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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의 발원지↔태백 검룡소
크고 밝은 산 태백(太白)은 백두대간의 중추이자 한반도의 젖줄인 한강과 낙동강의 발원지이기도 하다. 분명 태백은 우리 영토의 모산(母山)이요 한민족의 시원지(始原池)라 이를 만하다. 태백산 검룡소한강의 발원지로 알려져 있다. 솟아오르는 물이 하도 차고 맑아서 탐방객들이 엎드려 물을 마시고 있다. 태백이 한반도의 영산임을 서해바다의 이무기도 잘 알았던 모양이다. 용이 되어 승천하고픈 소망에 이 이무기는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이곳 태백의 중턱 금대봉골까지 다다른다. 더 이상 오를 수 없는 산중턱, 이곳이야말로 하늘로 오를 수 있는 최적지라 여겼던 모양이다. 520여 킬로미터에 이르는 한강의 발원지, 이곳에 신령스런 용이 산다 하여 검룡소(儉龍沼)라 불러 주지만, 그러나 그 이무기는 아직 용이 되지는 못한 것 같다. 한때 인근 주민들이 검룡소를 메워 버린 적이 있다고 한다. 이는 승천할 때까지 조신해야 할 이무기가 인근 마을의 소를 잡아먹었기 때문이란다. 지금도 못 아래 암반에는 갈퀴에 긁힌 듯한 자국이 선연하다. 이 못에 오르기 위해, 또는 하늘에 오르기 위해 몸부림쳤던 이무기의 발톱 자국이라던가. 검룡소의 이무기가 언제쯤 용이 되어 승천하게 될지는 모른다. 이무기가 소를 잡아먹은 일과 우리가 선진국 문턱에서 샴페인을 먼저 터뜨린 일과는 어떤 연관이 있지 않을까? 이 땅에 다시 한번 한강의 기적이 일어나 우리가 명실공히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게 될 때 그제야 검룡소의 이무기도 이름 그대로 용이 되어 승천할 수 있을 것이다.
태백 검룡소
서해바다의 이무기가 용이 되어 하늘로 오르고 싶은 소망에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태백의 중턱 금대봉골까지 왔다가 더 이상 오르지 못하고 둥지를 튼 곳이 검룡소이다. 지금도 못 아래 암반에는 하늘에 오르기 위해 몸부림쳤던 이무기의 발톱에 긁힌 듯한 자국이 선연하다. 태백은 이외에도 용정(龍井), 용연(龍淵), 용담(龍潭) 등 용에 관한 지명과 전설이 많다 이무기든 용이든 하루 수천 톤의 수량을 내뿜는다는 검룡소의 물은 시원지답게 맑고도 차다. 무더운 여름에도 물이 얼마나 찬지 손발을 담그고 1분을 견디기 어렵다. 언제까지나 차갑고 맑은 물을 그대로 내뿜어 주었으면, 또한 그 맑음 그대로 서해로 흘러 나갔으면 하는 바람이 간절하다. 태백산 정상의 용정천제단에서 제사를 모실 때는 꼭 이 물을 사용한다고 한다.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물빛이 흐려진다는 속설이 있다. 검룡소뿐만이 아니다. 태백이 본디 신령스런 산이라 그런지 이 산에 용이 있다고 믿는 샘이 여러 군데 있다. 이 산 정상 천제단 밑에 있는 용정(龍井)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하늘에 제사 지낼 때 제수(祭水)로 쓴다는 용정수는 우리나라 가장 높은 곳에서 솟는 샘이다. 어떤 가뭄과 장마에도 그 수량이 일정할 뿐 아니라 부정한 사람이 마시면 물빛이 혼탁해진다는 속설이 있을 정도이다.
태백산 기슭 소천 땅에는 용연(龍淵)이란 못이 있어 희고 검은 두 마리의 용이 살고 있다고 한다. 또한 소도동 청원사 경내에는 용이 된 어머니와 아들 삼형제의 전설이 서린 용담(龍潭)이란 곳도 있다. 대개 용에 대한 전설이 신령스러운 데 비해 이곳 용담의 그것은 보다 인간적인 데 특징이 있다. 옛날 낙동강 하류에 아들 삼형제가 홀어머니를 모시고 살았는데 이 어머니는 하반신이 용의 꼬리로 변해 가는 괴이한 병을 앓고 있었다. 삼형제의 지극한 간호에도 불구하고 상태가 더욱 나빠지자 어머니는 자신을 태백산 밑에 있는 용담에 데려가 달라고 부탁한다. 어머니의 간청에 아들들이 응낙하자 이내 한 마리의 용마(龍馬)가 나타난다. 용마는 사경에 이른 어머니를 태워 용담에 이르러 이곳 연못에 풀어 놓는다. 청원사 경내에 있는 용담용이 된 어머니가 아직도 이 못 속에 살아 있다고 하는데 1년에 두번씩 아들을 보러 나온다고 한다. 이들 형제의 어머니도 고려 태조의 할머니처럼 본디 용녀(龍女)였는지 모른다. 죽어 가던 어머니는 못에 들어가자마자 생기를 되찾아 요란한 몸놀림과 함께 용이 되어 물 속으로 사라진다. 이 광경을 지켜본 아들들도 발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만 한 아들, 평소 어머니를 끔찍이 따랐던 막내만은 태백산 기슭에 우뚝 서서 어머니의 모습을 그리다가 그대로 굳어 돌미륵이 되었다. 지금도 1년에 두 번씩 이곳 용담의 물이 흙탕물로 변한다고 하는데, 이는 용이 된 어머니가 돌미륵으로 변한 막내아들을 보기 위해 물 밖으로 거동하기 때문이란다.
