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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시사 Focous, 2023.11.20
[기고]
연개소문, 군신(軍神)으로 기리고, 경극(京劇)으로 가두고https://www.yjb0802.com/news/articleView.html?idxno=37110
심의섭 (명지대 명예교수)
중국의 경극은 청나라 때 지방에서 유행하던 연극이 북경으로 진출하고 발전되어 경극(京劇)이란 이름으로 부르게 된 것이다. 경극은 청나라 건륭 황제의 탄생 80년을(1790) 맞아 안휘 지역 출신의 배우들로 구성된 극단 휘반(輝班)이 축하공연을 하면서 지방극 들이 북경에 들어와 새로운 형태의 연극으로 태어나면서부터 발전하게 되었고 동양의 오페라로 불리게 되었다. 서양의 오페라처럼 일반 국민들이 즐기는 경극은 청나라 200년 역사에서 가장 인기가 있었던 극장극 이었다. 최고 통치자로부터 평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즐기는 예술이었으며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이후에도 경극은 더욱 흥성하였다. 문화대혁명(1966~1976) 시기에도 경극은 중국의 '모범극'으로 되었다. 그러나 중국의 개혁 개방의 물결이 일어난 1980년대부터 경극의 지위는 다양한 대중문화의 등장으로 시들기 시작하였다.
경극의 전성기에 중국 귀족층 특히 만주족들이 열렬히 애호하던 경극에서 가장 인기 있었던 주인공은 연개소문 장군이었다. 등소평의 개혁개방 정책 이전에 중국의 경극 중에서 당태종(李世民, 599~649)과 설인귀(薛仁貴, 613~683), 연개소문(淵蓋蘇文, ~665)을 소재로 한 경극은 독목관(獨木關), 분하만(汾河灣),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이며, 당태종이 안시성 싸움에서 패하여 퇴각하는 이야기를 공연하는 것이었다. 왜, 청제국의 지도층은 그렇게 경극과 연개소문장군을 흠모, 존경 했을까? 청나라의 이름, 청(靑)자는 바로 백두산 천지를 뜻하면 청룡이 바로 천지에서 살던 신화적 동물로서 우주와 우리 인간들의 시조인 한민족(Khan)의 메시아로 인식했다. 좌청룡 우백호에서 좌청룡은 청, 우백호는 고려란 주장도 있다. 그래서 청나라는 국기에는 청룡이 그려있고, 우리는 무서울 때 ‘호랑이가 온다.’고 하듯이 중국에서는 ‘연개소문이 온다.’고 한다.
청나라 통치자들은 백두산을 자신들의 세력 발상지인 용흥지지(龍興之地)로 규정하고, 건륭제 때 청 황실의 뿌리인 건주여진(建州女眞)이 살았던 백두산 북쪽 땅과 청 태조 누르하치의 본거지인 흥경(興京) 일대를 보호구역으로 관리하였다. 중국 산해관∼북위원보∼흥경∼봉황성을 잇는 지역에 975㎞의 버드나무 방책을 세우고 중국 한족이 동쪽으로 들어가는 것과 조선인의 출입을 금하는 봉금(封禁)을 실시하였다. 그 후 1875년에서야 봉금정책을 해제하였다.
이렇게 성스런 땅인 만주(고구려)에 살았던 위대한 인물 중에서 한족의 공포의 대상이 되었던 인물인 연개소문 장군이 있다. 연개소문의 안시성전투는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고구려 군사가 중국황제를 유린하고 우리민족 국가 중 가장 강력한 국가인 고구려의 영토 확장으로 위세를 떨친 대첩이다. 당연히 만주에서 발상하여 중원을 지배한 청조의 지배층은 연개소문의 역할에 몰입하여 긍지와 자부심을 품게 되고, 피 지배층 한족들은 그들의 공포의 대상 인 연개소문을 경극에 넣어 자신들의 한풀이를 하려는 희극화한 내용들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개소문이 주연으로 등장하는 경극은 여러 종류이다. 그 중에서도 유명한 것은 독목관(獨木關)를 비롯하여 경극 살사문(殺四門), 어니하(淤泥河), 분하만(汾河灣) 등인데 모두 이전부터 지방에서 공연되었던 희극들이 정리된 것이다. 경극은 19세기 중엽에는 인기를 얻고 공연되었으나, 민국(民國) 연간(1912~1949)에 들어서는 횟수가 점점 줄었고, 1965년 이후는 북한의 요구로 공연이 금지 되었다. 큰 줄거리는 내용은 연개소문에게 쫓기던 당 태종을 설인귀(薛仁貴, 614~683)가 겨우 구출했다는 내용이다. 역사의 무대는 모두 산서성이고 설인귀와 연개소문이 주연이고 당 태종은 조연이다. 독목관, 어니하, 살사문, 분하만 같은 모든 경극에서 연개소문이 신출귀몰하는 장수로 나온다. 어니하와 분하만은 독목관과 줄거리가 비슷하다. 경극 중 어떤 경우에는 연개소문이 안시성 싸움의 기세를 몰아 당태종을 쫓아 장안(西安)까지 찾아가 당태종을 무릎 꿇리고 항복문서를 받아내는 내용을 끼우기도 하는 것이 경극화한 내용이다.
