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포은정문충공서원비명(圃隱鄭文忠公書院碑銘)
남공철(南公轍,1760~1840) 찬(撰)
고려의 문하시중(門下侍中) 시호가 문충(文忠)인 포은(圃隱) 정 선생의 휘는 몽주(夢周)요, 그 서원은 서경(西京) 숭양리(崧陽里)의 옛 집터와 유허에 있다. 경오년(庚午年,1810년 추정)에 공철이 유수(留守)로 부임하여, 중추절(추석) 사채(舍菜: 향사 전에 채소를 차려 제사 지냄) 전의 어느 날 서원에 알(谒)배하고, 역대 왕들의 어제(御製)와 어묵(御墨), 그리고 선생의 유상을 삼가 우러러보며 두 번 절하고 나왔다.
이에 다음 해 여름에 부(府)의 선비들이 서로 의논하여 계생(繫牲: 제물로 바칠 가축을 매어두는 돌)을 세우고 공철(公轍)에게 글을 청하였다. 현인군자의 도덕과 절의는 마치 일월성신이 하늘에서 찬란하게 빛나고 강하(江河)가 땅에서 흘러 미치지 않는 곳이 없는 것과 같다.
한 고을의 현인은 한 고을에서 제사 지내고, 한 나라의 현인은 한 나라에서 제사 지낸다. 그러나 공자 같은 이의 제사는 천하에 두루 미치되 유독 궐리(闕里)를 귀하게 여기니, 선생이 살던 옛 도읍에 있는 서원이야 어찌 더욱 중하지 않겠는가?.
선유(先儒)가 이르기를 "제사는 자기가 바라볼 수 있는 범위를 넘지 않는다" 하였으니, 그러므로 노나라에서는 태산에 제사 지낼 수 있어도 초나라에서는 하수(河水)에 제사 지낼 수 없다. 이는 예의 넘을 수 없음을 이른 것이다. 옛사람들이 선농제(先農祭)를 지내고, 수화제(燧火祭)를 지내며, 교잠제(敎蠶者)를 지낸 것은 모두 보답하기 위함이었다.
보답이란 지역의 멀고 가까움을 따지지 않는 것이다. 선생의 학문은 정주(程朱)의 통서(統緖)를 직접 이어받아 공씨(孔氏)에게 이르렀으니, 만약 그가 중국에서 태어났더라면 장차 온 천하가 함께 제사 지냈을 것이다. 지금 그의 지팡이와 나막신이 미친 곳과 언덕과 무덤이 있는 곳에 제수로 받드는 곳이 논하건대 십여 곳이 넘으니, 그 예우가 매우 마땅하되 숭양서원의 원(院)과 그 경중을 쉽게 논할 수 없다.
공철은 말학으로서 어둡고 얕으나 일찍이 선생의 문집을 읽고 사모하고 공경하는 바를 알았으나, 그 성리의 연해가 호탕하고 미오(微奧)한 곳에 이르러서는 그 만분의 일도 엿볼 수 없다. 더구나 사백 년 뒤에 태어나 보고 들음이 점점 아득하니 어찌 감히 서술할 수 있겠는가. 마땅함에 막혀, 선현 제군자의 논의를 간략히 읊는다.
퇴계(退溪)의 선생을 제사 지낸 문장에 이르기를, "슬프다 우리 부자(夫子)여, 하늘이 내린 인걸이시네. 성인에 이르려는 학문은 하늘을 떠받치는 힘이로다. 들어와서는 오직 효도하셨고 나가서는 오직 충성하셨네. 세상이 몹시 어려움을 만나매 굽힘 없이 몸을 돌보지 않으셨네. 이웃 나라를 방문하여 완악한 자를 복종시키고 조정에 나아가 천자를 감동케 하셨네.
경륜에 온 힘을 다하여 흥성하고 쇠퇴함을 일으키고 폐단을 보완하셨네. 무너지는 큰 집을 나무로 받치고 물결치는 강을 배로 건네셨도다. 예로부터 영웅들은 운이 다하면 이룬 것이 없었으나, 태산 같은 의리는 무겁고 홍모(鴻毛) 같은 목숨은 가벼웠도다" 하였다.
