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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윤관(尹瓘)
[생졸년] 1040년(고려 정종 6)~1111년(고려 예종 6)
이 비는 1766년(조선 영조 42)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에 건립된 윤관신도비(尹瓘神道碑)로 21대손인 윤봉구(尹鳳九)가 비문을 지었고, 앞면의 글씨는 윤동섬(尹東暹)이 썼으며, 뒷면의 글씨는 윤방(尹坊)이 썼다.
윤관(尹瓘)의 본관은 파평이고, 자는 동현(同玄)이다. 문종(文宗)때 과거(科擧)에 급제(及第)하여 여러 벼슬을 거쳐 어사대부, 지추밀원사겸한림학사승지(知樞密院事兼翰林學士承旨) 등에 이르렀고, 요(遼)와 송(宋)나라에 사행(使行)하기도 하였다.
1104년(고려 숙종 9) 2월에 이르러 동북면행영도통으로 임명(任命)되어 여진(女眞)을 정벌하였는데 소기의 성과를 달성하지 못하고 돌아와 별무반(別武班)을 조직(組織)하여 후일(後日)의 여진정벌(女眞征伐)에 대비(對備)하였다. 1107년(예종 2) 10월에 윤관(尹瓘)을 원수(元帥), 오근총(吳近寵)을 부원수(副元帥)로 임명하여 크게 여진정벌(女眞征伐)을 행하였다.
장군(將軍)은 17만의 대군(大軍)을 이끌고 4군으로 편성(編成), 수륙양면(水陸兩面)에서 일대공격(一大攻擊)을 감행하여 함흥평야이북(咸興平野以北)의 여진(女眞)의 근거지(根據地) 135개(個) 촌락(村落)을 점령(占領)하고 9성을 쌓았다. 그러나 여진이 다시 공격하여 고려와 협정을 맺어 다시 돌려주었다.
▲문숙공 윤관신도비 / 소재지 : 경기도 파주시 광탄면 분수리 산4-1(혜음로 9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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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수태보 문하시중 영평백 문숙 윤공 신도비문(高麗守太保 門下侍中 鈴平伯 文肅尹公神道碑文)
우리 선조이신 고려 태보(高麗太保)를 지낸 시호가 문숙공(文肅公)인 분은 휘(諱)가 관(瓘), 자(字)가 동현(同玄)이며 관향은 파평(坡平) 이다. 공이 삼한(三韓)을 뒤덮고 그 명성은 백대에 펼쳐져 있다. 의당 그 묘소에 비석을 세워 후손들로 하여금 그 향을 올리고 그 앞을 지나는 자은 공경히 인사하게 하는 것이 천도(天道)와 이치의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세대가 점점 멀어져가고 다른 사람들에 의해 묘소가 침범당하고 옛날 무덤자리를 살피지 못했기에, 우리 종친들이 그것을 통탄스럽게 여겨서 몇백년 사적을 들추어 보기를 하루 아침 일처럼 하였다. 이제 21대손 면교가 여러 종친들과 방편을 세워서 묘소를 찾아 다시 봉축하고 종족의 근본을 추모하게 되었으며 비로소 만방에 표하였으니, 진실로 우리 후손들에게 이보다 더 큰 경사가 없으리라.
아아! 이 어찌 우리 선조들의 밝고 밝으신 영령이 어둡지 않아 가만히 후손을 일깨워서 그렇게 된 것이 아니라 하리요.
공의 고조부의 휘는 신달(莘達)이니 고려 태조를 도와 이 나라를 통일하였으므로 벽상공신(壁上功臣)에 봉해졌고, 벼슬은 태사(太師)에 이르렀으니, 우리 윤씨의 시조(始祖)이시다.
