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총지(王寵之)는 현종(顯宗) 때 과거에 급제하였고, 여러 차례 승진하여 기거사인(起居舍人)이 되었다.
정종(靖宗) 때 우승선 급사중(右承宣 給事中)이 되어 도병마부사(都兵馬副使) 박성걸(朴成傑) 등과 함께 주문(奏文)을 올리기를, “동로(東路)의 정변진(靜邊鎭)은 변방의 적이 노리는 곳이므로 백성들이 편안히 거할 수 없습니다. 청컨대 농한기까지 기다렸다가 성과 해자를 수축하소서.”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지주사 예빈경(知奏事 禮賓卿)으로 전임되었다가 〈정종〉 10년(1044)에 동북로병마사 참지정사(東北路兵馬使 叅知政事) 김영기(金令器)와 함께 장주(長州)와 정주(定州)의 2주 및 원흥진(元興鎭)에 성을 쌓았다.
문종(文宗) 초에는 중추사(中樞使)로서 서북면중군사 겸행영병마사(西北面中軍使 兼行營兵馬使)가 되었고 수사공 상주국(守司空 上柱國)을 더하였다.
얼마 안 되어 이부상서(吏部尙書)로서 도병마사(都兵馬使)가 되니 주문을 올리기를, “전(傳)에 이르기를, ‘편안할 때에 위태함을 잊지 말라.’고 하였고, 또 이르기를, ‘적이 오지 않을 것을 믿지 말고 우리에게 대비가 있음을 믿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라에서는 매년 중추(中秋)에 동반과 서반의 관리들을 교외에 모아서, 활쏘기와 말타기를 가르치고 익히게 해야 합니다. 더구나 여러 위(衛)의 군사들은 나라의 기둥[爪牙]이니, 마땅히 농한기에는 징·북·깃발에 따라 움직이는 절도(節度)를 가르쳐야 합니다. 또 군마(軍馬)를 모두 훈련시킬 수는 없으니, 청컨대 먼저 선봉 기마병을 뽑아 한 부대마다 말의 갑옷 10벌씩을 지급하고 달려가서 쫓는 것을 익히게 하며, 또 어사대(御史臺)·병부(兵部)·6위(衛)로 하여금 교련과 사열을 관장하게 하십시오.”라고 하니, 〈왕이〉 따랐다.
곧이어 내사시랑(內史侍郞)에 임명되고 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로 전임되었으며, 글을 올려 병마사 직을 사직하려 하니 〈왕이〉 윤허하지 않았다.
개성감목직(開城監牧直) 이계(李啓)가 사사로운 일로 기두(旗頭) 이인(李仁)과 구사(驅史) 가달(加達)을 보내어 부군(府軍) 김조(金祚)를 체포하게 하니 김조가 강물에 몸을 던져 죽었다.
상서형부(尙書刑部)에서 아뢰기를, “이계의 죄는 협박치사[畏懼致死]에 해당되니 마땅히 싸워서 죽인 것과 같이 논죄해야 합니다. 지금 법에 따라서 등에 곤장을 치고 유인도로 유배할 것이며, 이인과 가달은 〈그를〉 따랐으니 3,000리 밖으로 유배하소서.”라고 하니, 이자연(李資淵)의 의견도 형부와 같았다.
〈그러나〉 왕총지 등은 “협박치사란 것은 물가에 있거나 험한 곳을 걷다가 협박으로 인해 죽게 되는 것과 같습니다. 지금 김조는 스스로 물에 빠졌으니 이와 다릅니다. 마땅히 이인을 주범으로 삼되 교수형은 감해 주고, 가달의 〈죄를〉 감하여 종범(從犯)으로 삼을 것이며, 이계는 사리를 따져 무겁게 논죄해야 할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왕이〉 제서를 내려 이르기를, “협박치사로 이계를 논죄하는 것은 죄가 규정된 조문이 아니다. 〈관리 명부에서〉 이름을 지우고 땅을 거두어들이며, 그 나머지는 아뢴 바에 따르라.”라고 하였다.
수태위 문하시랑 동중서문하평장사(守太尉 門下侍郞 同中書門下平章事)에 올랐다가 곧이어 문하시중 판상서이부사(門下侍中 判尙書吏部事)로 승진하였다. 〈문종〉 21년(1067)에 중서령(中書令)으로 치사(致仕)한 후 죽으니, 사흘 동안 조회를 정지하고 시호를 경숙(景肅)이라 하였다. 후에 그 덕행을 기려 조서를 내려서 아름다움을 칭송하였으며, 수태사 중서령(守太師 中書令)을 추증하고, 문종의 묘정에 배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