우암(尤庵)이 일찍이 신도비(神道碑)를 지었는데, 그 대략에 이르기를 "선생은 호걸의 자질을 타고났고 홀로 우뚝 서는 기상을 품으셨도다. 고려 운명이 장차 끝나려 할 때에 맡은 바에 온 힘을 다하셨으니, 신하의 도리가 다 갖추어져 진실로 이미 책서(冊書)에 드리워졌도다. 고려가 선생을 두었으니 어찌 다행이 아니겠는가" 하였다.
우리 동방은 치우쳐 오랑캐의 옷을 입고 있었는데, 주나라 무왕(武王) 때에 이르러 은나라의 태사(殷太師: 기자)가 와서 군장이 되어 여덟 가지 가르침을 베풀었다. 이는 반드시 그 조상인 순임금의 사도(司徒)가 공경히 펴던 것을 종으로 삼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를 이어 지은 이가 들리지 않았다. 이천여 년을 지나 자취가 꺼지고 말도 묻혔다.
몽골 원나라의 세력 하에 천하가 누린내 나고 더러울 때에 이르러 동토(東土)에 미치매 또 인륜과 떳떳한 도리가 더욱 무너졌으니, 진실로 난세가 극에 달하여 치세(治世)를 생각하는 날이었다. 그런데 선생이 태어나셨던 것이다.
또 이르기를, "나이가 조금 들어서는 곧 성현의 학문을 사모하셨고, 부모의 상을 당하여는 모두 여막에서 시묘하며 상례를 마쳤다. 의관과 문물을 화하(華夏)의 제도를 좇아 사용하였고, 글을 강론하고 이치를 논할 때는 주자(朱子)를 주력으로 삼았으되 가로 풀고 세로 풀음이 부합하지 않음이 없었다.
비록 옛 주석의 지리한 것들이 사람을 그릇되게 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강서(江西)나 영가(永嘉)의 유사하면서도 그릇된 것들도 또한 행해질 곳이 없었다. 가례(家禮)를 사용하여 사당을 세우니 제사의 예가 바르고, 오랑캐를 배척하고 의로운 주군에게 귀의하니 춘추의 대의가 밝아졌다.
대개 그 큰 벼리와 커다란 쓰임이 모두 귀신에게 물어도 의심이 없고 백세를 기다려도 미혹되지 않는다" 하였다. 이 때문에 본조의 제자들이 근본을 추슬러 연역할 수 있었으니, 그 도학의 연원과 전장문물(典章文物)이 낙건(洛建)에서 거슬러 올라가 은주(殷周)에 은은히 스며든 것이 모두 선생으로부터 비롯되었다. 그 정치를 다스리고 나라를 보전하며 충성을 다하고 어짊을 이룬 것은 진실로 선생의 남은 일일 뿐이다.
옛적에 문중자(文中子)가 이르기를 "공자에 통하여 망극 한 은혜를 입었다" 하였으니, 동토의 선비들이 선생에게 대함도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할 것이다. 두 선생(퇴계, 우암)의 학문 연원은 선생에게서 나와 국조의 유림(儒林)의 종주가 되었고, 모두 도학을 밝히는 것을 선생의 큰 공으로 삼았다.
대개 선생이 나라를 위해 순절한 절의는 아줌마와 어린아이까지도 모두 말하지만, 그 도에 이르면 사대부들도 능히 말하는 이가 드물다. 이미 그 도를 알면서도 그 처음 주창한 공이 미친 바가 크고 멀다는 것을 알지 못하였는데, 두 선생을 얻은 뒤에야 그 말이 더욱 징신(徵信)할 만하게 되었다.
세상에는 진실로 그 임금을 위해 절의를 세우는 이가 있으니, 이는 중간 이상 되는 이들은 혹 힘쓸 수 있는 바이다. 백이(伯夷)는 주나라의 곡식을 먹지 않고 수양산 아래에서 굶어 죽었다. 이는 백이에게 있어서는 하나의 절의이므로 사람들이 일찍이 그를 성인이라 칭하지 않았으나, 공자와 맹자를 얻고서야 그 덕이 비로소 드러났다.
