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국 3 - 은허의 갑골문으로 유명한 고대의 상(商) 나라!
상(商) 나라는 중국 고대 국가로 현조(玄鳥)를 토템으로 하며 에게해 (크레타) 문명이 시작
되던 무렵인 기원전 17세기에서 기원전 11세기까지 존재하였으니.... 한자는 상(商).
국성은 자(子). 수도는 호(허난성 푸양시)이나 기원전 14세기 말에 은허로 옮겼으니
은(殷) 나라 라고도 부르는데..... 한때 하(夏)나라 처럼 전설상의 국가로 인식되었으나
은허 유적과 갑골 문자 기록의 발견으로 실존했던 중국 최초의 국가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 붉은 색은 초기 청동기 얼리터우 문화(二里頭文化) 유적의 영역,
녹색은 《죽서기년》 연구에 따라 중국 학계에서 비정하는 영토이다.
은허는 상(商)나라의 주요 도시이자 수도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은' (殷) 이라고도 불리니 합쳐서
'은상'(殷商) 이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으니, 은은 반경(盤庚) ~ 제신(帝辛) 시기에 도읍했던
상나라 최후의 수도였는데, 당대에는 '의'(衣) 혹은 '대읍 상' (大邑 商) 이라는 별칭이 있었습니다.
그들 자신은 은을 도시 이름으로만 쓰고 부족 이름은 '상' 이라 하였으니 갑골문에서도 은 이라는
글자는 나타나지 않으며 나라 이름이 은이라 불린 것은 주대 성립부터로, 초기에는 상과
혼용하다가 후에 은으로만 부르게 되었으니 이를 주나라 사람들이 부른 폄칭으로 이해하는
견해도 있으니 서구인들은 Shang 이라고 하며 요즘 중국인들도 상(商)이라고 부르는 추세입니다.
이는 중동의 히타이트와 비슷한데 히타이트도 네샤에서 하투샤로 수도를 옮겼는데, 그들 스스로는
계속 자기들을 네샤인이라 불렀으나 주변 국가들은 하투샤인이라는 뜻으로 하티라고 불렀습니다.
상인(商人), 상업(商業) 등의 商(상) 자가 이 나라의 이름에서 나온 것이니 상나라가
주나라에 망한후 상나라 유민들이 이곳저곳 장사하며 떠돌아 다니던
것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하며 현재 상추시 역시 같은 유래를 지니고 있다고 합니다.
상나라는 망했지만 주나라는 상의 유민들을 안정시키기 위해 무왕 희발은 제신(주왕)의 아들 무경(武庚)
을 은 지역에 분봉해 봉국으로 삼았으니 송나라인데, 무왕이 죽은후 그의 동생인 관숙(管叔),
채숙(蔡叔), 곽숙(霍叔)은 주공 희단의 섭정에 반기를 들고 무경과 연합해 반란을 일으켰으나 주나라
에게 진압당하면서 송나라를 봉지로 받은 미자계의 후손만 제후 신분으로 남고 나머지는 몰락 합니다.
기원전 1600년에 여러 제후국을 모아 탕서(湯誓)를 발표하며 군대를 발진시켜 전설상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의 걸왕을 물리친 성탕(成湯)이 상을 건국하였으니 성탕은 갑골문에서도 확인되는 왕
으로 대을(大乙), 성당(成唐)으로 언급되는데 다만 갑골문에서 탕왕은 상나라를 중흥시킨 왕일뿐
창시자는 아니었으니 갑골문에서 상나라의 창시자는 삼황오제 중 제곡 고신씨까지 거슬러 올라갑니다.
탕왕 이후 상나라는 정신이 어지러울 정도로 여러번 천도를 하는데, 현재 발굴되어 확인된
상나라의 도읍은 중기의 수도인 박(亳)으로 추정되는 허난성 옌스 유적, 그리고 최후의
수도인 허난성 안양시 샤오툰촌의 은허 유적지가 있으니 우리가 아는 갑골문은
주로 안양 은허 유적지에서 발굴된 것으로..... 다른 유적지에서는 갑골문 출토가 드뭅니다.
