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당(李簹)
[생졸년] 1661년(현종 2)∼1712년(숙종 38)
조선 후기의 문신. 본관은 덕수(德水) . 자는 의숙(猗叔) . 실학자 이식(李植) 의 손자로, 예빈시정 이신하(李紳夏) 의 아들이며, 모친은 교관 신후원(辛後元) 의 딸이다. 여주 출생으로 이단하(李端夏)의 문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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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암 이재(李縡) 撰비문
현감 이공 묘지명(縣監李公墓誌銘)
공은 휘가 당(簹)이고 자는 의숙(猗叔)이니 예빈시 정을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된 휘 신하(紳夏)의 아들이요 영의정 수곡(睡谷) 휘 여(畬)의 아우요 택당(澤堂) 문정공(文靖公) 휘 식(植)의 손자이다. 덕수 이씨(德水李氏)는 우리나라의 문헌가(文獻家)였기에 공은 태어나면서부터 가훈에 영향을 받았으며 성품 또한 책을 좋아하고 경사(經史)를 탐구하여 심한 병이 아니면 일찍이 하루도 책을 놓은 적이 없었다.
수곡공(睡谷公)과는 형제간에 지기(知己)가 되어 일찍이 말하기를,
“우리 둘째 형님은 나의 스승이다.”
하였으니, 매사에 반드시 수곡공을 법도로 삼았다.
또 문정공이 남긴 가르침을 병풍에 걸어놓고 경계의 뜻을 담았다. 어버이를 모실 적에는 곁에서 부지런히 받들어 비록 비천하고 자잘한 일이라도 동복(僮僕)에게 대신 시키지 않았다. 모친이 오랫동안 병상에 누워있었는데 밤낮으로 부축해 드렸으며, 종종 어린아이 재롱을 부려 기쁘게 해드리고자 하였다.
전후로 몸과 마음을 다해 상을 치르면서 모두 예법대로 하였다. 일찍이 과부가 된 누이의 집에 임시로 거처하였는데 4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면서도 위아래에서 이간하는 말이 없었으니 남들이 어려운 일이라 여겼다. 젊어서 성품이 엄하고 급하여 남의 허물을 용납하지 않았는데 의정공(議政公)이 주의를 주자 힘써 성품을 다스려 너그럽고 여유 있는 성품으로 일변하였다. 그래서 매우 급박한 상황에서도 다급한 기색이 없었다.
집안이 성대하였기 때문에 항상 분수에 차면 넘친다는 근심을 생각하여 겸손함을 지켰다. 중간에 과거에 응시하고 만년에 가난 때문에 벼슬하였으나 모두 공이 즐기는 바가 아니었다. 시속이 대부분 이익을 탐하여 조급하게 다투는데 공은 이를 부끄럽게 여겨 분수에 따라 벼슬살이하다가 마침내 작은 고을의 수령 자리를 얻어 떠났다. 비록 큰 고을의 수령으로 추천되었으나 다른 곳으로 옮기길 구하지 않았으며, 돌아와서 자주 쌀독이 비었으나 또한 개의치 않았다.
공의 집안은 대대로 여강(驪江) 가에 거주하였는데 수곡공과는 강물을 사이에 두고 살아 아침저녁으로 왕래하기를 일상으로 여겼다. 어떤 이에게 말하기를,
“종일토록 옛 서적을 토론하니 인생의 지극한 즐거움이 어찌 이보다 더한 것이 있겠는가.”
하였다.
이따금 시를 읊조렸는데 그 시가 담박하여 속기(俗氣)가 없는 것이 공의 인품과 같았다. 병이 심해져 의원에게 가려고 도성에 들어갔다가 얼마 뒤 널에 누워 돌아왔다. 수곡공이 제문을 지어 곡하며 말하기를,
“의숙은 단정하고 고상하며 뜻은 공손하고 행실을 조심하였다. 어려서부터 자제로서의 허물을 보인 적이 없어 부모가 가상히 여기고 형제가 소중히 여겼다.”
하였다.
아! 이것은 남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 말이라 할 만하다. 공은 신축년(辛丑年,1661, 현종 2) 정원 15일에 태어나 임진년(壬辰年,1712, 숙종 38) 11월 30일에 세상을 떠났다. 공은 숙종(肅宗) 갑신년(甲申年,1704)에 처음 벼슬에 나아가 사산감역, 세자익위사 시직ㆍ부솔, 사복시 주부, 의금부 도사를 역임하고 외직으로 나가 양구 현감(楊口縣監)이 되었는데 4년 뒤에 그만두고 돌아갔다. 나중에 의영고 주부에 제수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다.
공은 재주와 식견이 통달하고 민첩하여 한 고을에 재능을 시험함에 그 다스림이 볼 만하였다. 청렴하고 검소하며 너그럽고 공평하였으며 풍교(風敎)를 급선무로 삼았다. 친척끼리 다투는 백성이 있었는데 우선 그 가장을 다스렸고, 부친이 병에 걸려 손가락을 베어 피를 올린 어떤 딸이 있었는데 혼수를 갖추어 시집을 보내주었다.