한강을따라서!
“어야디야! 어기야디야! 달은 밝고 명랑한데 돛단배가 두리둥실 잘도 간다.” 기차나 자동차가 없던 옛날에는 배가 요긴한 교통수단이었고 한강이 중요한 뱃길이었어요. 그래서 한강 나루터에 가면 뱃사공의 힘찬 노랫소리를 들을 수 있었지요. 한강에 있는 나루터는 언제나 북적거렸답니다. 나루터는 과거 시험을 보러 가는 선비들, 물건을 싣는 상인들, 곡식을 나르는 관리들로 시끌시끌했어요. 거기다 괭이갈매기까지 끼룩끼룩 울어대서 나루터는 들썩들썩했어요. 십 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지요? 한강의 모습은 옛날과는 참 많이 달라졌어요. 북적대던 나루터, 강 위를 둥둥 떠다니던 황포돛배1)는 모두 사라졌지요. 강변에 있던 기와집과 초가집은 아파트로 바뀌었고, 풀이 자라던 강둑은 콘크리트로 메워졌어요. 그러나 한강은 여전히 서울의 한가운데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답니다.
황포돛배
한강의 물줄기는 어디서 시작하는 걸까요? 옛날 사람들은 한강의 물줄기를 따라 거슬러 올라갔어요. 그러다 찾은 것이 바로 오대산 우통수2)예요. 《대동지지》, 《동국여지승람》, 《세종실록지리지》 등과 같은 옛날 문헌을 보면 오대산 우통수에서 한강이 시작되었다고 나와요. 우통수에서는 샘물이 퐁퐁 솟아나는데, 그 물은 아주 차디차고 보통 물보다 비중이 높아 무거웠어요. 그래서 옛날 사람들은 우통수의 물을 신성하게 여겼다고 해요.
오대산 우통수
한강의 발원지를 찾는 일은 계속되었고, 오늘날에 이르러 한강이 검룡소3)에서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어요. 검룡소는 강원도 태백시 금대봉에 있는 연못이에요. 검룡소 위에는 고목나무 샘이 있는데, 이곳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검룡소를 지나 아우라지에서 송천을 만나지요. 강원도 영월에서 동강과 서강을 만난 남한강은 충청북도를 지나 서해로 흘러 북한강과 합류한답니다. 한강은 강줄기가 둘이에요. 한강 남쪽에 있는 남한강은 강원도 태백에서 시작해서 충청북도를 지나 경기도 양평 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긴 강이에요. 북한강은 금강산에서 시작해 강원도 춘천을 거쳐 경기도 가평 쪽으로 흘러 들어오는 강이지요. 남한강과 북한강의 두 강물은 양수리에서 만나요. 옛날 사람들은 양수리를 ‘두물머리’라고 했는데, 두물머리는 두 개의 물이 머리를 맞댄다는 뜻이지요. 양수리에서 하나가 된 한강은 계속 서쪽으로 흘러 마침내는 서해로 나아가지요. 남한강과 북한강이 만나서 하나가 되는 ‘두물머리’(오늘날 양수리 모습)
역사 속의 한강
한반도의 중심에 있는 한강 주변에서는 까마득한 선사 시대 때부터 사람들이 살았어요. 사람들은 강변에 움집을 짓고 강가에서 낚시를 하며 살았지요. 농사 짓는 법을 알게 된 이후에는 강가에 모여 농사를 짓고 살았어요.
