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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년 11월 12일 살아나서 살리는 교회 주일 설교
제목 : 위협 받으나 보호 받는 증인
본문 : 마가복음 14장 71절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말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새번역>
각종 사건이나 사고의 피해자, 피고인, 신고자 또는 관련자를 재판이나 사건이 해결될 때, 혹은 평생 동안 생명이나 물질적인 위협으로부터 신변을 보호하기 위한 제도가 바로 ‘증인 보호 프로그램’입니다. 특정 단체의 내부고발자나 흉악한 강력범죄의 신고자는 법정에서 증언을 하지 못하게 협박이나 위협을 당하거나 혹은 가해자들이 처벌을 받은 뒤 앙심을 품고 고발자에게 보복을 가하는 경우가 많이 생기기에 이를 보호하기 위한 제도입니다. 만약 이런 제도가 없다면 범죄자의 검거와 재판에 큰 영향을 주는 신고자들이 보복을 두려워해 신고하는 경우가 더욱 줄어들 수 있고, 이는 사건 해결과 범죄율 억제에 큰 악영향을 미치므로 도덕적으로도 실용적으로도 반드시 필요한 제도라고 볼 수 있습니다.
증인은 언제나 위협 속에 놓일 수밖에 없습니다. 진실을 바라지 않는 시대 속에서 진실을 이야기할 때에는 그 진실에 불편해 하는 존재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존재들로부터 수많은 위협이 찾아오곤 합니다. 그래서 증인이 된다는 것은 제법 ‘용기’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이런 용기를 지켜주기 위해 증인 보호 프로그램 등이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아주 엉뚱한 질문이 하나 생겼습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인 우리에게는 어떤 위협이 있습니까?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라는 진리를 선포하기에, 이 진리 선포를 너무도 미워하는 세력으로부터 위협을 받고 있습니까?
그런데 이상하게도 별 위협이 없어 보이는 것이 아닙니까? 우리가 무슨 말을 하든, 무슨 행동을 하든지 그대로 내 버려두는 것처럼 보일 때가 더 많습니다. 하다못해 제가 어릴 때 교회를 다니겠다고 부모님께 말씀 드렸을 때 부모님께서 하셨던 핍박조차도 요즘은 없는 것처럼 보입니다. 위협이 없는 것일까요? 우리가 증인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아니면 우리가 증인은 증인인대 진실을 말하는 증인이 아니기 때문일까요? 혼란스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분명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라면 위협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진실을 말하지 못하도록 막아서는 수많은 것들이 있어야 합니다. 지금 여러분의 삶 속에는 이런 위협이 있습니까? 올바른 증언을 하지 못하도록 만드는 위력이 있습니까? 증인답게 살지 못하도록 계속해서 방해하는 세력이 있으십니까? 제가 알지 못하는 수많은 각양각색의 위협들이 있으실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측면에서 바라볼 때 오늘 함께 나눈 본문에 등장한 베드로는 최소한 진리를 선포하며 다녔던 것이 분명합니다. 그에게 3번이나 강력한 위협이 등장하기 때문입니다. 위협이 등장하기에 그는 증인이었던 것이 분명하다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이상하게 베드로가 부러워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조금 더 깊이 그 이야기 속으로 들어가 보려고 합니다.
최후의 만찬이 끝나고 예수님을 팔아넘긴 가룟 유다에 의해 함께 있었던 장소가 발각이 되었고, 대제사장과 율법학자와 장로들이 보낸 무리가 칼과 몽둥이를 들고 예수를 잡으러 왔습니다. 그러자 곧 제자들은 모두 예수를 버리고 36계 줄행랑을 쳤습니다. 아마 그 무리들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등 뒤에서 마음껏 비웃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무리에 의해 대제사장에게로 끌려갔습니다. 그리고 수많은 고초를 당하기 시작하십니다. 없는 죄까지 뒤집어씌우면서 예수를 사형시켜야 한다고 자기들끼리 결론을 내고 있었습니다. 이런 암담한 상황이 계속되고 있을 때, 그 대제사장의 집 안 뜰 아래쪽에서 우리가 아는 한 사람을 만나볼 수가 있습니다. 베드로였습니다. 모두 도망쳤지만 자신은 그래도 자신이 했던 말이 있기에 두려움 가운데서 거기까지는 따라가 보았던 것입니다.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모두가 걸려 넘어질지라도, 나는 그렇지 않을 것입니다." <마가복음 14장 29절, 새번역>
베드로는 몸도 맘도 추웠기에 불 곁에 서서 불을 쬐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마음속으로는 부디 아무도 자신을 알아채지 못하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전혀 예상 밖의 인물인 대제사장의 한 하녀가 자신을 뚫어져라 빤히 노려보는 것이 아닙니까?
