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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영동 양강에서 만난 옛 정미소
하룻밤을 영동읍 동생네집에서 묵었다.
작년 은퇴한 제수씨는 올해 한해 작은 밭에 심은 불루베리 농사를 지어 보느라 바빳다며
아침 일찍 나서는 내차에 한 상자 먹을 것을 넣어준다 .
과수원에 농약을 주지 않아 모여드는 것은 지렁이고 지렁이가 많아지자 두더지 두어마리가 땅을 훼집어 골치라고 한다.
두더지가 생기자 뱀들까지 출현하여 먹이 사슬을 보는 현상 같다고 .
제수씨는 내년부터 다시 일을 해야 겠다고 한다.
나중에 집에와서 풀러보니 냉동 불루베리 ,영동 사과(사과는 유명한 곳이 아니나 당도가 높다),고향 큰집에서 따와 건조중인 반시,말린 감,그라고 올라가며 먹으라고한 단감과 사과가 럭앤럭 통에가득했다.
바로 밑의 동생과는 5살차.
어머니께서는 동생과 나사이에 중간에 유산을 하여 터울이 진다는 얘기를 어렴풋이 들은 적이 있다.
동생도 내년이면 정년이다.
두 여조카중 하나는 서울에서 간호사로 일하고 있고 막내조카는 약학 대학원 5년차 재학중이다.
할머니 묘소 가는 길(호탄리)
할아버지께서는 첫째 할머니와 혼인후 사별하고 두번째 할머니와도 혼인후 사별하셨다.
세번째로 시집온 분이 우리 할머니시다.
위로 두분은 자식이 없었다.
지혜로우신 할아버지께서는 첫째 할머니에게 정도 많았겠지만 함께 묻혀야 후손들이 찾아와 자식없는 할머니가 덜 외로우실 것이란 생각에 첫째 할머니 옆에 묻어 달라 유언하셨다 하신다.
살아계신 할머니 생각은 아니하시고.
이북 압록강 주변의 주택을 연상케하는 호탄 부근의 마을.
대부분 빈집이다.
영동 양강
영동은 감나무가 유난히 많은 곳이다.
단감은 경상도가 유명하나 한때는 황간과 더불어 감으로 유명세를 지녔던 영동이다.
대부분 재래종으로 감이 작다.
영동은 근교 학산과 함께 포도로 유명한 고장이다.
지금은 불루베리 키우는 농가가 많아 진다고 한다.
나무 끝에 매달려 발그스레 익어가는 홍시의 빛갈이 곱다.
고향 가는 길-양산면 외마포
양산강
상류로는 장수에서 발원하여 무주를 거쳐, 심천을 지나 금강으로 흘러들어 간다.
멀리 보이는 산이 비봉산으로 산 아래 동네가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다.
조상 선대가 400년을 살아온 나의 고향.
우리말로는 각골(가곡리)로 불리웠던 곳으로 우리 집안을 타지 사람들은 "각골 이씨'라 칭했다.
강가에 자리한 송호리 (松湖里)
옛부터 소나무가 많고 강물이 맑아 송호리라 부른다.
한여름이 지나고 텐트 구획을 정했던 줄들이 남아 있고 가을도 지나 모든 식당도 모텔도 문을 닫았다.
어린시절 방학때 큰집에 놀러와 사촌들과 강에 나가 멱을 감던 곳이다.
멀리 우측에 보이는 곳이 봉곡리 "강선대"다.
강엔 일찍 날아온 철새들의 세상이다.
수영장
선녀가 내려와 춤을 추었다는곳-강선대에서 내려본 양산강.
멀리 비봉산이 보이고 강을 따라 서쪽 방향으로 가면 인삼으로 유명한 금산에 이른다.
단양 팔경을 이르듯 양산에도 팔경이 있다.
*<강선대>가 그중 하나다.
*영동군 양산면 봉곡리
물은 생명의원천이다.
강물과 계곡은 언제나 마음에 평안을 준다.
충북 영동군 양산면 가곡리
이곳이 호적에는 나의 출생지로 되어있다.
사실은 영동읍 계산동에서 출생한 것을 아버님이 이곳으로 출생신고를 하셔서 그리된 일이다.
400년전 합천에 사시던 할아버지께서 한양으로 과거시험 보러가던 길 ,피곤하던차에 정자에 쉬고 계셨다 한다.
이곳에 사시던 최씨 할아버지께서 낮잠을 주무시다가 동구밖 정자 기둥에 용이 감겨 있는 꿈을 꾸고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한다.
머슴을 시켜 보내보니 웬총각이 있어 데려다 자초지종을 들어보고 과거를 보고 내려온 합천 할아버지를 정혼을 하여 무남독녀의 사위로 삼았다.
( 과거에 급제하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고려왕조시 인주이씨(소송이씨,경원이씨라고도 부름)는 " 이자겸(인주이씨)의 난"이후 몰락한 조상들은 전국으로 흩어졌다.
