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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욥기로 들어갑니다. 욥이란 말은 ‘대적’ 또는 ‘미움’이란 뜻입니다.
우리가 욥기를 조금만 보면 하나님이 마귀의 시험을 허락하셨을 뿐,
하나님이 욥을 직접 건드리지 않았음을 압니다. 마귀가 두루 돌아다니다가 욥을
건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마귀가 그 생각 속에 들어가면 하나님을
대적하게 됩니다. 욥처럼 의인 행세를 하다가 그만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고 맙니다.
그리고 사람들과 대적하다 미움의 대상이 됩니다. 성격이 나빠져서 도전적이고
따지고 원망하고 불평하면서 욥처럼 말로만 ‘난 그런 사람 아니다’라고 합니다.
말은 ‘나는 하나님 앞에 죄 없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고 하나님은 나를
다 아신다, 나의 갈 길 그분이 다 알고 계신다’ 하지만 속으론 그렇지 않아요.
신앙이란 ‘믿습니다’는 외적표현보다 속에 있는 의식의 전환이 중요합니다.
요한복음 5장이 그렇습니다. 38년 된 병자가 하는 말은 물이 동할 때에 나를
못에 넣어줄 자도 없고 내가 가려고 하면 나보다 다른 이가 먼저 들어가 버린다.
그래서 나는 평생 안 된다는 겁니다. 나는 운이 없는 사람, 남이 몰라주는 사람이라
원통하다는 겁니다. 하나님이 기회를 나에게 주지 않는다는 은근한 불만을 가집니다.
이게 모든 인간이 날 때부터 가진 병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아들의 생명의 말씀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고 하십니다. 병의 원인 동기를 따질 필요 없습니다.
‘교회가 나를 몰라준다, 목사들이 나를 몰라준다. 아니면 사람들이 나를 우습게
본다, 그들이 나를 잘 못 보고 있다.’ 이런 것이 중요한 게 아닙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내게 임하면 바깥으로 믿음의 증거가 나타나는 겁니다. 그러나 그렇지 못할 때에는
욥기처럼 변명하고 서로 지적하고 네가 옳으니 내가 옳으니 도토리 키 재기를 합니다.
많은 주석가들이 욥기가 사실이냐에 의문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욥은
아브라함과 동시대에 있었던 실제 인물입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말씀을 믿으니
의롭다함을 받은 사람입니다. 욥은 하나님의 말씀 없이 사건 속에서 고난과 역경을
통해 대가를 지불할 것 다 지불하고 내가 귀로만 듣던 하나님을 눈으로 보았나이다
또 무지한 말로 그 이치를 가리운 내 입을 막겠나이다. 내가 티끌과 재에 앉아서
내가 회개하겠나이다. 결국 이렇게 고백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이 왜 우리에게 중요하냐면 하나님의 말씀이 믿음으로
내게 들어오면 그 때 나타는 것이 “하나님의 의”입니다. 하나님은 “의”를
동반해서 행차하십니다(시85:13) “의”가 없는 곳에는 주님이 일을 하시지
않으십니다. 그 밖에서 너풀거리시기만 합니다. 표적이나 기사나 꿈이나 환상이나
여러 가지지 사건을 통해서 ‘내다. 내가 왔다. 나를 받아 들여라. 너의 마음 문 밖에
서 있다. 내가 너와 함께 한다. 제대로 내 말을 들어라 내 말을 등한히 여기지 마라.
내 아들에게 입 맞춰라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지 마라 이 큰 구원을 등한히
여기면 모세의 율법도 심판을 받았는데 하물며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새 언약은
그 심판이 더 크지 않겠느냐?’고 말씀하십니다. 그런데 사람들의 신앙을 보면
그게 전부인줄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욥과 같은 고난을 받습니다.
어느 지방에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나 척 보면 알아야지’라는 말이 있죠.
그렇지만 아브라함은 말씀을 받고 믿은 처음 사람이 되었습니다.
믿음의 조상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말씀을 믿음으로 받기만 했는데
이 말씀이 그의 안에 들어와서 아브라함으로 하여금 살게 하더라는 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말씀은 신실하십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진실하십니다.
나는 말씀을 받았어요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았어요 사모하는 마음으로 받았는데
이 말씀이 나의 믿음이 되고 이 말씀이 나의 소망이 되고 이 말씀이 사랑이
되고 이 말씀이 능력이 되고 이 말씀이 나의 영광이 되더라고 간증하게 됩니다.
그와 같은 시인이 밖으로 발현되는 게 믿음의 증거입니다. 그리스도의 편지입니다.
세상의 소금이요 빛입니다. 그러나 욥이라는 사람은 말씀적인 신앙생활이 아니라
원래 타고난 인간의 본성 즉 선악을 가진 인간이 완전해 지려고 하다가
고난을 받고 나니 결국 하나님의 대적하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욥기는 이러한 인간에게 하나님은 완전히 코미디언처럼 나타나십니다.