공자가 이르기를 "백이와 숙제는 인을 구하여 인을 얻었다" 하였고, 맹자는 "성인 가운데 맑은 분이다" 하였다. 인이라 하고 성이라 하여 허락한 것은 그 학문과 도덕이 이미 당시의 대로(大老)가 되어 백세의 스승이 되었음이다. 그 우뚝 서서 홀로 행한 절의는 모두 도를 믿음이 두텁고 스스로 아는 것이 밝음에서 비롯된 것이다.
백이의 절의를 알기는 쉬우나 백이의 덕을 알기는 어렵다. 만약 공맹의 말씀이 아니라면 백이는 반드시 성인의 반열에 끼지 못했을 것이다. 선생의 절의는 실로 평소의 학문에서 나온 것이요, 게다가 그 처음 윤강을 붙들고 성리를 창명한 공은 퇴계와 우암을 얻어 더욱 두드러지게 드러났다.
생각하건대 동토 수천 리가 변하여 인의예의 나라가 되고 금수(禽獸)를 면하게 된 것이 누구의 은덕이겠는가?.
대저 또 나아갈 것이 있다. 서원은 진실로 학문을 강구하는 곳이다. 선비가 그곳에 거함은 마치 온갖 장인이 일터에 거하여 그 일을 성취하는 것과 같다.
서원에 있으면서 학문을 강구하지 않는 것은 장인이 일터에 있으면서 일을 하지 않는 것과 같다. 선생의 도는 곧 삼강오상(三綱五常)이요, 학문은 시서(詩書)와 어맹(語孟), 그리고 정주(程朱)의 책이다. 그 일은 높고 멀어서 행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요, 배우지 않는 것을 근심할 뿐이다. 배우면 이를 수 있거늘, 세상이 쇠한 지 오래되었다.
선비들이 대개 외우고 읽는 암송의 학문으로 과거와 벼슬길에 요행히 들어가며, 어린아이 시절부터 서당에 들어와 조정에 서서 정사를 좇을 때까지 모두 일체 요행의 마음을 가질 뿐이고, 심한 자는 술과 음식에 놀고 머무르며 서로 희롱과 업신여김을 더하니, 이에 다툼과 소란이 일어난다. 이는 이 고을의 제군자들이 마땅히 힘써야 할 바이다.
이 서원에 들어오는 자는 반드시 윤강으로써 기본을 삼고, 시서로써 밥과 반찬을 삼으며, 벗으로서 절차탁마하고 염치로써 준척(繩尺: 규범)으로 삼아야 한다. 부박(浮薄)한 명리의 사람이 되지 않은 뒤에야 선생의 도가 장차 빛나고 선생의 학문이 흥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저 상자와 의자, 그리고 당우는 허설(虛設)에 그칠 뿐이다.
원의 정실은 6칸이며, 동서로 배향된 이가 모두 다섯 분이다.
충정공(忠靖公) 우현보(禹玄寶)의 휘는 현보(玄寶)이니, 선생과 함께 고려 말에 벼슬하여 도의의 교분을 맺었다. 선생이 해를 당할 때에 감히 와서 보는 이가 없었으나, 공이 몰래 천마산의 승려 한 사람을 시켜 관곽을 갖추어 해풍현(海豐縣)에 장사 지냈다. 본조에서 단양백(丹陽伯)으로 추증하였다.
문공(文康公) 서경덕(徐敬德)의 휘는 경덕(敬德)이며 서경 사람이다. 어려서부터 격치(格致)의 학문에 뜻을 전념하여 일찍이 천지 만물의 이름을 벽에 붙여놓고 한 물건을 이미 통하고 난 뒤에 또 다른 한 물건을 궁구하였다. 바야흐로 그것을 궁구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밥을 먹어도 그 맛을 알지 못하였고, 혹은 여러 날 동안 잠을 자지 않기도 하였으니, 그 학설은 대개 스스로 얻은 것이 많았다. 학자들이 화담(花潭) 선생이라 일컫는다.