일부에선 변성 (變姓)까지 할 정도로 삶은 고단했다.
유배를 당하고 나중에 어린 왕을 보호, 섭정했던 외할아버지(이자겸))의 공을 생각하여 사후 복권시켰지만 단지 역사의 한순간일 뿐이다.
지금은 인천이씨들은 합천,함양,장흥,파주 ,인천,영동,보은 등에 흩어져 살며 영동은 합천 할아버지의 이동으로 인천이씨의 일가를 이루었다.(옛 본관 대신 현재 지명인 인천으로 사용한다)
지금도 최씨 할아버지,할머니 묘소는 나의 할머니 산소부근에 자리하여 문중에서 일년에 한번 제사를 지낸다
고향에는 개천을 복개하고 아스팔트로 포장까지 하였다.
사진: 아버지에게 제금을 내준집
천석꾼인 할아버지의 6형제중 네째인 아버지께서는 19살(1934년경)에 장가들어 할아버지댁에 사시다 1935-6년경 제금난 집이 이집이다.
아버지가 19세,어머님이 16세에 혼인을 하셨다.
당시 시골에는 드문 양철집으로 모두 우물물을 길어다 먹던 시절 처음 마당에 펌프를 설치하여 내가 초등학교 시절 빈집에 왔을 때도 물이 나왔다.
아마 1960년대 중반이었나 시골에 가 살 이유도 없고 발갛게 녹쓸어가던 함석지붕의 집을 아버님께서 우리와 상의후 파시고 말았다.
아버님이 얼마나 서운해 하셨을까 나이가 들어서야 짐작이 간다.
부엌과 안방과 건너방 그리고 대청에 해당되는 마루와 사랑방이 붙어 있다.
지금은 누가 사는지 반듯하게 지은 집에 개량 기와를 얹었고 처마를 길게 내었다.
이 집에서 부모님이 사신 기간은 잠시, 아버지께서 영동에 근무하시면서 영동 읍내에 살았다.
영동읍 계산동 600번지로 어렴풋이 기억한다.
축사로 사용하던 이자리엔 행랑채 초가집이 한채 있었다.
부엌과 방하나인 집으로 황토뜨럭을 올라서면 댓돌위로 사람하나 겨우 기어들어갈만한 작은 문이 있는 초가집이 있었다.
방문을 열면 토굴같은 방너머 서쪽으로 작은 손바닥만한 창이 있었다.
60년대 매입후 부수고 축사를 만든 모양이다..
당시 " 광"이라 부르던 목재로 지은 창고에 들어서면 어린 내코에 퀘퀘한 곰팡이 냄새가 났다.
그 묘한 냄새가 좋아 자주 들어가보곤 했다.
창고 아래엔 마을 공동으로 사용하는 우물이 있었다.
뿌연빛 물로 식수로는 부적합해 빨래물로만 사용했다고 한다.
오래된 느티나무가 있던 곳.
공무원이 셨던 아버님이 큰 아버님과 부산으로 피난가 계신 시절,우리는 영동읍내에서 40리길을 걸어 이곳으로 피난을 왔다 한다.
한국 전쟁이 발발 하자 아버님께서는 (당시35세) 어머니와 와 형제들 (형,누나 ,나)을 두고 할머니를 모시고 큰 집 식구들과 피난을 가셨다.
엄마등에 업힌 세살(2년반)였던 나는 아버지에게 손을 흔들었다는데 기억이 없다.
사진 아래로 보이는 집이 둘째 작은 아버지 집이다.
작은 아버지는 할아버지가 돌아가신후 받으신 유산을 팔아 일본 와세다 대학을 나와 한국은행의 전신인 조선은행에 일하신 적이 있다.
28세에 일찍 작고 하셨는데 사촌들 3남매를 두었다.
큰 사촌형은 서울대 의대를 나와 해군병원을 거쳐 충북의료원장을 하다 개업후 작고 하셨다.
둘째인 누님은 하와이에 살고 계신다.
셋째인 사촌형은 UN WHO에 근무후 은퇴하여 오스트리아에 살고 있다.
세상이 좁아 필립핀 마닐라 Citicorp에서 연수 받을 때 마닐라에서 만났고 캐나다에 살 때는 형이 뉴욕에 근무해 맨하튼에서 형과 형수를 만난적이 있다.
피난 시절 고향에서 딱 세가지를 기억한다.
그중 한가지가 혼자서 걸어 사진의 집인 작은 집에 들엿을 때 마침 작은 어머니와 웬 여자아이가 점심으로 닭고기를 먹고 있었다.
닭고기를 먹고 싶었으나 그냥 있기가 뭐해 어린 마음에 되돌아오고 말았다.
생각해보면 그 여자 아이는 하와이에 살고 있어 캐나다 에서 귀국길에 만난 사촌 누님이다.
