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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마의태자의 풍경산방 원문보기 글쓴이: 풍경 송은석
스토리텔링의 보고, 대구의 재실
31. 【인흥서원】(추계추씨) 550년 만의 화려한 컴백 노당 추적
그리고 명심보감
글·송은석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광역시본부 사무국장·대구시문화관광해설사)
프롤로그
근래 우리 대구에는 「마비정(馬飛亭·馬飛井) 벽화마을」이라는 명물이 하나 생겼다. 전통적인 촌락마을인 이곳은 이 마을 출신인 한 화가의 마을벽화로 인해 전국적으로 명성을 얻고 있다. 이 마비정 벽화마을 가는 길에 두 곳의 유교유적지가 있다. 하나는 남평문씨 본리세거지요, 다른 하나는 고려 말의 성리학자이자 문신인 추적 선생을 배향하고 있는 우리나라 추계추씨 문중의 랜드마크 「인흥서원(仁興書院)」이 바로 그것이다.
그래서 말인데, 오늘은 인흥서원에 대해 한 번 알아보기로 하자. 주소는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으로 되어 있지만 실제 대구시 달서구 대곡동과 아주 가까운 거리에 있다. 이 서원은 추계추씨라는 문중을 우리나라 명문의 반열에 올려놓는데 큰 공을 세운 추계추씨 현조(顯祖·이름이 드러난 선조) 4위의 위패를 모시고 있는 서원이다. 동시에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인흥서원본 명심보감 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서원으로도 유명하다.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이곳 역시 많은 이야기들이 전하고 있다. 오늘은 거두절미하고 ‘추적’, ‘명심보감’ 두 개의 키워드를 중심으로 이야기를 풀어가기로 한다.
인흥서원 초입 입간판
인흥서원 돌아보기
인흥서원(仁興書院)은 대구시 달성군 화원읍 인흥리에 위치한 서원으로 조선후기인 1866년(고종3)에 세워진 서원이다. 창건당시 서원에 배향된 인물은 노당(露堂) 추적(秋適·1246-1317) 선생 1위였다. 그는 고려 말 안향(安珦) 선생과 더불어 우리나라에 처음 성리학의 씨를 뿌린 대학자이자 문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를 주벽(主壁·여러 위패 중 주장이 되는 위패)으로 배향한 서원은 우리나라를 통틀어 이곳 인흥서원 단 한 곳뿐이다.(사당은 몇 곳이 존재한다) 그것도 추적 선생 사후 무려 550년이나 지나서 말이다. 현종·숙종 조 고을의 향선생 또는 문중 단위의 현조들을 대상으로 무려 7백 개소가 넘는 서원들이 무차별적으로 설립될 때도 추적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 건립되지 못했던 것이다. 그래서일까? 현재 추적 선생에 대한 일반인들의 인식은 사실 거의 무지에 가깝다고 할 수 있다. 과연 이래도 되는 것일까?
인흥서원의 가치는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하나는 ‘노당 추적 선생을 제향하는 국내 유일의 서원’이라는 것이요, 다른 하나는 ‘국내 유일의 명심보감 목판을 소장한 서원’이라는 점이다. 이를 염두에 두고 우선 인흥서원에 대한 개괄적인 내용을 살펴보기로 하자.
인흥서원은 지금으로부터 약 150년 전인 1866년(고종3) 가을, 우리가 살고 있는 대구 땅의 남쪽 변두리 지역인 인흥리(仁興里)에 세워졌다. 이 서원이 우리 대구 땅에 세워진 데는 잘 알려지지 않은 비하인드 스토리가 하나 숨어 있다. 노당 추적 선생의 묘소가 바로 이곳에서 발견되었기 때문이었다.