증조부의 휘는 선지(先之)로 또한 벽상공신이었으며, 할아버지의 휘는 금강(金剛)으로 상서좌복야(尙書左僕射)를 지냈다. 아버지의 휘는 집형(執衡)으로 검교소부(檢校少府) 소감(少監)을 지내고 우복야(右僕射)로 추증(追贈)되었으며 문정공(文靖公) 이란 시호(諡號)를 받았다. 공께서는 일찍이 과거에 장원(壯元)으로 급제(及第)하고 현달하여 여러 번 자리를 옮겨 이부상서(吏部尙書), 한림학사(翰林學士), 승지(承旨)에 이르렀다.
고려 숙종(肅宗,고려 제15대) 10년(1105년)에 참지정사(參知政事), 판한림원사(判翰林院事) 태학사(太學士)가 되었는데, 당시는 여진족(女眞族)이 북방(北方)을 괴롭혀온 지 오래였다. 예종(睿宗,고려 제16대왕) 초에 오랑캐가 정주(定州)를 침략하여 그 형세가 매우 심각하였다.
이에 공을 도원수(都元帥)로 삼고, 오연총(吳延寵,해주사람) 을 부원수로 삼아 부월(斧鉞)을 주어 보냈다. 공이 마침내 군대를 거느리고 북으로 행군하여 적진에 들어가 적을 크게 무찌르고, 또 금성(金城)에 이르러 격파하고, 석성(石城)에 당도하니 적들이 모두 성안으로 들어가 성문을 굳게 닫고 대적하지 않아 적을 격파할 수 없었다.
공이 장수들을 격려하고 협공을 하여 크게 무찔렀다. 하루도 못되어 두 성을 항복시키고 또 모든 장수들에게 부절(符節)을 주어 길을 나누어 적을 공략하여 적 6천여 명을 사로잡거나 죽였다. 그리하여 모든 군문(軍門)의 함성이 하늘을 진동하고 그 형세 또한 드높았으며, 기세를 몰아 적을 공격하니 마치 추풍낙엽(秋風落葉)과 같았다.
적은 사기가 떨어져서 도망쳐 북쪽으로 종적을 감추었고, 활과 칼을 버리고 진영에 와서 항복하는 자가 계속 이어져 공이 스스로 포고문(布告文)을 내려 그들을 치하하였다. 왕께서 글을 내려 공을 포상하였는데 그 글에서
“황하가 골짜기에 쏟아지듯 달려 나가 한 치 아교풀로 막을 수 없었고, 큰 바위가 산봉우리에서 굴러 빈 알이 바싹 깨졌네.”
라고 하였다.
그 글귀가 씩씩하고 힘이 있어 지금까지 전송되고 있다. 오랑캐 땅을 개척한 것이 700여리이고, 9성을 쌓고 경계비도 세웠다. 왕이 그 공로를 높이 여겨 공을 추충좌리 평융척지 진국공신(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으로 삼고, 문하시중 지군국중사(門下侍中知軍國重事)로 임명하시고, 개선하여 돌아올 때 북을 치고 음악을 연주하여 성대히 맞이하고는 교외에서 크게 잔치를 열어 군대를 위로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여진족(女眞族)이 다시 침략하여 공을 보내어 토벌케 하였는데, 적장의 머리를 베어 바치자 그 공을 치하하여 영평현 개국백(鈴平縣開國伯)에 봉해주시고 식읍으로 300호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태보상주국 감수국사(太保上柱國監修國史)를 제수하였다. 공이 죽자 시호를 문경(文敬)이라 하였다가 그 후에 유릉의 휘호를 피하여 시호를 지금의 문숙(文肅)으로 고쳤다.
공(公)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손에서 잠시도 책을 놓지 않았으며, 군영(軍營)에서도 늘 오경(五經)을 가지고 다녔다. 후진 중에 재주가 있는 학자들과는 도(道)를 논하기 좋아하였다. 이 때문에 현인(賢人)을 좋아하고 선(善)을 즐기는 것이 한 때에 으뜸이었다. 그의 신주(神主)를 예종(睿宗)의 사당(祠堂)에 배향하였고, 조선조에서도 숭의전(崇義殿)에 배향하였다.