기원전 1541년 상나라 노신 이윤이 태정의 아들이자 탕왕의 종손인 태갑(太甲)을 왕으로 옹립
했는데 그는 어리석고 포악해 조부의 법을 어기고 제멋대로 행동하니 태갑3년에 이윤은
왕을 교외의 동궁(허난성 엔스시)에 가두고 섭정해 천자의 직권을 대행했는데
그가 뉘우치자 3년후 복귀시키니 어진 정사를 펼쳐 성탕 때와 같은 성세를 누렸다고 합니다.
이윤은 어느날 탕이 덕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의 밑에서 자신의 뜻을 펼치기를 바랬으니 유신씨
의 딸이 탕에게 시집간다고 하자 혼수품으로 딸려가는 노예가 되어 상으로 갔는데 요리사
가 되어 탕에게 음식을 올리는 기회를 이용해 천하의 형세를 분석하고 걸왕의 폭정을
열거하며....... 하왕조를 멸망시키고 새로운 나라를 세우려는 큰 뜻을 이야기 했다고 합니다.
기원전 1285년 반경이 즉위해 왕실 내부의 갈등 해소를 위해 수도를 엄(산동성 곡부시)에서 은(허난성
안양)으로 옮기려고 하자 상나라 백성들의 반대에 부닥쳤으니 반경은 선대왕들이 천제의
뜻에 따라 여러번 천도했고 점을 쳐보니 천도하라는지라 천제의 뜻을 따르지 않는다면 천제가 너희
조상의 영혼을 벌하실것이라 위협해 감행하니 이후 273년에 걸쳐 총 8대 12왕이 재위했다고 합니다.
상나라 시대의 갑골문은 최초의 문자인데 거북 등딱지와 동물의 뼈에 새겨졌기 때문에 갑골문
으로 불리니 상나라 귀족들이 점을 친 것으로 복사(卜辭)로 불리는데 대부분 칼로 새겨졌고
이 밖에 묵(默) 또는 주(朱)로 글씰르 쓴 것도 있는데..... 이는 먼저 글씰르 쓴 뒤에 칼로
새긴 것으로 문자의 결체가 자연스럽고 구성이 자유로우며 일정한 서예 수준을 드러냅니다.
상은 기원전 13세기 무정(武丁) 시기에 전성기를 맞이하였으며 북쪽 유목부락 귀방(鬼方)을 3년
만에 평정하고 공방과 토방을 10년만에 복속시켰으며 서쪽에 오래된 부족인 강방, 강룡,
마강등 강족을 정벌해 얻은 전쟁포로는 인간제물로 삼아 귀신에게 제사를 지낼 때 희생제물로
바쳤고 남쪽 형초까지 우너정하는등 주변 종족들을 대거 복속시키면서 영향력을 확대했습니다.
상나라 귀족들은 자제를 교육하여 노예제 꾸가의 통치를 굳건히 하기위해 서(序), 학(學)등의
학교를 세웠는데 교사는 나라의 관직을 겸했고 종교와 군사를 주로 화고 윤리와
문화를 가르쳤으니 처음으로 육예(六藝)를 교육했으며 상나라는 제사를 중히 여기고
예악을 숭상해 고종(顧宗)을 세웠으니 원래 악사의 종묘로 제사를 지내는 곳이었다고 합니다.
기원전 1191년 조갑은 역대왕을 적장자여부에 따라 대종과 소종으로 나누고 문자와 역법을 개혁했으며
무을 치세에 주나라왕 계력이 알현했으나 천신을 농락하는등 무력을 숭상하고 사냥을 좋아
하다가 벼락을 맞아 죽었으며...... 이후 상나라왕 문정은 기우너전 1109년에 주나라왕 계륵을
목축을 관장하는 목사로 임명했으나 그 세력이 크지자 죽이니 그 아들 희창이 즉위하니 훗날 문왕입니다.