문정공(文正公) 상헌(金尙憲)의 휘는 상헌(尙憲)이요, 천자(天姿)가 고결하고 강직하였다. 일찍이 정학(正學)을 일으키는 것을 자기임무로 삼았고, 명나라가 망하자 절의를 지켜 벼슬하지 않았으니, 조정과 야인들이 지금까지 스승으로 존경한다.
문정공(文貞公) 육(金堉)의 휘는 육(堉)이요, 경제(經濟)의 재주로 농가에서 일어나 재상이 되어 대동법(大同法)을 행하였으니 인효조(仁孝朝)의 명신이라 일컬어진다.
문효공(文孝公) 익(趙翼)의 휘는 익(翼)이요, 성품이 학문을 좋아하여 대학(大學)과 중용(中庸)에 더욱 깊었다. 지은 <곤득설(困得說)> 등의 여러 편이 세상에 전한다.
충정과 문강의 배향은 혹 도를 같이함으로 인함이요, 이 고을의 산두(山斗: 태산과 북두칠성, 즉 추앙받는 존재)의 바람으로 함이며, 문정·문정·문효는 일찍이 부(府)에 임임(莅任)하였고 또 사람들에게 남긴 은택이 있었으므로 함께 제사 지내는 것이다.
서원의 창건은 만력 계유년(癸酉年,1613)에 있었고, 비의 건립은 곧 숭정기원후 세 번째 신미년(1831) 7월 어느 날이다.
[명(銘)하여 이르기를]
은나라 태사가 동쪽으로 와서 여덟 조항으로 백성을 가르쳤네.
이천 년이 지나매 성인은 멀어지고 말은 묻혔도다.
아! 우리 선생이시여, 인류 중에서 빼어나게 나오셨네.
정학을 창기(倡起)하시어 깊이 나아가고 멀리 도달하셨도다.
가로세로 논설함이 스스로 도(道)와 계합하였네.
거친 가시덤불을 베어내어 풍속을 땋은 머리의 오랑캐에서 변화시켰네.
선비들이 글 읽고 노래할 줄 알며 상례와 제사의 예를 바로잡았네.
천명이 돌아갈 곳이 있어 신하와 종복이 되지 않으셨네.
한 번 죽음으로 나라에 순절하시어 그 몸이 욕되지 않으셨도다.
주나라가 도서를 세워 閩甌(민구)에 전함과 같도다.
공로는 이어 열어줌에 남아 있고 은택은 오히려 흘러내리네.
또한 그 이룩하신 바를 감히 그 누구와 짝하리오.
숭산의 남쪽이요, 사당의 궁궐은 날아갈 듯 엄숙하네.
삼가 내리신 편액에는 빛나는 보묵(寶墨)이 있도다.
부엌과 변방(변소와 문)이 질서가 있고 깎고 갈았도다.
붉고 흰 칠은 변하지 않고 벽돌은 숫돌같이 매끄럽네.
누가 그 배향될 이인가?
다섯 군자라 이르니 뜻이 같고 도가 합하여 춘추로 함께 제사 지내네.
제제유유(濟濟瀏瀏)하도다, 이 많은 선비들이여.
물고기, 포, 마른고기, 육포와 젓갈이요, 변(籩)과 두(豆), 수(簠)와 귀(簋)로다.
신명들이 두루 취하고 배부르며, 앙제(盎齊: 빚은 술)는 이미 향기롭도다.
복과 아름다움을 의지해 받들어 천만 년에 이르리라.
돌에 비문을 새기니 뜰에 우뚝하도다.
아! 선생이시여, 성인의 맑음을 얻으셨네.
<끝>
[역주]
◇포은 정문충공(圃隱鄭文忠公): 고려 말의 충신이자 성리학자인 포은 정몽주(1337~1392)를 가리킨다. 시호는 문충이다.
