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정토선림을 만들자.
2003년 봄부터 나는 정토선 수행과 보급을 위해서 열심히 노력하였다. 우선 오송암 굉정 스님과 함께 「극락세계 유람기」 10,000권을 인쇄하여 전국에서 보내달라고 하면 모두 보내 주었고, <관정 스님 법문 테이프> 1,000개를 만들어 전국에 보급하였다.
아울러 정토선 수행을 본격적으로 해보기로 하였다. 혼자 공부해보니 수행은 역시 혼자 공부하는 것보다는 스승을 모시고 짧은 기간이라도 집중적으로 지도를 받는 것이 가장 효과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뿐만 아니라 복이 많고 근기가 높으면 혼자 공부해도 되지만 그렇지 않으면 혼자 수행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는 생각이 들어, 정토선을 하는 다른 스님들과 힘을 합쳐 함께 수행해 보기로 마음 먹었고, 정토선만 수행하는 정토선림을 만들기로 의논하고 몇몇 스님들과 일을 추진하였다. 나의 생각에 공감하고 3명의 스님은 200만원씩 회비까지 납부하였다. 나는 어느 정도 계획이 서자 관정 스님에게 여쭈었다.
“관정 스님께서 1달이나 2달 정도 이곳에 머무시면서 몇 사람에게 집중적으로 정토선을 지도해 주실 수 있으신지요?”
관정 스님은 중국에 불사를 하기 위해 불사금을 모으러 다니느라 바쁘시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만일 한 달 지도해 주시면 1000만원을 드리고 최고 2000만원까지 드리기로 약속하였다. 다행히 관정 스님은 나의 제안을 받아들이셨다.
2003년 10월 28일부터 2~3일 다시 우리 절에서 큰스님을 모시고 법회를 하였다. 특기할만한 일은 이때 영주에 가지고 있던 땅에 장안사를 짓고 관정 스님을 모시고 상량식을 하였다는 것이다. 정토선림을 만들려면 우선 수행할 방과 잠 잘 방사가 완비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장안사 터는 소백산 국립공원 동쪽 계곡 두여골에 있는 조용한 곳으로 단산면 단곡리에 들어간다. 관정 스님을 모시고 대구를 떠나 10시쯤 현지에 도착하여 상량식이 시작되었다. 갖가지 행사를 보신 관정 스님은 상량식은 처음 보신다며 기뻐하셨다. 상량식은 오후까지 이어졌으며 가을 해는 서쪽으로 빠르게 기울어지고 있었다. 그런데 상량식 도중 맑은 날씨인데도 해에 두 겹의 해무리가 나타나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아름다운 서광이 피어나기 시작하였다. 참석했던 대중들은 모두 이런 광경은 평생 처음 본다며 감탄을 금하지 못했다.
장안사가 완성되면 현재 정토선을 하는 제자들 뿐 아니라 여러 선방에 연락하여 정토선 수행을 바라는 비구승들을 모아 한 철에 30명씩만 배출해도 관정 스님을 몇 번만 모시면 한국에서 정토선이 완전히 자리를 잡을 것이라는 계산을 가지고 적극 추진하였다.
그러나 너무 큰 욕심을 가져 마장이 끼었던지 그다음 뜻하지 않은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였다. 사실 장안사를 짓는 데는 큰 무리가 없었다. 그런데 장안사 가까이 사는 한 거사가 영주 시내에 있는 땅을 사면 불사에 도움이 될 것이라는 말을 듣고 그 부동산을 산 것이 큰 폐단이 되었다. 매달 내는 이자를 지불하기가 어려웠고, 감당이 되지 않아 팔려고 내놓았지만 팔리지도 않았다. 이런 생활을 8년간이나 계속하는 동안 정토선림을 세우는 것이 사실상 불가능해져 회비를 낸 스님들에게 돈을 돌려주고 일을 접을 수밖에 없었다.
2004년에도 큰스님이 한국에 두 번 오셨는데, 그때는 우리 절에 초청을 하지 못했지만 서울에 올라가 두 번 모두 찾아뵈었다. 그때만 해도 이때가 마지막이 될 것이라는 것은 생각을 못했다. 그런데 3~4년 뒤 관정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제 어느 정도 마무리하고 나서 뒤돌아보니 그때 너무 욕심을 부려 뜻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던 것이 정말 가슴 아프다.
4) 남은 생, 정토선 열심히 하여 극락 가서 관정 스님 만나겠다.
나도 이미 70살이 넘었다. 금년에는 우리 절 주지 소임을 졸업하려고 한다. 지금까지 불사하느라고 모든 힘을 다 쏟았으니, 이제는 기반이 닦였고, 넉넉하지 않지만 주지를 벗어도 수행할 만한 최소한 경제력이 생길 것으로 본다. 아니 주지로 있으면 내 주머니에 한 푼도 남은 적이 없지만, 소임을 놓으면 오히려 편안히 밥 먹고 수행할 수 있는 여력이 생길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처음부터 관정 스님을 믿고 존경하였다. 그런데 2003년 어느 날 관정 스님은 나에게 자신의 수첩과 20대 도반과 찍은 사진을 보여 주셨다. 무슨 염문인지 몰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당시 한국에 관정 스님이 가짜라는 낭설이 분분하다며 이렇게 말씀하셨다.
“내 나이 이미 79살(한국 나이 80살)이다. 얼마 안 가면 이 사바세계를 떠날 것인데 무엇이 아쉬워 쓸데없는 짓을 하고 다니겠느냐? 능엄경에 대망어를 하면 지옥에 떨어진다고 했다. 무엇 때문에 내가 그런 대망어를 하겠느냐?”
출가한 사람으로 스님과 수행법을 보고 좋다는 생각이 들면 의심 없이 믿고 수행하면 되는 것이지 사량분별로 따져서는 안 된다. 그렇기 때문에 그런 소문에 나는 흔들리지 않았다.
관정 스님이 입적하셨다는 소식을 들은 다음해인 2008년 불교 유적지 순례 때 중국 샤먼을 가서 그곳에서 가장 크고 유명한 남보타산을 간 적이 있다. 관정 스님이 태어나신 복건성에서 가장 큰 절 가운데 하나이기 때문에 이곳에서도 관정 스님을 알고 있고 정토선 수행을 하고 있는지 알고 싶었다. 종무소에 들어가 소임 스님을 찾아가 이야기를 나무면서 관정 스님에 대해서 물어 본 적이 있다.
“관정 스님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극락세계 유람기」라는 책을 아십니까?”
“알고 있습니다.”
“읽어 보셨습니까?”
“읽어 보았습니다.”
“그러면 왜 정토선 수행을 안 하십니까?”
이 물음에는 대답이 없었다. 중국에는 「극락세계 유람기」는 읽고 있지만 수행법인 <정토선 정의>는 보급되지 않았다는 것을 나중에야 알았다. 극락을 다녀오셨다는 사실 때문에 중국에서는 정토선 보급이 어려웠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관정 스님은 특별히 한국에서 가는 곳마다 정토선을 수행 하도록 법문하셨다. 이제 관정 스님은 입적하셨지만 정토선 수행법은 남아있다. 관정 스님이 어느 날 분명하게 말씀하셨다.
“아미타부처님이 ‘이 번 생을 마치면 극락으로 오너라.’라고 하셨다. 그렇기 때문에 이번 생을 마치면 극락으로 간다.”
그렇기 때문에 나도 앞으로 남은 생을 열심히 정토선 염불하여 극락에 가서 관정 스님을 뵈려고 한다.
나모아미따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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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
감사합니다.
우리 모두 극락으로 가는 그날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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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불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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