그러다 제일 먼저 한강을 다스리는 나라가 생겨 났어요. 바로 백제였지요. 백제 사람들은 한강을 ‘옥리하’라고 불렀어요. 백제 사람들은 한강이 고구려와 신라를 공격하기 좋은 뱃길이라는 것을 알았어요. 한강변에 있는 몽촌토성, 풍납토성, 아차산성 등의 유적을 통해 백제 사람들의 의지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지요. 그러나 백제의 영광은 영원하지 않았어요. 396년 고구려의 광개토왕이 한강 이북의 여러 성을 함락하고 백제 왕의 항복을 받아 냈지요. 고구려 사람들은 한강을 ‘아리수4)’라고 불렀고, 한강을 중심으로 삼국을 통일하려 했어요. 그러나 고구려의 영광도 영원하지 않았답니다. 신라가 고구려와 백제를 몰아내면서 한강을 차지하게 되었거든요. 신라인들은 한강을 차지함으로써 중국으로 가는 뱃길을 확보할 수 있었어요. 그리고 마침내 삼국을 통일하지요. 고려 시대에는 한강을 ‘열수’라고 불렀어요. 열수란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 내린 긴 강’이란 뜻이에요. 하지만 고려의 도읍지는 개성이었으므로 임진강을 모태로 하여 한강이 주목을 받지는 못했어요. 이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 도읍지를 한양으로 옮기면서 드디어 한강이 역사의 중심에 우뚝 서게 되었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은 한강을 ‘한수’ 또는 ‘한가람’이라고 불렀어요. ‘한’은 ‘크다, 신성하다’는 의미였지요.
(지도로 배우는 우리나라 우리고장 )
한강은 서울과 경기의 평야에 넉넉한 물을 대 주었고 수상 교통의 요지가 되었어요. 조선 시대 사람들은 관리가 지방에서 걷어 들인 곡식과 특산물을 한강의 뱃길을 이용해서 날랐어요. 영광 굴비, 한산 모시, 울릉도 오징어와 같은 거의 모든 특산물이 한강을 통해 한양으로 올라왔답니다. 그래서 한강에 있는 나루터는 하나같이 크고 시끌벅적 했어요. 서구 문명이 우리나라에 들어오면서 한강도 크게 변했어요. 1900년에는 한강에 처음으로 근대식 다리가 놓였지요. 그리고 얼마 안 되어서 철교 위로 기차가 오갔어요. 1917년에는 사람들이 걸어 다닐 수 있도록 한강대교가 만들어졌지요. 이때만 해도 한강에는 배를 타고 오가는 사람이 많았어요. 하지만 1944년 청평댐5)이 건설된 이후 한강은 물길로서의 역할을 끝내게 되었답니다. 청평댐이 만들어진 이후 한강 하류에서 배를 타고 서울로 올라가는 일이 불가능해졌기 때문이지요. 그러다 업친 데 덮친 격으로 한국전쟁이 났어요. 전쟁이 나면서 한강대교는 폭파되고, 한강은 아수라장으로 변했어요. 하지만 불행은 오래가지 않았어요. 한국전쟁 이후 우리나라 사람들은 경제를 일으키기 위해 부단히 노력했어요. 한강의 흙과 모래를 퍼다가 집을 짓고 한강에 콘크리트 제방을 쌓았어요. 한강 주변에 있던 초가집과 판자집은 모두 사라지고 그 자리에 하늘 높이 솟은 아파트가 생겼지요. 한강 다리 위로는 전철과 자동차들이 쌩쌩 달렸지요. 사람들은 이것을 두고 ‘한강의 기적6)’이라며 감탄했어요. 하지만 우리는 한강의 기적으로 소중한 것을 잃어버리게 되었답니다. 바로 자연이지요.
생명의 보금자리, 한강
한강은 수만 년 동안 작은 곤충과 물고기, 새들의 보금자리였어요. 그러나 한강이 개발되면서, 많은 새와 물고기들이 갈 곳을 잃어버렸어요. 수초가 자라야 할 강변은 콘크리트 제방으로 꼭꼭 막혔지요. 그러자 새들은 어디에 알을 품어야 할지 몰라 푸드덕댔어요. 하천에서 흘러 들어온 폐수로 많은 물고기들이 죽거나 기형이 되었지요. 한강에 살던 많은 생명들이 사라지자 그제야 사람들은 깨달았어요. “이렇게 더러운 강에서는 어느 누구도 살 수 없어.”
겨울에 한강 하구를 찾는 철새들의 모습
사람들은 부랴부랴 깨끗한 한강을 되찾기 위해 노력했어요. 이런 노력은 지금도 이어지고 있어요. 사람들의 노력과 보살핌 덕분인지 철새들이 하나둘씩 돌아오기 시작했어요. 서강대교 밑에 있는 밤섬은 세계적인 철새 도래지예요. 여름에는 30여 종이, 겨울에는 무려 46종이나 되는 새들이 밤섬을 찾는답니다. 밤섬에는 형형색색의 오리떼와 ‘소쩍소쩍’ 우는 소쩍새, 사이 좋은 원앙새, 흰뺨검둥오리, 황조롱이가 있어요. 한강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물고기는 ‘누치7)’예요. 더러운 물에서도 꿋꿋하게 잘 사는 ‘몰개’도 한강에서 볼 수 있어요. 몰개는 다른 나라에는 없고 우리나라에서만 볼 수 있는 물고기예요.