어린조카 (세살)입에 닭고기 한점 넣어 줄만한 어려운 피난 시절이다.
그 때의서운했던 심정을 이야기하면 동생은 '형, 내가 통닭 몇마리 사줄께 '하곤 했다.
나중에 쇠약해지신 작은 어머님이 대전으로, 수원으로 양노원을 옮기실 때마다 안사람과 찾아 뵈었다.
돌아가시기전 내가 꼭 하고 싶었던 닭고기 얘기를 듣지 못하고 90이 넘어 돌아가셨다.
무너져버릴것 같은 집.
집안으로 촌수로는 멀다.
무너져갈 것 같은 집지붕에 현대식 기와를 얹었다.
나중에 들은 이야기로 아주머니뻘인 장녀가 했다고 한다.
일찍 서울로 올라간 이집 자손들로 장남은 토론토 영사로 근무했는데 근무당시는 서로가 몰랐다.
항열을 생각하면 혹시 궁금해 서로 물어볼 수도 있었는데 예의상 묻지 않았다.
나중에 귀국해서 종친회에서 동생을 우연히 만나 알게된 사실이다.
큰 딸은 인사동에서 화랑을 했고 밑의 동생들은 외교관 ,성대 교수를 지냈다.
동네길을 걸어보기로 했다.
조금 남아있는 옛모습을 보며 이제 가슴이 저릴만한 시기가 지났음을 실감한다.
아버님이 많이 지나다셨음직한 길이다.
고향의 들과 산과 강을 내려다 보는 산이 비로봉이다.
큰집에서 보면 북쪽에 자리한 작은 할아버지를 남산 할아버지라고 불렀는데 오래전 북쪽 마을에 살다 남쪽으로 이사후 습관적으로 남산으로 부른 모양이다.
옛부터 수리조합이 잘 발달되어 물이 마르지않던 문전 옥답이 저 너른 들판이다.
지금은 모두 밭으로 변해 특용작물을 심는 비닐 하우스가 가득찼다.
한때 댐 공사 계획이 있어 이곳 들판이 모두 물속에 잠길 뻔했다.
수백년된 보호수
감나무 과수원.
조성한지 오래되지 않아 작은 감나무엔 따지 않은 작은 감들이 남아있다.
손에 닿아 따먹은 홍시가 무척이나 달다
변약국으로 부르던 곳으로 오래동안 이자리를 지켜왔다.
경옥고를 만들어 유명한 곳이다.
남산 작은 할아버지집.
한옥이나 일본식집처럼 덧유리창을 내어 한옥의 단점을 보완한 집이다.
할아버지에게 한분밖에 없는 동생이셨다.
방학때 놀러가면 많은 당고모들로 시끌버끌했다
나보다 나이가 두어살 어린 막내 당고모는 아무개 조카하며 열댓살 많은 조카들(형님들)이름을 마구부르며 재미있어 했다.
막내 당숙이 이집을 팔기까지 당고모가 어린 손녀를 데리고 살아 15년전에만해도 고향을 찾으며 들려보던 곳이다.
이제 남의 손에 넘어간 집이다.
왼편으로 단감나무하나가 있었고 우물이 있었다.
여름방학에 놀러가 뒤안으로 가면 "보리똥"나무가 있어 뜹뜰하며 달콤한 열매를 따먹곤했다.
뒤담 넘어엔 과수원이 있었고 당숙이 뒷집 변약국에 땅을 매각한뒤엔 과수원 대신 변약국 주차장과 경옥고 공장이 들어섰다.
집도지(땅이 없는 분에게 집을 지어 살게하고 일년에 보통 벼 두가마 정도를 받는다)를 주었던 옆집에서 본 작은 할아버지집
재실(齋室)이 어떻게 되었나 들여다 보았다.
10월 초하루 문중에서 제를 지난다는 데 자손들이 전부떠나 9촌 아저씨마저 돌아가시면 누가 이어갈런지
기와를 갈아 무너지지않아 다행이었다.
시골에 귀농 컨설턴트가 있다는 건 매우 다행스럽다.
오랫만에 본 아주까리.
옛날엔 집집마다 한두그루 심던 아주까리가 이제 보기 힘들다.
비봉산 오르는 제1등산로다
경사가 심한 산이다.
정상에 올라가 보려 했던 곳으로 힘이들어 전망대 정자가 있는 곳까지 올라가 보았다.
목표는 정상에서 아버지가 살았던 산하를 내려다 보는 것이었는데 다음에 기회를 만들어 보아야겠다.
다시 온길을 되돌아 오자 옛 우리집이었던 파란 지붕을한 집이 보인다.
집안 에서 보통 부르기를 "비석밭'이라 부르는 곳이다.
비석이 있어 그렇게 부른다.
어린 시절 이곳에 오면 이곳을 관리하던 산지기 집이 남아있었다.
