였다. 그 신부는 알맞게 도착하여 병실로 들어갔다. 목격한 증인의 말을
빌리면, 잠시 후에 나타난 그의 모습은 분명히 충격을 받고 있었다. 어떤 설명에 들어보면
그는 [두 번 다시 웃지 않았다]고 한다. 또 다른 설명에 따르면 그는 심각한 우울증에 빠져,
그 증세가 몇 달이나 계속되었다. 이러한 이야기들이 과장되었건 말았건, 소니에르의 참회
내용이 원인이 되어 그 신부는 종유를 거부했다.
1월 22일 소니에르는 고해를 하지 않은 채 숨을 거두었다. 이튿날 아침 그의 시체는 주홍빛
술을 달아 장식한 화려한 법의에 싸여, 막달라 탑 테라스에 내 놓은 안락의자에 꼿꼿이 앉혀
졌다. 확인되지 않은 조문객들이 하나하나 줄지어 지나갔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자의 옷에
서 기념으로 술을 뽑아갔다. 이 의식에 대한 설명은 한 번도 나온 적이 없다. 지금 렌느 르
샤토에 살고 있는 주민들도 다른 사람과 마찬가지로 영문을 몰라 얼떨떨해 했다.
큰 기대를 걸고 소니에르의 유언 낭독을 기다렸다. 그러나 그에게는 땡전 한 닢 없었다는 선고
가 내리자 모두 놀라고 아쉬워했다. 죽기 전 어느 땐가 그는 전재산을 32년 동안 삶과 비밀을
함께 했던 마리 드나르노에게 넘겨 주었던 것으로 보였다. 혹은 그 재산의 대부분이 처음부터
마리의 이름으로 되어 있었을 가능성도 배제하지 못했다.
그의 상전이 죽고 난 뒤에도 마리는 1946년까지 호화별장 베타니아에서 편안하게 살고 있었
다. 그런데 제 2차대전 후 새로 들어선 프랑스 정부가 새 화폐를 발행했다. 탈세자, 나치 협력
자와 전시 모리배를 색출하는 수단으로 프랑스 시민들은 옛 프랑과 새 프랑을 교환할 때에는
그들의 수입을 설명하게 되어 있었다.
재산 설명을 해야 할 처지에 이르자, 마리는 차라리 빈곤을 선택했다. 별장 정원에서 옛 프랑
화 다발을 쌓아 놓고 불을 지르는 마리의 모습이 보였다.
(지도) – 렌느 르 샤토와 그 부근
그 뒤 7년 동안 마리는 빌라 베타니아를 판 돈으로 검소한 생활을 했다. 그녀는 별장 구입자
노엘 코르뷔씨에게 죽기 전에 몰래 한 가지 비밀을 알려주겠노라고 약속했다. 이 비밀은 부자
를 만들어 줄 뿐만 아니라 ‘권력’을 주게 될 것이라고 했다. 한데 1953년 1월 29일 앞서간
그의 주인처럼 마리도 갑자기 심장마비가 덮쳐 말을 하지 못한 채 죽는 순간까지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런지 얼마 안 되어 그녀는 비밀을 간직한 채 세상을 떠나, 코르뷔씨의 좌절감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있음직한 보물들
이것이 1960년대에 프랑스 출판물에 나온 이야기의 줄거리였다. 우리들이 처음 이 사실과
접하게 된 것도 이러한 형태로서였다. 그러고 다른 조사 연구자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이 착수
하게 된 문제들은 이 같은 형식으로 제시된 설화의 의문점에서 출발하는 내용이었다.
첫째 의문은 어느 정도 분명하다. 소니에르의 돈의 출처가 무엇이었던가? 어디서 그처럼 갑자
기 거대한 재산이 나올 수 있었는가? 설명을 들었다면 결국 진부한 것이었을까? 그렇지 않다
면 그보다 더 자극적인 무엇이 있었던가? 후자의 가능성이 이 미스터리에 감질나는 호기심을
더했고, 우리들은 탐정놀이를 해보고 싶은 충동을 억누를 수가 없었다.
우리들은 다른 조사자들이 제시한 설명들을 검토하는 데서 일을 시작했다. 이들 가운데서 많은
사례를 들추어 보면 소니에르는 실제로 어떤 종류의 보물을 찾아냈다는 주장이었다. 이건 정말
그럴듯한 가설이었다. 왜냐하면 이 마을과 그 주변의 역사에는 숨겨진 황금이나 보석들이 있음
직한 근거가 많이 담겨 있다.