◇서경 崧陽里(숭양리): 고려의 수도였던 개성(부소산의 남쪽이자 개성의 별칭인 송악의 남쪽)을 가리킨다. 포은 정몽주의 유허지에 숭양
서원이 세워졌다.
◇퇴계(退溪)와 우암(尤庵): 각각 조선 성리학의 거봉인 퇴계 이황과 우암 송시열을 뜻한다.
◇배향된 오위(五位)의 인물:
우충정공 우현보(禹玄寶): 고려 말 포은과 교우하며 절의를 지킨 충신이다.
서문공 서경덕(徐敬德): 조선 전기의 위대한 학자로 호는 화담이다.
김문정공 상헌(金尙憲): 조선 후기의 문신이자 병자호란 때 청나라에 항전할 것을 주장한 충신이다.
김문정공 육(金堉): 조선 중기의 대신으로 대동법 시행 등에 힘쓴 실학적 경세가이다.
조문효공 익(趙翼): 조선 중기의 학자로 경학(經學)과 성리학에 깊은 조예를 가졌다.
출처>전통의명문 경주이씨종친회 카페 ㅣ 이상훈
--------------------------------------------------------------------------------------------------------------------------------------------------------
[原文]
圃隱鄭文忠公書院碑銘
高麗門下侍中謚文忠圃隱鄭先生諱夢周書院。在西京崧陽里舊第遺墟。歲庚午,公轍來爲留守。以仲秋舍菜前某日,謁書院,欽觀列朝御製御墨及先生遺像,再拜而出。粤明年夏,府之諸士相與謀竪繫牲之石,請公轍以文。賢人君子道德節義,如日月星辰之閃爍明麗于天,如江河之流于地,無乎不被。一鄕之賢,一鄕祀之;一國之賢,一國祀之。然如孔子,其祀遍天下,而尤以闕里爲貴,則書院之在先生所居之舊都者,豈不益重耶。先儒有言「祭不踰望」,故魯可以祭泰山,楚不可以祭河,此言禮之不可踰也。古者爲先農祭,爲燧火祭,爲敎蠶者祭,皆所以報也。報者,不以地之遠邇。先生之學,直接程朱統緖,以達於孔氏,使其出於中國,則將擧天下同祀。今其杖屨所至、邱墓所在,奉以俎豆者,亡慮十餘所,其禮也甚宜,而未易與崧陽之院論其輕重也。公轍以末學蒙陋,嘗讀先生文集,知所慕敬,而至其性理淵海之浩汗微奧者,不能窺其萬一。且生於四百年之後,聞見浸遠,何敢有述。無已,略誦先賢諸君子之論。退溪之祭先生文曰「嗟我夫子,天挺人傑。希聖之學,拄天之力。入則惟孝,出則惟忠。遭世孔棘,蹇蹇匪躬。聘隣服頑,朝天感帝。盡瘁經綸,興替補敝。廈顚木支,河决航濟。從古英雄,運去無成。泰山義重,鴻毛命輕。」尤庵嘗撰神道碑,其略言「先生挺豪傑之才,負特立之姿。當麗運將訖,盡瘁所事,臣道畢備,固已垂諸冊書。麗氏之有先生,豈不幸歟」我東僻處夷服,至周武王時,殷太師來爲君長,八敎是施,是必宗其祖舜司徒之敬敷者,然繼作者無有聞焉。歷二千餘年,跡熄言湮。當胡元之世,天下腥羶,至於東土,則又彝倫益斁,誠亂極思治之日也,而先生生焉。又曰「稍長卽慕聖賢之學,父母喪皆廬墓終制。衣冠文物,遵用華制。講書談理,主於朱子,而橫說竪說,無不脗合。不但古註之支離者不能誤人,而如江西、永嘉似是而非者,亦無所售焉。用家禮立祠堂而祭祀之禮正,拒北虜歸義主而春秋之法明。