추계추씨의 시조는 본래 중국의 송나라 사람으로 고려 인종 때 우리나라로 건너온 추엽(秋饁)이라는 인물이다. 추엽의 손자였던 추적은 그 손자 대에 이르러 큰 변화를 맞게 된다. 당시 여말 혼란기로 인해 1363년(공민왕12) 추적의 손자인 운심재(雲心齋) 추유(秋濡)와 추협(秋浹)이 다시 중국으로 건너간 것이다. 이후 임난 때 명나라 원군으로 추수경(秋水鏡)이라는 인물이 다시 조선으로 돌아오긴 했지만 여하튼 이러한 연유로 추적의 묘소는 실전(失傳·잃어버림)되고 말았다. 하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던가? 무려 50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c 중반에 이르러 추적의 후손인 추세문·추성욱 등의 노력으로 이곳 인흥리에서 추적 선생의 묘소를 기적적으로 찾아낸 것이었다. 이를 계기로 전국의 추계추씨 문중이 합심하여 자신들의 선조인 노당 추적 선생의 현창사업에 매진하게 되었고, 그 최종 결과물이 바로 인흥서원의 건립과 명심보감 목판 제작으로 이어진 것이었다.
현재의 인흥서원은 2007년 대대적인 보수를 거친 건물이다. 말 그대로 낡은 것을 보수한 것이지 새롭게 중창을 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경내의 건물들은 세월의 흐름을 읽기에는 다소 부족한 점도 있으나 옛 원형은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참고로 인흥서원은 1870년을 전후로 시행된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사당만을 제외하고는 모두 훼철이 되었다가 1938년에 복설이 되었다.
인흥서원 전경
추적선생 신도비 비각
서원 입구에 서면 우측으로 잘 지어진 비각이 하나 보인다. 노당 추적 선생의 신도비 비각이다. 「고려평장사노당추선생신도비명(高麗平章事露堂秋適先生神道碑銘)」이라 명명된 이 신도비는 1864년(고종1)에 세워진 것으로 예조판서를 역임한 신석우(申錫愚)가 그 비문을 지었다. 보통의 신도비가 모두 그러하듯이 이 비문 역시 추적선생을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참고로 이 글의 말미에 그 전문을 옮겨놓았다.
인흥서원 외삼문 숭봉문
인흥서원 강당
응와 이원조 선생의 인흥서원 편액
숭봉문(崇奉門)이라 편액된 솟을외삼문을 열고 경내로 들어가면 정면에 강당이 있고 좌·우에 동·서재가 있다. 강당은 정면 5칸·측면 2칸의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로 전면으로 반 칸의 툇간을 두었다. 강당에 걸린 인흥서원 현판은 응와(凝窩) 이원조(李源祚) 선생이 썼다. 강당을 마주 보고 섰을 때 대청을 중심으로 좌측 한 칸의 방은 존학당(尊學堂), 우측 한 칸의 방은 모학당(慕學堂)이다. 한편 동재는 지금은 요산료(樂山寮)라 편액 되어 있으나 창건 당시에는 요산재(樂山齋)였다. 서재 역시 예전에는 관란재(觀瀾齋)였으나 지금은 관수헌(觀水軒)으로 명명되어 있다.
인흥서원 사당, 문현사
문현사 내 신위, 좌측 회암 추황, 우측 노당 추적
좌측 운심재 추유, 우측 세심당 추수경
노당 추적 선생 영정
강당 뒤편에는 별도의 담장을 갖춘 사당 문현사(文顯祠)가 있으며, 사당의 내삼문은 추모문(追慕門)이라 이름 되어 있다. 이 사당은 정면 3칸·측면 2칸의 겹처마 팔작지붕으로 전퇴가 없는 폐쇄형 사당이다. 원래는 단청이 없었는데 2007년 대대적인 중수를 하면서 내삼문을 포함한 사당영역에 단청이 입혀졌다. 현재 문현사에는 추계추씨 사현(四賢)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는데 ‘문정공(文正公) 회암(悔菴) 추황(秋篁·추적의 父), 문헌공 노당 추적, 상서공(上書公) 운심재(雲心齋) 추유(秋濡), 충장공(忠莊公) 세심당(洗心堂) 추수경(秋水鏡)’이다. 특히 추적의 경우는 위패와 함께 그의 영정도 함께 봉안되어 있다.
