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도의 굽타왕조(Gupta dynasty)와 힌두교(Hinduism)의성립 이길상 가. 안드라왕조(Andhra / BC 3세기 말 ~ AD 3세기초?) (1) 인도 사(史)의 명암 BC 3세기 경 마우리아왕조의아소카왕은 최초로 인도를 통일하고 불교를 보호 장려하여 많은 사탑(寺塔)의 건립과불경의 결집, 그러나 왕의 사후 분열, 얼마간의 공백기를 지나 다시 스키타이계의쿠샨족이 북인도에 침입, 쿠샨왕조의 성립과 카니슈카왕의 불교 보호와 장려로 대장경의결집, 대승불교와 간다라미술의 등장, 왕의 사후 다시 분열, 찬드라굽타 1세가 등장하여인도의 재통일 등으로 각종 텍스트에서는 인도의 역사를 서술하고 있으나 이것을우리들의 통상적인 관점에서 판단하는데는 많은 어려움이 있습니다. 이런 사실들이 체계적인 기록에 의해서 밝혀진 것이아니라 정복자가 남긴 전승기념비문, 그런 전승비문의 여백(餘白)에 다시 후대의권력자가 자기의 공적을 추가로 덧 새겨 기록한 것, 각종 주조(鑄造)화폐에 새겨진조각(彫刻) 및 각인(刻印)된 내용, 도기(陶器)나 봉니(封泥)에 새긴 내용, 고고학(考古學)의발굴을 원용(援用)한 추정과 보완, 다른 지역에서 남긴 사료(史料), 구법(求法)승려들을비롯한 여행자들의 기행문 등을 근거로 하기 때문에 진위(眞僞)의 판단이 어렵고,해석 또한 보는 관점에 따라서 다양할 수 있겠지요. 이런 것은 정도의 차이는 있으나동남아시아 대부분의 지역의 공통된 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인도는 사막과 밀림, 평야와 고원이 함께 하는광활한 국토와 잡다한 인종(종족), 복잡한 언어와 예측 불허의 각종 재앙(災殃) 등이현세(現世)보다는 내세(來世)를 인간의 능력보다는 신의 위력을 경외(敬畏)하는 습속이오랜 전통으로 굳어져 삶과 주검을 자연(신)의 섭리(攝理)로 수용(收容)하는 숙명적인인생관을 가지게 되었고, 이런 것들이 현세의 삶이나 기록을 대수롭지 않게 취급한것도 원인의 하나라고 합니다. 이런 그들의 인생관은 전생(前生)과 현세(現世), 내세(來世)를오가는 윤회(輪廻)와 해탈(解脫), 인과(因果)와 응보(應報)라는 등식을 성립시켜4성 차별의 신분제도를 담담히 받아들이고 씨족 내지는 부족 단위의 소집단이 그들의추장(?)을 중심으로 독립된 공동체를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에 인도를 통일했다고해서 주민들을 전부 지배할 수는 없었고, 이들 추장(토후)들에게 공납을 받거나 주종(主從)의서약을 받는 것이 고작이었기 때문에 막상 인도의 민중에게는 누가 권력을 잡던 상관없다고여긴 것이 인도적인 토양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선사시대로부터 인도에 들어온무수한 외세(外勢)가 있었지만 그 누구도 인도 사회를 근본적으로 개혁하고 하나의통치단위로 통합하지는 못했습니다. 인도를 역사 공간으로는 크게 세 개의 지역으로 분류하고있습니다. 동으로 오늘날의 벵골만 에서 갠지즈 강을 따라 서쪽으로 나아가 펀자브지방을 잇는 북인도, 데칸고원을 중심한 중남부 일대의 중부인도, 그리고 삼각형의인도반도에서 꼭지점에 해당하는 남단(南端)의 남인도 등인데, 그 중 역사의 전면에서활약한 지역은 옛 마가다왕국의 고토(古土)였던 오늘날의 네팔왕국과 갠지즈강의중하류 유역으로서, 여기에서 불교와 자이나교가 발생했고, 왕사성과 나란타의 유적등이 있는 곳입니다. 