그의 아들은 여섯인데, 맏아들 언인(彥仁)은 지후를 지냈고 그 후손은 남원(南原) · 함안(咸安)의 두 족으로 갈리어져 대대로 이어졌다. 다섯째 아들 언이는 정당문학을 지냈고 문강이란 시호를 받았으며, 지금 파평을 본관으로 하는 사람은 모두 그의 후손이다.
공의 공훈은 이미 세상에 드러났고, 그의 복과 은택이 멀리 전해 내려와 내외의 후손들이 번성하였고 현달하게 되어 그것을 다 기록하지 못하니, 임금이 태어나는 경사를 길러 성인을 탄생하게 하여 면면히 동방 억만세의 기업을 이어나가게 하는구나. 아! 아름답고 성대하도다.
공의 묘는 파평 분수원 북쪽에 있고, 기록이 보첩과 여지승림에 기록되어 있다. 촌민들은 문숙공을 마치 병사들이 장수 이름을 외우는 것처럼 알고 있는데, 모두 문숙공의 묘가 심씨 대 묘소 언덕 안에 있다고 한다. 대개 심씨댁 묘소 아래 한 개의 고분이 있는데 뒤에는 굽은 담을 쌓았던 흔적이 있고 앞에는 한 개의 흙 돈대가 있어 거기에는 윤시중교자총이라고 적혀 있다.
우리 종친들 중 산을 왕래한 자들이 지적하며 애통하게 여긴 지가 오래이다. 그 후에 홀연히 이씨 성을 가진 비석이 무덤 앞에 세워졌으니 이것은 전에 없던 일인데 이제 새로 생긴 것이어서 더더욱 사람들을 당황하게 하였다. 우리 종친이 비로소 심씨와 더불어 서로 따졌더니 그 말이 임금에게까지 전해졌다.
임금이 곧 측근의 신하를 보내어 그 실정을 염탐케 하고, 인하여 교지를 내려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700여년이나 된 옛 무덤에 만일 비석이 있었다면 사람들이 못 보았을 리가 없으나, 지금에 와서 비석이 세워졌으니 하늘이 세운 것인가? 귀신이 세운 것인가? 그 사람은 알기 어렵지 않도다.
또 무덤 앞 조그만 개울에서 비석 한 개를 얻으니, 비록 깎이고 깨지기는 하였으나 훈호와 벼슬, 시호와 성과 이름이 완연하여 읽을 수 있는데, 심씨가 오히려 다시 서로 논란을 벌여 양가에 다시 파문을 일으키는가?”
상께서 또 교지를 내려 “옛 정승이 지각이 있다면 마음에 어찌 편할 수 있겠는가. 그 후손이 된 자로 하여금 그 조상을 편히 모시지 못하도록 한다면, 어찌 사람의 도리라 할 수 있겠는가? 만약 이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내 마땅히 엄히 다스리겠노라.”라고 하시고, 이에 직접 글을 지어 근신을 보내어 공의 묘에 제사를 올리도록 하였다.
글에 이르기를,
“공의 묘가 분수의 북쪽에 있으니 세상 사람들이 교총이라 한다. 무덤 곁에 하늘의 이치 밝고 밝아 확연하니, 이 날부터 다시는 슬픔 일으키지 않으리. 이에 특별히 명하노니 묘를 다시 수축하라.”
심씨 집에서는 오히려 희미한 일을 가지고 번거롭게 하거늘, 성상께서 혁연히 친히 임하여 살펴보시고, 심정최가 묻어둔 비석과 다른 집안의 비석을 옮겨 세우도록 하고 곧 제사를 지내도록 하였다.