독목관에는 이세민이 봉황산에서 연개소문에게 쫓겨 도망가고 있을 때 설인귀가 나타나서 이세민을 구했다는 내용이다. 분하만은 당 태종이 늪에 빠진 곳으로 안시성 앞을 흐르는 현재의 분하이고, 어니하라고도 불린다. 어니하에는 이세민이 사냥을 나갔다가 연개소문을 만나자 놀라서 도망을 가다가 어니하에 이르러 말이 강에 빠지게 되었고, 연개소문은 당황해 어쩔 줄 모르는 이세민에게 항복문서를 쓰도록 강요했으며, 이때 설인귀가 돌연 나타나 이세민을 구한다는 내용이 있다. 살사문에는 이세민이 월호성에서 연개소문에게 포위당했다가 구출되었다고 한다.
경극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나르는 칼이라는 비도(飛刀)를 5개를 차고, 등에 깃발 모양의 고기(鼓旗, 소수민족의 표식)를 하고 등장하는 인물이 있는데, 이는 이민족임을 상징한다는 설명이다. 푸른빛의 얼굴 화장은 동방인인 고구려의 장군, 연개소문을 암시한다. 연개소문은 중국의 경극에도 등장할 정도로 중국인들이 가장 두려워했던 인물이다. 그도 그럴 것이 연개소문이 665년에 사망할 때까지 당나라는 고구려를 상대로 한 전투에서 단 한 번도 승리하지 못했다. 그러나 연개소문이 사망하자 연개소문의 큰아들 남생과 그 밑의 남건, 남산간의 권력 싸움 등 내부 갈등이 심화되어 남생은 당에 항복하고 연개소문의 동생 연정토는 신라에 투항하자 신라와 당은 이를 틈타 668년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경극의 주인공은 연개소문, 설인귀이고 당태종은 조연급이다. 그런데 중국인들이 두려워하는 연개소문은 극중에서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과는 많이 다르른 것도 있다. 고구려는(BC 37~668) 700년 가까이 세월 동북아의 강자로 군림해온 나라다. 고구려가 존재할 당시 중원에서는 무려 35개국이 흥망성쇠를 거듭했으나 고구려는 장수한 국가이다. 당시 최강국인 당나라의 대군을 거듭 격파하는 동아시아의 최강국이었지만 멸망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늘 연개소문이 있다. 연개소문에 대한 기록 중 김부식은 ‘삼국사기’에서 임금을 죽인 역적으로, 신채호는 ‘조선상고사’에서 그를 위대한 혁명가로 평가하고 있다. 삼국사기에는 "연개소문은 왕을 시해하고 그 몸을 토막 내 개천에 버렸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단재 신채호는 연개수문은 "4000년 역사에서 첫 번째로 꼽을 수 있는 영웅이다." "당태종과의 전쟁 때 연개소문이 중국 내륙인 지금의 북경지역까지 들어갔다." 북경에 '고려영'이라는 성과 지명이 지금까지 남아있다. 실제로 산둥반도 북서쪽 하북성과 남쪽 강소성 등 여러 지역에 관련 설화와 유적이 많이 남아 있다. 설화의 주 내용은 연개소문에게 쫓기던 당 태종을 설인귀가 겨우 구출했다는 내용이다.