예를 들어 선사시대에 렌느 르 샤토 일대를 이곳에 살고 있던 켈트족들이 거룩한 장소로 만들
었다. 그리고 이 마을도 한때는 레데(Rhedae)라고 불렀는데, 이 겔트족의 어느 부족 이름에서
따온 명칭이었다. 로마시대에는 이 지방이 광산과 치료용 온천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크고
번창하던 곳이었다. 그리고 로마인들 역시 이 장소를 거룩하다고 보았다. 그 뒤에 조사자들이
몇 군데에서 이교 신전의 유적을 발견했다. 6세기에 이 산꼭대기 마을은 주민 3만 명의 도시였
으리라 생각된다. 어느 시대에는 비지고트족이 지배하던 제국의 북부 수도였던 것 같다. 비지
고트족, 즉 서고트족은 중부 유럽으로부터 서쪽으로 휩쓸고 나와 로마를 짓밟고, 로마제국을
뒤엎었으며 피페네산맥을 걸터앉은 그들의 영토를 확장했던 튜튼족이었다.
그 뒤 500년동안 이 도시는 중요한 군(郡) 또는 백작령, 라제 백작령의 중심지였다. 그러다가
13세기초에 북방기사들의 대군이 랑그도크에 내려와 카타리파 또는 알비의 이단종파를 말살하
고, 이 풍요로운 지방을 가기들의 전리품으로 차지했다. 이른바 알비십자군의 잔학행위가 벌어
지고 있을 동안에, 렌느 르 샤토는 점령되어 한 개의 봉토로 이 손 저 손으로 옮아다녔다.
1세기와 4반세기가 지난 뒤 1360년대에 이 지방 주민들은 전염병으로 씨가 마르다시피
했으며, 그런지 오래지 않아 렌느 르 샤토는 떠돌이 카탈로니아 마적들에게 파괴되고 말았다.
상상을 넘어서는 보물의 전설들은 이와 같이 수많은 역사적 영고성쇠와 뒤얽혀 있다. 이를테면
카타리의 이단종파들은 황당무계하면서, 거룩하기조차 한 가치를 지닌 무엇을 갖고 있었다는
소문이 돌고 있었다. 많은 전설에 따르면, 그 가운데는 ‘성배’가 들어 있다는 소문이 났었다.
보도에 따르면 이들 전설에 힘입어 리하르트 바그터가 최후의 오페라 <파르찌발>을 작곡하기
에 앞서 렌느 르 샤토를 순례했다. 1940 ~ 45년 점령기간중에 독일 군대가 바그너의 뒤를
따라 이 부근에서 여러 차례 발굴을 시도했으나, 성과가 없었다고 전한다. 거기에는 또한 성당
기사단의 사라진 보물이 있었다. 성당기사단의 단장 베르트랑 드 블랑슈포르는 이 부근에서
불가사의한 불굴작업을 의뢰한 바가 있었다.
여러 이야기로 미루어 보아, 이들 발굴작업은 유난히 비밀스러웠고 특별히 데려온 독일 광부들
이 그 일을 맡았다. 실제로 성당기사단의 보물 일부가 렌느 르 샤토 주변에 숨겨져 있다면,
소니에르가 발견한 문서에 있는 ‘시온(Sion)’이라는 대목을 설명할 수 있지 않을까
그밖에도 다른 보물이 있을 가능성이 있다. 5 ~ 8세기 사이에, 현대 프랑스의 상당 부분이
다고베르 2세가 포함되어 있는 메로빙왕조의 지배를 받았다. 다고벨 시대에 렌느 르 샤토는
비지고트의 요새였으며, 다고베르 자신이 비지고트의 공주와 결혼했다. 이 도시는 일종의 왕실
보고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게다가 다고베르가 군사정복으로 거대한 재물을 모아, 렌느 르
샤토 인근에 감추었다고 하는 문서가 있다. 만약 소니에르가 그러한 창고를 찾아냈다면,
암호문에 다고베르를 언급하고 있는 대목을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카타리파, 성당기사단, 다고베르 2세, 그리고 나아가서 다른 보물의 가능성이 있었고 – 비지
고트족이 광풍노도와 같이 유럽을 휩쓸고 진격하면서 쌓아 올린 거대한 전리품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에는 통상적인 전리품 이상의 것들, 서양의 종교전통에 중대한 상관관계가 있을
항목들 – 문자 그대로이면서 상징적인 – 이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 요컨대 거기에 예루살렘
성전의 전설적인 보물이 들어 있을 수도 있으며 – 성당기사단보다 한 걸음 나아가 ‘시온’을
언급한 대목을 보증해 줄 지도 모른다.