이에 심정최의 불충불효함에 대한 교시가 있었다. 심하도다, 심씨의 근거 없음이여! 심씨는 윤씨에서 갈라져 나왔다. 심씨도 스스로 이것을 말하면서, 도리어 차마 이런 일을 할 수 있는가! 심씨는 아직도 묘를 옮기지 않아 땅이 너무 가까워 묘지의 제도를 끝내 다 갖추지 못했으니, 어찌 슬프고 애통하지 않겠는가?
아아! 공이 몇백년 뒤에 지우를 집어, 우리 성상께서 먼 옛날 일을 살펴 감흥을 느끼고 옛 무덤을 다시 수축할 수 있게 명하고 친히 글을 지어 제사를 드리니, 공의 세상에 다시 없는 큰 공적이 드러나게 되었고, 이미 잃어버렸던 유적도 다시 나타나게 되었다.
임금의 글이 혁연히 밝게 게시된 것이 마치 해와 별 같아, 후손들이 하해와 같이 헤아릴 수 없는 큰 은혜에 감격하여 칭송하고 있다. 오직 문강공의 묘가 보첩에도 또한 지금 심정승의 원산이라 했는데 오히려 징험하여 찾을 수 없다. 이는 성의가 미치지 못한 것이요, 인사를 다하지 못함이로다.
우리 종친과 후손들은 마땅히 그것을 알아야 하리라. 이제 장차 표석을 먼저 세우려 하노니 여러 종친들은 종중에 나가 의논하라.
지금 영부사 윤동도가 나 윤봉구에게 비문을 부탁하였다. 나는 병들어 늙고 붓을 놓은 지 오래였으나, 뒤에 계승하는 사람들이 힘을 다해 선인의 일을 추모하는데, 이것을 버리고야 감히 무엇으로 증거를 삼으리요.
삼가 행장 및 고려사 열전에 의존하여, 이를 엮어 글을 짓는다. 그러나 다른 증거할 만한 글이 없어 평일의 문장 및 공훈 다 기록치 못하고 만분의 일 쯤 밝혀 둘 뿐이다.
숭정기원후 세 번째 병술년(영조 42, 1766년) 월 일 세움
21대손 정헌대부 전 공조판서 겸 세자시강원찬선 봉구는 삼가 짓는다.
22대손 가선대부 사헌부대사헌 겸 동지춘추관사 동섬은 삼가 전면을 쓰다.
22대손 통정대부 사간원 대사간 지제교 방은 삼가 음기를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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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高麗守太保門下侍中鈴平伯文肅尹公諱瓘之墓
我先祖高麗太保諡文肅公諱瓘。字同玄。籍坡平。功蓋三韓。聲施百代。宜其衣履之藏。表識於後。使遺裔薦香。過者敬式。天道神理之必然。而世寢遠。爲人侵葬。莫省故處。吾宗之痛恨傷衋。閱幾百年如一日。今宗姓東暹,東晢在仁馹。諸人相與設方便。尋得塋域。改其封築。追遠寓慕。始有所矣。誠我後孫之莫大慶也。嗚呼。豈非我先祖赫赫之靈不昧者存。有所陰隲而然也歟。公高祖諱莘達。佐麗太祖。統一東土。策壁上功臣。官太師。爲我尹鼻祖。曾祖諱先之。亦壁上功臣。祖諱金剛。尙書左僕射。考諱執衡。檢校少府 少監 。贈右僕射。謚文靖公。公早魁科。仕華膴。累遷至吏部尙書,翰林學士,承旨。