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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된 여러 신앙들에서 말하는 것처럼 사람들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며 기록하는 거대한 거울과 같은 것이 천상이나 명부 어딘가에 존재한다면, 거기 담긴 나의 지난 사 년은 껍데기에서 몸을 꺼내 칼날 위를 전진하는 달팽이 같은 무엇이었을 것이다. 살고 싶어하는 몸. 움푹 찔리고 베이는 몸. 뿌리치고 껴안고 매달리는 몸. 무릎 꿇는 몸. 애원하는 몸. 피인지 진물인지 눈물인지 모를 것이 끝없이 새어나오는 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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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사람들은 떠날 때 자신이 가진 가장 예리한 칼을 꺼내든다는 것을 우리는 경험으로 안다. 가까웠기에 정확히 알고 있는, 상대의 가장 연한 부분을 베기 위해.
반쯤 넘어진 사람처럼 살고 싶지 않아, 당신처럼.
살고 싶어서 너를 떠나는 거야.
사는 것같이 살고 싶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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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 뻔뻔스럽게 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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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도적인 성량으로 끊임없이 세계가 말을 걸어오는 것 같던 여름이 갔다. 더 이상 매 순간 땀 흘리지 않아도 된다. 온몸에 힘을 빼고 거실 바닥에 누워 있지 않아도 된다. 열사병에 걸리지 않기 위해 수없이 찬물 샤워를 하지 않아도 된다.
세계와 나 사이에 소슬한 경계가 생긴다. 긴소매 셔츠에 청바지를 꺼내 입고, 증기 같은 열풍이 더 이상 불어오지 않는 도로변을 걸어 나는 식당에 간다. 여전히 요리를 할 수 없다. 한끼 이상의 식사를 할 수도 없다.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만들고 함께 먹었던 기억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규칙들이 돌아온다. 여전히 사람들을 만나지 않고 전화를 받지 않지만, 다시 정기적으로 이메일을 체크하고 문자메시지를 확인한다. 새벽마다 책상 앞에 앉아 쓴다. 매번 처음부터 다시, 모두에게 보내는 작별 편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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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설령 지금 포기한다 해도, 없어진 손가락의 통증을 평생 느끼는 경우가 많아서 의사는 권하지 않는다고 했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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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술을 다문 채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인선의 옆얼굴을 나는 보았다. 특별한 미인이 아니지만 이상하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녀가 그랬다. 총기 있는 눈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그보다는 성격 때문일 거라고 나는 생각해왔다. 어떤 말도 허투루 뱉지 않는, 잠시라도 무기력과 혼란에 빠져 삶을 낭비하지 않을 것 같은 태도 때문일 거라고. 인선과 잠시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 혼돈과 희미한 것, 불분명한 것들의 영역이 줄어드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었다. 우리의 모든 행위들은 목적을 가진다고, 애써 노력하는 모든 일들이 낱낱이 실패한다 해도 의미만은 남을 거라고 믿게 하는 침착한 힘이 그녀의 말씨와 몸짓에 배어 있었다. 피투성이 손에 헐렁한 환자복을 걸치고 팔뚝에 주렁주렁 주삿줄을 매달고 있는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그녀는 약하거나 무너진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50p
말없이 우리는 남은 국수를 먹었다. 누군가를 오래 만나다보면 어떤 순간에 말을 아껴야 하는지 어렴풋이 배우게 된다.
200p
대답 대신 나는 손을 뻗어 뼈들의 사진 위에 얹었다.
눈과 혀과 없는 사람들 위에.
장기와 근육이 썩어 사라진 사람들.
더이상 인간이 아닌 것들.
아니, 아직 인간인 것들 위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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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에 대한 섬세한 기록으로의 치유
공동체를 정의하는 매우 다양한 방법이 있는데, 그중 하나가 같은 상처를 공유하고 그 상처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하는 것이다. 그래서 아픈 역사도 굳이 우리는 후손들에게 가르쳐야만 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공동체는 곧 민족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우리 현대사를 돌아보면서 뼈아픈 것은 같은 상처를 공유는 하였으나 그것을 공감하는 부분에서는 완전 반대입장을 취하고 둘로 나뉘기도 한다는 점일 것이다. 광주 5․18도 제주 4․3도 그래서 여전히 고통스럽다.
한강은 그런 점에서 공동체를 회복하고 감싸 안는 시도를 소설로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의 상처가 어느 이념이나 진영의 문제가 아닌 인간적인 고통이라는 것을 다시 한번 일깨워주는 작업을 한다.
이 소설은 줄거리를 따라가면서 읽어 나가고자 한다면 목적지에 도달하기가 힘들지도 모른다. 그만큼 친절한 줄거리를 독자에게 전달하고 있지는 않다. 하지만 인간에게 고통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을 품고 읽어 나간다면 깊이 빠져들 수 있는 소설이다. 고통에 깊이 빠져든다는 말이 모순일 수 있지만, 공감이라는 말 자체가 그러하지 않은가. 상대방의 감정에 깊이 발을 들여놓지 않으면 절대 제대로 된 공감은 불가능하다. 하물며 고통은 더하다.