왕조 말기 제을(帝乙)시대에 동남쪽 오랑캐 제후국들이 맹방, 임방과 함께 반란을 일으키자
양쪽전선을 피하기 위해 아버지가 죽인 계력의 아들인 주나라 희창에게 자신의 여동생
을 시집보내 관계를 회복하는데 희창이 정세를 살펴보니 아직 때가 아니라 시간을 벌기
위해 결혼을 받아들여 결혼식날 배를 몰고와서소방주라 부르니 서백으로 임명을 받습니다.
기원전 1075년 상나라 제을이 죽으니 계는 어머니 신분이 비천하니 배다른 동생 주가 즉위하니 제신(帝辛)
인데 그는 즉위후 술과 여자, 음란함에 빠졌고 달기를 총애하며 세금을 무겁게 거두어 백성들의 원성을
샀으며 동방 정책으로 서방 지역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했고, 이 틈을 탄 산시성의 주나라가 서방 부족
을 모아 상나라를 공격해 오니 주력 군대는 멀리 동쪽 동이와 전쟁중이라 급한김에 노예를 무장 시킵니다.
노예들이 창을 거꾸로 잡으니 상나라는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회전에서 대패하여 국가가 멸망하고
말았는데 마지막 왕이었던 제신에게는 주나라에 의해 불명예스러운 '주'(紂)라는 시호가 내려
졌으며, 하나라의 걸왕과 함께 폭군의 대명사로 일컬어지게 되었고 상나라 왕족 미자(微子) 계(啓)
에게는 공작위를 수여해 제후국인 송(宋)에 봉했고 나라의 근본인 상(商)의 제사(祭祀) 를 계승합니다.
송나라는 다른 제후국들과 다르게 천자의 제례가 허락되었는데 이것은 상나라 자성 왕실의 후예를 예우한
것이니 천제께 제사 지냄은 천자의 특권이었으나 주나라를 비롯한 당시의 인식이 아직은 모든 면에서
상왕실의 후예를 함부로 할수 없었고, 신분을 넘어 그들의 능력과 공로를 귀하게 여겼던 것으로 송나라
에서 공자의 부친이 송씨를 공씨로 바꾸고 노나라에 건너가서 정착했는데 공자 또한 미자계의 아들입니다.
청나라 시대에 고대의 역사적 사실을 의심하는 의고파가 득세하면서 한때
실존이 의심되기도 했으나... 1899년에 갑골문이 발견되어 세상에
알려지면서 상나라는 실존했던 나라라고 학자들 대부분이 인정하였습니다.
상나라의 역대 군주는 갑골문에서 발견되는 상나라 왕의 시호(이름?, 존호?)는 모두 십간을
따라 지었으니 상나라가 제정일치적 성격이 강했던 면모의 일환으로 보이기도 하는
데... 놀랍게도 갑골문으로 확인한 왕명과 순서가 사마천의 《사기》 기록과 거의 일치 합니다.
하나라를 역사적 실체로 인정하더라도 일개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는다고 짐작되는데《사기》의
사마천등 후대의 중국인 역사가들은 자기 시대의 왕조상을 수천년 전의 하대에 투사하여
방대한 규모의 영토를 가진 국가인양 묘사했는데 그후 상, 주 등 중원의 '왕조' 들도 수많은
성읍 국가군으로 구성된 중원 국제 사회의 대표적 성읍 국가에 지나지 않았기 때문 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왕이라 하면 무소불위의 권력을 가진 존재로 생각하나 왕이 가지는 권력은 시간
과 공간에 따라 다르니 당시 중국에는 상나라를 섬기는 성읍국가와 상나라를 섬기지 않는
수많은 이민족들이 공존했으며 이들이 어느 지점을 경계로 나눠진 것도 아니니 이민족
사이에 상나라 성읍이 있기도 하며 상나라 성읍 사이에 이민족 부락이 존재하기도 했습니다.