38장에 ‘욥아 내가 땅의 기초를 둘 때 네가 어디 있었느냐 네가 뭐냐는 겁니다.
네 근본이 뭐냐는 겁니다. 너 알고 있냐? 들의 들소를 네 맘대로 움직이겠어?
악어를 봐 네 마음대로 장난감처럼 움직일 수 있겠어? 그리고 하늘을 한 번
쳐다봐 수많은 별들을 펼칠 때 너 어디 있었어 도와 준 게 있어 할 말 있어?’하십니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말씀을 하시므로 욥으로부터 할 말 없음, 정말 할 말 없음이라는
항복을 기어이 받아내십니다. 그렇게 해서 결국 욥에게 진정한 회개가 뭔가를 알게
하십니다. ‘내가 무지한 말로 하나님의 계획과 엄청난 복을 가리웠다’고 엎드립니다.
그래서 그때부터 욥의 입이 다물어 집니다. 말씀을 받은 요나도 입이 닫히고 맙니다.
저도 할 말은 많고, 욕심이 많아 뭔가를 이루고자 하는 배고픔이 엄청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남이 말하면 나도 알아 하고 나섭니다. 행여나 내가 무식한 사람
취급받을까 싶어서 뭐든지 알고 있어야만 했습니다. 남한테 절대 지지 않으려고,
공부면 공부, 테니스면 테니스, 뭐든지 이겨야했습니다. 심지어 성경지식까지...
그리고 남이 이야기하면 기어코 다 참견해야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러나 어느 순간부터 ‘주님, 세상이 내게 주는 것은 귀찮습니다. 오직 한가지 밖에
없습니다. 오직 내가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내게서 깡그리 다 가져가십시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에 대해서 못 박혔고 나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십자가에 못 박혔습니다. 아버지와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 외에는
어느 것도 알기를 원치 않습니다. 그 외에는 안다고 얘기하고 싶지 않습니다’는
고백이 나왔습니다. 그래서 누가 뭐라고 해도 광화문의 이순신 동상과 같아집니다.
대통령이 지나가도 입만 달린 국회의원이 지나가도 묵묵히 서 있는 동상 말입니다.
그래서 구원의 은총을 많이 받은 사람은 말이 적어요. 남편의 사랑을 충분히 받은
분은 말이 없습니다. 남편의 사랑을 많이 받지 못한 사람은 수다를 떠는 편이지요.
카페가 국회의사당입니다. 그들은 구원과 하나님의 사랑과 영광, 은사다 능력이다
말하지만 구원을 받아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와 긍휼을 아는 사람은 말이 없습니다.
그 엄청난 구원을 어떻게 말로 그려 내겠습니까? 남편의 사랑을 그 가슴에
담고 남편의 품을 아는 사람이 그 넓은 사랑을 어떻게 입으로 그리겠습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긍휼의 품을 말 몇 마디 로 표현할 수 있습니까?
다른 사람들에게 증거하기 위해서는 전도의 미련한 방법으로 그도 나와 같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게 하기 위하여 성경을 통하여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해서 설명하는 것뿐이지요. 그러고 나서도 어딘가 석연치 않는 겁니다.
그래서 가슴에 지퍼를 달아서 말 대신 열어 보였다가 다시 닫았으면 좋겠습니다.
세상의 문제는 소똥이나 개똥이 문제가 아니고 인간 때문에 무섭습니다.
에덴동산을 쫓겨 난 인간, 모든 인간은 이 불치의 병을 가진 인생으로 태어난다는
사실을 성경이 말씀합니다. 성경 외에는 이런 인생이라 말하지 않습니다. 아담이
흙으로부터 나왔습니다. 그래서 티끌입니다. 그러나 타락하므로 아주 복잡한 형태의
인간이 되고 말았습니다. 인간이란 불치의 병에 걸린 어떤 존재를 말하는 것입니다.
인생, 이런 불치의 병에 걸린 사람들에게 선을 행하라 헌금을 하라 그리고 교양을
갖추라 지식을 가져라 인내하라 깨끗하게 살아라 별 별 방법으로 다 가르쳐 보세요.
그 배운 걸 갖고 영악하게 더 큰 일을 저지르고 맙니다.
그렇기 때문에 옛말에 홍역은 앓지 않으면 죽어서도 앓는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신앙의 홍역은 한번은 앓아야 되는데 사람들이 홍역 예방 주사를 맞아서
홍역을 먼저 약간 앓고 맙니다. 근데 신앙의 홍역이 언제 오냐는 게 굉장히 중요해요.