기원 66년 팔레스타인은 로마의 멍에에 항거하여 일어섰다. 4년 뒤인 70년 예루살렘을 로마
황제의 아들 티투스의 지휘를 받은 군대에게 쑥대밭이 되고 말았다. 성전은 약탈당하고,
지성소의 기물들은 로마로 실려갔다. 티투스의 개선문에 묘사되어 있듯이, 여기에 유대교에서
는 너무나 거룩한 7가지 황금촛대와 심지어 언약궤마저도 들어 있을 가능성이 있었다.
3세기 반 뒤인 기원 410년에, 이번에는 알라리크 대왕 휘하의 비지고트 침략군에게 로마가
약탈되었다. 알라리크는 영원의 도시 로마의 전재산을 사실상 쓸어가 버렸다. 역사가 프로코피
우스가 말하는 바와같이 알라리크는 [대부분이 에메럴드로 장식되었고, 고대에 로마인들이
예루살렘으로부터 갖고 왔으며, 보기에 가장 값진 히브리왕 솔로몬의 보물들] 을 가지고
달아났다.
그렇다면, 해명되지 않은 소니에르의 재산엔 보물이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 신부는 몇 가지
보물 가운데 어느 것을 발견했거나, 혹은 수세기에 걸쳐 되풀이해서 손을 바꾸어온 단일 보물
– 예루살렘성전에서 로마인, 다시 비지고트족 그리고 궁극적으로 카타리파 또는 성당기사단으
로 옮아갔을지도 모르는 – 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그렇다면, 문제의 보물이 왜 다고베르
2세와 시온에 동시에 ‘귀속되는지’를 설명할 수 있게 될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들 이야기는 본질적으로 보물이야기였던 것 같다. 그리고 보물 이야기 – 예루살
렘 성전의 보물을 포한하는 경우마저도 – 는 궁극적으로 한정된 상관성과 의미밖에 없다. 사람
들은 끊임없이 이런저런 보물을 뱔견하고 있다. 그러한 발견이란 때로 자극적이고 극적이며
신비롭기도 하고, 그 중 많은 경우에 과거를 밝히는 중요한 계기가 된다. 그러나 문제의 보물
이 어떤 비밀을 내포하거나, 충격적인 비밀을 내포할 가능성이 없는 한, 정치적으로나, 그 밖의
직접적인 영향을 현재에 미치는 사례는 거의 없다.
소니에르가 보물을 발견했다는 논증을 에누리하지는 않는다. 동시에 그 외에 무엇을 발견했건,
그는 역시 하나의 비밀 – 그 시대에, 그리고 모르긴 하되 우리 시대에서조차 – 중대한 뜻을
지닌 역사적인 비밀 – 을 발견했던 게 분명한 것 같았다. 단순히 돈, 황금 또는 보석만으로는
그의 이야기가 지닌 많은 측면들을 설명하지 못한다. 이를테면, 그것만으로는 그가 오페의
그룹에 받아들여지고 드뷔시와 교제하며, 에마 칼베와 연계를 가졌던 사실을 풀이하기 어렵다.
아울러 그것만으로 이 문제에 대한 교회당국의 열띤 관심, 소니에르가 주교의 명령을 깔아뭉개
고, 또는 교황청이 그를 면죄하여 긴박한 관심을 나타냈던 사실을 밝혀주지 못한다. 그리고
그 신부가 죽어가는 사람에게 종부성사를 거부하고, 합스부르크 대공이 피레네 산중의 구석진
작은 마을을 방문했다 – 특히 1916년에 한 번은 자기 나라 오스트리아가 프랑스와 전쟁중인데
도 – 는 사실을 풀이할 수 없다. 돈, 황금 혹은 보석만으로는, 정교한 암호문에서 유산으로
받은 은행권을 불사르던 마리 드나르노에 이르기까지 이 사건 전체를 에워싸고 있는 강력한
신비의 광배를 규명하지 못한다. 그리고 마리 자신은 재산만이 아니라 ‘권력’까지도 넘겨줄
‘비밀’을 밝히겠다고 약속했었다.