마우리아왕조가 펀자브 지방에서 일어났으나 동진(東進)하여이 지역을 차지하므로 써 인도를 통일했다고 말하고, 쿠샨왕조 역시 서북인도로부터들어와 이 지역을 석권하고 인도를 지배했다고 이야기합니다. 그렇다면 통일이라고는하지만 그것은 인도의 북부일대에 한정된 것이고, 데칸고원과 그 남쪽은 그들의 전통과습속을 따르는 또 다른 왕국이나 토후국들이 무수히 있어서 반목과 협력을 뒤풀이하면서끈질긴 삶을 잇고 있었습니다. (2) 안드라왕조(Andhra王朝 / 기원전 3세기말 ~ 기원후3세기 초) 확실한 사료에 의하면 마우리아왕조가 성립될 무렵인기원전 3세기 후반, 데칸고원 일대에는 사타바하나 왕국이 일어나 5백년 이상을 지탱하고있었는데, 드라비다 족에 속하는 안드라족(族)이 세운 왕조라 해서 안드라왕국이라고부르고 있습니다. 그리고 데칸이란 산스크리트어로 남쪽 나라를 뜻한다고 하는데,동시에 아리아 족이 문화적인 생활을 하고 있던 북부인도에 대칭 되는 말로서 악마들이살고 있는 후진지역이라는 뜻을 내포하고 있다고 합니다. 아리아인들이 침입하자 이들의 노예가 되기를 거부하고쫓겨난 자들이 갈곳이 없어 헤매다가 거의 통행이 불가능한 데칸고원의 밀림지대로들어가 살았는데, 처음에는 데칸고원의 서부지대에 자리잡았으나 북쪽에서 밀려온사카족의 압력으로 동부 지역으로 이주, 이곳은 예로부터 표범, 호랑이, 코끼리,뱀, 하이에나, 원숭이들이 득실대는 몹시 더운 곳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마우리아왕조의 초기에 안드라 왕국은 이미보병과 기병, 그리고 코끼리부대까지 갖춘 강력한 군사력을 보유한 큰 세력으로 등장하였으나,아소카왕 때는 그의 강력한 힘에 밀려 마우리아왕조의 종주권(宗主權)을 인정했다가왕의 사후에 독립을 회복하고 북쪽으로 영토를 넓혀 기원 28년경에는 마가다를 쳐들어가이곳에 있었던 칸바(Kanva)왕조를 무너뜨리고, 다시 1세기말에서 2세기초에 걸쳐서해안으로 쳐들어 온 사카족의 세력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대칸의 대부분과 북부인도의일부까지를 지배영역으로 삼았는데, 이것이 대략 120년경의 일어난 일이 됩니다. 이때의 안드라 왕은 가우타미푸트라 슈리 샤타카르니(GautamiputraSri Satakrni)라는 긴 이름을 가지고 있는데, 안드라왕조의 최대의 왕으로 알려져있습니다. 그런데 그의 이름에서 가우타미푸트라는 가우타미(고타마)집안 출신의부인 아들이라는 뜻이며, 슈리는 개인 이름, 샤타카르니는 씨족(氏族)의 명칭으로,이를 우리 식으로 풀어보면 가우타미 가계(家系)의 부인 아들 샤타카르니 족의 슈리라고할 수 있는데, 이것은 어머니 집안을 성(姓)으로 삼는 인도의 모계(母系)사회의 유습을보인 것이라고 합니다. 안드라왕조는 인도 원주민에 의해 이룩된 순수 인도인의왕조로서 브라만교가 성행, 4성에 의한 카스트제도가 확립되어 있었고, 왕조의 세력범위는직할령에 한정, 왕국 내에는 수많은 번후국(藩侯/土豪)이 있어서 토후들에 의해서통치되는 봉건제도가 채택되어 있었으며, 토후(土侯)들의 주민 통치는 철저한 신분제도에의한 차별에 의지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국왕 이하 지배층은 브라만교를 신봉했으나 불교에대해서도 매우 관대했기 때문에 두 종교가 사이좋게 번영할 수 있었습니다. 