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는 인간에 대하여
부드런 강철
저자는 전작 라틴어수업를 포함 100쇄 이상을 찍었는데 신부이기도 하고 학자이기도 하지만 이분을 글 쓰는 사람으로 평가를 해 주고 싶다. 라틴어수업도 라틴어라는 어려운 분야를 차분하게 풀어 일반 대중에게 어필할 수 있도록 글을 썼는데 이 책도 종교적인 얘기를 종교인 보다는 일반인 상대로 역시나 아주 차분히 아주 잘 썼다. 이 사람은 신부이지만 천주교를 믿는 사람만의 도그마에 빠지지 않고 일반 사람들에게도 설득력있게 어필할 수 있는 그러한 내용이 많이 들어가 있는 글을 썼다.
개신교는 유일신 사상이어야 하는데 이분은 신부의 신분으로 유일신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이다. 이슬람, 유대교, 기독교가 한곳에서 뻗어 나갔음을 인정하며 같은 뿌리에서 나와 비슷하니 종교를 마음을 수련하는 방편이다라고 얘기하고 있다.
이분이 추구하는 마음을 수련하는 방법을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는데
p30
저는 2019년에서 2020년으로 넘어가는 길목에 ‘종교 박물관’과도 같은 도시, 예루살렘에 머물렀습니다. 그때 동방과 서방 그리스도교의 여러 성직자와 수도자, 목사, 이슬람의 종교 지도자 이맘, 유대교의 종교 지도자 랍비의 얼굴들 속에 내적 평화가 깃들어 있고 인간과 세상의 어려움을 포용할 ‘어른’의 얼굴이 있지 않을까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지금 그때를 돌아보면 그 얼굴은 밖이 아니라 제 안에서 찾아야 했던 게 아니었나 합니다.
외적인 구원이나 외부의 절대자의 권위를 빌려 평화는 찾는 것이 아니라 자기 마음속에서 스스로 찾는 것을 계속 얘기한다.
이 책은 코로나 팬데믹 시기에 많이 쓰여졌는데 그 시기의 종교적 고민이 글에 담겨있다.
p105
예전처럼 종교 행사에 참석할 수 없는 상황에서 많은 이들이 자기 신앙을 지켜나가는 방법에 대해 고민하고 일상에서 전보다 더 내적 평화를 가지고 충만한 신앙생활을 하고 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합니다.
교회라는 공간에 가서 꼭 기도하는 절차나 의식을 고려한 외면적인 것도 좋지만 내면적인 평화를 추구하는 것 또한 종교생활로서 중요하다고 보았다.
p121
믿음을 따르는 인간은 그 믿음으로 예배하고 경배할 공간을 더 화려하고 웅장하게 만들어 나갔지만 그 안에 머무는 인간은 그 예배의 공간만큼 대단하지도 거룩하지도 않았나 봅니다.
그 때문에 ’수도복이 수도승을 만들지 않는다‘는 관용어가 생겨난 것이 아니었을까요?
이런 식으로 계속해서 어떤 종교 의식이나 외적인거보다는 내적인 면을 강조하고
p149
두려움으로 종교심을 가꾸는 자는 결코 경건한 사람이 아니다. 이보다 진실한 말이 있으리라 생각하지 말라
라는 문구를 강조하며 피사의 사탑같은 경건한 종교시설물, 악마나 사탄의 이야기, 죽음 이후의 지옥으로 두려움을 이용해 예수의 품으로 들어가는 방식의 종교는 이분에겐 안 통하고 내적인 수양을 강조하는 것을 차분하게 잘 얘기하고 있다.
아름두리
자신이 신에 대한 존재 자체를 별로 믿지 않는 스타일이라서 인간이 갖고 있는 믿음을 깔고 그 믿음이 갖는 정서적 안정성을 기반으로 해서 책이 진행되는 느낌이라 인간심리의 불안전성이 종교를 찾는다는 생각을 갖고 사는 입장에서는 ’참 평화로운 책이다‘라는 생각을 했다.