"당신도 저 나사렛 사람 예수와 함께 다닌 사람이지요?" <마가복음 14장 67절B, 새번역>
군사도 아니고, 어른들도 아니고, 한 하녀의 말이었습니다. 그런데도 베드로의 심장은 쿵쾅쿵쾅 뛰기 시작했을 것입니다. 무엇이라고 말해야 할까요? 여러분들이라면 여기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겠습니까? 베드로는 손사래를 치면서 부인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부인하여 말하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나는 알지도 못하고, 깨닫지도 못하겠다." <마가복음 14장 68절A, 새번역>
그리고 이 말과 동시에 황급하게 바깥들로 이동하게 됩니다. 그런데도 그 하녀는 포기를 모르는 셜록 홈즈였습니다. 이젠 혼잣말이 아니라 곁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이 사람은 그들과 한패입니다." <마가복음 14장 69절B, 새번역>
베드로는 더욱 더 당황하여 다시 또 모른척하며 부인하게 됩니다. 하지만 사람들은 이미 베드로가 누구인지 명확하게 눈치를 챈 것이 분명합니다. 이토록 예수님의 제자라고! 증인이라고! 많은 사람들이 알아봐 준 것입니다. 정말 증인의 삶을 추구하는 우리로서는 부러운 장면입니다. 실로 베드로가 예수님의 수제자였던 것이 거짓이 아니었음이 판명이 되는 순간입니다. 물론 좋은 순간은 아니지만 말입니다. 그리고 베드로인 것에 확신이 서자 무리들의 손가락질은 더 거칠어지기 시작했습니다.
조금 뒤에 곁에 서 있는 사람들이 다시 베드로에게 말하였다. "당신이 갈릴리 사람이니까 틀림없이 그들과 한패일 거요." <마가복음 14장 70절, 새번역>
이 순간 베드로는 고민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냥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도망쳐야 할 것인지, 아니면 그래 이왕 들킨 것 사실대로 말할 것인지, 여러분들은 어떤 결정을 내리시겠습니까? 한 번도 아니고 3번씩이나 자신을 알아봤다면 이제 사실대로 ‘증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당장에라도 잡혀 그토록 사랑하는 예수님 곁으로 같이 가서 이 고초를 같이 겪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요? 하지만 베드로는 두려웠습니다. 이 위협을 도저히 이겨낼 수가 없었기에 하지 않아도 되는 행동까지 하게 됩니다. ‘증언’이 아닌 ‘위증’을 하게 됩니다. ‘인정’이 아닌 ‘부인’을 하고, 저주로 맹세까지 하게 됩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저주하고 맹세하여 말하였다.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을 알지 못하오." <마가복음 14장 71절, 새번역>
공동번역은 이 구절을 더욱 더 실감나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을 듣고 베드로는 거짓말이라면 천벌이라도 받겠다고 맹세하면서 "나는 당신들이 말하는 그 사람은 알지도 못하오." 하고 잡아떼었다. <마가복음 14장 71절, 공동번역>
진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저주를 해야 할 필요는 없었습니다. 저주까지 해야 할 그 어떤 이유도 없었습니다. 하지만 베드로는 점점 자신을 옥죄여 오는 위협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 이런 행동까지 하게 된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운명처럼 닭이 두 번째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의 말씀이 생각났습니다.