이래서불교미술사에 빛나는 산치탑의 네 문에 새겨진 조각과 장식 무늬, 간다라 미술의흐름을 볼 수 있다는 안드라 주(州)의 아마라바티 탑, 서고츠 산맥의 측면에 판 동굴(洞窟)승원을비롯, 푸우나를 중심으로 한 카루리, 칸헤리, 나식 등지의 동굴사원, 그리고 봄베이동북방 480킬로미터 지점에 있는 아잔타(Ajanta)석굴도 이미 기원 전후, 이 시기에조성되기 시작하였습니다. 불교가 이 정도라면 브라만교의 부흥과 그 기세는이보다 더해서, 이미 베다의 여러 신들을 대신하여 시바(Siva), 비슈누(Visnu) 등의힌두의 신들이 역대의 왕들과 서민의 신앙을 광범위하게 차지하고 세력을 넓히고있었고, 이것이 다음의 굽타왕조시대에 왕성하게 나타나는 힌두교의 바탕을 만들고있었으며, 동시에 인도의 고전과 브라만의 철학 부흥, 힌두교의 승리는 이미 안드라왕조에서전주곡을 연주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안드라왕조의 경제기반은 고대왕국 답지 않게 농업이아니라 상업, 그 중에서도 외국과의 통상에서 얻는 이익이 주류를 이루었기 때문에북쪽에서 침입해온 사카족의 여러 왕국과의 끊임없는 투쟁도 인도 서해안의 많은항구를 서로 차지하기 위한 방편에서 비롯되었으며, 영역내의 서해안 각 항구에는페르시아 만과 아라비아해안을 왕래하는 선박들에 의해서 늘 붐볐고, 특히 서방의로마제국과의 교역은 큰돈을 만질 수 있는 기회가 되어 활발하게 교환이 이루어지고있었다고 합니다. 이집트 프톨레마이오스 왕조의 수도였던 알렉산드리아로부터그리스인들이 가지고 온 포도주, 유리 제품, 황금 등과 인도산 마노(瑪瑙) 등의 보석,질 좋은 면사(綿紗)를 비롯한 직물, 향료 등과 교역을 했는데, 이런 것들은 당시로마의 귀부인들이 매우 좋아했기 때문에 수출이 많아져 다량의 금화가 인도로 들어왔다고합니다. 그러다가 사카족의 남하세력과 끊임없는 대치 속에서 2세기 말경에는 여러왕국으로 분열 사실상의 왕조는 단절되었고, 다만 그 잔존세력의 일부가 6세기 말칼루키아(Chalukya)왕조에 병합될 때까지 겨우 명맥을 유지하고 있었습니다. 나. 굽타왕조(Gupta dynasty : 320 ~ 530?) (1) 굽타왕조의 성립 쿠산왕조가 마치 달이 지듯이 소리 없이 사라지고난 뒤, 북부 인도의 각지에는 사카족을 위시해서 스키타이, 파르티아 계통의 소왕국들이할거(割據) 난립(亂立)하여 약 200년간 분열과 항쟁을 되풀이하고 있었습니다. 특히갠지즈 유역의 동부 지역에서는 칸바왕조가 데칸을 본거지로 한 안드라왕조에게 기원28년경 패망된 후 약 300년간 마가다의 역사에는 아무것도 알려진 것이 없는 단절의시대가 됩니다. 그렇지만 이곳이 인도정치무대의 본산이라는 점에서 미루어 보면아마도 여러 소국들이 분열과 항쟁, 그리고 융화를 되풀이하고 있었다고 미루어 짐작하고있을 뿐입니다. 이러한 역사의 공백기를 지나서 옛 마우리아왕조의파탈리푸트라의 왕위를 계승하고 중부 인도까지 지배한 마하라자(위대한 왕) 찬드라굽타1세(320 ~ 335?)가 등장하여 굽타왕조를 세움으로서 인도의 역사는 다시 시작되었습니다.그의 과거 행적이나 가문의 내력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없고 다만 마우리아왕조를열었던 찬드라굽타의 이름을 사용한 것으로 보아 미천한 출신으로 기병(起兵)하여세력을 넓히고, 전대부터 명문거족이었던 이웃 바이살리를 점령하고 강화조건으로왕가의 딸을 비로 마지 하여 성대한 결혼식을 올림으로써, 신분적인 열세를 만회하고왕가로서의 자격과 권위를 높였다고 보고 있는데, 그 날짜가 서기 320년 2월 26일,...