물론 여기 나오는 내용들은 복잡하고 중동 문제 또한 다루고 있지만 깊고 강렬하다기보다는 믿음을 갖고 있는 사람들을 상대로 차분하게 접근하여 적절한 좋은 말로 신심을 이끌어내는 책이 아닐까 싶다. 그래서 깊은 감동이라기보단 서양사에 대한 새로운 관점’ 서구 보단 중동을 중심으로 한 사고를 차분하게 풀어낸 게 아닌가 싶고 마지막에는 현대인들이 믿음을 어떻게 바라봐야 될까 라는 시선을 담고 있다고 읽었다.
그리고 사실 나는 망가진 인간인지 불안한 인간인지 글이 잘 와닿지 않았다. 책은 되게 좋다고 생각해 20대쯤 읽었으면 어쩌면 차분하게 잘 읽었을 것 같은데 50이 돼서 읽으니 ‘그렇게 편안한 세상을 살고 계시군요’ 정도의 생각이 들 정도.
크로우
뭐 특별히 할 얘기는 없고 내용 좋고 괜찮게 읽었다라는 정도로 할 수 있을 것 같다.
세부적인 거 하자면 코로나 시기 신문에 기고했던 것이라 시기가 약간 틀어지는 느낌은 있었지만 전반적으로 글도 좋고, 글에서만 봐도 글 쓴 사람 자체가 굉장히 인품과 성품이 느껴지고, 글 또한 훌륭한 내용이었기 때문에 내용 자체를 논하기보단 좋게 읽으면 되는 책인 것 같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저자는 종교나 사람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종교인보다는 오히려 수학자, 공학자에 더 가까울 정도로 굉장히 합리적이고 논리적인 사람인 것 같아 종교인보단 회사에서 부하직원으로 두면 일 엄청 잘할 것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리고 이분에 대해 본받았으면 하는 점이 이분은 공부하는 사람인 것 같다. 내가 특별히 어떤 분야이든 우위의 것이 없는데 그나마도 책상머리에서 뭔가 읽고 생각하는게 조금 낫지 않나.. 나도 공부하는 사람으로 내 방향성을 정해야하지 않나..그런 생각을 좀 하게 되었다.
가을햇볕
시작하기 전에 고해성사를 먼저 한번 하자면 고등학교 2학년 때까지는 개신교 교회의 아주 충성스러운 참신자였으나 고2때 신과 종교의 관계에 대해서 고민하다 읽은 책이 이문열의 ‘사람의 아들’ 이었고 그 책을 읽고 나서 교회를 버렸다.
책 안에서 누가 누구를 죽였다. a가 b를 죽인 거는 a의 뜻이냐 아니면 신의 뜻이냐
대표적으로 나온 게 카인이 아벨을 죽였어. 그럼 카인이 아벨을 죽인 거는 카인의 뜻인가 신의 뜻인가 고민을 하게 되었다. 왜? 우리는 신의 피조물이니까 성경에 의하면 카인이 아벨을 죽인 거는 신의 뜻이란 말이지 그럼에도. 카인을 용서하지 않는다 원수를 7번에 7번에 다 용서해 주라고 한 신이 카인은 왜 용서해 주지 않는가를 고민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면서 신의 존재는 믿지만 종교는 안 믿게 되었다.
종교의 속성은 정당과 같은 면과 보험의 속성, 두 가지 측면이 있다.
정당이라는 측면은 자신들의 교회와 성당, 사찰에 속한 이들의 이익을 위해서 신을 끌어들이고 신을 팔아먹고 있다는 점에서 일반 정당이랑 차이를 못 느낀다.
보험이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두려움을 팔아서 살고 있다는 점이다. 우리나라 보험광고를 보면 끊임없이 당신은 치매에, 암에 걸릴 거라며 보험을 팔아먹는데 그게 곧 두려움을 팔아먹는 것이다. 그래서 종교 집단은 보험이나 정당이기에 믿지 않고 다만 신, 그게 잡신이 됐든 유일신이 됐든 어떤 정령의 신앙 형태이건 모든 걸 다 인정한다.
전작 라틴어수업도 이런 식으로 책을 쓸 수도 있구나, 처음 접하는 그런 느낌 때문에 재미있게 잘 읽었었는데 이책은 그 전작에 못 미치는 동생 정도로 본다.
이 책 역시 그 내용은 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처럼 다 좋은 내용이라고 생각되지만, 그런 내용에 더해서 서양의 중세사 기원부터 전쟁, 종교 모두 다루며 재미있게 서술해서 좋았고 그리고 제일 좋았던 거는 아주 퀄리티 좋은 성당 사진들과 그림들이었다.