고조할아버지께서 혼인후 제금 날때 쌀 한되 보리 한되와 됫박에 수저 두벌 꼿아 주었다던가
증조부代에 하루 두끼에 근검절약하며 살았고 그을음이 오르는 메케한 목화 기름등잔 밑에서 일을 하신 증조 할머니
목화밭을 일구시고 당시 금값과 맞먹던 인삼 농사를 지으시면서 부를 축적하여 할아버지에 이르러서는 천석꾼이 되었다.
장투가리를 숫갈로 긁고 물 한모금 마시며 허기를 달래며 밤에도 일하시며 근검절약으로 집안을 일으킨 증조 할머니는 집안의 전설이 되었다.
초등학교 6학년때부터 마름들과 소작인들에게 도지를 받는 것을 배워온 아버지 말씀으로 정확히 쌀 1,800석(벼 3600석)이었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경성 덕수궁 조경공사를 했다는 정원사를 불러 목화밭 일대를 정원을 꾸민다.
목화밭을 정원으로 만들어 부모님,조부모(내겐 증조부모 ,고조부모)들을 추억하고자 하셨다.
공원안에는 무주에서 돌을 운반하는 동안 소달구지가 세번이나 부서져 나갈정도의 무거운 돌로 비석을 세웠다.
비석에 새겨진 내용은 자세히 모르겠으나 조상의 업적과 효행을 기리는 비슷한 것이다.
정원을 조성하며 연못을 대.중,소 세개나 만들었고 화단에 각종 꽃을 심었다.
어머님이 동서들(큰어머니,작은 어머니들)과 이곳 정원에서 찍은 사진만 보면 그땐 외지인들도 이곳에서 모임을 가질 정도였다.
큰 연못은 동네 처녀가 물에 빠져 죽은 후 큰아버지께서 메워버리고 말았다.
비석밭은 탱자나무울타리로 되어있어 접근이 어렵고 문은 잠겨있다.
잡초가 우거져 접근하기가 곤란하여 뒷길로 올라가 터진 울타리로 들어가 보았다.
작은 언덕길을 오르자 아버님이 신혼시절 지내시던 집이 눈아래보인다.
양철 지붕이 기와로 바뀌고 지붕을 덧내어 옛모습 그대로다.
왼편 솔밭이 우리가 비석밭이라 부르는 끝자락이다.
저곳을 넘으면" 의희 큰집"이라 부르는 동네로 종손집안이 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한번도 고개넘어 가본적이 없다
윗 산언덕으로 누가 오래전 작은 과수들을 심더니 지금은 크게 자랐다.
아들과 며느리를 데리고 10여년전 이곳에 데려온적이 있다.
서울에서 자란 며느리는 처음으로 감을 따보며 즐거워했다.
할아버지께서 생뚱맞은 장소에 기이한 형태의 돌을 쌓아 놓으셨다.
영모대(永慕臺)-조상을 ,특히 부모님을 그리워한다는 뜻이 강하다.
할아버지의 함자(李羲然)가 새겨져있다.
두번째 큰 연못
큰 비석이 있던 곳은 원래 담으로 둘러쌓여 있어 담이 무너진후 큰아버님께서 철책을 둘러 놓았다.
안의 작은 비석들은 송덕비로 지금의 감사패와 비슷하다
흉년이나 가뭄이 들었을시 소작료를 감면혹은 면제하여드린데 대해 감사의 표시로 세운 것이다.
후일 길에서 남의 발에 채여 욕이 될까봐 모아서 이곳에 두었다.
할아버지께서는 흉년이 들면 사랑채에 걸린 가마솥에 잡곡밥을 하여 밥을 얻으러 오는 사람들에게 한사발씩 주어 구휼하셨다고 한다.
그들은 밥을 먹지 않고 집으로 가져가 다시 다른 산채를 넣어 죽을쑤어 가족들과 함께 먹었다고 한다.
할아버지 엄명으로 어디서 오신 분인지 묻지 말라고 했다는데 그중엔 양반 자손들도 있음을 배려해서였다고 한다.
흉년엔 할아버지께서는 너희들도 먹어야 한다며 꺼끄러운 잡곡밥을 강제로 먹게하였다는데 아버님께서 나중에 부엌뒤에서 할머니가 주신 흰 쌀밥에 참기름을 넣어 비벼 먹다 할아버지에게 들켜 아주 혼난적이 있다고 직접 들은 적이 있다.
할아버지 당신도 비단옷을 입지 않고 아버지 세대에게 비단 옷을 입히지 않았고 여름엔 참외도 한개 이상 못먹게 하셨다는 할아버지.
그래도 보릿고개에는 할아버지께서는 가난한 집안 일가들과 동네 사람들 식솔수대로 양식을 보내곤 하셨다고 한다.
비석이 있는 곳엔 잡목이 우거져 접근이 어렵다.
교장으로 은퇴한 사촌형이 관리에 손을 놓고 있는 동안 순식간에 잡목으로 뒤덥혔다.