어쨌던이로서 굽타왕조의 기원은 여기서 시작되었고 이것만은 기록에 근거한 확실한 사실이라고합니다. (2) 굽타왕조의 번영 굽타왕조 번영의 초석(礎石)을세우고 가장 위대하고 유능한 군주가 된 것은 찬드라굽타 1세의 뒤를 이어 왕위에오른 사무트라 굽타(Samutra Gupta / 335 ~ 376?)로서, 갠지즈강 유역의 여러 나라를토벌하고, 이어서 힌두스탄 평원을 평정하여 중앙인도를 통일하고, 여세를 몰아 동서남북으로출정, 여러 나라가 자진해서 귀속케 하였으며, 북부인도와 격리되어 있던 데칸에원정, 칼링가 해안에서 동해안을 따라 남하하면서 여러 왕국을 정복하고 남단에 가까운칸치 지방까지 진격, 도중에 남인도의 패자(覇者) 팔라마왕이 이끄는 데칸 연합군을격파, 이들을 종주권을 인정받는 선에서 강화를 성립시키고, 간접지배를 시도, 막대한공납을 요구하여 부를 빼앗아 갔습니다. 남방원정에서 개선하는 도중 말을 제물(祭物)로 바치는장엄한 브라만의 마사제(馬死祭)를 올렸는데, 이는 대정복 왕만이 행할 수 있는 조상전래의브라만의 제전으로 인도의 최고 주권을 선포한 왕가가 그 정복의 위업을 하늘의 신과천한 백성 앞에서 과시하는 행사라고 합니다. 이런 내용들은 아소카왕의 엘라하벳석주의 상부에 덧새긴 서사시에 의해서 밝혀지고 있다고 하는데, 600년전 아소카가법의 승리를 믿으며 속어(俗語)로 새긴 칙령(勅令)과 나란히 정복의 피비린내 나는사실들을 고전적인 산스크리트어로 여백에 덧 새겨놓은 것은 역사의 희비(喜悲)라고할 수 있겠지요. 이것은 베다 성전과 브라만의 전유물이었던 산스크리트 어가 보편화되는과정을 보여주기도 하고, 브라만의 권위 실추를 상징적으로 의미하기도 합니다. 사무트라 굽타의 뒤를 이어 찬드라굽타 2세(375 ~414?)가 즉위, 스스로 "무용(武勇)의 태양(太陽)" (중국에서는 超日王으로기록)이라고 자칭하고, 정복과 혼인, 회유를 병행하면서 영토를 확대하여 아소카왕에버금가는 통일제국을 이룩하였습니다. 특히 인더스 하구에서 카티아와르(Kathiawar)까지의 연안지역을 차지하여, 인도양으로 나가는 해양로의 확보로 아라비아를 거쳐이집트를 지나 유럽 여러 나라와 통상의 길을 열어 번영하였고, 델리 근교에 철주로개선(凱旋)비를 세웠는데, 철주의 정상에는 통일제국을 상징하는 연꽃 장식이 새겨있어서 탁월한 철공기술을 보여줌과 함께 왕의 위업을 후세에 전하고 있습니다. (3) 훈족의 침입 찬드라굽타 2세를 이어 쿠마라 굽타 1세(Kumara Gupta1 / 414 ~ 455?) 때까지 번성했으나, 다음대인 스칸다 굽타(Skanda Gupta / 455 ~470?) 때 반란이 일어나기도 하고 훈족의 침입을 받아 곤욕을 치렀는데, 훈족이라고하면 375년 흑해 북안으로부터 유럽에 침입, 동서고트족을 압박하여 게르만족의 이동을촉진시켰고 이로 인해서 서로마제국이 무너졌다는 것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지요.그리고 5세기 중반 추장 아틸라는 헝가리 평원을 본거지로 주변의 동고트족을 비롯한게르만의 제부족을 복속시키고 동으로는 카스피해에서 서로는 라인강에 이르는 대제국을건설, 동로마제국으로부터 조공을 받았으며, 갈리아에 원정 오를레앙을 위협하고,로마까지 침공하였으나 그의 사후 제국과 함께 훈족도 아틸라제국도 자취 없이 사라지고말았습니다. 그리고 니벨룽겐의 노래에서는 아틸라가 에첼로 묘사되고,.... 