인흥서원 장판각
서원 경내 가장 동쪽에는 사당의 경우처럼 별로로 둘러진 돌담 안에 한 동의 건물이 자리하고 있다. 「기사 인흥재사본 명심보감 목판(己巳 仁興齋舍本 明心寶鑑 木板」을 소장하고 있는 장판각이다. 인흥서원 장판각에 소장된 목판은 총 31매로 현재 대구광역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명심보감 목판으로는 국내 유일본으로 알려져 있다.
참고로 본래 서원의 서편에는 노당 추적과 세심당 추수경 선생의 부조묘(不祧廟·불천위묘)가 있었다고 전한다. 이 역시 서원철폐 때 훼철되었다가 1877년(고종14)에 다시 세워졌으나 지금은 사라지고 그 유지만 남아 있다.
고려 말 우리나라 성리학 발흥의 주역, 노당 추적
앞서 잠깐 언급한 것처럼 우리나라 추계추씨는 추엽이라는 인물을 시조로 한다. 그는 중국의 송나라 사람으로 1141년 송나라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문하시중에 이른 인물이다. 그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것은 고려 인종(1123-1146) 때로, 자료에 의하면 동해상에 상서로운 기운이 비취는 것을 보고 큰 땟목을 타고 함경남도 함흥읍 연화도(蓮花島)에 정착했다고 전한다.
노당 추적은 시조 추엽의 손자로 우리나라 추계추씨를 대표하는 인물이다. 그는 15세가 되는 해인 1260년(원종1)에 문과에 급제했는데 같은 해에 안향 역시 18세의 나이로 합격했다. ‘안동부 서기·사록·직사관·좌사간·용만부사·익흥도호부사(원주목사)’ 등을 역임하고 민부상서·예문관대제학을 끝으로 사직하였으나, 후에 충선왕에 의해 다시 문하시중에 제수되고 밀성백(密城伯·현 밀양일원)에 봉해졌다.
그는 50여년을 관직에 있었는데 청요직(淸要職)에 있을 때는 권력에 아첨하지 않았고, 학문을 관할하는 직에 있을 때는 주자성리학의 도입과 발흥에 큰 공을 세웠다.
추적의 강직한 성품을 엿볼 수 있는 일화 중 하나를 예로 들어보자. 추적이 좌사간으로 있을 때 환관 황석량(黃石良)의 부정을 지적한 일이 있었다. 이 일로 추적은 간신배들에 의해 누명을 쓰고 왕명에 의해 곧장 칼이 씌워져 순마소(巡馬所·원나라가 내정간섭을 위해 고려에 둔 감찰기관)로 보내졌다. 이때 압송하는 자들이 추적에게 사람들의 이목을 피해 다른 길로 가자고 했으나, 그는 그 불가함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고려사 「열전」에 등재되어 있다.
“무릇 죄 있는 자는 모두 유사(有司·해당관청)에게 돌려보내는 법인데, 왕이 있는 곳에서 칼 씌움은 아직 없었던 일이다. 내가 마땅히 넓은 길을 감으로써 나라사람들이 다 나를 보게 할 것이다. 또 간관(諫官)으로서 칼을 씌움은 영광스러운 일이니, 어찌 아녀자들처럼 길거리에서 낯을 가리는 것을 본받겠느냐?”
또 한 번은 이런 일도 있었다. 추적이 용만(龍灣)부사로 부임할 때의 일이다. 당시 용만은 비록 오지라고는 하나 원나라와의 접경지대로 교통·군사·무역의 요충지였다. 400리 길을 행차하여 임지에 도착한 신임부사 환영 자리에 엄청난 양의 잔칫상이 차려졌다. 그런데 추적은 아무 말 없이 상을 물리쳤다. 상차림이 초라한 탓이라고 받아들인 용만의 관리들은 백배 사죄하며 다시 상차리기를 청했다. 하지만 추적은 부드러운 말씨로 다음과 같이 타일렀다고 전한다.