82세의 연로한 사촌형에게 이제 무얼 기대한다는 건 무리다.
14-5년전 아내와 몇번 이곳을 오며 톱과 사다리를 가지고와 잘라주고 했으나 역부족이다.
이제 이곳에 대한 기억만 가지고 떠나야 한다.
마침 면사무소에서 10년 계약조건으로 마을 휴식 공원으로 만들고자 예산까지 받아 사촌형과 접촉하였으나 사촌형은 고심끝에 거절했다고 한다.
황폐화된 정원.
피난 시절 저 아래 큰 소나무중 하나를 끌어 안고 저공으로 날아오던 미국 전투기 굉음에 놀라 울던 내모습이 보인다.
피난 시절 기억하는 세가지 기억중 두번째다.
수령조차 알 수없는 느티나무
왼편 축대위로 오른 편 느티나무와 쌍둥이 같은 나무가 있었다
웬일인지 휑하여 이상하더니 서울 나무장사에게 1,500만원을 받고 문중에서 팔았다고 한다.
느티나무 뿌리는 가구에서 소위" 용목"으로 불리우며 사용한다
나무의 뿌리 부분은 용의 형상을 한 것 처럼 문양을 이루어 옛 가구-반닫이 ,농문짝에 많이 사용했다.
가구용이 아니라 옮겨 심느라 사간 모양이었다.
동네길을 내려가며 남이 담장들을 무너뜨려 배상하고 갔다 한다.
외과의사로 온집안의 가정의 역할을 했던 작고한 사촌형의 집이다.
(장티브스에 걸린 내가 살아있는 것도 형님 덕분이다)
누가 살고 있나 들어가자 마침 들어오시던 어느 할머니께서 들어 가잔다.
앞집 조카된다고 하였더니 마침 팥죽을 쑤었다며 같이 들자하여 네분의 할머니들과 계획에 없던 팥죽을 얻어 먹었다.
옛날 먹던 팥죽의 맛을 느껴본다.
모두 80대 중반으로 한국전쟁 무렵 시집을 오신 분들이다.
우리 어머니 택호인 '천안댁'을 기억하고들 계셨다.
이곳에 사시는 할머니는 얼마전 마흔에 결혼한 나의 5촌 조카( 堂姪)과 새댁인 조카 며느리(姪婦)를 데리고 다녀갔다고 한다.
그러니까 사촌 형님이 타계후 이젠 이집이 조카 소유인 셈이다.
빈집으로 두었으면 벌써 페허가 되었을 집이다.
나중에 팥죽을 대접해준 할머니는 아버지 8촌의 제수씨로 아주 남에게서 얻어먹은 아니라고 사촌형이 나중에 일러준다.
큰집 건너집인 이집엔 이층집 같은 창고가 있어 어릴 때 볼대마다 신기했던 집이다.
아버지께서는 "목수 할아바지'가 사시던 집이라고 일러주셨는데 한문을 잘 아셔서 집안의 대소사에 많은 일을 해주시던 집안 할아버지라고들었다.
내가 태어나기전 돌아가셔서 뵌적은 없다.
자손이 살고 있나 들어가 보자 사시는 분은 자손이 아니라 한다.
나중에 사촌형님에게서 들은 이야기로 할아버지 처가의 조카뻘되는 분이라든가 남이 살고 있는 집이 되었다.
사진: 세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져내리는 큰집(1881년 건축)
앞 건물이 사랑채고 뒤가 안채다.
원래 좋은 목재로 지은 집이 아닌데다 사람이 살지 않아 관리를 하지않아 서서히 내려 앉고 있다.
원래 사랑채와 안채사이에 담이 있고 문이 있어 안채는 외부인 출입이 어려웠다.
집은 대문과 세개의 쪽문이 있다.
텃밭으로 가는 문과 사랑채에서 대각선 방향에 한개 ,안채옆에 한개가 있어 동네 어느 방향으로든지 출입하기 좋게 달려있었다.
사랑채 나무가 쌓여 있는 곳은 작은 루가 있어 마루엔 아름답게 만든 난간이 있었다.
할머니께서 머무시던 남향집외에는 안채와 사랑채가 산세를 따라 북서향으로 지어져 특히 골짜기(동네 이름이 각골-柯谷里다)의 동향집은 여름에 덥고 겨울엔 추웠다.
큰집에 우물이 없어 50여미터 떨어진 마을 공동무울에 서 길어다 먹어야 했는데 옛날 머슴이 있던 시절은 몰라도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방학이면 힘드실 큰어머니를 생각하여 익숙하지 않은 물지게를 지고 부엌에 있는 큰 독에 물을 가득채워놓는 일이 우리의 아침 일과였다.
나중에 지하수에 수도를 설치하여 그런 불편은 없어지고 말았다.