이들이 중국 사서에 등장하는 몽골 초원지대의 유목민흉노(匈奴)와 동일 종족인지 아니면 투르크계의 기마민족(騎馬民族)인지의구분도 아직은 밝혀진 바가 없다고 합니다. 다만 그들이 어디를 가나 약탈과 만행이너무나 잔인했기 때문에 당하는 측에서는 공포와 저주의 대상 이였는데 이들이 북인도에 침입해서도 그 잔인성을 유감없이 발휘, 간다라 지방을 중심으로 번영을 누리던불교 교단에 참혹한 피해를 가하여 장엄한 사원과 아름다운 불상, 이색적인 탑과조각품을 거침없이 부수고 승려들을 대량으로 학살하였습니다. 굽타왕조의 군대는 이 침입자를 물리치기 위해서 안간힘을썼으나, 그들을 파미르고원 너머로 쫓아내지는 못했고, 이들 중 일부가 카슈미르의왕을 자칭하고 횡포를 거듭했으나, 홍수가 밀려가듯 이들의 침략도 곧 끝나고 말았으나이로 인하여 굽타왕조도 쇠망의 혼미를 거듭하여 다시는 옛 영화를 찾지 못한 체붕괴의 길을 걸었습니다. 530년 굽타왕조로서는 마지막 왕으로 알려진 발라디트야(Baladitya)가죽음으로써, 사실상의 왕조는 끝나고, 그 후 여러 왕국으로 분열된 북인도의 작은왕국의 하나로 명맥을 유지하다가, 8세기 중엽 벵골에서 일어난 파라(Para)왕조에병합되어 최후를 마쳤습니다. 다. 인도인의 종교 힌두교 (1) 힌두교의 성립 인도에서 마우리아, 쿠산에이어세 번째 통일왕조를 형성한 굽타왕조는 약 200년간 평화를 유지하면서 북방의 쿠산족을몰아내고 사카족이나 투르크인들이 차지했던 서인도의 영토를 되찾아 통일을 이룩하는과정에서 필연적으로 고조된 것은 인도적인 민족의식의 각성이었습니다. 인도는 인도인의것이어야 된다는 것이지요. 따라서 성스러운 베다의 신을 받드는 고유의 인도로 돌아가야한다는 민족 반성이 계기가 되어 아소카왕이나 카니슈카왕의 보호 아래 성장했던불교나 자이나교에 눌려 상대적으로 빛을 잃고 있었던 힌두교가 표면에 다시 나타나게되었습니다. 인도의 베다와 카스트제도 등은 칼럼 5호를 비롯해서연관되는 항목마다 설명을 하였기 때문에 중복을 피하기 위해서 다시 부연하지 않겠습니다.다만 베다가 브라만 계급만이 독송할 수 있는 전유물로서 일반인들은 독송이나 접근이불가했고 계급에 따라서는 듣는 것조차 부정(不淨) 탄다고 해서 이를 엄격히 금했기때문에, 이런 원시적인 종교나 제의(祭儀)로서는 발전 변화되는 민중의 의식, 즉종교적인 욕구를 충족시킬 수는 없었습니다. 이런 종교적 갈망을 염원하는 의식의 변화는 기원전2세기부터 싹트기 시작하여, 굽타왕조에 와서는 브라만들 사이에서만 쓰이던 산스크리트어가 궁중어, 공용어, 문학어로 쓰이게 되고, 마하바라타와 야마나야의 2대 서사시와마누법전 등이 산스크리트어로 완성되는 수순을 밟고 있었습니다. 여기에서 베다를대신한 서사시가 민중들에게 널리 독송되면서 다시 수많은 인도적인 신들이 등장,창조주로서의 브라만과 파괴 신으로서의 시바, 유지 신으로서의 비슈누의 신격이형성되고 다시 인도적인 토착 신들이 잡다하게 가미되어 힌두교라는 인도의 고유종교가나타나게 되었습니다. 힌두란 인도라는 말로서 넓은 의미의 힌두교라고 하면브라만의 베다 신앙까지도 포함되지만, 베다가 자연신을 모체로 숭배 물로서의 신상(神像)이없었으나 힌두교에서는 브라만교의 바탕에 인도적인 모든 요소가 가미되고 불교 등의영향을 받아 신상이 등장하고 예배의 대상이 되었으며 카스트제도가 다시 부활하게되었습니다. (2) 힌두교의 발전 힌두교가 인도적인 풍토에서 서서히 성장하였기 때문에특정한 교조와 체계를 갖고 있지 않으나, 다양한 신화·성전(聖典)전설·의례·제도·관습을포함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다양성을 통일하여 하나의 종교로서의 구체적인 기능을가능케 하는 것은 카스트 제도였는데, 이의 기원은 브라만에 규정된 사성(四姓) 즉브라만·크샤트리아·바이샤·수드라의 종족 분류의 신분제도였지만, 세월이 지나면서종족의 분류는 물론이고, 직업과 종교적인 제조건이 다시 복잡하게 얽혀서 인도사회를지금까지 유지하고 있습니다. 