“산해진미는 나에게 필요 없다. 오직 밥 한 그릇과 나물국이면 족하다. 앞으로도 손님을 대접할 일이 있으면 흰밥에다 생선을 잘라 국을 끓여 대접하도록 하라. 백금을 소비하여 팔진미를 차려놓아도 입으로 한 번 지나가면 다 마찬가진 게야...”
한편 추적은 안향을 위시한 우리나라 주자성리학 1세대 그룹의 핵심 맴버였다. 안향이 재상에 올라 국학(國學·성균관)과 사학(私學) 등을 세워 성리학을 중심으로 여말의 학풍을 재정립하는 작업에 ‘추적·이성(李晟)·최원충(崔元冲)’ 등을 중용했던 것이다. 이때 추적은 시랑 겸 국학교수로 재직하면서 대성전 개축에 깊이 관여하였으며, 3품 이상 고위직 자제들을 가르쳤다. 안향과 추적이 성리학 중흥책을 추진할 당시 고려 국학은 마치 중국 연경의 시장터처럼 학생들로 붐볐는데, 그 수가 무려 수백에 이르렀다고 고려사에 전한다. 또한 그는 여말 장학제도를 대표하는 ‘섬학전(贍學錢)·양현고(養賢庫)’사업에도 적극 참여했다. 세상에 회자되는 명심보감 편찬 역시 이 시기의 일로 전하고 있다.(이에 대해서는 모든 관직에서 물러나 밀성백으로 있을 때의 일이라는 설도 있다.)
이처럼 15세의 어린 나이에 문과 급제하여 50여년 세월을 우리나라 유풍(儒風) 진작에 헌신한 노당 추적. 그는 사후 충숙왕 때 ‘문헌(文憲)’이라는 시호와 함께 그가 한때 부사로 근무한 적이 있는 평안도 용천군에 왕명으로 섬학재(贍學齋)라는 사당이 세워지고, 영정이 하사되었다. 하지만 그의 손자들이 중국으로 환국하는 등, 세월이 흐름에 따라 추적이라는 인물은 역사의 전면에서 서서히 물러나게 된다. 그로부터 약 300년 뒤, 명나라에서 무강자사(武康刺史)로 있던 그의 7세손 추수경이라는 인물이 임진왜란 때 우리나라에 원군으로 와 큰 공을 세우게 된다. 이로부터 또 다시 250여년 뒤, 이번에는 명암(明庵) 추세문(秋世文·1822-1894)이라는 인물이 등장하여 꺼져가던 추계추씨 가문의 불씨를 되살리는데 성공한다.
대구 사람으로 추적의 20세손인 추세문은 전남 옥과 사람인 추성옥(秋成沃)과 함께 자신들의 선조인 추적을 다시 역사의 중심으로 복귀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었다. 대표적으로 무려 500년 동안 실전되었던 추적의 묘소를 대구에서 찾아냈으며, 묘소 인근에 선생을 기리는 인흥서원을 세웠다. 이러한 현창사업은 결국 전주향교·용천의 섬학재 등을 중심으로 한 추적선생 문묘종사 운동에 까지 이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500년 만의 화려한 컴백(?)이라 할만 했다.
추적은 정사인 고려사를 비롯해 옛 선현들의 사서·문집 류 등에 수없이 등장한다. 그 중 신재 주세붕 선생의 무릉잡고(武陵雜稿)에 언급된 한 예는 특별히 주목할 만한 가치가 있다. 주세붕은 익히 잘 알려진 대로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우리나라에 성리학을 처음 도입한 안향 선생을 배향한 백운동서원의 설립자이다.
‘해동(海東·우리나라)에서 유교를 숭상하고 학교를 건립한 도(道)가 복초당(復初堂·안향의 호) 안선생 문성공 유(안향의 초명)와 노당 추 선생 문헌공 적으로부터 시작되었으니 이제까지 누구라고 흠모하지 않겠는가!’
이처럼 19c 중반에 이르러 전국적으로 문묘종사운동까지 일어났던 문헌공 노당 추적 선생. 그는 현재 대구의 인흥서원 외에도 전국의 여러 사당에 배향되어 있다. 충북 음성의 도통사(道統祠)·호서의 충현사(忠賢祠)·호남의 황산사(黃山祠)·강원의 첨학재(瞻學齋) 경현사(景賢祠)·경남의 도남재(道南齋) 등이 그것이다.