이는 주나라 때도 마찬가지였으나 상, 주의 영향권은 시간이 지날수록 커졌으니 상 초기
보다는 후기에, 상 후기보다는 주 초기에, 주 초기보다는 후기에 더 많은 성읍들이
복종해 왔으며 시간이 갈수록 이민족은 토벌되거나 동화되어 사라졌으니 결국 한나라
시대가 되면.... 파촉, 형남, 강남등지에서야 이민족을 찾을수 있을 정도로 동화되었습니다.
영토국가가 아니라 성읍국가 간 네트워크였던 데에는 정치체제의 발전이 덜 되었던 것도 이유지만
더 큰 이유는 기후인데 황하 주변 지역이 밀림이었으니 몇몇 거점을 중심으로 살았던 것이고
기후변화와 전쟁으로 인해 황하 유역은 평지가 되고 교통이 발달했으며 거대한 국가가 등장하게
되었으나 장강 유역에는 밀림이 많아 인구 밀도가 낮고 그 밖으로는 이민족들이 여전히 많았습니다.
중국 학계에서는 이리두 문화를 하나라 유적으로 추정하나 확실한 정체는 드러나지 않았는데
상나라 이전에도 중원에는 여러 성읍국가들이 병존했고, 하나라가 실존했더라도 그 중
에서 가장 강한 성읍 또는 부족일 뿐이었으니 현대인들은 하나라가 망하고 상나라가 건국
되었으며 주나라가 상나라를 정벌하고 세워졌다고 생각하지만 실제로는 이와 다르다고 봅니다.
중국 청동기 시대는 아직 후대의 진, 한과 같은 중앙집권국가는 등장하지 않았으니 하→상→주 교체는
가장 강한 성읍 또는 집단의 교체일 뿐 전 왕조가 외부의 침입으로 망하고 새 왕조가 들어선 것이
아니고 고대 그리스에서 아테네와 스파르타의 패권 경쟁 즉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후로 패권이 아테네
에서 스파르타로 넘어간 것처럼 명조대전과 목야대전 전후로 패권이 하→상, 상→주로 넘어간 것입니다.
또 패권이 스파르타에 넘어갔다고 아테네가 멸망한 것은 아닌 것과 비슷한 맥락으로 하, 상이
패권을 잃었다고 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었으니.... 패권을 쥔 성읍은 하→상→주
순으로 바뀌었지만, 기타 여러 성읍의 지배계층과 주민들은 큰 변화 없이 유지되었다고 봅니다.
갑골문에는 탕왕을 칭송하는 내용은 많이 보이지만 하왕조 같은 적을 물리쳤다는 언급은 없으며 갑골문
에서 夏(하) 라는 글자는 보이지 않고, 갑골문에서는 1년을 춘하추동이 아니라 춘추로만 구별했으며
또한 후기 하나라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와 초기 상나라 문화로 추정되는 문화가 연속적이라는
측면에서 하-상의 교체는 상-주의 교체와 달리...... 지배층 내부의 계승분쟁이라 보는 학자도 있습니다.
반면 상과 주의 관계는 성격이 다르니 위치가 낙수, 황하, 제수 사이로 비슷한 하-상과 달리 주의
근거지는 관중지방이고 또 주나라가 승리한 후 산동 지역에 친척을 분봉하고 강족을 이주
시켜 토착 세력을 통제하려고 했으며 문화 면에서도 제사 대상은 제→천으로 바뀌고 점을
치는 방법은 동물뼈→나뭇가지로 변화했는데 문화가 큰 변화가 없는 하-상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사기, 시경 등의 기록에 의하면 주나라는 고공단보 대에 융적을 피해서 기산 아래에 정착
했는데 그후 서방에서 인심을 얻으며 세력이 점차 성장하고 초기에는 상나라와
대립했으나 점차 상나라의 패권을 인정하는 쪽으로 가게 된다. 하지만 상나라는
주나라 근거지 기산, 풍경, 호경이 있는 관중 지방은 상나라의 영향력이 약한 지역입니다.