이런 카스트제도를 이론적으로 뒤 받침한 것이 마누법전(Manu,Code of)으로서 마누(Manu)란 일체의 법에 관한 최고의 권위로 숭앙 받는 인류의시조를 뜻한다고 하는데, 마누의 계시에 의하여 성립되었다고 전할 뿐 그 누가 언제썼는지는 알 수 없다고 합니다. 인도에서는 종교·도덕·습관 등을 묶어서 법이라고하는데, 이 법전에서는 우주의 개벽, 만물의 창조에서부터 인간이 일생을 통해행하여야 할 각종 의례, 행사, 제사, 학문, 생명주기(生命週期)에 관한 규정, 국왕의의무, 민법·형법·행정에 관한 규정, 카스트간 규칙엄수와 속죄의 방법 및 윤회(輪廻)와업(業), 해탈에 관한 논의(論議) 등이 상세히 기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법률론적 조항 중에는 상속법·혼인법·재판절차 등도들어 있지만, 브라만 계급을 옹호하는 입장이 전편을 통하여 역력히 드러나 있고,또한 힌두교로 강하게 채색된 관습법의 집대성 등으로 미루어 보아 산스크리트어의운문으로 기록된 이것은 법전이라기보다 종교적 성전의 성격이 강하다고 합니다. 힌두교의 근본 경전은 베다·우파니샤드이나, 마하바라타와라마야나의 2대 서사시가 널리 애송되면서 인도인들의 구미(口味)에도 맞아 실질적인경전 구실을 하고 있으며, 브라만교의 많은 신들도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다신교같아 보이지만, 신들의 배후에 유일한 최고자를 설정하고 그 신들을 최고신의 현현(顯現:權化)이라고하여 교묘히 통일시키고 있는 점에서 일신교적 형태를 취하고 있습니다. 이런 것은우주를 창조한 신으로 브라마, 유지신 비슈누, 파괴신 시바의 세 신을 일체로 하여최고의 실재원리로 삼는 있는데, 그 중 비슈누와 시바를 숭배하는 사람들이 힌두교의2대종파를 이룬다고 합니다. 비슈누 파는 학문적 성격이 강하며, 비교적 사회의상층부에 속하고, 이는 비슈누가 때에 따라 인간의 모습과 동물의 모습으로 지상에출현하는 것으로 믿고 있으며, 이런 것을 비슈누의 권화(權化)라고 합니다. 비슈누는10가지의 권화를 가지고 있는데 그 중의 라마야나에서는 라마로 마하바라타에서는크리슈나로 인간 세상으로 내려와 각가지 영웅적인 모험담을 펼쳤고, 이에 따라 비슈누파는 다시 라마 파와 크리슈나파로 나뉘었다고 합니다. 비슈누 파에 비하여 시바파는 사회 하층 부에 세력이 있으며, 수행자의 고행·주술, 열광적인 제의(祭儀)가특색이라고 합니다. 또한 인도에서는예로부터 신의 아내, 곧 배우자(神妃) 숭배가 성하여 브라마에게는 시라스바티(辯才天),비슈누에게는 라크슈미(吉祥天)가 배우(配偶) 여신으로 알려져 있으며, 시바신의배우여신으로는 두르가·파르바티·우마·칼리 등 많은 다른 이름이 있습니다. 이들 여신을샤크티(여성적 창조력)라고 하며, 이들을 숭배하는 샤크티파도 있다고 합니다. 