누치
밤섬을 찾는 물고기로는 풍선처럼 몸이 통통한 황복, 아주 희귀한 젓뱅어, 가시선이 있는 가시납자리 등이 있어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 합쳐지는 한강 하구에는 매년 겨울 20만 마리가 넘는 철새들이 찾아와요. 한강 하구는 강과 육지, 바다를 아우르는 거대한 생태계로, 개리, 저어새, 재두루미가 많이 날아다니지요. 한강 하구 중에서 새와 물고기를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곳은 바로 장항습지8)예요. 습지는 물이 흐르지 않고 고여 있는 곳으로 곤충과 물고기, 새들이 살기 좋은 낙원이지요. 장항습지에는 수십만 마리의 고라니들이 살고 있어요. 그리고 멸종 위기에 처한 삵과 너구리, 족제비, 두더지 같은 보기 드문 동물들도 살고 있답니다.
북한강[北漢江
북한강은 북한 지역인 강원도 금강군의 옥발봉에서 발원해 유역면적 10,834.8㎢, 유로연장 317.5㎞이다. 한강의 대지류로, 금강산의 비로봉 부근에서 발원하는 금강천 등과 합류하여 남쪽으로 흐르며 소양강, 홍천강 등의 주요 지천이 있다. 공식적으로는 남한강의 길이가 북한강보다 길어 발원지를 한강의 발원지로 꼽고 있다.
형성 및 변천
지질은 쥐라기(Jura紀)말의 대보운동의 영향으로 강한 습곡작용을 받아 고생대층이
중생대층을 덮어 교란된 지질구조로서 다른 강 유역에 비해 비교적 험준한 지형을 보인다.
자연환경
유역에는 춘천강ㆍ소양강ㆍ홍천강 등의 지류가 만든 춘천ㆍ홍천 등의 침식분지가 있다. 산지와 평지와의 전환점에 가까운 산록 부근에는 하각작용으로 많은 협곡을 만들고 있다. 유로 주변에는 하류 일대를 제외하고는 저평한 충적지가 적고 대부분 산간분지와 고랭지의 산록이 넓게 분포하므로 경지율이 전국 평균보다 낮고 밭경작 비율이 논보다 훨씬 높은 것이 특징이다. 주요 작물로는 옥수수ㆍ감자ㆍ콩 등이 있고, 산간지방에서는 양잠ㆍ낙농ㆍ양봉ㆍ약초재배가 성하다.
현황
협곡이 많은 지형적 조건과 하천유량이 풍부한 관계로 이 강은 우리나라 제1의 수력발전지대를 이룬다. 먼저 광복 이전에 건설된 화천발전소를 비롯하여 우리나라 최초의 다목적댐인 소양강발전소와 춘천발전소ㆍ의암발전소ㆍ청평발전소 등이 좋은 예이다. 이들 발전소는 북한강 수계의 연쇄적 기능을 가지고 있으며, 수도권의 전력 공급은 물론 하류의 수량 조절에 중대한 구실을 하고 있다. 이 외에도 북한의 금강산댐과 이로 인한 잠재적 위험을 대비하기 위한 평화의 댐이 화천댐 상류에 위치하고 있다. 최근에는 화천에서 양평에 이르는 유역의 산록에 풍부한 자연 목초를 이용한 목축업이 급속히 일어나 전국 유수의 한우와 육우 사육 지대를 이루고 있다. 북한강 유역은 관광 유원지로서도 이름이 높다. 홍수 조절과 용수 공급ㆍ발전 등 다목적으로 건설된 소양강댐은 수로로 설악산 산록인 인제군까지 통행이 가능하게 한다. 중류에 위치한 춘천은 호반의 도시로서 자연미와 인공미가 조화를 잘 이룬 관광지이다. 춘천에서 양평에 이르는 하류는 의암ㆍ청평댐이 자리하고 그 사이에 남이섬ㆍ청평ㆍ대성리 등 잘 정비된 유원지가 즐비하고, 수많은 골프장 들이 북한강 유역을 중심으로 건설되고 있다. 따라서 서울을 중심으로 한 수도권 지역의 관광객이 많이 찾고 있으며, 펜션이라는 이름으로 주말관광객을 유치하기 위한 숙박시설의 건축이 대단히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韓國)의 5대강(五大江) Ι』(자연보호중앙협의회, 2003)
『신한국지리(新韓國地理)』(강석오, 대학교재출판사, 1984)
『한국지지(韓國地誌) -총론(總論)-』(건설부 국립지리원, 1980)
「수자원(水資源) 단위(單位) 지도(地圖)를 기반(基盤)으로 북한강(北韓江)