주나라의 세력도 강력했기 때문에 상나라의 복사를 보면 주나라를 정벌할까요? 같은 기록이
나올 정도로 주나라를 경계했는데 주문왕의 아버지 계력이 상왕 문정에게 감금되어
죽었다는 기록이 있고 주문왕이 상나라 왕을 만나러 갔다는 기록도 있는데, 상나라
는 주나라를..... 일단 지금은 고개를 숙이고 있지만 언제 반격할지모른다고 여긴 것 같습니다.
전통적으로 주나라 희성은 강성이랑 통혼하는 관계였으니 고공단보의 아내 이자
계력의 어머니는 태강이었고 주무왕의 아내는 읍강이었으며 훗날 주유왕이
포사를 총애하면서 내친 신나라 출신 왕비 또한 신나라가 강성 제후이기 때문에
강성인데 주나라 세력이 강해지면서 다른 성이랑 통혼하는 경우도 생기게 됩니다.
주문왕의 어머니는 임(任)성, 아내는 사(姒)성이었으니 주역의 효사를 보면 상나라
주왕의 아버지 제을이 주문왕에게 딸을 시집보내는 내용이 있는데 이는
상나라가 주나라와 결혼동맹을 맺어야 할 정도로 주나라의 세력이 성장했다
는 것이니.... 제신이 문왕을 유리에 감금한 것도 주나라 견제의 일환으로 보입니다.
상왕 문정이 계력을 감금해 죽였지만 계력의 아들인 서백 창 즉 주문왕 대가 되면 상나라의 근거지와
가까운 우,예,숭 등을 정벌할 정도로 세력이 강해지자 제신이 서백을 유리에 감금하면서 견제는
했지만 결국 서백 창의 아들 주무왕 대에 주나라를 수장으로 강(羌), 용(庸), 촉(蜀), 무(髳),
노(盧), 팽(彭), 복(濮) 등 서쪽 국가들이 연합해 목야에서 상나라 군대를 격파하고 패권을 쟁취합니다.
주나라가 패권을 쟁취하긴 했지만 상나라 유민의 세력은 여전히 강했으니 제후국을 세우게 했는데
문화 면에서 주나라와 상나라는 큰 차이가 없었으니 고공단보 시절이면 몰라도 상나라와
전쟁을 한 주무왕 시절의 유물을 보면 상나라와 대동소이하니 꾸준히 상나라와 교류하면서
문화도 발전한 것으로 보이는데 주나라 또한 상나라 처럼 동물 뼈로 점을 친 흔적이
있으니..... 민족의 기원은 달랐을수 있어도 상주교체기 무렵에는 문화가 비슷해진 모양 입니다.
상대를 특징짓는 것은 도철문이 아로새겨진 청동기이니 상나라는 청동기 문명권이었음을 알 수 있는데
조형 수준도 뛰어나지만, 도철문의 형태나 크기, 위협적인 형태의 장식이 상, 주 이후의 중국 왕조
문화와는 다른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니 남아메리카 고대 문명의 모습을 연상케 할 정도이며 상나라
시대의 청동기는 종류까지 자유분방해서 고고학자들이 하나하나 특징을 잡고 명칭을 붙이기 어렵습니다.
당시 청동기를 만드는 기술은 주나라 이후처럼 대량생산하기는 어려웠던 모양인지 청동기들은
주로 제사에 쓰였는데 주나라 시대로 가면 장식이 다소 간략해져서 이전 시대보다도 오히려
청동기 주조기술이 퇴보한 것처럼 보이지만...... 이는 단순히 주조기술이 후퇴해서가 아니라
청동기가 단순 제사용에서 확장되어 귀족의 기념물에 이르렀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 있습니다.
