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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후기 스크랩 동적 예술과 정적 예술의 만남-달아달아 밝은 달아
반잔 추천 0 조회 49 08.01.07 20:15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언제나 그러하듯 연출가 이윤택은 라이브 음악을 선호한다. 그러면서도 그 음악적 고향은 과거의 향수를 불러 일으키게 하는 신파적이라는 느낌마저 든다. 그러나 선율의 진부함과 달리 내용에 있어서는 이러한 경향을 탈피하는 현대적 해석의 숨은 코드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차별된다.

 

이 날도 예외는 아니었다. 무대 앞에 배열된 가야금과 해금 등의 악기들이 그 연출가가 누구인지 짐작케 하였다. '억척어멈과 그 자식들", 뮤지컬 "화성에서 꿈꾸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다.

 

그만의 색깔을 벌써 오래 전에 구축하였고, 실험을 뛰어넘어 이제 그 예술적 창작혼의 완성 단계에 이르렀다고 아니할 수 없다. 이 날은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자리라는 점에서 의미있는 일이었다.

 

그의 해석에 꽃을 달았다. 설치 미술적 요소가 무대에 디자인되면서 동적 예술과 정적 예술이 만난 것이다. 보통의 무대가 몇몇 소품들로 꾸며지는 것에 비한다면 아예 고정된 설치작품들은 그 자체가 공연도 예술의 한 쟝르라는 사실을 인식시켰을 뿐 아니라 상당히 품격있는 오래된 원시예술의 완성을 보여 주었다는 점에서 의의있다. 비록 무대가 고정되는 관계로 다양한 무대적 배경을 나타내 보여주진 못하였지만, 언제나 무대는 그냥 시대적 배경을 보여주는 흔적으로서의 도구적 역할에만 머물렀었던 수준에서 이제는 예술과 예술의 쟝르가 화려하게 조화를 이루며 생산적 활동적 美로 승화되었다.

 

시놉시스가 예사롭지 않았다.

 

"아버지 심봉사의 공양미 삼백석을 마련하기 위해 심청은 대국나라 청루에 팔려간다. 중국 도화(용궁이 아니다)에서 몸을 팔게 된 심청은 (용궁의 용왕님이 아니라) 손님 중에 고국에서 온 인삼장수 김서방을 만나 서로 정이 든다. 김서방은 이국땅에서 장사에 실패하고 실의에 바져 술과 여자로 세월을 보내던 가운데 청이를 만나 삶의 의지를 다진다. 돈을 벌어 청이의 몸값을 대고 함께 고향에 돌아가서 살 계획이었던 그는 자신은 곧 뒤따라 가겠다는 약속만을 남긴 채 고향으로 가는 배에 청이를 태운다. 그러나 청이는 해적을 만나 고향이 아닌 일본의 해적소굴로 끌려간다. 그러다 조선정벌에 참여하는 해적들을 따라 결국 고향땅에 돌아오지만, 그곳에는 이미 그리운 아버지도 없고 김서방도 없다." 

 

 

옛날의 심청이 모티브지만, 옛날의 심청은 아니다. 시대적 배경도, 인물의 직업이나 분장, 배경, 모든 것이 바뀐 인생이다. 캐릭터만큼은 그대로일 수 있을까?

 

심청이 간 ‘용궁’을 중국 색주가의 환유로 읽은, 당시로는 매우 도발적인 발상과 뒤집기를 담은 심청전의 패러디물이라는 평을 들은, 한 세대 전에 발표된 최인훈의 희곡을 원작으로 했다.

 

국악으로 들려주는 효과음이 이색적이다. 여기에다 심학규의 솔직담백한 대사를 통한 심리묘사는 뛰어나다. 아비로서의 심정과 눈을 뜨고픈 인간 내면의 갈등이 대사를 통해  드러난다. 그렇지만, 전체적으로는 부모된 자의 마음이 노정되었다기 보다는 희화화되었다. 물질에 노예가 되어버린 현대적 인간성 상실을 실랄히 비꼰 것인가?

 

모 신문에서는 다음과 같은 글이 실렸다.
 
