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주집 문집 제10권 / 묘갈명(墓碣銘)
통정대부 형조 참의 이공 묘갈명 병서
(通政大夫刑曹參議李公墓碣銘 幷序)
우리 마을에 순수한 덕을 지닌 군자가 있으니, 이공(李公) 휘(諱) 목(莯)으로, 자(字)는 자요(子繇)이다. 향당의 사람들이 한목소리로 그는 관후(寬厚)한 장자(長者)라고 말한다. 처음에 양녕대군(讓寧大君) 휘 제(禔)는 실로 공정대왕(恭定大王 태종(太宗))의 원자(元子)였지만, 임금의 자리를 사양하고 계승하지 않아 주(周)나라 태백(泰伯)처럼 하였으니, 공의 6대조이다.
이분이 함양군(咸陽君) 휘 포(𧦞)를 낳고, 이분이 호산군(湖山君) 휘 현(鉉)을 낳고, 이분이 진안 부정(鎭安副正) 휘 영남(永男)을 낳고, 이분이 봉사 휘 희년(希年)을 낳고, 이분이 제릉 참봉(齊陵參奉) 휘 세량(世良)을 낳았는데, 모두 봉호를 받고 증직된 사실이 가승(家乘)에 기록되었다.
세량의 부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는 참판(參判) 휘 주(澍)의 딸이다. 만력(萬曆) 계유년(1573, 선조 6)에 공을 낳았다.
공은 약관(弱冠)이 되기도 전에 향시에 연달아 합격하고, 을사년(1605)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다. 임자년(1612, 광해군4)에 과거에 급제하여 강진 현감(康津縣監)이 되었다.
계해년(1623, 인조 원년)에 내직으로 들어와 병조(兵曹)의 낭관이 되었다가 외직으로 나아가 전라 도사(全羅都事)가 되었다. 돌아와 병조 정랑이 되고, 내섬시 정(內贍寺正)을 거쳐 옥천 군수(沃川郡守)에 제수되고, 다시 제용감 정(濟用監正)에 임명되었다.
봉상시(奉常寺)로 옮겼다가 임기가 차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올라 영월 군수(寧越郡守)에 제수되었다. 을해년(1635)에 형조 참의(刑曹參議)가 되었다. 병자년(1636) 이후로는 면천(沔川)에 있는 시골집으로 물러나 살았다. 경진년(1640) 가을에 이르러 형조(刑曹)를 거쳐 평창 군수(平昌郡守)가 되었는데, 임오년(1642) 6월에 임소(任所)에서 운명하니, 향년 70세였다.
공은 진실한 성품에 부지런하고 삼가서 다급한 말과 황급한 기색이 없었다. 평소에 고요하고 차분하여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사람들과 교제할 때는 그 장후(長厚)함을 미루어 차별하는 바가 없었으니, 이웃 사람들이 그 화기(和氣)에 젖었다.
때때로 아우나 조카와 고금 인물의 선악(善惡)을 평론하고, 일의 이해(利害)가 뒤에 마땅히 어떻게 될 것인가를 이야기 할 때 훤히 알아서 막힘이 없었다. 그러나 진솔하기만 하고 화려하게 드러남이 없었으므로, 누구도 그 내면을 아는 이가 없었다. 이로 인해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고 낮은 관직에서 전전하였으니, 안타까운 마음 견딜 수 있겠는가.
공의 부인 파평 윤씨(坡平尹氏)는 호조 판서(戶曹判書) 휘 자신(自新)의 딸이다. 성품이 성실하여 공과 덕이 잘 맞았다. 아들 하나를 낳았으니 대사헌(大司憲) 만(曼)으로, 조정에서 모범이 되었으며 당대의 중임을 맡았는데, 오래 살지 못해 그 능력을 크게 베풀지 못하였다.
만의 아들은 진사 게(垍)이고, 딸은 지평(持平) 민종도(閔宗道)에게 출가하였다. 이들의 소생은 모두 어리다.
공이 강진 현감(康津縣監)으로 있을 때, 내가 조정의 명령으로 군사를 살피느라 그 현에 갔었다. 당시 도헌공(都憲公 이만(李曼))은 14세였는데 문재(文材)를 이미 성취하였고, 나와서 나의 술자리를 도왔다. 그런데 잠깐 사이에 세대가 변해가는 감회를 이루게 되었다.
지금 나만 죽지 않은 채 상유(桑楡)에 걸린 저녁 해처럼 늙은 신세로 공의 무덤에 기록하니, 진실로 탄식을 금할 수 없다. 다음과 같이 명을 짓는다.