주나라 청동기는 문양이 화려하지 않은 대신 유물의 주인이 주 왕실로 부터 받은 은사나 선조의 공덕,
자기 자랑을 구구절절하게 새겼음이 특징이니 사료적 가치는 주나라 것이 더 높은데 고도로 발전한
청동기 기술에 비해 상나라의 건축 기술은 그다지 발달하지 못했으니 기와가 발명되지 않아 자주
지붕을 갈아야 함은 둘째 치고.... 한번 지은 건물의 공학적 내구도가 낮아 자주 새로 지어야 했습니다.
건물이 붕괴되는 일도 잦아서 건물을 짓기전 인간 제물을 땅에 묻어 건물이 튼튼해지기를 기원하였으니
이런 풍습은 지진으로 건물이 자주 무너지던 일본이나, 아프리카나 아메리카 원시문명에도 있던
풍습으로, 이 때문에 상대의 건축물 기둥 유적 아래에서 사람의 해골이 대량으로 나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 시대에 상족이 숭배하였던 신은 제(帝)였으니 제는 조상신으로서 그들은 왕이 죽으면 제(帝)가 된다고
믿었으니 인간을 신적 존재로 받드는 고대 신정국가였으며 왕은 제와 소통할수 있는 유일한 제사장
으로 제에 대한 숭배 의식을 주도했는데 제는 혈통적 의미가 있기 때문에, 같은 제를 숭배하는 씨족
끼리 연합하여 한 국가를 이루었으니 이를 통해 상나라가 씨족들이 모인 도시국가였음을 알수 있습니다.
정사일에 점을 치는데 장차 불로 지내는 제사를 하(河, 황하)에 지내려는데, 우리에서
기른 소와 첩을 강물에 빠뜨릴까? (丁巳卜:其燎于河, 牢沈妾?)《갑골문합집》
병술일에 점을 치며 정인 대가 묻는다. 특정 사안을 고하며 포로를 바치는 제사를 하(河)에
지낼 때 불로 지내는 제사를 지내려 하는데, 소 세 마리를 황하에 빠뜨릴까?
(丙戌卜, 大貞: 告執于河燎, 沈三牛?)《갑골문합집》
갑자일에 점을 치면서 묻는다. 여자를 제물로 바치는 제사에 주술사(巫)를 쓸까?
(甲子卜,㱿貞:妥以巫)《갑골문합집》 5658 묻는다. 오늘 병술일에 재라는
주술사를 불로 태우면 큰 비가 있을까?(貞: 今丙戌燎ㅁ,[22] 有從雨?)《갑골문합집》77
성을 쌓으면서 제물을 바치려는 상나라 사람들의 모습. 갑주를 입은 사람은
귀족 무사이고 뒤쪽의 도끼를 든 사람은 제물로 바칠 사람의
목을 치는 부월수다. 머리를 풀고 윗옷이 벗겨진 남자는 제물로 잡혀온 이(夷)족.
실제로 인신 공양의 제물로는 동쪽의 이(夷)족과 양을 치는 유목민들인 강(羌)족이 주된
희생양이었으니 동이(東夷) 란 명칭은 상나라가 자기들보다 동쪽인 산동성 지역에
있던 이민족들을 부르던 말에서 유래했는데, 상나라는 동이들을 상대로 대대적인 전쟁
을 벌이며 진출했다가... 서쪽의 주나라와 그 연합 세력들의 공격으로 멸망했다고 합니다.
상나라는 훗날 멕시코의 아즈텍 왕국과 마찬가지로 인신공양을 행했는데 그 내용과 방법
은 갑골문에 자주 나오며, 이와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유골 역시 다량으로 출토되고
있기 때문에 이것은 단순히 설이 아니라 고고학적으로 확인된 사실이며 또 갑골문의
기록을 볼 때 농사가 안 되거나 천재지변이 벌어지면 주술사를 제물로 썼다고 합니다.