국내 유일의 명심보감 목판
인흥서원은 추적 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라는 점 외에도 대구시 유형문화재 제37호로 지정된 인흥서원본 명심보감 목판을 소장하고 있는 서원으로도 유명하다. 현재 우리나라에는 여러 판본의 명심보감이 통용되고 있다. 하지만 현존하는 명심보감의 목판은 이곳 인흥서원 장판각에 소장 중인 31매의 목판이 유일하다. 이 목판은 「기사인흥재사본명심보감목판(己巳仁興齋舍本明心寶鑑木板)」으로 불리는데, 기사년 즉 1869년(고종6)에 인흥재사에서 제작한 명심보감 목판이라는 의미이다.
명심보감은 책이름 그대로 ‘마음을 밝히는 보배로운 거울’이라는 의미로 근세 서당교육에서 초학용 교재로 사용된 것으로 알려진 책이다. 하지만 명심보감이 지금과 같이 널리 대중화된 것은 1959년 이승만 대통령에 의해 국민계도용 교재로 보급되면서 부터였다. 그런데 이 명심보감이라는 책은 그 이름에 걸맞지 않게 학계에서는 논란의 중심에 서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 자리에서 이 문제를 다루는 것은 옳지 않은 것 같다. 하지만 궁금증만 키워놓고 입을 닫는 것도 그다지 옳은 일은 아니다. 두 가지 정도의 주요 논란에 대해 키워드 정도만 언급해보기로 하자.
먼저 명심보감 원저자 논란이다. 명심보감은 기존의 여러 책들에서 귀감이 될 만한 글귀를 뽑아 엮은 책이다. 따라서 저자보다는 편저자로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불과 십 수 년 전까지만 해도 명심보감의 편저자는 ‘추적’으로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근년에 들어 학계를 중심으로 중국 명나라의 ‘범립본(范立本)’이 명심보감의 편저자라는 주장이 제기되어 현재까지 양쪽의 주장이 대립하고 있는 실정이다.
다음은 명심보감의 사상적 정체성 논란이다. 명심보감의 내용구성을 살펴보면 약 60% 정도는 유교사상을 담고 있지만 나머지 40%는 도교·불교사상이 혼재되어 있어, 유가의 교재로 보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주장이다. 글자 한 자만 다르게 해석해도 사문난적으로 몰아갔던 조선후기 성리학적 학문체계에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사이비 교재(?)라는 지적이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이러한 논란들은 우리 같은 일반인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편저자가 누구인가 하는 문제는 관련당사자들 사이에서는 무척 민감한 사안일 것이나 일반 독자들에게는 큰 의미가 없다. 그리고 정체성 논란 역시 지금의 한국은 ‘성리학의 나라 조선’이 아닌 까닭에 더 더욱 의미가 없다. 최근 들어 명심보감이 대중서로 각광을 받는 것은 ‘저자’ 또는 ‘유교·불교·도교’라는 사상 때문이 아니다. 한문으로 되어 있으나 문장이 쉽다는 점. 그리고 실생활의 지침으로 삼기에 더없이 적합한 그 실용성 때문이다.
명심보감을 둘러싼 이러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놓쳐서는 안 되는 분명한 사실이 하나 있다. 바로 우리나라 유일의 명심보감 목판이 인흥서원에 소장되어 있다는 사실이다. 확인은 못해보았지만 어쩌면 이 목판이 세계유일의 명심보감 목판일지도 모를 일이다.
인(仁)이 일어나는(興) 동네(里) 인흥리
대구의 주산인 비슬산 자락의 인흥리(仁興里). 참으로 많은 보물들을 간직하고 있는 유서 깊은 땅이다. 인흥리라는 지명은 고려시대 때 이곳에 있었던 인흥사(仁興寺)라는 절 이름에서 연유된 것이다. 일연스님(1206-1289)은 이 인흥사에 십 수 년을 주지로 머물면서 삼국유사의 뼈대에 해당하는 역대연표를 정리했다고 전한다. 그런데 재미있는 것은 일연 스님과 추적 선생이 모두 고려 충렬왕 때의 인물로 일연 스님은 생전에, 추적 선생은 사후에 각각 이곳 인흥리와 인연을 맺었다는 사실이다.