중국 쪽 자료인 ‘신간전상당설인귀과해정료고사(新刊全相唐薛仁貴跨海征遼故事)’의 ‘막리지비도대전(莫離支飛刀對箭)’에서 막리지 연개소문의 칼을 나르는 칼, '비도(飛刀)'라고 할 정도로 연개소문을 뛰어난 장수로 묘사하였다. 대표적인 유적으로는 강소성 염성시 건호현에 몽롱탑이 있는데 연개소문에 쫓겨 달아나든 이세민이 우물에 빠졌을 때 우물 속의 거미줄이 자신을 보호해줘 목숨을 건진 곳을 잊지 않기 위해 세운 탑이므로 ‘몽롱보탑(朦朧寶塔)’이라 부르고 있다. 그 탑의 동북방에 세니하(洗泥河)가 있는데 당 태종이 말과 함께 늪에 빠졌다가 위험에서 벗어난 후 말을 씻었던 곳이라고 한다.
설인귀는 독목관에서는 아예 연개소문을 쓰러뜨린 영웅으로 나오는데 연개소문에게 쫓기는 당 태종을 보호하기 위해 연개소문과 싸우는 주인공으로 나온다. 설인귀가 역사에 처음 등장하는 무대는 안시성인데 그 이유는 당시 설인귀가 살던 집이 안시성에서 그리 멀지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설인귀는 한족이 아니라 고구려 출신이다. 신강현에는 설인귀의 유적이 여럿 남아있다. 경극에서 설인귀는 긴 창으로 말의 배 밑을 푹 찔러 양 어깨로 힘을 써서 당 태종과 말을 진흙 밭인 강 위로 끌어 올려 위기를 넘기게 하였다. 당 태종은 기뻐하며 설인귀를 유격장군으로 삼고 훗날 안동도호부에 봉하고 요동을 다스리도록 했다. 이야기는 ‘어니하’에서 왕을 구한 설인귀’라는 고사에서 나온다.
중국에서 전해오는 경극에는 연개소문과 당태종이 만났다는 이야기가 많다. 당 태종 이세민이 직접 군대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해왔지만, 전장에서 이들이 직접 대면했다는 기록은 없다(김용만/연개소문전, 신경섭/학위논문). 이처럼 우리가 알고 있는 안시성 전투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우리의 역사기록에는 자세히 나와 있지 않다고 한다.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 장군의 화살로 당태종이 눈을 맞아 부상당했다는 기록은 중국역사의 기록에서는 볼 수 없고 우리나라기록에도 없다고 한다. 다만 연개소문이 죽고 난 700여년이 지난 후 고려 후기의 학자인 이색(李穡)의 정관음(貞觀吟)이라는 시와 이곡(李穀)의 ‘가정집(稼亭集)’에 의하면, “당나라 태종이 눈에 화살을 맞아 부상을 입고 회군했다고 한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다(김장수, 세종의 소리). 안시성 싸움에서 양만춘 장군의 화살로 당태종이 눈을 맞아 부상당했다는 기록은 중국역사의 기록에서는 볼 수 없고 우리나라기록에도 없다고 한다.
경극의 배경과 시대적 상황은 당 태종(재위 626~649)이 고구려를 침공한 고당(여당)전쟁은 1차(645)와 2차(660~662)가 있고, 고구려는 대막리지 연개소문(~665)이 다스렸다. 그 후 고구려는 라당연합군과의 전쟁(667~668)의 패하여 668년에 멸망을 하였다. 그래도 한족에게는 당태종 연대는 연개소문과 고구려에 한이 맺힌 시대였다. 그래서 경극에서 나마 연개소문과 설인귀의 배역에서 군신과 같은 연개소문을 설인귀가 상대하여 한이라도 풀려는 자위적 문화로 보인다. 시대가 바뀌면서 경극의 내용도 변색되었을 것이다. ‘독문관’과 ‘어니하’의 내용도 1911년 신해혁명 이후 바뀌었을지 모른다. 중국인은 신해혁명 때 북방 민족인 만주족을 몰아내고 한족을 부흥시키자는 멸만흥한(滅滿興漢) 구호를 외치면서 중국 국민당과 중국 공산당은 이후 ‘한족 민족주의’를 부르짖었다. 그러한 상황에서 연개소문은 더 이상 주인공으로 남기 힘들었을 것이다(세계일보, 2018.2.15).