인신공양은 주로 노예나 강족과 같은 다른 민족의 포로를 잡아다가 죽여서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형식으로 했다고 하는데 물론 적당한 제물이 없으면 자국민
이라도 봐주는 건 없었으니 이렇게 제사로 쓸 인간을 죽이는 방법이 12가지나
되었으니....... 십이지의 하나인 묘(卯) 자가 형벌의 한 종류로 쓰이기도 했습니다.
한자의 모양에서 짐작이 가겠지만 제물로 삼기 위해 세로로 두토막을 내는 방법으로
소나 돼지 같은 동물을 정형할 때 모습을 상상하면 될 것이니 갑골문 기록
중에 '사로잡은 적국의 고위 여성을 이렇게 죽일까?' 하고 점치는 기록이
있으니....... 한자 피 혈(血) 역시 그 형상이 제기(皿)에 담긴 사람의 피를 나타냅니다.
사마천의 《사기》에 은 주왕 제신이 포락지형 같은 혹형을 만들었다고 했는데, 이는 《사기》의 기록이
잘못된 것이니 제신의 대에 들어서 포악한 방법을 채택한 게 아니라, 원래부터 상나라가 잔악
무도한 짓을 많이 했으니 오히려 갑골문의 기록을 보면 제신은 어느 정도 인신공양을 줄이려고
했는데, 상나라의 잔학한 풍속이 제신의 전설로 변형되어 《사기》에 기록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포락 정도의 혹형은 고고학과 갑골문을 통해 밝혀진 상나라의 많은 잔악한 짓들의 일람에서 극히
일부에 불과한데 이렇게 인신공양에 처해지는 노예는 눈을 멀게 하고 무릎 꿇린 뒤 밧줄로
묶었으니 백성을 뜻하는 민(民)은 원래 툭하면 제물로 바치던 노예를 뜻하던 문자였는데
상형 문자로 눈(目)을 상처내어 멀게 하는 모양을 뜻한다고 하니 즉 민(民)의 기원은 매우
잔인했으며 춘추전국시대만 하더라도 인(人)은 지배층만을 향해 말하는 개념이었다고 합니다.
순장도 공공연히 벌어졌는데, 그냥 묻는 게 아니라 머리를 잘라버리고 묻었는데 이 잘린
머리들은 골기 공장(뼈 공장)으로 보내져 골기(뼈 그릇)를 만드는 데 쓰였으니 이곳
에서 출토된 두개골들은 윗부분이 톱 같은 도구로 잘려나간 흔적이 남아 있으며....
게다가 인신공양 제사의 흔적으로, 발굴된 청동 솥 안에 삶긴 사람 머리가 있었습니다.
상나라가 멸망한 주요한 원인 중에는 아즈텍 제국과 마찬가지로 이런 잔혹한 인신공양
에 질릴대로 질린 주변 민족들이 모두 주나라 편을 들었던 것으로 보이는데 주나라는
상나라에 비해서 잔인성이 약해졌지만, 인신공양이나 순장 등의 악습이 완전히 없어
지지는 않았으니 춘추전국시대에도 유가의 집중적인 비난을 받는 가운데 이따금
보이다가 통일 진나라에서 대체로 사라지고...... 청나라 중기에서야 완전히 사라집니다.
도시 국가 집단 + 주변의 이민족들 + 대규모 인신 공양이라는 특징을 놓고 볼때 역사
속에서 상나라와 가장 닮은 문명은 신 대륙에 위치한 아즈텍이니 당시 기록에는
상나라의 식인 행위도 자주 사료에 나오는데, 이 또한 아즈텍과 비슷하며 또한 상나라
가 있던 시절에는 중국 대륙에 슾지가 있는 밀림 지역이 많았다고 보는 시각도 있습니다.