저나 여러분이나 신앙의 홍역이 한번은 다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이 신앙의 홍역이
죽을 때쯤 오면 제일 불행합니다. 죽어가는 사람을 많이 봤습니다만 이 신앙의
홍역을 피하려고만 하다가 죽을 때 걸리는 사람이 있습니다. 얼마 전에 안타까운
분들을 최선을 다해 수습을 해서 보내드렸습니다. 이런 분들 유언하는 말은
거의 ‘예수 잘 믿어라’ 이 말 밖에 없습니다. 기껏 이 소리 밖에 못해요.
그 말의 뜻이 뭐냐면 ‘나는 예수를 잘 못 믿었다’는 시인입니다.
오래 전 한 장로께서 지리산 기도원에 가서 수고하고 계시는데 이 분은
늘 하는 말인즉 ‘목사님 제가요 교회 몇 개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이분은
내가 목사이기 때문에 목사 이야기를 꺼냅니다. 목사와 안 맞았던 얘기며
목사가 잘못한 얘기를 하고는 그래서 기어이 교회를 갈랐던 얘기를 합니다.
그런데 욥기의 소발과 엘리바스와 빌닷같이 그 분의 말이 이치에 딱 들어맞아요.
그리고 욥의 편에서 말을 하는 걸 보면 이치에 틀림없이 딱딱 맞습니다.
그래서 제가 ‘장로님 이치의 합당한 말로는 사람을 살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장로님이 더 이상 하나님의 일에 꼬챙이는 되지 마십시오. 꼬챙이는 하나님이
유익하게 쓰시더라도 나중에 버리십니다’ 제가 그 말을 하고 대화를 끝냈습니다.
중요한 것은 70세가 넘어서 시무장로로 은퇴한 이후에 신앙의 홍역이 온 것입니다.
자녀들이 안 믿습니다. 불신자인 딸이 보내주는 매달 20만원 갖고 겨우 삽니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아요. 그리고 평생 봉사하고, 기도할 만큼 했다는데 자신의
신앙의 역정이 그만 자기 자신을 배신하므로 너무 속을 상하게 한다는 겁니다.
원망과 응어리에 갇혀서 살고 있었습니다. 신앙의 홍역이 황혼에 찾아온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의 홍역이 빨리 오면 올수록 우리에게 복입니다.
말씀을 통하여 ‘내가 아니라 그리스도입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신앙의 홍역을
제일 잘 받는 방법은 “세례(침례)”입니다. 기독교의 표지는 말씀에 의한
“세례”와 “성찬”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죽었습니다. 희망 없는 나는
파산선고를 했습니다. 아담 안에 있던 나는 죄와 사망의 종이기 때문에 이 옛사람의
나를 포기했습니다. 정과 욕심이 십자가에 못 박혔음을 그대로 받아들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자기 죄는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총으로 해결했다고 믿는데
이 대속의 은총으로 자기의 옛사람을 처리 못합니다. 그래서 죄 사함 받은 것이나
안 받은 것이나 피장파장이 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 죄를 예수 그리스도가 해결해
주신 것을 알았다면 아담 안에 있는 옛사람은 죽었고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안에 그의
살으심과 연합이 되어 나는 새로운 피조물로 거듭났다 새사람으로 산다 할례나
무할례나 소용이 없는데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 새로 지음을 받은 자뿐이니라
라고 하는 사도 바울의 고백과 같은 그리스도의 흔적이 몸에 있어야 됩니다.
많은 사람들이 죄 사함만 생각하고, 자신의 옛사람을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성령의 기름부음이 없습니다. 죄 문제만 해결하고 옛 하늘과 옛 땅에 그대로 살아가고
있기 때문에 새 하늘에서 내려오는 성령의 기름부음이 그 속에 없습니다. 죄 사함
받았다는 고백은 있고, 구원 받았다는 고백과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다는 고백은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의 얼굴은 익어가지 않습니다. 탱글탱글한 시냇가의 조약돌과
같습니다. 말이 너무 메마릅니다. 건조합니다. 그의 심령은 굳어져 있습니다.
바늘 하나 꽂을 만한 마음의 여유가 없습니다. 철통같이 자기 방어를 합니다.
왜 그럴까요? 옛사람을 처리하지 못하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 속에 심어지는 새 사람이 되지 않습니다. 씨가 자라지 않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환난과 고난을 주십니다. 시험과 역경을 주십니다. 그래서 사형선고를
받아서 더 살 가망이 없어서 자기를 포기하는 것은 환난을 당할 때 위로를 받아
다른 사람을 위로하기 위함이고, 그 환난으로 말미암아 자기를 의뢰하지 말고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 의지하도록 하십니다(고후1장)
첫댓글 할렐누야! 오직 죽은 자를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만을 의지합니다.
참으로 주님은 찬양을 받으셔야만 됩니다!
아멘! 감사합니다.
주님을 찬양하며 그 이름을 송축합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