여기에 나오는 모든 존재는 자기만의 고통이 있다. 붉디붉은 동백처럼 아주 선명하게 그 고통 속에 놓여있으면서 날것 그대로 느끼는 존재들이 나온다. 한강의 가장 무서운 쓰기가 여기에 있다. 고통마저 너무도 섬세하고 느리게 전혀 서두르지 않고 묘사하기. 그래서 글을 읽어 나가면서 나도 모르게 움찔움찔한다. 그 고통을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제주 산중간 돌담집 안으로 스며든다. 4.3부터 주욱 거기에 그대로 있었던 돌담들. 개개인의 고통이 뭉글뭉글 모여서 집단을 이루었다가 다시 개인의 이부자리 위로 내려앉는다. 이 또한 동백을 닮았다. 동백은 홀로 피지 않지만 홀로 진다. 그리고 함께 다시 다음 봄을 기다린다. 인선이 잘린 자신의 손가락을 부여잡고 그 고통의 뿌리를 4.3 희생자들의 고통으로 가져가는 것이 그래서 이 소설에서는 억지스럽지 않다.
경하와 인선은 각자의 고통으로 시작해서 만나 공동의 고통을 말하게 된다. 그러면서 서로의 고통에 가까워질수록 둘은 서로를 신뢰하고 또 의지하게 된다. 그래서 가장 극단의 순간에 서로가 만나 이 고통의 뿌리들이 가진 고통을 이야기로 풀어냄으로써 치유로 가는 길목을 발견한다. 그것은 인선의 부모가 만나 인선을 낳은 것과 같은 이치다. 둘은 잔인하게 잃어버린 것을 찾다가 서로를 만났기 때문에 두 분이 어떻게 신뢰하고 의지하게 되었는지는 자세히 나오지 않지만 충분히 그 빈 곳을 채워서 이해할 수가 있다. 그리고 그분들 사이에서 태어난 인선이 부모가 한을 못다 풀고 이제 모두 떠나버린 자리에서 왜 그들의 고통을 다시 되새김질하고 기록해야 하는가에 대한 당위성을 알아가는 과정이 서술자인 경하를 치유한다.
그래서 여기 나오는 고통의 묘사는 매우 섬세하다. 그리고 특히 감각을 살려서 그려낸다. 고통은, 통증은, 감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내가 사랑하던 것들의 감각을 무참히 잃었을 때의 고통. 사랑스러웠던 감각들이 있던 자리에 밀려오는 통증은 너무도 서럽게 묘사된다.
아버지의 막내동생의 머리털이 가지던 여린 부드러움과 엄마의 물어뜯은 손가락을 빠는 동생의 입술의 부드러움, 살아있는 앵무새의 깃털이 가진 부드러움... 그것을 잃은 자들의 고통의 낙인이 선명한 시간들. 그런데 그 고통의 낙인은 수천 수만의 학살 피해자들과 그들의 가족, 그리고 목격자들 모두에게 찍혀있었을 거라는 것을 소설을 읽다보면 알게 된다. 그리고 기록자들 마저도 그 안에서 자유로울 수가 없다는 것을 경하를 보면서 느끼게 된다.
경하가 고통스러운 장면을 자세히 들여다보기를 두려워하면서도 들여다보게 되는 것은 알아야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인선의 엄마도 계속해서 들여다보기를 했던거고 인선도 마찬가지다. 외면하는 순간 그 고통과 이별하게 되고 무디어지기 때문이다. 어느 고통 앞에서 ‘이제 그만 잊자, 그만하면 됐다.’라는 말이 지니는 매정함을 온몸으로 부정하는 글이다.
그래서 한강은 오늘도 쓴다. 아주 섬세하게 예리한 언어를 골라서 아프게 쓴다. 아마도 당연히 작가도 많이 아프지 않았을까. 그게 고통을 대하는 예의인 거라고 담담하게 답할 거 같다. 그래서 한강은 이 소설 안에서도 경하의 입을 빌어 솔직히 고백한다.
학살과 고문에 대해 쓰기로 마음먹었으면서, 언젠가 고통을 뿌리칠 수 있을 거라고, 모든 흔적들을 손쉽게 여읠 수 있을 거라고, 어떻게 나는 그토록 순진하게-뻔뻔스럽게-바라고 있었던 것일까? - 소설 중에서
그래서 결국은 고통과 ‘작별하지 않는 것’이 최고의 공감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는 치유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부러진 성냥이라도 하나 그어 밝힐 수 있을 것이다.
첫댓글 일찍이 한강의 노벨문학상 수상을 예감하셨나보네요.^^ 일본에서도 책 구한다고 난리라네요. 살다보니 이런 날도 오네요...ㅎㅎ
다른 작가가 아니라 한강이어서 더 다행이다라는 생각은 있네요 ㅎㅎㅎ 편드는 것이 아니라, 시대를 쓰는 작가들이 점점 줄어든다는 아쉬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