소유자인 사촌형의 이름인 ,이진환 가옥
증조모가 돌아 가시자(약 1936년경) 대문 밖에는 하얀 무명을 깔고 노제를 지낸후 상여가 떠났다
나보다 어머니에게서 많은 얘기를 들은 아내의 얘기다.
많은 자손을 두고 떠나신 증조모.
할아버지와 작은 할아버지,대고모 두분과 많은 손자 손녀를 두셨다.
할아버지에겐 아버지 형제 6형제와 작은 할아버지에겐 많은 당숙과 당숙모들이 있었다.
작은 할아버지댁 당숙들은 한분만 제외하고 젊은 시절 장티브스,페결핵등으로 모두 일찍 돌아가셨다
대신 당고모(5촌 고모)들은 모두 장수하셨다.
동네에 그러싸한 기와집을 화적떼들이 곧 잘 습격하던 시절,
할아버지는 벨기에제 장총과 권총을 구입하셨고 포수를 집에 머물게 하신 적도 있다고 한다.
총이 있단 소문을 듣고 찾아온 화적에게 총쏘는 법을 시범보이시고 총을 주어버린 할아버지 .
칼든 화적떼 앞에서 안전을 택하셨다고 한다.
지금도 사진의 사랑채 문엔 위협하는라 칼로 찍은 자국이 선명히 남아있다.
할아버지께서는 朝陽( 양산 초등학교 전신) 건립시 많은 돈을 기부하셨는데 100년이 넘은 공립 초등학교가 되었다.
한때 할아버지는 일본시민지 시절 재산을 정리하여 미국으로 가시고자 하였으나 증조모가 말리는 바람에 그냥 주저앉으셨다고 한다
미국으로 가셨으면 우린 태어나지 못한 거다.
어머님과의 혼인은 없을 터이니까.
뒤에서 본 사랑채.왼편으로 가마솥이 걸려 있고 안채로 들어가는 쪽문이 있었다. 문지방이 높아 드나들기에 불편했다.
광과 안채 화장실
지금도 남아 있는 옛 옹기와 단지
화적떼가 들이 닥쳐 불을 질러 소실된 집.
처음 기와집이 소실된 후 초가 지붕을 얹어 집을 지었다.
나중에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거주하셨던 곳으로 남향이라 빛이 바르고 따스한 집이다.
왼편 창고가 되어버린 곳은 원래 Y자형 디딜 방아가 있던 곳으로 어릴때 방아위에 올라 방아찟는 시늉을 하며 놀던 곳이다.
나중에 큰아버님께서 쪽문을 올라 다니는 것이 불편하여 담을 허물고 문을 내셨다.
할머니가 지내시던 집. 나중에 스레이트 지붕을 얹었다.
이곳이 아래 사진을 찍은 장소다.
증조모의 상을 마치고 가족들이 찍은 기념 사진(1936년음력 11월)
지금은 없는 오른쪽 문도 보인다.
건을 쓰신분들은 상주인 작은 할아버지와 할아버지 (이미 작고하셨다)의 맏손자인 백부
앞의 두 남자 어린이는 사촌형님들로 후일 교장,의사가 되었다.
두번째줄 우측이 새댁시절의 어머니
증조모의 장례 사진;
지금 87세로 살아계신 당고모의 말에 의하면 사진을 찍느라 잠시 멈추었다고 한다.
현재 보관하고 있는 1936년 음력 11월 증조모 장례 사진이다.
확대경으로 들여다 보면 상여꾼들은 12명 이상이고 상제중 두사람이 당나귀를 탔다.
종조부와 백부로 짐작한다.
장례행렬을 가다 멈추게 했다는데 당고모는 이 사진을 찍기위해서였다고 기억하셨다.
조문객들이 타고온 두대의 버스와 두대의 승용차도 보인다.
뒤로 보이는 산이 "비봉산"이다.
남쪽 담
안채.마루밑에 는 디딤돌이 있었다.
처마에 갈린 저 나무는 감 딸때 사용하는 장대같다.
커다란 자두나무엔 지금도 수많은 자두가 달린다.
나무도 노쇠하고 비료도 주지않아 단맛이 거의 없다.
행랑채로 나가는 쪽문.
쪽문을 나가변 행랑채가 있었고 일꾼들이 살았다.
가을 추수후 이곳에 노적가리를 쌓아 두었다 한다.
할아버지께서는 행랑채에서 동네 아이들을 위해 야학을 운영하셨다 한다.
왼편이 행랑채 방이고 오른편은 사랑채 화장실 자리였다.
안채
담장안의 돌배나무. 아무리 돌배라도 흉악할 정도로 맛없는 돌덩이 같이 작은 배들이 달렸다.
안채 뒤안.
커다란 가죽 나무가 있었는데 없어지고 말았다.
어머니께서는 가끔 가죽나무 잎를 얻어와 찹살풀을 발라 말린후 겨울에 기름에 튀겨 안주및 반찬으로 삼았다.
이 음식은 경상도와 충청도에서만 먹는 듯하다.