유역(流域)의 지형학적(地形學的) 특성(特性) 분석(分析)」(
박근애ㆍ권형중ㆍ김성준, 『환경공학(環境工學)』 26-3B, 2006)
「배한강류역(北漢江流域)의 경사분석(傾斜分析)과 지형자원(地形資源)」
(김우관, 『경배대논문집(慶北大論文集) 37』, 1984)
출처:(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남한강 단심(丹心)이 흐르는 줄기
태백산맥의 준령인 오대산(금대산, 혹은 대덕산)에서 발원한 남한강은 정선에 이르러 ‘아라리’의 전설과 노래를 만들고 다시 흘러 단종이 유배되었던 영월 땅에 닿는다. 영월군 서면 신천리, 남한강의 지류가 굽어 보이는 언덕 위에 관란정(觀瀾亭)이란 정자가 있어 비운의 왕 단종을 추억하게 한다. 관란(觀瀾)이란 “흐르는 물을 바라본다”는 뜻으로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元昊)의 호이면서 그가 손수 세운 정자 이름이기도 하다. 세조에 의해 단종이 영월 땅 청령포(淸冷浦)로 유배되었을 때 원호는 고향 원주를 떠나 이곳 서강 상류로 와서 관란이란 정자를 짓고 먼발치에서나마 옛 임금을 섬겼다고 한다. 그가 날마다 청령포를 향해 절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했으니 관란(觀瀾)이란 눈물 흘리며 바라본다는 뜻으로 해석함이 좋을 듯하다.
관란정
‘관란(觀瀾)’이란 “흐르는 물을 따라 본다”는 뜻으로, 세조 때 생육신의 한 사람인 원호의 호이면서 그가 손수 세운 정자의 이름이다. 단종이 영월 땅 청령포로 유배되었을 때 원호는 고향 원주를 떠나 이곳 서강 상류로 와서 관란이란 정자를 짓고 먼발치에서나마 옛 임금을 섬겼는데, 날마다 청령포를 향해 절하며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원호는 이 정자에 기거하면서 남류하는 강물을 이용하여 표주박에 문안 편지를 띄우기도 하고, 또 낙엽으로 엮어 만든 배를 이용하여 채소나 과일 같은 음식을 실어 보내기도 했다. 그런데 용케도 이들 물건이 단종이 계신 청령포에 정확히 닿았다고 하니 지극한 충성심을 하늘도 감동한 것인가. 원호의 충성심을 엿볼 수 있는 또 다른 일화가 있다. 어느 날 한 여인이 강가로 빨래하러 나왔다가 울고 있는 원호를 보고 우는 연유에 대해 물었다고 한다. “열녀는 두 남편을 섬기지 않고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 법이어서 나는 이렇게나마 한 임금을 섬기고 있는 중이라오.”
이같은 원호의 말은 또 다른 파문을 일으킨다. 여인 역시 슬피 울면서 “실은 제가 며칠 후 개가하려 했는데 어르신의 말씀을 듣고 생각을 고쳐 먹어 수절해야겠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도 평생 한 남편을 그리며 수절했다는, 그런 이야기다. 원호 역시 단종이 사약을 받자 두문불출하며 삼년상을 치렀고, 평소 앉거나 누울 때도 머리를 동쪽으로 향했다고 한다. 단종이 잠든 장릉(莊陵)이 관란정의 동쪽에 있었기 때문이다. 원호의 일편단심도 그렇지만 단종의 시신을 거두었던 엄흥도의 무용담이나, 머루를 따다 바쳤다는 추충신(秋忠臣)의 고사 등 영월 땅은 온통 단종애사(端宗哀史)에 얽힌 전설로 점철되어 있다. 이 지역의 지명 역시 예외는 아니다. 단종이 노산군으로 강등되어 넘어온 고개를 지금도 군등치(君登峙)라 부르고, 그때 타고 온 말이 슬프게 울었다는 우레실은 명라곡(鳴羅谷)으로, 또 그 말이 말방울을 떨어뜨렸다는 고개는 방울재란 이름으로 지금도 남아 있다.
영월 청령포단종을 향한 원호의 단심이 여기까지 미쳤다고 한다.