"모티브가 된 '심청전'과 내용 전개가 판이하게 다르다. 판소리·정가 등 한국 전통 문화와 아시아 전통 연희가 어우러진 연극은 심청이 팔려가는 장면, 중국에서 몸 파는 장면, 해적에게 포로가 된 장면, 늙은 장님으로 고국으로 돌아 온 장면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윤택 씨는 전통과 현대를 넘나드는 시공간 무대를 연출, 침탈과 억압의 시대에 희생된 여성의 존재를 그리고 있다."

 

판소리나 정가는 없었다. 그냥 배경음악이나 배경효과로서의 한국 전통악기가 사용되었을 뿐이다. 심청전이 판소리의 한 마당인 것은 분명하나, 그것의 차용을 가지고 한국 전통문화가 하기에는 지나친 것이 아니었을까? 여기에다 중국과 일본서 몸 파는 여자로 전락해 버린 심청을 두고 아시아 전통 연희라 할 만 한가? 설령이 그것이 아시아 문화의 한 측면으로 존재했었다 하더라도 보도에서 언급한 것처럼 자랑거리가 될 만한 소재는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의 글귀는 어느 정도 적절한 평이라 아니할 수 없다. 내내 과거사에 얽매인 과거적인 모솝만 보여지다가 마지막에 가서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에서 같은 상황이 연출된다. 그런 점에서 시대를 초월한 침탈과 억압을 보여 주었다고 해도 무리가 아니다. 과거에는 가난했던 국가와 개인이 외세에 의해서 이러한 상황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면, 현대에는 사회적 제도의 모순이 잉태한 부적절한 변화와 때늦은 대응 그리고 부조리한 사회제도가 낳았다는 점이 다를 뿐이다. 과거 중국과 일본에 의해 처절히 짓밟힌 우리 역사를 빗댄 것이 심청이의 운명이라면 노숙자적인 삶은 또 오늘날의 우리의 삶이 처한 형편을 빗댄 것인가?

 

그런데, 신문 속에 끼워지는 광고전단지에 심청이가 붓글씨를 연습하는 모습은 익살인지 아닌지 헛갈린다.

여전한 악극스타일은 다소 주술적이면서 미신적이고 토속적이기도 한 냄새가 배었다.

곳곳에 드러나는 심청의 애절한 심정에도 불구하고 살짝 비틀어진 느낌이다.

뺑덕을 맡은 배우는 아직 노래와 대사가 몸에 바짝 붙어있지 않았다.

 

청이 떠나는 장면에서는 생이별의 고통을 안무로 표현했다. 가로 막은 그물(밧줄)이 상징적이다. 바다가 출렁하는 장면은 영상으로 처리했다.

 

검은 옷 차림의 사람들이 바퀴달린 무대처럼 꾸며진 나무 판자 아래에서 인력으로 움직이며 돌리는 모습과 사람이 들어앉아 덮어 쓴 꿈틀대는 용의 움직임에서는 뮤지컬 돈 주앙이 연상된다,

 

새장에 갇힌 심청은 현재의 삶을 실랄히 비꼰다.

 

오페라 라트라비아타의 스토리가 전체적으로 원용된 느낌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지루하다는 느낌은 지워지지 않았다. 조금 더 빠른 전개가 이루어졌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다.

 

종군위안부와도 같은 삶의 심청은 약소국의 설움이다. 그 설움은 결국 심청을 우리로 변화시켰고, 우리의 설움을 보여 주었다.

 

심청의 귀가......

 

귀향길 해적에게 다시 탈취돼 만신창이가 되어가는 심청의 몸을 허수아비 놀음 엮듯 표현한 장면, 한양으로 이송 중인 이순신 장군이 탄 수레와 심청이 마주치는 장면, 온후한 달빛을 가림으로서 일본이 멸망하였음을 표현한 것 등은 뛰어난 형상화다.

 

보따리 둘러메고 고향으로 돌아왔건만, 기다리는게 무언가?

 

 

오늘의 서울역.

 

노숙자들의 삶이 펼쳐진다. 시대는 변해도 변하지 않고 존재하는 눈 뜬 장님. 재수없다?는 대사에서 사회적 냉대와 버림받은 사람의 사회적 관점이 엿보인다. 지나치리만큼 냉소적은 관점이다.

 

몇 백년만의 귀향. 여전히 우리의 자화상인가?

 

기다리는 서방님과 아버지는 꿈이었다. 꿈을 기다리는 자, 그래도 희망이 있어 행복하다.

 

오늘도 우리는 꿈꾸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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