盖其宏綱大用,皆可以質鬼神而無疑,俟百世而不惑矣。」是故本朝諸儒得有以推本演繹,其道學淵源,典章文物,沿泝于洛建而浸淫乎殷周者,皆祖於先生。其制治保邦,盡忠成仁者,寔先生之餘事也。昔文中子曰「通於夫子,受罔極之恩。」東土之士於先生,亦當如此。二先生學問淵源出於先生,爲國朝儒林所宗,而皆以闡明道學爲先生之大功。盖先生殉國之節,婦孺皆言之,而至其道則士大夫鮮能言之。旣知其道,而不能知其首倡之功所被者大而遠,及得二先生而後,其言愈可徵信也。世固有爲其君立節者,此中人以上或可以勉也。伯夷不食周粟,餓死首陽山下,此在伯夷爲一節,故人未嘗以聖稱之,得孔子孟子而其德乃彰。孔子曰「伯夷、叔齊,求仁得仁。」孟子曰「聖之淸者也。」曰仁曰聖而許之者,是其學問道德,已爲當時之大老而爲百世之師也。其特立獨行之節,皆由於信道篤而自知者明也。知伯夷之節易,知伯夷之德難,若非孔孟之言,則伯夷必不居聖人之列矣。先生之節,實出於平日之學問,而且其首扶倫綱倡明性理之功,得退溪、尤庵而益著顯焉。原環東土數千里,變而爲仁義禮樂之邦,而得免於禽獸者,其誰之賜歟 抑又有進者。書院固講學之所也,士之居之,如百工居肆,以成其事院而不講學,則與肆而不事事同。先生之道,乃三綱五常也學,乃詩書語孟程朱之書也。其事非高遠而難行,患不學耳,學之可至也。而世之衰久矣,士率以記誦佔畢之學,乾沒於科擧仕宦之途。自童而入塾,至立朝從政,皆一切僥倖之心,而甚者酒食流連,戲侮相加,於是爭閧起焉。此鄕中諸君子之所當勉也。入是院者,必也倫綱以爲基本,詩書以爲茶飯,朋友而切磋之,廉恥而繩尺之,不爲浮薄名利之人,然後先生之道將有光,而先生之學可興矣。不然,彼筵几堂宇爲虛設而止爾。院正室爲六間,東西配享凡五位:
禹忠靖公諱玄寶,與先生同仕麗末,爲道義交。當先生之遇害也,人無敢來視者,公密嗾天磨山僧一人,具棺槨葬于海豐縣。本朝贈封丹陽伯。
徐文康公諱敬德,西京人。自少專意格致之學,嘗書天地萬物之名,付之壁上,究一物旣通然後又究一物。方其未窮也,食而不知其味,或累日不睡,其說盖多自得。學者稱花潭先生。
金文正公諱尙憲,天姿高潔剛直,嘗以興起正學爲己任,明亡守節不仕,朝野至今師尊之。
金文貞公諱堉,以經濟材起畎畒爲相,行大同法,號爲仁孝朝名臣。
趙文孝公諱翼,性喜學問,尤深於大學、中庸,所著《困得說》諸篇傳于世。
忠靖、文康之配,或以同道,或以是邦山斗之望,而文正、文貞、文孝曾莅府,又有流澤之在人者,故幷祀之。院之創,在萬曆癸酉, 碑之立,卽崇禎紀元後三辛未七月某日。
銘曰。
殷師東來,八條敎民。歷二千年,聖遠言湮。
猗我先生,出倫拔萃。倡起正學,深造遠詣。
論說橫竪,自與道契。芟闢蓁翳,俗變魋䯻。
士知絃誦,禮正喪祭。天命有歸,罔爲臣僕。
一死殉國,其身不辱。周建圖書,以傳閩甌。
功存繼開,惠澤尙流。亦其樹立,疇敢與儔。
崧山之陽,廟宮翼翼。欽賜厥額,有煌寶墨。
庖湢有序,斲之礱之。丹堊不渝,磚如砥而。
孰其配之 , 曰五君子。志同道合,春秋幷祀。
濟濟瀏瀏,來玆多士。魚腊𩚉𩞀,籩豆簠簋。
神具醉飽,盎齊旣旨。賴承庥嘉,維千萬禩。
刻銘于石,穹然在庭。於虖先生,得聖之淸。
金陵集卷之十六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