하지만 고대 중국에서 기록에 나오는 식인은 아즈텍과 달리 사회 전반적으로 만연할 정도는
아니었으니 주 문왕의 사례 및 춘추전국시대에 나오는 식인 일화는, 당대 서술에도
극악한 죄라고 낙인 찍힌 친지를 요리해 짐승 고기라고 속이고 먹임으로서 씻을 수 없는
죄의식과 굴욕을 느끼게 하는 패륜이었지 제도적이고 일상적인 것과는 거리가 멀었습니다.
춘추시대 공자는 식인이 아닌 순장 대용 인형인 용(俑)을 보고 "이걸 발명한 사람은 대가 끊어지리라!"
라며 저주를 퍼부었는데 실제 사람이 아닌 흙으로 빚은 '인형'이었지만 공자는 진짜 인신공양
은 말할 것도 없고 사람 비슷한 물건으로 대리만족하려는 시도마저도 극히 비도덕적인 행위로 간주
한 것이니.... 고대 중국에서도 사람의 생명을 희생시키는 짓을 꽤나 부정적으로 봤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에 반에 아즈텍은 인육 자체가 사회적 금기로 치부되기는커녕 적극적으로 권장되었으니
구대륙 대부분의 문화권에서는 식인은 단발성 소규모라도 상상조차 하기 힘든 게
보통이지만 아즈텍은 전쟁조차도 살해가 목적이 아닌 생포해서 먹는 방향으로
무기와 전술 자체가 기형적으로 변이될 만큼....... 인육이 군사, 사회, 정치를 잠식했습니다.
이 방식은 훗날 에르난 코르테스와의 전쟁 당시 이들에게 지장이 되었을 정도니 살상 목적이
아니라 잡아가서 먹으려고 생포하기 위한 전투를 하니 무기도 날카롭지 않고 적당히
상처를 입히는 식으로 발달했는데, 코르테스와 스페인 용병들은 당연히 그 자리에서
살해할 목적으로 최대한 위력이 강한 무기들을 들고 있었으니 상대가 될 턱이 없었습니다.
의식이나 국가 행사는 황하 문화권은 대중의 참여보다 귀족이나 주술사등 제의 당사자의 복잡한 예식과,
딱딱하고 엄숙한 분위기에 덜 자극적인 생매장과 수몰을 선호한 반면에 아즈텍 제국에서는 축제를
벌이며 사방에서 군중이 지켜보는 가운데, 도시 중심부의 높은 제단에 희생자를 눕힌후 배나 가슴을
가르는 모습을 보며 군중이 환호하는 퍼포먼스가 하이라이트였던 대중적인 오락거리였던 점이 다릅니다.
흥미롭게도 고대 크레타 문명 또한 주변 국가들에게서 유력자들의 어린 자식들을 제물
로 받아서 잡아먹는 식인 문화가 있었는데....... 고대 강국들이 약소국들을 상대로
우월감을 과시하기 위해 식인 행위를 한 것은 심심치 않게 그 사례를 찾을 수 있습니다.
인신공양 외에도 아즈텍과의 공통점이라면 그들 스스로를 칭하는 명칭과 외부 민족들이 칭하는 명칭이
각기 달랐다는 점이니 스스로 메시카(Mēxihcah) 라고 부르던 사람들이 이방인들에게서 아즈텍이라
불렸고, 상 또한 주변 민족에 의해 은이라고 불렸던 점이 유사한데, 이 메시카가 멕시코의 어원 입니다.
상나라를 다룬 창작물 중에서 유명한건 고전소설 《봉신연의》일 것인데, 오덕계에서도 《봉신연의
(만화)》 덕분에 은나라가 친숙한 소재이며...... 코에이의 게임 배틀 봉신 시리즈도 《봉신연의》
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며 《요괴소년 호야》에서는 상나라가 망한 이유가 백면인 때문이라고 합니다.
첫댓글 갑골문자로 유명한 상나라역사군요. 우리한테는 은나라가 더 다가옵니다.
상나라..... 감골문자로 유명하지요?
저게 발전해서 훗날 한자가 되었다는.....
@바이칼3 아 그렇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