이러한 사실들을 바탕으로 하여 우리들은 점차 소니에르의 설화에는 재산 이상의 것이 포함
되어 있으며, 거의 틀림없이 논란의 대상이 될 그 어떤 비밀이 내포되어 있다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말을 바꾸어, 이 미스터리는 구석 시골 마을과 19세기의 한 신부에게만 한정되진 않았
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이 무엇이든, 렌느 르 샤토에서 방사되어, 그 바깥 세계까지 물결 –
심지어 해일의 잠재력마저 있는 – 을 일으키는 것 같았다. 소니에르의 재산이 본질적으로 경제
가치가 있는 물질로서가 아니라 일종의 지식에서 나올 가능성이 있었을까? 만약 그렇다면,
이 지식을 경제력으로 바꿀 수 있단 말인가? 예컨대 이것은 어떤 사람을 협박하는 데 쓸 수도
있었을까? 소니에르의 재산이 침묵을 지키는 대가로 지불될 가능성이 있었는가?
그가 요한 폰 합스부르크로부터 돈을 받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 신부
의 ‘비밀’이 무엇이건, 그것은 정치적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종교적이라고 본다. 나아가서 오스트
리아대공과 그의 관계는 어떤 이야기를 들어보면 매우 우호적이었다. 그와는 달리 그의 만년에
가서는 그를 완연히 두려워하고 몹시 조심스럽게 다룬 기구 – 교황청 – 가 있었다. 소니에르가
교황청을 위협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세심하게 예방조치를 취한다 하더라도 한 사람이 그와
같은 협박을 한다는 것은 터무니없이 위험한 노릇이라고 할 수 있으리라. 그러나 만약 로마
교회가 침범할 수 없는 고관현직, 가령 프랑스의 문화상 또는 합스부트크왕가와 같은 다른
사람들이 지원을 한다면 어떻게 될까? 요한 대공은 중개자에 지나지 않고, 소니에르에게 준
돈이 사실은 교황청 금고에서 나왔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음 모
1972년 2월, 소니에르와 렌느 르 샤토의 미스터리를 소재로 하여 우리들이 제작한 필름 3편
중의 제 1편인 <예루살렘의 잃어버림 보물(The Lost Treasure of Jerusalem?)>이 방영되었다.
이 영화에서는 논쟁을 불러일으킬 주장을 하지 않았고, 다만 앞서 대강 설명했듯이 ‘기본적인
이야기’만을 했을 뿐이었다. 거기에는 ‘충격적인 비밀’ 또는 고위층에 대한 위협을 둘러싼 추리
도 들어가 있지 않았다. 또한 이 영화에서는 에밀 오페 – 소니에르가 은밀히 양피지 문서를
전달했던 파리의 청년 신부신학자 – 의 이름을 인용하지 않았다는 사실도 지적해 두어야
하겠다.
우리들에게 우편물이 홍수처럼 밀려들었던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그 중 일부
는 추리에 바탕을 둔 방향제시를 흥미있게 펴고 있었다. 다른 편지는 칭찬하는 내용이었고,
정신나간 소리를 하는 것도 있었다. 이 많은 편지들 가운데서, 발신인이 공개하지 말아 달라는
한 통의 편지가 특별히 우리의 관심을 끌었다. 현직에서 물러난 성공회 신부가 보낸 것이었는
데 그릇된 결론 같았지만 호기심을 자아내게 하고 도발적이었다. 발신인은 절대적인 확신과
권위를 뽐내며 쓰고 있었다. 그의 자세는 대담하고 결정적이었으며 확고부동했다. 자세하게
설명하려 들지 않고, 우리들이 믿든 말든 무관심한 것 같았다. 그 ‘보물’에는 황금이나 보석이
들어 있지 않았다고 그는 단호하게 자르고 나왔다. 그와는 반대로, 거기에는 십자가의 처형은
사기요, 예수는 기원 45년까지 살아 있었으며, ‘바꿀 수 없는 증거(incontrovertible proof)’가
있다고 했다.
이러한 주장은 황당무계하기 짝이 없게 들렸다. 도대체 확신에 찬 무신론자라 하더라도,
예수가 십자가 처형 뒤에 살아남았다는 ‘바꿀 수 없는 증거’가 무엇일 수 있단 말인가?