페허로 변해가는 큰 집을 보며 아픔도 안타까움도 사라져 버렷다.
세상의 이치요 삶의 순환이다.
할아버지가 돌아가시자 청주고보(5년제)를 1년 남기고 할머니 명으로 중퇴한 큰아버지.
장자로서 집안을 지켜간다는 것이 중요한 일이라고 판단하신모양이다.
600여석의 재산을 받은 큰아버지께서는 이승만 대통령 시절 토지개혁으로 인해 많은 토지를 잃으셨고 벌채 사업을 하신다고 사들인 트럭들은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휴지가 된 종이 한장의 인수증을 받고 전쟁에 징발되고 말았다.
재산이란 벌기보다 지키기가 어렵다.
또 다른 사업중에 믿고 맡겼던 돈을 먹고 튀는 사건도 발생한다.
큰 아버지 사업에 보증서신 아버님이 대신 빚을 갚느라 힘들어하셨던 어린 시절을 어렴풋이 기억한다.
학자풍의 큰 아버님은 사업과는 도무지 어울리지 않는 분이셨다.
아버지 형제들은 모두 고향을 떠나 다시 돌아가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고향에 남아계시던 큰아버지,큰어머니께서 3일 간격( 줄초상이란 말이 이런 경우다))으로 별세후 작은 할아버지댁의 당숙까지 과수원과 집마져 팔아 버리자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그랬다.
"각골 이씨 "망했다고 .
천석꾼의 자손들이 땅한평 없이 되었으면 망한 것이 틀림없다.
인간 사는 세상에 어찌 시샘이 없을까.
그러나 자손들은 번성했고 다들 자기 몫을 하며 잘 살고 있다.
땅보다 중요한 것이 사람이다.
땅은 없어졌을 지라도 조상들의 근검 절약하는 생활신조와 사람은 배워야한다는 교훈에 힘입은 바 크다.
둘째인 작은 아버지 한분은 일본 와세다를 나오셨고 셋째 작은 아버지는 고향에서 약종상을 하셨다
영민하셨던 아버지께서는 초등학교 졸업후 집안 재산관리와 경성에서 학교다니는 동생들 뒷바라지 하는 동안 부기 학원을 다닌 것이 전부다.
밑의 두 작은 아버지들은 현재 경기고 전신인 제일 고보를 다니셨고 피하고 피하다 일본 유학중 학도병으로 징집되어 출정전 해방이 되어 귀국하셨다.
귀국후 연희전문과 서울 법전을 졸업하셨다.
아버님은 공무원으로 일하시다 은퇴하셨다
할머니께서는 살아생전 아버님 교육을 못 시킨 것을 늘 후회하셨다고 하셨다.
모두 돌아가신 지금 다 지난일이요 운명이다.
우리 형제를 포함 27명의 사촌들은 부산,청주,서울 해외로 흩어져 살고 있다.
9명이 해외에 거주한다.
제일 위로는 82세의 사촌형에서 58살의 막내 사촌까지 있다.
아버지 형제 6형제를 거쳐 27명의 사촌 형제에게선 56명의 자녀와 조카들이 있다.
단 한명의 사촌형님만이 암으로 타계하였고 모두 건재하다.
할머니방 뒤안의 감나무
왼편이 큰집 모습이다.
엣날 사랑채가 있던 곳. 큰 아버지께서 양계장을 해보신다고 두서너 해 하시다가 그만둔후 남아있는 양계장 이 그대로 남아 있다.
앞의 큰 감나무엔 아직도 감들이 많이 달리나 높이 달려 따기가 어렵다.
청주 사시는 사촌 형님은 영동읍에 사는동생을 불러 사다리를 타고 감을 따게하여 가져간다.
고향의 감으로 곳감을 말려 조상께 제사와 차례를 지내는 정성은 좋으나 환갑이 넘은 동생이 힘에 부치는 모양이다.
아버지 집과 똑 같이 지은 집이 있던 작은 집 자리.
이 곳에 살던 사촌들은 제일 먼저 이민하여 시카고 공무원으로 자리잡은 사촌 누님 내외를 따라 6남매가 시카고에 거주한다.
시카고에서 태어난 사촌의 형의 딸은 하나 은행에서 설립한 명문고 서울 하나고등학교에서 원어민 영어교사로 부부가 근무한다.
나의 종손녀(큰 조카 딸)은 하나 고등학교에 들어가 나중에 알게된 영어 선생님-미국인이된 재당고모(7촌 아주머니)를 만나게 된다.
좁은 세상이다.
먼 집안이 작은 집을 사들여 멋진 양옥을 지었다.
그러나 이집에서 오래 사시지 못하고 아저씨와 형님 되는 분들이 10여년 사이로 타계한 것은 안된일이다.
아버지의 8촌 동생인 9촌 아저씨가 사시던 곳.
멋진 정원수와 항시 꽃이 많던 집이다.