비록 한풀이의 경극이라 해도 우리민족의 영웅을 놀리는 것이라 국가 간의 문제가 되었다. 중국의 경극에 고구려의 맹장 연개소문을 주인공으로 하는 4대 작품에서 당 태종은 고구려를 침략했다가 645년 안시성 전투에서 패배한다. 봉황산에서 연개소문의 고구려 군에 대패해 줄행랑을 치는 초라한 신세가 되는데 달아나는 당 태종을 설인귀가 등에 들쳐 업고 도망쳐서 극적으로 구해 낸다. 연개소문은 당 태종을 장안까지 쫓아가 무릎 꿇리고 항복 문서를 받아내지만 연개소문은 중국의 영웅 설인귀에 의해 죽음을 맞이한다. 이에 대해 1949년 북한 정부는 중국의 경극들이 조선민족의 영웅인 연개소문을 패자로 만들어 비하시키고 국가 간의 단결을 저해한다고 문제를 제기하였다. 이에 대해 중국 문화부는 ‘우호 국가를 자극하는 공연’ 등을 금지하면서, 연개소문을 소재로 한 경극은 더 이상 공연을 못하게 되었다(박병식, 카카오스토리).
그 후의 역사의 흐름을 보면 1990년대부터 약 20여 년간 한국이 중국을 앞선 평화적인 시대를 살았다. 이 시기부터 한족은 자존심 회복과 같은 역사공정의 일환으로 동북공정을 추진한다. 동북공정이란 역사왜곡의 핵심은 고구려가 중국의 지방정부라고 억지 주장을 하는 것이다. 동북공정의 시작은 바로 안시성부터이다. 이러한 맥락에서도 중국 당국이 금지시킨 ‘연개소문 경극을 우리가 다시 보기는 어려울 것이다.
중국의 경극에서는 주인공인 연개소문을 군신과 같이 추앙하면서도 자기들의 직성(直星)이 풀리도록 한 풀이를 한 것 같다. 연개소문을 가장 높이 올려놓고 설인귀를 등장시켜 한풀이 대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마치 일본의 전통극 가부끼에 등장하는 김시민 장군을 우스꽝스러운 인물로 묘사하는 것과 같다. 제1차 진주성 전투(1592)에서 일본군 정예 병력은 김시민이 주도한 조선관민의 필사적인 항전으로 패배하였다. 일본군에게 김시민은 조선군의 맹장으로 각인되고 모쿠소(木曾)라고 부른다. 가부키에서 조선의 맹장이자 충신인 모쿠소는 원한을 품고 일본을 전복하려는 원귀로 등장한다. 이처럼 일본에는 가부키, 중국에는 경극이 있다면 우리나라에는 판소리가 있다.
이처럼 한민족의 영웅인 연개소문을 중국에서는 경극으로 기리는데, 정작 한국에서는 그렇지 못한 것 같다. 기껏해야, 사실여부에 관계없이 강화박물관 입구에 '고구려 대막리지 연개소문 유적지'라는 비석이 있을 뿐이다. 오히려 감악산에 있는 파주시 향토유적인 몰자비(沒字碑)라고도 하는 설인귀사적비(설인귀사적비)가 남아있고, 설인귀를 기리는 감악사(紺嶽祠)도 있었다고 한다. 철저한 소중화(小中華)와 사대모화(事大慕華)의 형상일 뿐이다. 우리의 판소리에서도 군신 연개소문이 등장하는 곳은 경우 삼국시대에 신라의 입장을 돋보이게 할 때뿐이다. 판소리 수궁가에서 김춘추가 고구려 연개소문에게 감금된 상황에서도 탈출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연개소문을 속이고 김춘추가 탈출하는 대목이 고작이다. 그러나 우리의 판소리 적벽가에서는 관우(關羽)를 노래한다. 그것도 모자라 관우에 대한 존경은 동묘(東廟)에서 모시고, 남산의 와룡묘(臥龍廟)에서도 관우와 와룡 제갈량까지 지성으로 섬기고 있으니 도대체 우리의 얼(DNA)은 어떻게 된 것인가?
출처 : 정경시사 FOCUS(http://www.yjb0802.com)
첫댓글 우리의 역사가들은 무엇을하고 있었나?
우리 역사를 연구하며 평생을. 바친 사학자들이 많이 있을터 역사를 꿰뜷어 진실을 밝힐 책임이 있슴을 다하지 못한 책임을 모르고 살아왔다면 학자로서 부끄럽지 않을까
4000년 역사의 위대한 혁명가 연개소문이 성공했더라면 우리의 역사가 달라졌으리라
한 혁명가의 성공과 실패가 역사를 바꾸는 것임을 알수있다는 사실을 알고 운명을 탓하는 것이 허무할 뿐이다
연개소문 장군이여 다시 일어나 저들을 다시 호령하라 우리의 오페라로 세계를 향하여 갈채 박수를으며 다시 날아라
연개소문 장군!
<오샘 曰, 아이구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