여름숲
이 책 제목이 믿는 인간에 대하여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인데, 라틴어 수업 두 번째 시간이 아니라 완전히 별개의 책이라는 생각이 든다. 굳이 부재를 잡는다면 믿는 인간에 대하여 ‘믿음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하는가’ 정도이다. 나 같은 아무런 종교가 없거나 유물론자인 사람에게는 어울리지 않고 종교를 가진 특히나 카톨릭을 신자에게 어떠한 마음으로, 어떠한 세상을 보는 태도로, 어떻게 종교를 보는 태도로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것을 파괴승이 자기도 이미 성직을 내려놓고 나와 약간 비판적인 모습까지 담아서 글을 쓰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이 책이 마음에 담기질 않는다. 부처님 가운데 토막 같은, 공자님 말씀일 뿐이지 하나도 마음에 담아지지가 않는다라는 것이 일단 나의 기본적인 총평이다.
다만 이 책은 이분이 대단한 이 종교에 대해서나 법학, 종교, 철학에 대해서나 전문가이다 보니 카돌릭은 유럽의 역사와 떨어뜨려놓고 생각할 수 없기에 서구 역사에 대한 기원을 잘 설명해 주고 또 한 가지 여기서 확실하게 본래부터 생각하고 있었지만 더 굳히게 된 것이 제정일치 시기에 대한 이해이다. 과거 초기 카톨릭 시기 제정일치 사회였기에 종교에서 세금을 걷어 사회에 유용하게 썼지만 이 책에도 있듯이 ‘황제의 것은 황제에게 신의 것은 신에게 돌려줘야 한다’는 말로서 제정이 분리된 이 사회에서는 더 이상 종교가 과세하면 안 되는데 현대 사회에서 교회가 과거 경전을 잣대로 십일조를 바치라고 하는 부분은 명확히 잘못되었음을 표현하고 있어 이 책에서 좋았다.
그럼에도 읽으면서 코웃음이 났던 것들 중에 하나가 수도사의 식탁이 더 가난해진다면 그것이 우리 사회에서 국가가 할 수 없는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할 수 있는 어떤 끈이 될 수 있지 않겠느냐라고 하는데 과연 작금의 종교가 그런 행동들을 하고 있는가, 물론 일부겠지만 오히려 더 나쁜 행동을 하고 더 나쁜 모습을 보여주고 있는 게 종교이지 않나 싶어 회의적이다.
물질이 많고 부유한 종교 공동체가 그 규모에 맞는 영적 부유함을 갖추면 할 수 있는 일이 많을 거다 라고 하는데 과연 이 지상에 쌓아놓은 엄청난 부을 가지고 세습하고 있는 교회에(저자는 카톨릭이니까 약간 다르긴 하지만) 교회 공동체의 모습들을 보면서 정말 종교의 사악함을 나는 다시 한 번 느끼게 되는데, 저자가 하는 말은 경전 그 자체일 뿐이고 오히려 저자가 하는 말에 반대되는 모습만 지금 우리 사회에서 보여주고 있기에 책이 마음으로 다가오지 않았던 것 같다.
이 책이 카톨릭을 위한 변명처럼 보이는 것이 이 종교의 존재 이유를 ‘신이 우리를 필요로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신을 필요로 한다’라고 그를 빌미로 해서 너무 악행들을 많이 하고 있다라는 생각이 든다. 어느 신이 진짜 누구를 때리라 했으며, 누구를 죽이라 했으며, 가늠하여 평가하고 어떻게 하라고 했는지 묻고 싶다.
그래서 가을햇볕님과 아두님이 가진 감상을 섞어놓은 것이 나의 감상인 그런 책이었다.
저자가 사제직을 하면서 가졌던 많은 그런 갈등 하에 결국은 이 사제직을 내려놨고 그 태도의 변화가 책에도 나타난 게 아닐까 싶다. 하지만 여기에 나쁜 얘기는 하나도 없으니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해당 종교를 가진 종교인이라면 아주 훌륭한 삶을 살 수 있을 거 같고 그런 의미에서 나랑은 맞지 않는다라는 생각이 들 뿐...
첫댓글 수우~~~고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