사옹원에 공납하는 백토(白土)가 고을의 큰 해악이 되자 중지하기를 주청하였다. 해당 관청에서 고집을 부리며 받아들이지 않자 또 차원(差員)으로 입대하여 힘써 아뢰어 마침내 수고와 비용을 절반으로 줄였으니 양구(楊口) 골짜기의 백성이 공에게 영원히 힘입었다.
모친 영월 신씨(寧越辛氏)는 부친이 교관 후원(後元)이다. 공은 두 번 장가들었는데, 원성 원씨(原城元氏)는 우윤 만춘(萬春)의 딸이고 삭녕 최씨(朔寧崔氏)는 좌랑 용지(容之)의 딸이다. 4남을 두었으니 기진(箕鎭)은 지금 예조 판서 예문 제학을 지내고 있는데 백부의 후사로 나갔으며, 규진(奎鎭)은 군수를 지냈고, 익진(翼鎭)과 성진(星鎭)이 있다.
딸들은 각각 감역 윤익동(尹益東), 사인 박사존(朴師存), 김상린(金相麟)에게 시집갔다. 이 가운데 아들 2명과 딸 2명은 후배(後配) 소생이다. 규진의 아들은 역(湙), 숙(潚), 속(涑)이고, 익진의 아들은 담(潭)이고, 기진의 양자는 황(潢)이다. 공은 지평(砥平) 목곡(木谷)의 선영 옆에 안장하고 원배(元配)를 부장하였으니 수곡공의 묘와는 몇 리 떨어져 있다.
나는 이미 수곡공을 위해 묘지문을 지었는데 공의 자식들이 또 묘지문을 부탁하였다. 아! 나는 일찍이 계방(桂坊)에서 숙직하면서 한 번 공에게 인사드렸는데, 그 용모나 기상이 묻지 않아도 수곡공의 아우임을 알 수 있었다.
공이 수곡공에 대해서 평소 깊이 열복하였고, 수곡공 또한 “내 아우는 내 말이라면 흡족하게 따랐다.”라고 하였으니, 비록 궁달(窮達)이 매우 달랐으나 기미(氣味)는 대체로 비슷하였다. 공을 알고 싶은 자는 수곡공을 보면 될 것이다. 마침내 명(銘)을 지으니 명은 다음과 같다.
여호 한 굽이에 / 驪湖一曲
군자가 묻혀있네 / 君子攸宅
자신은 젓대 불고 형은 질나발 부니 / 我篪爾壎
그 즐거움 끝이 없네 / 其樂無垠
저 무성한 무덤에 / 彼菀者崗
송백이 푸르네 / 松栢靑蒼
천추세월토록 / 有來千秋
혼백이 함께 노닐 것이네 / 魂魄同游
내가 명을 지어 밝게 드러내니 / 我銘昭揭
수곡의 아우라네 / 睡谷之弟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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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脚註]
[주01] 현감 이공 묘지 :
저자가 이당(李簹, 1661~1712)을 위해 쓴 묘지명이다.
[주02] 일찍이 …… 없었으니 :
이당(李簹)이 처음 벼슬살이할 적에 외사(外舍)에 살면서 녹봉을 모두 누이한테 주었다. 어떤 이가 사는 곳이 너무 협소하지 않냐고
하면 그는 말하기를 “내가 서울에 있을 날이 얼마나 된다고 어찌 우리 늙은 누이를 저버리겠는가.” 하였다.
4년 동안 한솥밥을 먹으면서 온 집안사람들이 화목하여 위아래에서 이간하는 말이 없었는데, 그의 누이는 늘 이 때문에 감동하여 그
를 칭찬하였다. 《牧谷集 卷9 生考奉正大夫行楊口縣監淮陽鎭管兵馬節制都尉府君家狀》
[주03] 남들이 …… 말 :
《논어》〈선진(先進)〉에 “효성스럽다, 민자건이여. 그의 효성을 칭찬하는 부모와 형제들의 말에 대해서 사람들이 이의를 제기하지
못하는구나.[孝哉, 閔子騫! 人不間於其父母昆弟之言.]”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주04] 나는 …… 지었는데 :
본서 제42권에 수록된〈영의정 수곡 이공 묘지(議政睡谷李公墓誌)〉를 가리킨다.
[주05] 자신은 …… 부니 :
형제간의 우애를 비유한 것으로,《시경》〈하인사(何人斯)〉에 “백씨는 질나발을 불고, 중씨는 젓대를 분다.[伯氏吹壎, 仲氏吹
篪.]”라고 한 데서 나온 말이다.
ⓒ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 최예심 장유승 권진옥 이승용 (공역) | 202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