사람들은 바야흐로 겉만 꾸미고 / 人方嫺飾
이리저리 달려 다니지만 / 橫騖旁馳
자신의 커다란 구슬은 잃어버리고 / 失己尺璧
얻은 것은 터럭처럼 하찮네 / 所得毫釐
의젓한 공은 / 懿懿維公
자랑하지도 고집하지도 않았네 / 不矜不持
나는 그 달려감을 편안히 하여 / 我安其驅
갈림길에도 두려워하지 않았네 / 不懾于岐
작위가 어찌 높았으랴 / 爵位豈多
보좌하는 관리로 낮았네 / 參佐以庳
벼슬길 높은 지위 / 名塗顯秩
누가 그 기회를 막았는가 / 孰遏其機
아들이 가업을 이어 / 有子克家
당대에 드날렸네 / 敭歷當時
구슬이 적수에 빠지니 / 珠淪赤水
사림들이 슬퍼하네 / 士林所悲
임존의 산기슭에 / 任存之麓
흙은 두텁고 광은 깊구나 / 土厚穴深
그 무덤 우뚝하니 / 其丘睪如
길 가는 사람도 공경을 표하네 / 行路攸欽
<끝>
[註解]
[주01] 양녕대군(讓寧大君) …… 하였으니 : 양녕대군은 태종(太宗)의 장남 이제(李禔, 1394~1462)로, 자는 후백(厚伯), 시호는 강정
(剛靖)이다. 태백(泰伯)은 주(周)나라 태왕(太王)의 장남이다. 태왕이 막내아들 계력(季歷)의 아들 창(昌)이 성덕(聖德)을 갖춘
것을 보고, 장차 상(商)을 정벌하기 위해 계력에게 왕위를 물려주고자 하였다.
이에 태백이 그 뜻을 알고, 아우 중옹(仲雍)과 함께 형만(荊蠻)으로 달아나니, 그곳 사람들이 귀의하여 임금으로 세우고 오 태백(吳
泰伯)이라고 일컬었다. 《史記 卷31 吳太伯世家》 여기서는 양녕대군이 왕위에 오르지 않고 아우 충녕대군(忠寧大君)이 왕위에
오른 사실을 말한 것이다.
[주02] 이포(李𧦞) : 1416~1474. 태종의 첫째 아들인 양녕대군 이제의 아들이다. 1431년(세종13) 통정대부(通政大夫) 원윤(元尹)에
제수되었고, 이듬해 가정대부(嘉靖大夫) 함양군(咸陽君)에 봉해졌다. 시호는 이안(夷安)이다.
[주03] 김주(金澍) : 1512~1563. 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응림(應霖), 호는 우암(寓庵), 시호는 문단(文端)이다. 예조 참판(禮曹參判)
을 역임하였다. 《寓庵遺集 卷7 贈輸忠翼謨光國功臣……寓庵金公諡狀》
[주04] 민종도(閔宗道) : 1633~? 본관은 여흥(驪興), 자는 여증(汝曾)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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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原文]
通政大夫刑曹參議李公墓碣銘 幷序
吾里中有純德君子。曰李公諱莯。字子繇。鄕黨一口言其長者。始讓寧大君諱禔。實恭定大王元子。讓德不嗣。爲周泰伯。於公上距爲六代。是生咸陽君諱𧦞。生湖山君諱鉉。生鎭安副正諱永男。生奉事諱希年。生齊陵參奉諱世良。俱有封贈載家乘。媲安東金氏。參判諱澍之女。以萬曆癸酉生公。未弱冠。連占發解。中乙巳司馬。壬子。釋褐登第。監康津縣。癸亥。入爲郞騎省。出全羅都事。還兵曹正郞。由內贍正除沃川郡守。復拜濟用正。轉奉常。考滿。陞通政階。除寧越郡守。乙亥刑曹參議。丙子以後退居沔川莊宅。至庚辰秋。由刑曹守平昌郡。以壬午六月考終于任所。得年七十。公恂恂勤謹。未嘗有疾言遽色。平居靜穆。不欲見知於世。與人交。推其長厚。無所差別。隣里飮其和。時與弟姪評論古今人臧否。及事利害後當如何。洞豁無滯。然悃款無華。人無有窺其中者。以是宦不通達。浮沈於下位。可勝惜哉。公媲坡平尹氏。戶曹判書諱自新女。性質塞淵。與公合德。生一子。大司憲曼。羽儀朝廷。肩時重任。拘於年命。不大厥施。有子進士垍。女適持平閔宗道。所生俱幼。公之監康津。不佞以朝命視師。至其縣。都憲公方年十四。文材已就。出而侑我酒。轉眄之頃。遽成人代之感。今我獨不死。桑楡末景。紀公窀穸。良可嘅也。銘曰。
人方嫺飾。橫騖旁馳。失已尺璧。所得毫釐。懿懿維公。不矜不持。我安其驅。不懾于岐。爵位豈多。參佐以痺。名塗顯秩。孰遏其機。有子克家。敭歷當時。珠淪赤水。士林所悲。任存之麓。土厚穴深。其丘睪如。行路攸欽。<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