영월이란 지명도 단종과 결코 무관하지는 않다. 백제 때 이 고을이 1백 가호가 넘었다 하여 백월(百越)이라 부르던 것이 고려 때 영월(寧越)로 고쳐 부르게 되었다. 편안히 넘을 수 있는 곳, 그러나 이곳으로 귀양 온 단종은 결코 편안히 넘을 수 없었을 게다. 세월이 흘렀으나 어린 왕에 대한 애틋한 정을 끊지 못하는 것은 그가 편안히 넘기는커녕 다시는 영원히 되넘어가지 못하는 영월(永越)이 된 탓이 아닐까? 오대천과 주천강이 영월에서 조양강을 만나면 비로소 남한강이 그 본래의 모습을 갖춘다. 본류를 형성한 남한강이 충청도 단양(丹陽) 땅으로 접어들면 그 옛날 우직한 충성심의 상징으로 고구려 온달 장군의 족적을 만난다. 영춘면 백자리와 하리 중간에 위치한 온달산성이 그것인데 문헌상에는 성산고성(城山古城)이라 적고 있다.
단양의 온달산성성산고성(城山古城)이라 불리는 이 산성은 용감한 온달장군과 평강공주의 전설이 서려 있다. 남쪽으로 소백산맥의 웅장한 산줄기가 보인다. 영월 장발리에 있는 선돌온달이 전사한 후 생겼다는 이 돌은 그의 용맹성을 상징하는 듯하다 역사상 인물 중에 바보 온달만큼 대중적인 인기(?)가 높은 장군도 드물다. 우스꽝스런 용모에다 우직하기 이를 데 없는 위인이 고구려 평원왕의 사위가 되었다는 사실부터 전설적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평소 울기를 잘하던 평강공주더러 “그렇게 울기만 하면 바보 온달에게 시집 보내겠다”는 으름장이 어쩌다 현실화된 사실부터 믿어지지 않는다.그러나 누가 예측이나 했을까, 바보 온달과 평강공주의 금실이 그렇게 좋을 줄을, 그리고 왕실에 대한 충성심이 그토록 깊을 줄을. 이곳 단양은 신라와 국경을 맞댄 최전선으로 온달은 이 산성에서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했다. 전사 전설도 결코 예사롭지 않다. 한이 맺혀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시신이 사랑하는 아내 평강공주의 말 한마디로 움직였다고 하니 말이다. 온달성 아래는 그가 수련했다는 온달굴(‘남굴’이라고도 함)이 이제 개발을 기다리고 있고, 전투 중 잠시 쉬면서 바위에 윷판을 새겼다는 쉰돌〔休石〕과 함께 장발리에는 선돌〔立石〕 같은 자연석도 남아 있다. 이 선돌은 온달이 백자리에 성을 쌓을 때 소백산의 산신 마고할멈으로 하여금 돌을 나르게 했는데 그가 패주했다는 소식을 들은 할멈이 나르던 돌을 그대로 팽개친 것이라 한다. 또 다른 설에 의하면 온달을 도우러 산성으로 가던 누이동생이 장발리에 이르러 오라비가 전사했다는 소식을 듣고 그 자리에 선 채 돌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온달산성
단양 땅 영춘면 백자리와 하리 중간에 있는 온달산성(문헌상에는 성산고성으로 되어 있다)은 평강공주와 결혼하여 고구려의 장군이 된 바보 온달이 적과 싸우다 장렬하게 전사한 곳이다. 한이 맺혀 꿈쩍도 하지 않던 그의 시신이 평강공주의 한마디에 움직였다는 전설을 간직한 곳으로, 성 아래에는 그가 수련했다는 온달굴이며 그와 관련한 쉰돌, 선돌이 남아 있다. 남한강 줄기가 소백산 기슭을 휘돌아 매포읍 도담리에 이르면 강 한가운데 우뚝 솟은 세 봉우리, 곧 도담삼봉(島潭三峰)이란 명승지를 만난다. 이 세 바위섬은 본래 강원도 정선 땅에 있던 것인데 어느 해 큰 홍수로 이곳까지 떼밀려 왔다고 한다. 그런 이유로 예전에는 강원도에서 매년 세금을 받아 갔으나 이 지역 한 아이의 기지로 세금을 물지 않게 되었다는, 흡사 설악산의 울산바위와 유사한 전설이 있다. 그런데 삼봉을 대하는 이곳 사람들의 생각은 좀 다르다. 봉우리 셋 중 가운데 있는, 가장 높은 것을 남봉(男峰)이라 하고 좌우 두 개를 각각 처봉(妻峰)과 첩봉(妾峰)이라 부른다. 남봉은 본처에게서 딸만 셋을 두었으나 후일 첩봉을 얻어 소망하던 아들을 보게 되었다. 