우리들은 불신할 수 없는 것, 부정할 수 없는 것 – ‘증거’가 될 뿐만 아니라, 진실로 ‘바굴 수
없는’ 것이 무엇인지 상상조차 할 수 없었다. 동시에 그 주장이 어마어마하여 자세히 밝히지
않고는 좀이 쑤셔 견딜 수 없었다. 발신인은 반송주소를 적어 놓았다. 우리들은 최단 시일
내에 차를 몰고 그를 찾아가 면담을 요청했다.
직접 만나 보니 편지에서보다는 오히려 말이 없었고, 당초에 편지 한 것을 후회하는 눈치였다.
그는 ‘바꿀 수 없는 증거’에 대해서는 부연하기를 거부하고 자진해서 작은 정보 한 토막을
더 보태었다. 아무튼 그 ‘증거’ 또는 그 증거가 있다는 사실은 다른 성공회 신부 앨프리드
레슬리 릴리 참사가 그에게 알려주었노라고 했다.
1940년에 세상을 떠난 릴리는 글을 써서 널리 발표했었으므로, 무명의 인사가 아니었다. 그는
일생 중 상당한 기간 동안 가톨릭 현대화 운동과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으며, 이 운동은
일차적으로 그 기반을 파리의 생 쉴피스 신학교에 두고 있었다. 청년시절에 릴리는 파리에서
활동했고, 에밀 오페와 친분이 두터웠다. 인맥의 궤적은 완전히 한 바퀴를 돈 셈이었다. 릴리와
오페의 연계를 고려에 넣은다면, 그 신부의 주장이 아무리 터무니 없는 것이라 하더라도 무턱
대고 흘려버릴 수는 없었다.
그와 비슷하게 중대한 비밀이 있음직한 증거가 나타나고 있었다. 우리들의 소니에르 설화에
처음부터 끝까지 되풀이해서 나오는 인물, 17세기의 위대한 화가 니콜라 푸생의 생애를 조사하
기 시작했을 때였다. 1656년 당시 로마에 살고 있던 푸생이 프랑스 왕 루이 14세의 재무장관
니콜라 푸케의 형제 루이 푸케 신부의 방문을 받았다. 로마에서 푸케 신부는 자기 형에게 급히
편지를 보내어 푸생과의 회담 내용을 알렸다. 이 편지의 일부는 인용할 가치가 있어 여기 적는
다.
그와 저는 어떤 일을 토의 했습니다. 그것을 형님에게 자세히 설명하기란 어렵지 않습니다 –
푸생씨를 통해서 이 일이 이루어진다면 제왕들이라 할지라도 큰 공을 들여 얻어내려는 이익을
누리게 될 것이며, 그의 말을 빌린다면 몇 세기가 지나더라도 다른 사람은 그 누구도 다시
발견할 수 없으리라고 합니다. 더구나 이것은 찾아내기가 너무 어려워 지구상에 있는 어떤
것도 그보다 더 좋거나 그와 맞먹을 수 있는 재물이 없습니다.
어느 역사가 또는 푸생이나 푸케의 전기작가도 지금까지 이 편지를 만족스럽게 풀이하지 못했
다. 이것은 분명 지극히 중대한 의미를 지닌 신비로운 문제를 언급하고 있다. 이 편지를 받고
오래지 않아 니콜라 푸케는 체포되어, 죽는 날까지 투옥되어 있었다. 어떤 기사와 기록에 따르
면, 그는 외부와는 엄격하게 통신이 두절되어 어떤 역사가들은 그가 바로 철가면의 주인공이
아닌가 하는 추측을 하고 있다. 그리고 또한 그의 서신은 남김없이 루이 14세가 압수하여,
그것을 왕이 직접 검사했다. 그 뒤 몇 년 동안 루이 14세는 푸생의 그림 <아르카디아의 양치
기들>의 원화를 구하려고 광적으로 날뛰었다. 마침내 그것을 손아귀에 넣자, 베르사이유 궁전
안 자기 밀실에 숨겨 두었다.