예수께서 그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정으로 너에게 말한다. 오늘 밤에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모른다고 할 것이다." <마가복음 14장 30절, 새번역>
그래서 베드로는 갑자기 그 자리에 쓰러져, 엎드려서 울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곧 닭이 두 번째 울었다. 그래서 베드로는 예수께서 자기에게 "닭이 두 번 울기 전에, 네가 나를 세 번 모른다고 할 것이다" 하신 그 말씀이 생각나서, 엎드려서 울었다. <마가복음 14장 72절, 새번역>
물론 다른 복음서에서는 대제사장의 바깥들 바깥으로 나가서 울었다고 기록되어 있긴 하지만 저는 바깥으로 나가서 울었다는 것보다 그 자리에서 엎드려 울었다는 것이 더 정확한 사실이라고 생각합니다. 만약 바깥으로 그대로 나갔다면 오히려 더 잡힐 빌미를 제공할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가장 먼저 기록된 복음서인 마가복음의 기록을 신뢰, 의지하여 베드로가 그 바깥들, 그 위협의 장소에서, 엎드려 울었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 기가 막히게 위기를 탈출하는 이 순간의 결과를 설명할 수 있고, 누가복음의 설명처럼 예수님과 눈을 마주친 것에 대해서 설명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여기서 베드로의 그 눈물은 자신을 위협 하고 있던 사람들마저도 당황케 만드는 슬픈 눈물이었던 것이 분명했습니다. 어느 정도 나이가 있던 베드로가 그렇게까지 우니 자신의 결백을 드러내고자 하는 진실의 눈물이라 생각했던지 더 이상 베드로에게 추궁하며 묻는 사람이 없는 것이 아닙니까? 그래서 놀랍게도 이렇게 긴박했던 소위 ‘베드로의 3번부인 사건’은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조용히 마무리가 되고 마가복음 15장으로 넘어가며 다시 예수님에게로 시선을 돌리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베드로는 목숨을 부지할 수 있게 된 것입니다. 3번이나 부인했지만, 예수님 앞에서 죽일 죄를 지은 것 같았지만, 오히려 그 것 때문에 살 수 있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더욱 더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미 말씀하신대로 마지막까지 자신을 사랑하셨으니 말입니다.
유월절 전에 예수께서는, 자기가 이 세상을 떠나서 아버지께로 가야 할 때가 된 것을 아시고, 세상에 있는 자기의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셨다. <요한복음 13장 1절, 새번역>
누군가는 이 장면이 베드로가 3번 부인했구나 정도로의 장면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저는 이 장면에서 베드로와 함께 그 대제사장의 바깥들에서 같이 엎드려 펑펑 울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은 베드로가 부인할 것조차도 아시고, 그 부인함을 통하여, 베드로를 보호하셨기 때문입니다. 만약 이 때에, 예수님과 베드로가 이미 그런 대화를 나누지 않았더라면, 베드로가 3번 부인할 것을 예수님이 미리 알지 않으셨다면, 베드로를 의심하던 많은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달려들어 베드로 역시 잡혀갈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베드로에게 이미 말씀하셨고, 지금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3번이나 부인한 그 자리에서 쓰러져 통곡할 수밖에 없었고, 그 울음이, 그 배신에 대한 죄송함이, 그 부끄러움이, 오히려 베드로를 살리는 고백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증인이 된다는 것은 두려운 일이 분명합니다. 위협이 찾아올 때마다 증인의 길을 부인하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입니다. 그 어떤 것도 나를 보호해 주지 못할 것 같아 더욱 더 불안감과 두려움과 공포가 커지곤 합니다. 무엇보다 많은 무리들이 나를 동시다발적으로 공격해 오거나 나의 약점을 파고들며 나에게 위협을 가할 때에는 증인이고 뭐고 다 포기하고 싶은 것이 당연한 마음일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랬을 것입니다. 절대로 예수님을 떠나지 않을 것이라고 장담했지만, 예수님도 함께이지 않았던 현실 앞에서는 그 장담은 그저 농담이 될 수밖에 없었고, 마음 안에서 고요 속의 외침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증인이 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우리 중 그 누가 베드로를 향해 돌을 던질 수 있겠습니까? 충분히 아주 충분히 나 역시 그랬을 것이기에 베드로에게 동정심을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 주님께서 이런 우리의 마음을 모르실까요? 우리의 두려움과 비겁함, 약함, 걱정과 공포를 외면하실까요? 베드로를 그냥 그 무리들에게 잡히게 내버려 두셨을까요? 아닙니다. 여기서 분명히 깨달아야 할 포인트가 있습니다. 우리는 결코 위협만 받는 증인이 아닙니다. 보호도 받는 증인입니다. 위협도 받고, 보호도 받는 증인입니다. 위협도 받지만, 보호도 받는 증인입니다. 무엇보다 약속하셨던 이 말씀을 지키시는 분이 우리 주님이시라는 것을 확실하게 깨달아야 합니다.