영동 농고를 나와 면장을 하셔서 면장 아저씨라 부른다.
12.12사태시 계엄 사령관인 정승화 대장과 고종사촌간이다.
아버님 살아생전 얘기로 어린 시절 정승화 대장이 놀러온적 있다고 한다.
아저씨는 9남매를 두셨는데 60대에 돌아가신 아주머니께서는 돌아가시면서 재혼하지 말라고 신신 당부 하셨다한다.
젊은 시절 바람을 많이 피웠다는 아저씨는 아주머니 말대로 홀로 사시다 암으로 돌아가셨다.
서울 막내 아들집에 계시는 동안 방문 할때마다 앙상하신 몸으로 반가워하시던 아저씨.
지금은 막내 아들이 집터에 새집을 지어 놓고 주말에 가끔 9남매들이와서 놀다 가곤 한다고 한다.
건설사에 다녔던 10촌 형님은 지금 71세다.
가곡리 입구에 있는 성당 공소.
작은 천주교 공소가 아담하다.
팥죽을 대접해주신 할머니는 천주교 신자로 말씀에 따르면 10여리 떨어진 학산면(포도로 유명하다) 성당에서 미사를 드리고 공소에서는한달에 한번 신부님이 오셔서 미사를 본다고 한다.
천주교 성당 공소 앞에 말라가고 있는 맨드라미.
오랫만의 고향길 나들이가 행복했다
설령 이번 나들이가 마지막이 되더라도 나에겐 여름날 붉은 맨드라미 같은 빛나던 삶이 있었던 것만으로 감사한 일이다.
첫댓글 한편 소설 같네요. 글솜씨며 정감 물씬 밴 사진이 넘 감동되네요. 어서 건강 회복하시길.
감사합니다.
지금은 평상시와 같을 정도로 몸의 상태가 되었습니다.
단지 조심스럽습니다.
대부분 고향을 잊고 찾지 못하고 있습니다.
한번도 산적이 없는 두살아래 사촌 여동생은 어린 시절 작은 아버님(미국 이민후 작고)을 따라 간 어렴풋한 고향을 한번 가보고 싶다 합니다.벚꽃 ,복사꽃이 피어나는 4월도 아름다운 곳입니다.
아버님세대를 기억하며 찾고 싶어하는 고향입니다.
제 메일입니다. ju-t-k@hanmail.net 꼭한 번 오시길..제가 2016년 4월 말까지는 여기 있을 것 같습니다.
와우~~~그 옛날 추억어린 고향을 가보셨군요...소설을 쓰셔도 되겠어요...시골마을이 참 고풍스럽네요...
그나저나 건강하시죠?
지난번 당연히 나오실줄 알았는 데 공무로 바쁘시다는 말씀에 섭섭했습니다.
건강하지 못하다가 요즈음은 회복된 상태입니다.ㅎㅎ
다음 기회엔 꼭 나오십시요
JB님 한 편의 사진 영상집을 보는 느낌 입니다. 전문 사진 작가로 이름을 올리셔도 무방 하실 거 같습니다!!
영동시골 모습이 조지아 카케티 어느 시골 모습과 비슷한 거 같기도 하고 열린 감을 보고 있노라니 늦가을의 정취에 흠뻑 취하는거 같습니다.
조지아의 아름다움이란 오염되지않은 고유의 아름다움을 간직해서 입니다.
터키와 함께 늘 가보고 싶은 고향같은 조지아입니다.
고향도 크게 변하지 않아 그리움이 많이 남은 곳입니다.
지안님에게 안부전합니다.
사람들이 그리운 년말이 되었습니다..이해의 마지막달.
한해가 후회없으셨길.....
창 정겹습니다. 보고만 있어도 힐링이 되는데...빈집도 많은데 아직은 내려가 살 형편이 안되네요 ㅎㅎ
당숙이 집을 판다고 하엿을 때 제가 사고 싶었던 마음이 전혀 없엇던 것은 아닙니다.
낙향 할 것도 아니고 고향을 마음에만 담기로 했습니다.
집도지분을 제외하고 450여평을 대지 분할하여 팔면 대전에서 사러 오지 않을까 상상도 해보았습니다.ㅎㅎ
@jb-lee 제 친구 고향마을이 영동에서 가까운 옥천군 청성면입니다...안 그래도 대전 사람들이 와서 많이 산다고 하네요. 대전에서 승용차로 50분 거리니...
고향구경 잘했습니다. 아주 멋진 곳인 것 같습니다. 그리고 건강을 다시 회복하셨다니 참으로 다행입니다.
시골치곤 멋진 곳에 해당하는 고향입니다.
시내나 강이 흐르는 고장들은 남달라 보입니다.
어죽이 특별히 맛있어 갈때마다 들리곤 합니다.
추운 겨울 잘 지내고 계신거지요?
@jb-lee 네. 덕분에 잘 지내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