또한 죽은 후라 할지라도 업(業)의 속박에서 벗어나는것은 어렵다고 보았기 때문에 이런 속박에서 해탈하는 방법으로서, 집을 떠나 수행길에 오르거나(遊行) 고행 또는 요가가 설파되고 있는데, 고행은 주로 육체의 수련,요가는 정신의 통일을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힌두교 사회의 도덕관념의 기초는 브라만교의법전에 규정되어 있는 카스트제도와 4생활기(學生·家住·林住·遊行期)가 중심으로서,이를 달마(법·의무)라고 하며, 자기가 소속하는 카스트에 따를 의무의 수행이 강조되고,최고신에 대한 바크티(信愛)와 그 은총은 능력·성별·직업·계급 여하에 관계없이일반 민중의 구제를 위하여 가르쳐진 것이라고 합니다. (3) 밀교(密敎)의 성행과 불교의 쇠퇴 브라만교와 힌두교에 밀린 자이나교와 불교에서도,이런 사회 변화에 대응할 수 있는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지 않으면 안되게 만들었습니다.그래서 두 종교 다 같이 산스크리트 어를 교단 용어로 채용하고, 당시의 계급적 신분질서와타협하기 위해서 인간 사회의 불평등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여, 보살(菩薩)은 브라만이나왕족 같은 상류계급 출신에 한하며 천한 신분의 가문에서는 태어날 수 없다고 새로운해석을 붙이기도 했고, 제왕의 신성(神聖)설을 주장하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경향은 세월이 지나면서 더욱 현저하게 나타나차차 불교가 비밀불교, 즉 밀교 화하여 자격 있는 사람이 아니면 그 교의를 가르쳐주지 않게 되고 힌두교의 탄트라(tantra) 신앙과 결합, 미신적인 주술(呪術) 체계로서,성력(性力:sakti)을 숭배하는 타락된 불교인 좌도밀교(左道密敎)가 되어 인도에서는점차 자취를 감추었는데 밀교(密敎)란 일반의 불교를 현교(顯敎)라 하는 것에 대한대칭어로서 대승불교의 화엄(華嚴)사상·중관파(中觀派)·유가행파(瑜伽行派)사상등을 기축으로 하여 힌두교의 영향을 받아 성립하였으나 인도에서는 힌두교의 영향으로좌도밀교가 되어 타락하였으나 다른 지역에서는 후기 대승불교를 모체가 되었다고합니다. 밀교의 산스크리트 어는 바지라야나(금강승)로서,금강승은 실재(實在)와 현상(現象)을 자기의 한 몸에 융합하는 즉신성불(卽身性佛)을목표로 하는 것으로 "다양한 것의 통일"이라는 사상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며,그 통일원리는 공(空)과 자비(慈悲), 반야(지혜)와 방편의 일치(空悲無二)로 나타나는데,인도에서 티베트·네팔 등으로 전파되어 오늘날도 행해지고 있는 것은 이슬람 침입(11세기)이후에 이룩된 구생승 계통이며, 중국·한국·일본 등의 밀교는 토착신앙과 결합된요소가 많아도 성력적 요소는 없다고 합니다. 현세적 욕망을 처리하는데 주술(呪術)을 동원하는금기(禁忌)·부적(符籍)·주법(呪法) 등으로 표현하는 것을 잡밀(雜密, 또는 呪密)이라고하며, 이에 반해 극단적인 신비주의 속에서 발달한 상징철학으로서의 밀교를 순밀(純密,또는 通密)이라 부르는데, 7세기 후반에 차례로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는 대일경(大日經)과금강정경(金剛頂經)이 기본경전이라고 하며, 밀교의 두 가지 세계관인 태장계(胎藏界)와금강계(金剛界)는 이 두 경에 의해 설명된다고 합니다. 다. 