너희는 내 이름 때문에, 모든 사람에게 미움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는 머리카락 하나도 잃지 않을 것이다. <누가복음 21장 17~18절, 새번역>
위협만 있다면, 미움만 있다면, 우리는 진작 증인으로 사는 삶을 포기해야 할지도 모르겠습니다. 당연히 포기해야 합니다. 고민할 필요도 없습니다. 3번이나 부인하기 전에 첫 번째에 저주로 맹세하며 깨끗하게 증인의 위치를 버려야 할 것입니다. 그런데 위협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아무리 큰 위협이 있더라도 더 놀라운 방식으로, 베드로를 보호하신 신비한 방법으로, 우리를 보호하시는 존재가 바로 우리 주님이심을 우리는 깨달아야 할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증인들이 가져야 할 ‘믿음의 눈’입니다. 현실을 바라보지 말고, 하나님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위협만을 바라보지 말고, 보호하심도 바라볼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마치 엘리사의 시종이 눈을 떠서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본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사람의 시종이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밖으로 나가 보니, 강한 군대가 말과 병거로 성읍을 포위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시종이 엘리사에게 와서 이 사실을 알리면서 걱정하였다. "큰일이 났습니다. 선생님,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 엘리사가 말하였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의 편에 있는 사람보다는 우리의 편에 있는 사람이 더 많다." 그렇게 말한 다음에 엘리사는 기도를 드렸다. "주님, 간구하오니, 저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셔서, 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그러자 주님께서 그 시종의 눈을 열어 주셨다. 그가 바라보니, 온 언덕에는 불 말과 불 수레가 가득하여, 엘리사를 두루 에워싸고 있었다. <열왕기하 6장 15~17절, 새번역>
사실 베드로는 그 하나님의 보호하심을 본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확신을 너무도 크게 의지했습니다. 눈을 열지 못하고 오히려 눈을 감았던 것입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힘주어서 말하였다. "내가 선생님과 함께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절대로 선생님을 모른다고 하지 않겠습니다." 나머지 모두도 그렇게 말하였다. <마가복음 14장 31절, 새번역>
생각해 보십시오. 이런 말까지 했으니 죄송함에 더더욱 눈물이 끊이지 않는 베드로였지 않겠습니까? 그리고 자신을 고발하고자 위협하던 사람들이 하나둘씩 자신의 곁에서 떠나는 것을 눈치 챘을 때, 그땐 울컥 목소리로 터져 나와 바깥으로 뛰어 나가며 더 큰 눈물이 흘러 나왔을 것입니다. 스승을 버린 제자를 이렇게까지 보호해 주심에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눈물만 흘렸을 것입니다. “베드로! 너는 나 예수를 버릴 것”이라고 예수님이 확신에 차서 말씀하실 때에는 베드로도 화가 났을 것입니다. 제자를 이렇게 믿지 못하는 스승에 대해서 조금은 실망했을지도 모릅니다. 그런데 다 이유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은 다 계획이 있으셨고, 인도하심이 있으셨고, 보호하심의 방법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함께 하지 못했기에 더더욱 베드로를 지킬 방법을 미리 말씀해 주신 것입니다. 그래서 곧 3번이나 부인하고 도망칠 베드로를 굳이 겟세마네 동산까지 데리고 가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계속해서 깨어 있으라고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버릴 제자를 향해 왜 이렇게까지 말씀하셨겠습니까? 여전히 사랑하셨기 때문입니다. 약함을 아시고, 보호하시고자 했던 것입니다. 베드로는 증인이면 증인답게 행동했어야 했는데 이미 많은 것들이 증인의 삶에서 떠나 있었던 자신의 모습을 돌이켜 생각하게 되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 중에 예수님의 이 말씀이 가슴에 와 탁 걸렸을 것입니다.