일연스님은 이곳 인흥사에서 삼국유사의 기초가 되는 역대연표를 정리했으며, 충렬왕으로부터 인흥사라는 친필사액을 받았다. 반면 추적 선생은 생전에는 고려조정에서 충렬왕을 보좌했고, 사후에는 이곳 인흥리에 묻혀 인흥서원과 명심보감을 세상에 남긴 것이었다.
한편 인흥리는 이 두 인물 외에도 여러 역사적인 인물들과 관련이 있다. 여말에는 도은(陶隱) 이숭인(李崇仁) 선생이 이곳에 머물렀다고 전하며, 조선 중기에는 인흥정사(또는 東溪精舍·東溪書舍)를 중심으로 대구유학의 중시조라 일컬어지는 한강 정구를 비롯한 ‘모당 손처눌·여헌 장현광·석담 이윤우·낙음 도경유’ 같은 향선생들이 이곳에서 교유를 하신 사실도 있다. 20c 초에는 남평문씨 세거지의 광거당(廣居堂)을 중심으로 전국의 학자·시인·묵객들이 이곳 인흥리에 모여들었다.
유교의 핵심 키워드는 인(仁)이라고 할 수 있다. 인(仁)이 일어나는(興) 동네(里). 과연 인흥리라 불릴 만하다.
에필로그
오백년 조선왕조의 지배이념으로서 역사의 중심을 관통해온 주자성리학. 그 성리학의 도입과 전파라는 험난한 과정의 중심에는 안향 선생과 함께 추적 선생이 있었다. 그리고 추적, 그를 기리는 서원인 인흥서원이 우리 대구 땅 인흥리에 있었다. 선생 사후 700년, 서원 건립 후 150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우리는 선생에 대해 무관심하다. 게다가 근래에 제기된 명심보감 편저자 논란으로 인해 고려 말 명신(名臣)이라는 선생의 지위마저도 어이없게 희석되고 있는 실정이다. 대단히 걱정스럽고 유감스러운 일이다.
팩트에 기초하여 이것만은 분명히 해두자. 노당 추적 선생은 15세에 등과를 통해 관직에 나아간 고려 말 명신이며, 안향과 더불어 어깨를 나란히 했던 우리나라 주자성리학 1세대라는 사실. 그리고 그를 배향한 우리나라 유일의 서원이 인흥서원이며, 우리나라 유일(혹은 세계에서도 유일할지도 모른다)의 명심보감 목판이 남아 있는 곳 역시 이곳 인흥서원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덧붙여 명심보감이 비록 정통 유가의 책은 아닐지언정 한문 텍스트로서는 현재 대중화에 가장 성공한 책이라는 사실이다.
인흥서원본 명심보감 목판
첨예한 논란 속에 있는 명심보감 편저자 문제. 이는 매우 신중하게 접근되어야 한다. 지금처럼 추적이라는 인물을 오로지 ‘명심보감의 편저자가 맞다·아니다’ 에 초점을 맞추면 안 된다. 이는 환국정치를 통해 노련하게 왕권을 지키며 조선왕조를 이끈 숙종을 두고 ‘여인의 치마폭에 놀아난 왕’으로 폄훼하는 우를 범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기 때문이다.
노당은 노당이요, 명심보감은 명심보감일 뿐이다.
노당 선조 현창을 위해 물심양면으로 노력하고 계시는 노당 선생 23대손 추태호 선생
(전 성균관청년유도회 대구본부 회장, 현 대구향교 장의)
☞주요참고문헌 <고려유학과 노당추적, 인흥서원편>
☞소재지: 달성군 화원읍 인흥 2길 26
이상끝...
2014.12.22
송은석(유교 칼럼니스트)
☎018-525-82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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