그러니 첩만 총애하게 되고 본처에게는 소홀히 대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삼봉은 한 남자와 두 여인의 서로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고 말한다. 세 바위섬 곁에 있는 천연 석문(石門)과 함께 단양팔경의 제1경으로 치는 이 도담삼봉에 대한 발상이 다소 유치하다고 생각된다. 다만 그렇게 보아 그런지 남쪽에 있는 첩봉은 불룩한 배를 자랑스럽게 내밀며 남봉에게 애교를 떠는 형상이며, 북쪽의 처봉은 등을 돌린 채 잔뜩 토라진 모습 그대로이다. 빼어난 풍광에 비해 전설은 그렇다 치더라도 도담삼봉은 조선 초 왕조의 기반을 닦은 삼봉 정도전(鄭道傳)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다. 대학자이기도 했던 정도전은 인근 도전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이곳에서 놀았던 인연으로 삼봉(三峰)을 자신의 호로 삼았다. 그의 출생지인 매포읍 도전리(道田里)는 본래 도전리(道傳里)라 적었으나 그가 태종 이방원에게 배척을 당한 후 글자마저 바뀌고, 그의 흔적은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단양의 도담삼봉삼봉 정도전이 어릴 때 놀던 곳으로 단양팔경 중 으뜸으로 꼽힌다. 흔히 세 봉우리를 한 남자가 처와 첩, 두 여인을 거느린 형상이라고 한다. 어떻든 삼봉 정도전은 왕조의 기틀을 마련한 일등공신이요 오로지 태조 한 임금을 섬긴 충신임엔 틀림이 없다. 일편단심 한 군주를 섬긴 충신이 많았기에 고을 이름조차 단양(丹陽)이라 했을까? 단양을 고구려 때는 사비골〔沙伏忽〕이라 불렀는데 ‘사비’는 붉은색을 뜻한다. 이 사비를 신라 때는 적산(赤山)으로 적고 고려 때는 단산(丹山)으로 적었다. ‘사비’란 말은 모음 사이의 ‘ㅂ’이 약화되면 ‘새’로 발음된다. 단양읍 장회리와 두항리 사이에 단구협(丹邱峽)이란 긴 골짜기를 ‘새바우골’이라 부르는데 이 이름이 바로 ‘사비 → 새’의 흔적이 아닐까 싶다. 지금은 물에 잠기고 만 옛 단양의 옥터 거리 옆에 인공 연못이 하나 있었는데 이 인공못이 지명 및 풍수지리와 관련이 있다고 전한다. 곧 단양(丹陽)이란 두 글자가 모두 불과 관련된 이름이다. 말하자면 화기를 막는다는 뜻에서 이곳에 연못을 파고, 또 두악산에 물과 소금을 담은 항아리를 묻었다는 것이다. 물이 불을 이긴다는 오행상극설이 용케 적중했음인가. 그 이후로 이 고장에 화재가 없어졌고, 더더구나 충주댐이 건설된 뒤로 옛 단양은 아예 물 속에 잠기고 말았다.
탁오대퇴계 이황이 발을 씻었다는 곳으로 단양 수몰지에서 옛 군청자리로 옮겨 놓았다.
수몰된 구단양의 흔적은 상방리 옛 군청 자리 앞마당에 서 있는 우화교신사비(羽化橋新事碑)와 탁오대(濯吾臺)라 새긴 바위가 잘 대변해 준다. 탁오대는 본래 하방리 강가에 있던 바위로서 조선 명종 때 퇴계 이황 선생이 이 고을 군수로 있을 때 손수 새긴 글씨라고 한다. 선생은 여가를 이용하여 단양 산수를 즐기곤 했는데, 특히 우화교(羽化橋)를 지나 이 바위에 이르러 갓끈을 풀어 놓고 한가롭게 놀았다고 한다. 고구려 왕실에 충성을 다한 온달 장군, 끝까지 단종을 섬긴 원호, 태조를 도와 조선왕조를 세운 삼봉 정도전 등 남한강 줄기 따라 단심(丹心)의 족적을 더듬는 이번 여행에서 마지막으로 대하는 탁오(濯吾)란 글귀가 묘한 여운을 남긴다. 정선·영월·단양 등 이 궁벽한 곳에 귀양왔거나 낙향한 인사들의 심정을 굴원(屈原)의 〈어부사(漁父辭)〉에 등장하는 한 어부가 잘 대변하고 있다. 퇴계는 이곳 단양에서 물은 비록 맑았더라도 자신의 발을 씻었던 모양이다.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의 물이 맑으면 내 갓끈을 씻고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의 물이 흐리면 내 발을 씻으리라.
