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침내 입적하기 몇 년을 앞두고 산골로 돌아가려 하였으나 내의령 황보숭皇甫崇과 태상太常 충양일감忠良日監이 대사의 공양구供養具를 살피되 마치 집시자와 같이 하므로 대사는 더욱 마음이 불안하였다. 어느 날 임금께 ”사슴이 들판에서 자유롭게 놀 듯 산속에서 조용하고 편안하게 있도록 놓아 달라.”고 간청하였다.
”외람되이 어명을 받아 오가니, 차츰 정에 끌려 부자유함이 동헌에 있는 학이나 들보에 있는 두견이 같습니다. 엎드려 바라오건대 신승臣僧의 작은 뜻을 받아들이셔 구름처럼 옛 산에 돌아가 물고기가 깊은 물에서 노는 것처럼 하여 주시면 그 은혜 참으로 크다 하겠나이다.“
이 같은 스님의 간청을 들은 왕은 허락하여 동리산桐裏山으로 돌아가게 하고 그 도의 수상守相에게 명하여 논밭에 매기는 조세와 남녀 종을 바쳐 공양(香積)을 올리도록 하였으며, 밖에서 돕는 가풍家風을 잊지 않고 늘 팔연八衍의 예를 펴서 돈독한 단월이 되었고, 불교를 보존하고 유지하는 의무를 받아서 각기 진뢰陳雷를 본받았다. 진실로 (비석깨짐) 구분舊分.
대사는 개운開運 2년(고려 혜종 2년, 945) 황락荒落 2월 2일 대중을 불러 놓고 ”삶(生)이란 유한한 것이며, 죽음(滅) 또한 그 시기가 정해져 있지 않은 것이다. 내 이제 떠나고자 하니 각기 뜻있게 잘 살도록 하라. 붇다께서 ‘쁘라띠목사(pra̅ṭimokṣa, 波羅提木叉, 戒本)는 곧 너희들의 위대한 스승이라’ 하였으니, 나도 또한 이 말씀으로 너희들에게 당부하노니 너희들이 이를 잘 지킨다면 내가 죽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씀하시고 향을 피우고 염불을 하게 하고 합장하고 바로 떠나시니(令焚香念佛 合掌奄然而浙) 세속 나이 82세, 승려 된 햇수 66년이었다.
이때 스님들은 큰 소리로 울며 나루터 다리와 큰 집 들보가 무너졌다 한숨 쉬고, 선사(禪伯)들은 슬퍼 가슴 아파하면서 가르침(法輪)의 문이 영원히 닫혔다고 슬퍼하였다. 심지어 새들마저 답답해하고, 짐승들은 슬퍼하였을 뿐만 아니라 평소 귀를 시원하게 해 주던 (깨짐) 잔잔히 흐르는 산골 시냇물도 슬픈 소리로 변하였고, 여러 해 눈을 즐겁게 하던 산에 덮인 자욱한 구름도 모두 참담한 빛으로 변하였으며, 곤충과 식물들까지도 슬퍼하는 이 사실을 어찌 다 적을 수 있으리오.
이러한 기이한 조짐을 왕에게 알리니 임금이 그 산에 대사의 탑을 세우게 하되, 경비는 모두 나라에서 부담하고, 일꾼은 가까이 사는 백성을 동원토록 하였다. 공사를 마치고 나니 꾸밈에 허술함이 없고, 새김도 점잖고 아름다웠다. 상수문인上首門人들이 다시 조정에 건의하되 “돌아가신 스승 (임금의) 신하 아무개가 다행히 임금님의 도움으로 탑을 세웠으니, 국은이 망극하여 생전과 사후에 걸쳐 함께 영광이오나, 아직 탑에 따른 비문이 없어 선사께서 살아서 쌓은 도행이 점차로 (비석깨짐) 쇠하여 없어질까 두려우니 비를 세우도록 윤허해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왕은 비 세우는 것을 허락하시고 보잘것없는 신하인 저에게 비문을 지어 스님의 선화禪化를 드높이게 하라 명하셨으나, 소紹는 칠보시七步詩를 지을 만한 재주도 없고 학문도 다섯 수레 책도 읽지 못한 변변치 아니한 선비이므로 굳게 사양하였지만 마지못하여 주생朱生과 같이 근부斤斧를 잡고, 예씨禰氏를 칭찬하는 것이니 부득이하여 억지로 엮어 비문을 지었다. 명銘하여 이른다.
위대하신 태안사 광자대사여!
진리의 방편을 깨달으시니
깨친 법문 깊고 깊으며
지극한 이치 깊고 머네.
그 덕화德化 해동에 널리 전하고
도와 덕은 해 뜨는 동국을 덮었네.
거침없는 행적 구름과 같고
지혜는 달빛이 맑은 물에 비치듯
파란波瀾과 이기理氣는 하늘을 찌르듯
평등한 그 마음 대원경大圓鏡 같아
갑자기 오늘에 열반하시니
어디서 다시 만나 선禪을 들으랴!
계족산鷄足山 산속에서 열반하시니
구름처럼 곳곳에 다니시다가
이곳을 열반할 곳으로 정하고
지금까지 이곳에서 정진하셨네.
호랑이 싸움 그치게 하고
개미 구제하듯 자비 깊고
강설할 때 돌도 귀여겨 듣고
나무도 그를 향해 머리 끄덕였다.
어느 날 꿈에 기둥 사이에 누었다가
신 한 짝만 남겨 놓고 문득 가셨네.
스님 신분엔 설할 법 없지만
광자廣慈란 그 칭호가 있게 되었네.
삼업三業은 맑고 깨끗하여 연꽃 같고
육진六塵은 말끔히 없어져 청량과 같아
행각行脚 마치고 동리산桐裏山에 돌아와
모든 대중, 한곳에 모아 놓고
쑤받다(Subhadda)가 마지막 가르침 듣듯
살타파륜보살薩陀波輪菩薩이 법을 구함과 같도다.
현묘한 그 말씀은 넓고도 깊어
큰 지혜라야 헤아릴 수 있네.
내 이제 피안에 오르려 하니
겁화劫火가 이내 몸을 태울 것일세.
대중들은 우러러 쳐다보다가
하늘을 부르면서 애통하였네
이 비석 영원토록 우뚝 솟아서
만세가 지나도록 상하지 않고
영원히 이 비문도 남아 있기를
애오라지 비명碑銘을 기록하노라.
광덕光德 2년(950) 세차 경술 10월 15일 (비) 세우고, 문민文旻이 글자를 새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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