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세상을 향하여
2024.01.14.(주현후제2주일)
선한목자교회 김 명 현 목사
1/ 그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다. 예수께서는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 2/ 가려 놓은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 놓은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 3/ 그러므로 너희가 어두운 데서 말한 것들을 사람들이 밝은 데서 들을 것이고, 너희가 골방에서 귀에 대고 속삭인 그것을 사람들이 지붕 위에서 선포할 것이다." 4/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5/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6/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지 않는다. 7/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누가복음 12:1-7)
들어가는 말
지난 화요일, 한라산 정상에 올랐습니다. 평지는 온화한 날씨였지만 정상에 오를 즈음에는 엄청난 바람과 추위, 그리고 정상에 드리워져 있는 구름 속에서는 세찬 비바람을 마주했습니다. 하산하는 사람들의 모자 밖으로 삐져나온 머리카락에는 상고대가 피었는데, 마주하며 올라가는 사람들에게는 신기하면서도 부러운 왕관과도 같았습니다. 개인적으로는 다리 수술을 한 후 처음으로 올라가보는 높은 산이었습니다. 느낀 감정은 두 가지였습니다. 하나는 발목이 너무 아파 ‘예전과는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었고, 또 하나는 왕복 시간이 6시간 30분인 것을 확인하고는 ‘아직은 살아있구나!’(?)하는 생각이었습니다.
또 한편 든 생각이 있습니다. 세상이 평편하다면 가장 높은 곳은 에베레스트 산 정상일 것입니다. 하지만 지구는 둥글기 때문에, 게다가 어떤 기준 점도 없기에, 내가 서 있는 위치에서 보이는 가장 높은 곳이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입니다. 그래서 제가 한라산 정상에 섰을 때, 저는 세상의 가장 높은 곳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한라산 정상에 서 있는 저를 축으로 삼아 직각이 되는 직선을 그어 본다면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제 발 밑에 있게 됩니다. 실제로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은 이처럼 둥근 세상입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왜곡된 평편한 세상에 익숙합니다. 여기서 수많은 높이 기준들을 세우면서 경쟁합니다.
계층적 지배의 세계
여러분! 사방을 둘러보십시오. 중심은 나이며 지구 반대편은 중심인 내 시야를 벗어난 먼 곳일 뿐입니다. 그런데도 욕심이 많은 사람들은 세상에서 가장 높은 곳을 찾아 헤매고 있습니다. 세상의 권력자들은 하나 같이 높은 곳에 오르길 원합니다. 예를 들어 미국과 중국은 서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경쟁합니다. 힘이라는 기준을 세우고 최고가 되려는 경쟁입니다. 우리의 정치 현실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들은 한반도 내에서 최고가 되려고 서로를 짓누르며 미친 듯이 경쟁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돈, 때로는 명예, 때로는 권력을 계층적 기준으로 삼아 기어오르려고 애를 씁니다.
교회들은 어떤가요? 특히 한국교회는 큰 교회들로부터 줄이 세워져 있습니다. 큰 교회의 목사들은 자신들이 가장 높은 자리에서 한국교회를 대표한다고 자부하며 그렇게 행동하고 있습니다. 그들은 세상이 평편하다고 생각하기에, 자신들이 가장 높이 있다고 믿습니다. 교회 크기는 곧 천국에 가까운 순위가 되었습니다. 인간은 착각 속에서 높은 것을 찾기에, 마천루를 세우려고 노력합니다. 그것의 상징이 바벨탑입니다. 권력의 추구도 하나의 바벨탑이며, 돈과 명예의 추구도 하나의 바벨탑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둥근 세상이기에, 그들은 자신이 가장 높은 곳에 있지 않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높이 대신, 중심을 찾아봅시다. 경험 상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이 수평적이라고 느껴진다면, 우리는 높은 곳이 아니라 중심을 찾아야 할 것입니다. 중심을 찾는 문제는 높은 곳을 찾는 것과는 다릅니다. 둥근 세상에서 높은 곳은 정해져 있지 않듯이, 수평적 세상에서 중심은 정해져 있지 않습니다. 결국 그 중심은 나인 것입니다. 싸움과 경쟁과 좌절이 있는 높이 대신 중심을 찾을 때, 세상은 나를 중심으로 펼쳐져 있습니다. 이러한 세상은 연대하는 만큼 풍성해질 것입니다. 주변의 사람들을 온갖 이유로 질투하고 미워하면서 끊어낸다면 나의 삶은 협소해질 것입니다.
수평적 지배의 세계
수평적 연대를 기반으로 하는 민주적 세상에서 중심을 잃고 주변으로 밀려나 버려야 하는 대표적인 부류는 정치인들일 것입니다. 이들은 연대의 중심이 되는 대신, 허상인 높은 자리를 추구하면서 모든 사람들을 자신의 지배하에 두려고 합니다. 오늘 본문은 예수님께서 한 바리새파 사람의 초청으로 그의 집에서 식사를 하고 나오셨을 때의 주변 모습입니다. “그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다.”(1) 저는 누가복음이 설명하고 있는, 실제로는 불필요해 보이는 이 배경설명이 완전히 달라질 세상을 미리 보여준다고 생각합니다. 이제부터 이 이야기를 하려고 합니다.