肅宗十年。參知政事。判翰林院事。太學士時。女眞匪茹北方久矣。睿宗初。寇擾定州關。勢甚橫。乃命公爲都元帥。以吳延寵副之。授鈇鉞以送。公遂提兵北行。入狄鄕遇賊。大破之。又至金城破之。又至石城。賊走入城。依險設固軍頓。不得進。公激勵將士。夾擊大破之。不一日而踣兩城。又授諸將節制諸路。分攻合擒。斬六千餘人。諸軍聲生勢長。摧鋒蹂醜。若振落焉。賊勢死咋。逃奔竆北。韜弓刀。降于陣前亦相續。公自爲露布以賀。王賜書褒諭。其表云黃河注壑。寸膠不能以防之。碬石轉峯。虛卵決然其破矣。句語雄勁。人至今傳誦。拓地七百餘里。築九城立界碑。王遙策公爲推忠佐理平戎拓地鎭國功臣。拜門下侍中知軍國重事。延寵爲協謀同德功臣。凱還。命以鼓吹軍衛迎。勞宴郊外。未幾。女眞又來創。遣公征之。及獻馘。加封鈴平縣開國伯。食實封三百戶。間又拜太保上柱國監修國史。及卒。諡文敬。後避綏陵徽號。改今謚。公少好學。手不釋卷。軍中常以五經自隨。後進有才學者喜稱道。以是好贒樂善。冠於一時。配享睿宗廟。我朝亦享崇義殿廡。子六人。第五男彥頤登文第。官門下平章事政堂文學。諡文康。我尹之至今顯於世者。皆文康派也。公勳庸旣著。福澤流遠。今內外孫蕃衍貴顯。不能盡記。而四毓沙麓之慶。誕生聖人。綿東邦億萬世基業。於休盛哉。公墓在坡平分水院北。載之譜牒與輿地勝覽。村氓知文肅公。如走卒之誦司馬。皆謂文肅公墓。在沈家塚岡之內。蓋沈塚下有一古墳。後有曲牆之址。前有一土墩。亦曰尹侍中轎子塚云。吾宗之往來山下者。指點傷惕久矣。其後忽有李姓之碑。立於墳前。是前無而今有者也。益使人疑惑。吾宗始與沈氏相詰。至達天聰。上敎曰。七百年古墓若有碑。人孰不見。而今乃有之。天所立耶。鬼所立耶。不難知矣。又於墳前小磵中得一碑。雖椎剝。然勳號爵諡與姓字宛然可讀。而沈氏猶復相難。兩家更爲申籲。上又敎曰。故相有知。心焉可便。爲其孫者。不使其祖妥靈。豈有人理。若不遵此意。予當嚴處。仍親製文遣近臣。致祭於公墓。有曰公墓焉在。焚修之北。世稱轎塚。塋域之側。乾道昭昭。皎然此日。不覺興愴。爰命修飭。及其修墓也。沈家猶執迷作挐。聖上赫然臨問。廷㝡以埋碑及他墓石移竪之。實直供焉。乃有廷最不忠不孝之敎。其供時諸宗人。聽於仗外。傳之甚詳。甚矣。沈氏之無狀也。沈氏我尹自出也。沈氏亦自言而反忍爲此乎。沈墳尙不移。地迫。墓制終不得備儀。豈不傷痛也哉。嗚呼。公得朝暮遇於屢百歲之後。我聖上曠古興感。旣命修墓。又親爲文以祭。公不世之偉績復著。旣失之遺藏復露。宸翰輝赫。揭如星日。後孫感誦。河海莫量。惟是文康公墓譜牒。亦曰今爲沈政丞之源山地云。而尙不能驗尋。此乃誠意之不逮。人事之不盡者也。凡我宗姓後人。其宜識之也。今將先立表石。諸宗人就議于宗中。今領府事東度屬鳳九以載石之文。鳳九癃老。久廢文墨。而後承之效力於追先事者。捨此無以也。謹依行狀若本傳。掇成爲文。然無他文獻之可徵。平日之文章事功。不得以揄揚萬一云爾。<끝>
崇禎紀元後三丙戌 月 日」
二十一代孫正憲大夫前工曺判書兼 世子侍講院賛善 鳳九謹撰」
二十二代孫嘉善大夫司憲府大司憲兼同知春秋館事 東暹謹書前面」
二十二代孫通政大夫司諫院大司諫知製 教坊謹書陰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