그 예술적인 위대성이 어떠하든, 이 그림은 무척 답답해 보인다. 전면에는 남자 셋과 여자
하나인 양치기들이 크고 오래된 무덤 둘레에 모여 비바람에 씻긴 비석의 명문 [ET IN
ARCADIA]를 명상에 잠겨 보고 있다. 배경에는 푸생의 작품에 으레 등장하는 그러한 유형의
험준한 산악풍경이 솟아 있다. 다른 푸생 전문가들도 그렇거니와, 앤터니 블런트의 말에 따르
면, 이 풍경은 완전히 신비적인 것이며, 화가의 상상력으로 지어낸 장면이라고 했다. 그런데
1970년도 초에 그림의 그것과 꼭 같은 실제의 무덤 – 배경, 규모와 비율, 형태, 주변의 식물,
심지어 푸생의 양치기 가운데 하나가 발을 올려 놓고 있는 둥근 바위덩어리마저 일치하는 –
을 찾아냈다. 이 실존하는 묘, 아르크라는 마을 변두리 – 렌느 르 샤토에서 약 6마일, 블랑슈포
르 성에서 3마일 거리 – 의 암벽무덤 앞에 서면 그 전망이 그림 속의 그것과 거의 구분할 수
가 없다. 그러므로 회화의 배경에 있는 산봉우리 가운데 하나는 렌느 르 샤토라는 게 분명해진
다.
무덤의 연대는 전혀 언급되지 않고 있다. 물론 아주 최근에 섰을 수도 있지만, 도대체 무덤을
세운 사람들이 어떻게 그림의 배경과 그렇게도 꼭 같은 장소를 선택하게 되었는가? 사실 이것
은 푸생이 살던 시대에 세워지고, <아르카디아의 양치기들>은 현장을 충실하게 재현했다는
인상을 준다. 이 부근에 있는 농민들의 말에 따르면, 그 무덤은 하도 오래 그곳에 있었기 때문
에, 그들과 그 부모와 조부모들이 기억하고 있다고 했다. 게다가 1709년에 나온 어느 ‘회고록’
에도 구체적으로 지적되고 있다는 것이다.
아르크 마을 등기부를 보면, 무덤이 서 있는 이 땅은 1950년대에 세상을 떠나기까지 매서츠세
츠주 보스턴의 루이스 로런스라는 미국사람의 소유였다. 1920년대에 로런스씨는 이 돌무덤을
열어보았는데, 속이 비어 있어서 뒷날 그의 아니와 장모를 그 안에 묻었다.
렌느 르 샤토를 소재로 한 BBD영화의 제 1편을 준비하면서 우리들은 그 무덤을 찍느라 하루
오전을 보냈다. 점심식사를 하기 위해서, 작업을 중단했다가 약 3시간 뒤에 돌아왔더니 우리들
이 없는 사이에 무덤을 부수고 들어가려고 난폭하고도 조잡한 행동을 한 흔적이 있었다.
실제의 무덤에 과거에는 비문이 있었는지 모르겠으나, 지금은 마멸되어 없어진 지 오래다.
푸생의 그림에 있는 비문은 진부한 애수를 나타내는 것으로 보인다 – 고전적인 신화의 목가적
낙원 아르카디아에서도 죽음은 그 침울한 존재를 드러내고 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이 비문에
는 동사가 없다. 문자 그대로 옮겨놓으면 이렇다.
그리고 아르카디아에서 나는 …..
동사가 빠져야할 까닭이 무엇인가? 철학적인 이유에서 – 모든 시제(時制)를 배제하고 과거,
현재, 미래의 모든 지시사를 제거하여 영원한 무엇을 함축하려 했는가? 혹은 한층 실용적인
이유가 있었을지도 모른다.
소니에르가 발견한 양피지 문서의 암호는 글자 맞추기, 즉 환치와 글자의 재편성에 크게 의존
하고 있었다.
[ET IN ARCADIA EGO] 역시 글자 퍼즐 놀이일 수 있을까? 비문에 일정한 글자만을 넣기
위해서 일부러 동사를 빠뜨렸을까? 텔레비전 시청자 한 사람이 우리에게 편지를 보내어 그럴
수 있지 않겠느냐는 의사를 전했다. 그리고는 글자를 다시 정리하여 조리 있는 라틴어 문장을
만들어 보냈는데 다음과 같다.
I TEGO ARCANA DEI
(가거라! 나는 하나님의 비밀을 숨기고 있다)
이처럼 재치 있는 작업에 우리는 기뻐하면 커다란 흥미를 느꼈다. 그때만 하더라도 이 충고가
얼마나 놀랍도록 적절한가를 미처 깨닫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