출처:(물의 전설)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린 강
서울의 젖줄이면서 한반도의 젖줄, 나아가 우리 민족의 젖줄이라고 일컬어지는 한강처럼 여러 이름으로 불린 강도 그리 흔치 않을 것이다. 중국의 위나라와 진나라 때의 지리지에서는 이 강을 대수(臺水)라고 하였고, 광개토대왕릉비에는 아리수(阿利水)로 올라 있다. 『삼국사기』의 백제 건국설화에서는 이 강의 이름을 욱리하(郁里河)라 불렀고, 신라는 상류를 이하(泥河) 하류를 왕봉하(王逢河)라 불렀다. 고려 문헌에 큰 물줄기가 맑고 밝게 뻗어내린 긴 강이라는 뜻의 열수(列水)라 불린 기록이 있으며, 모래가 많기 때문에 사평도(沙平渡) 또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도 불렀다. 한강의 명칭에 한(漢)이라는 글자를 쓰기 시작한 것은 중국문화를 도입하기 시작한 뒤부터였다. 조선시대에는 한강 및 한수 또는 경강이라 불렀는데, 한강은 본래 우리말인 한가람에서 비롯된 말이라고 한다. ‘아리’, 즉 ‘알’은 고대에 크다거나 신성하다는 의미로 쓰였는데, ‘한’도 이와 비슷한 뜻이다. 조선시대에는 해마다 제사를 올렸던 네 강, 즉 4독에 들었는데(동독은 낙동강, 서독은 대동강, 북독은 용흥강, 남독은 한강) ‘독(瀆)’이란 바다로 직접 들어가는 긴 강이란 뜻이다. 외국의 기록에는 ‘서울강(Seoul river)’이라는 이름도 있다.
또한 서울 부근의 한강은 여러 이름으로 나뉘어 불렸다. 팔당댐은 ‘도미진’, 광장동 앞은 ‘광진’, 뚝섬 앞쪽은 ‘동호’, 한남동 앞쪽은 ‘한강’, 동작동 앞쪽은 ‘동호’ 혹은 ‘동작강’, 노량진동 앞쪽은 ‘노들강’, 원효로동 앞쪽은 ‘용호’ 또는 ‘용산강’, 옛날에 마포나루가 있던 서울대교 언저리 쪽은 ‘삼개’ 또는 ‘마포강’, 송파 부근은 ‘삼전도’, 양평동 부근은 ‘양화도’, 가양동 앞은 ‘공암진’, 오늘의 제2한강교가 있는 쪽은 ‘서호’ 또는 ‘서강’이었다. 그와 더불어 서울 밖의 한강도 오늘의 경기도 여주시 언저리는 ‘여강’이었고, 임진강과 합하여 서해로 빠져드는 경기도 김포군 북쪽은 ‘조강’이었고, 행주 부근을 ‘왕봉하’라고 불렀는데 지금도 그곳 주민들은 이들을 쓰고 있다. 조선 성종 때 만들어진 『동국여지승람』에는 한강을 아래와 같이 기록하고 있다. 한강(漢江)은 도성 남쪽 10리 지점 곧 목멱산(남산) 남쪽(한남동)으로, 옛날에는 한산하(漢山河)라 하였다. 신라 때에 북독(北瀆), 고려조에서는 사평도(沙平渡)라고 하였는데 민간에서는 사리진(沙里津)이라고 이름하였다.
그 근원이 강릉부의 오대산 우통(于筒)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충주 서북쪽에 이르러 안창수(安倉水, 섬강)와 합하고 양근군(楊根郡) 서쪽에 이르러 용진(龍津)과 합하며 광주 지경에 이르러 도미진(渡迷津)이 되고 광진(廣津, 광나루)이 되고 삼전도(三田渡)가 되며 두모포(豆毛浦, 두뭇개)가 되며 경성 남쪽에 이르러 한강도(漢江渡)가 된다. 그리고 여기서부터 서쪽으로 흘러서는 노량이 되고 용산강이 되며 또 서쪽으로 가서 서강(西江)이 되고 시흥현 북쪽에 이르러서 양화도(楊花渡)가 되며 양천현 북쪽에서 공암진(孔巖津)이 되며 교하군 서쪽에 이르러 임진강과 합하고 통진부 북쪽에서 조강(祖江)이 되어 바다로 들어간다. 하늘공원 © 이혜민난지도는 한강 하구 섬에 제방을 쌓아 쓰레기 매립장으로 이용되던 곳이다. 쓰레기가 태산같이 우뚝 솟아 있던 이곳에 지금은 하늘공원과 노을공원이 조성되었다.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던 사독(四瀆)
한강은 조선시대에 해마다 제사를 올렸던 네 강, 즉 사독(四瀆)에 들었다. ‘독(瀆)’이란 바다로 직접 들어가는 긴 강이란 뜻이다. 동독은 상주의 낙동강, 서독은 평양의 대동강, 남독은 서울의 한강, 북독은 영흥의 용흥강이다.
출처:(신정일의 새로 쓰는 택리지)
▲아름다운 한강의 야경
한강 올림픽대교 풍경
노량진 사육신공원에서 늦가을의 단풍을 담아봤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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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6일 풍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