본문에 앞서 예수님은 식사하시는 동안 함께 있던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을 책망하셨는데, 내용은 이렇습니다.(11:37-54) 예수님을 초청한 바리새파 사람이 식사 전에 손을 씻지 않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자 예수님께서는 ‘바리새파 사람들은 잔과 접시의 겉은 깨끗하게 하지만, 속에는 탐욕과 악독이 가득하다’고 말씀하시면서, 속에 있는 것으로 자선을 베풀면 모든 것이 깨끗해질 것이라고 하십니다. 또한 십일조는 바치면서 정의와 하나님께 대한 사랑을 소홀히 하는 그들에게 화를 선포하시고, 회당에서 높은 자리에 앉기를 좋아하고 장터에서 인사 받기를 좋아한다며 비난하십니다.
나아가 바리새인들은 드러나지 않게 많든 무덤과 같아서, 사람들이 부지중에 그 위를 밟고 다니게 한다고 책망하시자, 말씀을 듣고 있던 율법학자가 그러면 우리까지도 모욕하는 것이라며 반발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들을 향해 스스로 지기 어려운 짐을 사람들에게 지우면서, 자신들은 손가락 하나도 그 짐에 대려 하지 않는다고 말씀하시면서 율법학자들은 지식의 열쇠를 가로채서, 스스로도 들어가지 않고, 또 들어가려고 하는 사람들도 막는다고 비판하십니다. 예수님은 이스라엘 사회에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가장 가까운 최고의 위치에 있음을 자랑스러워하는 사람들을 맹렬히 비난하셨던 것입니다.
동심원적 연대의 세계
그들은 자신들의 경건과 지식이 최고이므로, 최고에 도달하지 못한 아래에 있는 모든 이스라엘은 그들이 정한 규율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예수님은 이러한 세계관을 가진 바리새인의 집에서 손을 씻지 않음으로써 이 수직적인 계층구조에 저항하셨습니다. 그런 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는 바리새파 사람의 누룩 곧 위선을 경계하여라.”(1) 하나님을 들먹이며 땅으로부터 하늘에 이르기까지 층계를 만들고, 그 계단의 높은 곳에 올라가 있음을 주장하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들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하는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은 곧 위선자들입니다.
우리는 선거의 철을 맞이한 정치인들을 보면서 이와 같은 위선자들의 면면들이 무엇인지 잘 보고 있으므로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될 정도입니다. 위선의 핵심은 겉으로는 아닌 척 하지만 속으로는 자신들이 더 높은 곳에 있다고 여기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의 억압을 정당화시키는 이들의 논리에 균열을 일으키자,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은 앙심을 품고서, 여러 가지 질문으로 예수님을 몰아붙이기 시작하였습니다. 예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에서 트집을 잡으려 했던 것입니다.(11:53-54) 그런데 그 동안에 수천 명이나 되는 무리가 모여들어서,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이 장면에서 저는 다가오는 새로운 세상을 누가가 상징적으로 묘사했다고 생각됩니다. 수많은 사람들에도 불구하고 본문은 “예수께서 먼저 자기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1)로 되어 있습니다. 사실 수천 명의 사람들이 서로 밟힐 지경에 이르렀다는 설명을 굳이 할 필요는 없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표현을 삽입한 것은 예수님을 중심으로 서로 연대로 맺어진 동심원적인 세상이 펼쳐질 것이라는 암시일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과 율법학자들이 수직적인 지배구조를 만들어낸 것과 달리, 하늘나라를 가져오신 예수님은 사람들과 더불어 동심원적 연대의 구조를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나가는 말
이제 제자들은 또 다른 동심원적 구조의 중심이 될 것입니다. 나아가 예수를 따르기로 결심한 모든 사람들은 이와 같이 최고가 아닌 세상의 중심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사람들에 둘러싸여 제자들에게 ‘먼저’ 말씀하시는데, 이는 곧 제자들을 통해 사람들에게 확장되어 갈 것입니다. 이로써 세상은 달라질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이루어지는 이런 세상에는 새로운 가치들이 필요합니다. 그 첫 번째는 바리새파 사람들이 보였던 위선을 멀리하는 것입니다.(1) 위선은 곧 세상을 피라미드식 지배구조로 만드는 것입니다. 우리 사회의 위선도 여기에 있음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피라미드적 지배구조를 깬다는 것은 무척이나 두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갈 제자들을 친구라고 부르면서 말씀하십니다.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4) 수직적 세상은 인간이 만든 세상입니다. 이런 세상을 두려워할 이유는 없습니다. 진정한 세상은 그 너머에 있기 때문입니다. 동심원적 세상은 연대의 세상입니다. 예수님의 시대에는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이러한 세상이 지금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세상의 모범을 그리스도의 제자답게 만들어 가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