굽타 문화(힌두 문화) 인도에서 시성(詩聖)으로 추앙 받는 칼리다사는 굽타왕조의궁정시인으로 찬드라 굽타 2세의 비호 하에 비크라모르바시(5막 극)와 사쿤달라(7막극)를 비롯해서 많은 서정시와 서사시를 썼는데, 후일 독일의 괴테가 사숙하는 등세계 문학사에 적잖은 영향을 끼친 작품들을 많이 남겼고, 미술에서도 굽타 조상(彫像)이라는아름다운 양식의 조각이 이 시기에 나왔으며, 불상도 몸에 붙는 엷은 옷을 통해 손과발의 윤곽이 드러나는 특색을 지니게 되어 간다라불상에 보이던 그리스의 영향을소화하여 독특한 인도 불상을 남기고 있습니다. 회화에서도 사원의 벽을 장식하는 작품을 많이 남겼으며,아잔타 동굴 벽화에 이르러 절정에 달했고, 그 외 금속세공을 비롯한 공예와 천문학,수학이 진보하여 영(零 : zero)의 개념과 십진법의 사용, 원주율을 활용한 지구 둘레계산, 인력(引力)의 법칙 등도 이미 밝히고 있었습니다. 이런 문화 중흥의 바탕에는서방세계와의 교역을 통한 부의 축적, 역대 왕의 비호, 도시의 융성과 상류사회의형성, 그리고 시민의 출현 등이 직 간접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었기 때문인데, 또하나 인도적인 특이한 현상은 카마수트라(Kama Sutra)라고 하는 성애(性愛)의 교과서(?)가편찬되어 널리 읽히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힌두교 서사시 마하바르타에서는 인생의 목적을 사랑(愛),재산(財), 법, 그리고 해탈의 넷으로 나누고 있는데 이것이 다시 정리되어 인생에필요한 세 가지 요소, 즉 첫째, 법, 도덕률, 의무 등을 뜻하는 달마(Dharma), 둘째,이재(理財), 처세(處世)를 뜻하는 아르타(Artha), 셋째, 성애(Kama)의 지식을 들고있는데, 성(性)을 중요시하고 이를 만족시키는 것이 인간의 의무이며, 이상적인 인생이라고강조하고 있습니다. 굽타왕조 때 나온 것으로 보이는 카마수트라(Kamasutra)는산스크리트어로 쓰인 그러한 성애의 교과서적 기록 중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4세기경에바츠야야니가 썼다고 전해지고 있습니다. 이 책에서는 성애의 기교, 소녀와의 교접(交接),아내의 의무, 남의 아내와의 통정(通情), 창녀(娼女), 미약(媚藥) 등에 관해 상세하게기록하여 이후의 문예작품이나 조각에는 그 영향이 결정적인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이것은 인도와 같은 기후 풍토에서 여인의 자태는 벌거숭이 알몸으로 표현되었고,성이 일상생활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드러나게 클 뿐만 아니라 노골적인 성애를 사회가너그럽게 인정했기 때문인데, 자칫 문란하기 쉬운 일반시민을 성지식(性知識)의결여에서 오는 위험으로부터 구하고자 하는 책으로서, 고대인도의 일상생활이나 사회에관한 중요한 자료가 된다고 합니다. 인도의 문학 작품이나 사원의 조각 등에 난무하는군상이 많이 보이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이해하면 고대인도인의 세계가 그늘 없이소박하게 살아간 그들의 사고 방식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것입니다. 다음 이야기 -이성계의 조선건국과 주원장의 명나라건국- hindu music Deva여기를 클릭하시면 힌두음악 Khwabon을 들어실 수 있습니다. |
출처: 이길상의 세계사풀이 원문보기 글쓴이: 익명회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