너희는 유혹에 빠지지 않도록, 깨어서 기도하여라. 마음은 원하지만, 육신이 약하구나! <마가복음 14장 38절, 새번역>
베드로는 이 말씀들이 주마등처럼 스쳐갔었기에 도저히 멈출 수 없이 많은 눈물을 흘렸을 것입니다. ‘유혹에 빠져서 증인이 되지 못했구나. 깨어서 기도하지 않았기에 증인이 되지 못했구나! 마음은 원이지만 육신이 너무도 약하기에 증인이 되지 못했구나! 아직은 너무도 부족했기에 예수님은 미리 이 모든 일이 있을 것을 알려주신 것이구나! 그래서 그렇게 말씀하셨구나!’
사랑하고 존경하고 축복하는 증인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여러분! 예배자 여러분! 정말 우리 주님께서는 얼마나 제자들을 사랑하시는지 느껴지십니까? 우리가 생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사랑하시고 보호하시는 주님을 우리가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내 방법으로 아무리 생각해도 위협인대, 주님의 방법으로는 보호하심이란 이 신비를 어떻게 깨어 있지 않고 발견할 수가 있겠습니까? 이제 우리의 차례입니다. 우리도 증인으로서 이런 위협을 만나게 될 것입니다.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증인으로 살지 못하게, 괴롭히고 힘들게 하는 위협이 가득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두려워하고, 걱정하고, 공포감에 빠져야 할까요? 아닙니다. 이제 깨어나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분명하게 말씀드립니다. 위협도 받지만, 보호도 받는 존재가 바로 우리입니다. 위협이 있지만, 그 위협이 위협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편안한 보호하심이 우리와 함께 할 것입니다. 그러니 위협에 대한 문제는, 증인 보호 프로그램에 관한 문제는, 믿음의 눈을 떠서, 하나님께 맡기고, 우리는 계속해서 증인의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입니다. 계속해서 진실을 증언해야 합니다. 끊임없이 진리를 선포해야 합니다. 우리가 믿은 것을, 들은 것을 이 세상에 그대로 전하면서 살아가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먼저 증인의 삶을 살았던 바울의 이 고백이 우리들의 고백이 될 것을 믿습니다.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을 수 있겠습니까? 환난입니까, 곤고입니까, 박해입니까, 굶주림입니까, 헐벗음입니까, 위협입니까, 또는 칼입니까? 성경에 기록한 바 "우리는 종일 주님을 위하여 죽임을 당합니다. 우리는 도살당할 양과 같이 여김을 받았습니다" 한 것과 같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모든 일에서 우리를 사랑하여 주신 그분을 힘입어서, 이기고도 남습니다. 나는 확신합니다. 죽음도, 삶도, 천사들도, 권세자들도, 현재 일도, 장래 일도, 능력도, 높음도, 깊음도, 그 밖에 어떤 피조물도, 우리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습니다. <로마서 8장 35~39절, 새번역>
하나님은 여전히 변함없이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증인인 우리를 보호하십니다.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방법으로, 우리를 지켜 보호하십니다. 그래서 우리는 오늘 또 한 번 이렇게 다윗처럼 고백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악인들이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으나 나의 대적들, 나의 원수들인 그들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지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지라도 나는 여전히 태연하리로다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시편 27편 1~4절, 개역개정>
할렐루야! 위협도 받지만 보호도 받는 증인 여러분! 하나님은 당신의 증인을, 사랑하는 자녀들을, 지금도 변함없이 사랑하시고, 지켜 보호하십니다. 끝까지 믿음의 눈을 뜨고, 이 확신을 놓치지 않길 축복합니다. 우리에게 멈출 수 없는 사랑을 주시니 멈추지 않고 전진하는 증인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결단 찬양 - 멈출 수 없는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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