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의 탈 /최순우
한국 탈들의 얼굴을 유심히 보고 있으면 그 지지리 못생긴 모습들이나 거칠게 다루어진 손질이 용하게도 이렇게 서로 닮았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굿거리나 타령 같은 속곡, 기껏해야 영산곡 같은 가락에 맞추어서 짚신바람에 추어 온 이 탈놀이에는 아마 권위니 아첨이니 하는 따위의 잔 신경이 당초부터 필요치 않았던 것인지도 모른다.
눈꿈적이 상좌 왜장녀 소무당 노장 취발이 샌님 미얄할미 신할애비 양반 각시 부네 초랭이 먹중 말뚝이 작은어미 등 이 탈들의 구수한 이름들만 헤아려 봐도 어디서 이런 털털한 막걸리 냄새 같은 것이 물씬 풍겨오는가 싶도록 민속적인 흥취가 짙어진다.
가지각색으로 야릇한 이 탈들의 눈웃음들을 보고 있으면 제고장 사투리에 신명이 나는 듯 당장에라도 외어 넘길 봉산탈춤 양주산대 그리고 하회별신 같은 생생한 탈놀이 대사들이 그들의 입전에서 아물거린다. 직업 광대는 말할 것도 없지만 마을 사람ㅁ들은 이 탈들을 한번 얼굴에 덮어쓰면 북소리 증쟁기 소리에 저절로 어깻바람이 솟아나게 마련이고, 탈이 한번 입을 벌리게 되면 보기 싫고 역겨운 것들 앞에 못할 말이 없어지는 것이다.
주책없는 수도승들의 파계에 퍼붓는 신랄한 조소와 야유, 횡포하고 얌체없는 양반들에 대한 모욕과 풍자, 거기에 가난과 인습에 시달리는 서민사회의 애증과 탄식이 섞여 들어서 탈은 울고 웃고, 마을 사람들도 탈과 함께 울고 웃는 것이다.
하회탈 같은 오랜 탈들을 바라보면 이렇게 울고 웃는 자국과, 착한 마을 사람들의 눈물 콧물과 비지땀 그리고 그 좋은 입심마저 무시로 탈에 배어들어서 무슨 망령 같은 것들이 서려있는 것 같기도 하고 그 농판스러운 눈웃음이나 해식은 얼굴 표정에는 수많은 마을 아저씨와 아주머니들의 얼굴이 겹쳐 보이는 것도 같아진다.
우리나라 탈에만 한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대개 이러한 민속탈들의 아름다움은 기괴에 기울어지기 쉽고 이 기괴의 아름다움은 늘 그 시원 양식에다 뿌리를 둔 생경한 프리미티브 미술의 처지를 맴돌고 있는 경우가 많다고 해야겠다. 그러나 우리의 탈은 하회탈과 같은 오랜 격식의 탈에서 이미 프리미티브 미술의 때를 활짝 벗고 일본의 기악면 능면 같은 뛰어난 탈들과 대조되는 능숙한 조각적인 아름다움을 보여주고 있다.
봉산탈춤을 비롯해서 여러 탈놀이들의 대사를 읽어보면 애당초 민속적 신앙양식의 하나로서 비롯된 탈놀이가 어느 사이에 오락적인 민중연극의 형태로 발전해 온 자취를 쉽사리 알 수 있다. 토속적인 사투리의 진진한 맛과 여기에 얽힌 해학과 풍자의 아름다움, 그리고 때로는 서글픈 시정 이야기들이 그들의 냉철한 사회비판의 눈초리 속에서 소설처럼 도란거리고 있는 것이다.
봉산탈춤의 양반놀이 속에서 말뚝이가 채찍을 좌우로 휘두르며 “ 쉬이, 양반 나오신다. 양반 나오신다 - 좌우영상 다 지내고 노퇴재상으로 계신 노론소론 양반인줄 아지 마오. 개잘량이란 양자에 개다리 소반이란 반자 쓰는 양반 나온다 ” 한 것이든지 “ 이놈 너는 양반은 모시지 않고 어디로 그리 다니느냐” 하는 양반의 호통에 말뚝이는 다시 “예- 이 양반을 찾으려고 찬밥 국말아 일찍이 먹고 마구간에 들어가서 노새님을 끌어내다 등에 솔질 솰솰하여 말뚝이님 내가 타고 팔도강산 다 돌아 무른 메주 밟듯 하였는데 동은 여울이요, 서는 구월이라. 동여울 서구월 넘들어 북한산 방방곡곡이, 바위 틈틈이, 모래 짬짬이, 참나무 결결이 다 찾아다녀도 샌님 비뜩한 놈도 없기로 .......”라 한 구절, 그리고 말뚝이를 시끄럽게 불러대는 양반에게 “예-에이, 제미를 붙을 양반인지 X 반인지 허리 꺾어 절반인지 개대가리 소반인지 꾸레미전에 백반(白攀)인지, 말뚝아 꼴뚝아 밭 가운데 촹뚝아 오뉴월 말뚝아 잔디둑에 메뚝아 부러진 다리 절뚝아 호도엿장사 온데 한애비 찾듯 왜 이리 찾소” 하고 다시 이르면 양반은 “ 너 이놈 양반 모시고 다니면서 새 처를 정하는 것이 아니고 어디로 그리 다니느냐”고 호통을 친다. 이때 말뚝이는 도야지 우리를 가리키며 “이마만큼 터를 잡아 참나무 울짱을 드문드문 꽂고 깃을 푸근푸근히 두고 문은 하늘로 내인 집을 벌써 잡아 놓았습니다” 하고 양반을 야유하는 것이다.
이것은 소위 양반 대 상놈의 이야기이지만 이렇게 참을 수 없는 것을 참고, 견딜 수 없는 것을 견디면서 살아야만 햇던 조선 서민 사회의 사람들, 그들의 이지러진 웃음과 눈물이 무수히 얼룩져 간 주름진 얼굴 위해서 이 신기한 탈들과 신나는 대사들이 명맥을 이어왔다는 사실은 한편 서글프고 한편 다행한 일이라고 해야겠다.
한국의 탈들은 이러한 민중적인 거친 호흡속에서 수없이피어나고 또 져갔다. 민속적인 싱앙의식의 한 토막이던 탈놀이가 끝나면 원래 그해에 지었던 탈들는 모두 불에 태워 없애는 경우가 많았다. 옛사람들의 눈에는 아마 신이 붙었음직한 탈들이 오히려 불에 깨끗이 태워지는 것을 보고야 마음이 개운했을는지도 모른다. 하회탈 말고는 오래된 탈이 남아 있지 못한 사실이라든가 탈의 솜씨나 재료가 너무도 소홀한 것 같은 느낌은 아마도 이러한 당년치기 탈에서 올 수 있는 여폐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리고 오로지 안동 하회탈에서만, 오랜 유물이 남겨졌고 또 탈 짓는 젊은이와의 사이에 얽힌 다음과 같은 애절한 사랑의 전설이 남아 있는 것은 뛰어난 하회탈의 관록을 뒷받침해 주는 근사한 조건이 된다고 하겠다.
옛날 아동 하회 마을에는 고려 중엽까지는 허씨 문중이 모여 살았고 그 후에는 안씨가 모여 살았으며 조선 초부터는 유씨 문중이 모여 살아 왔다고 한다. 그때 허씨 문중에 허 도령이라는 멋진 청년이 있어서 어느 날 꿈속에서 하회탈을 만들라는 신탁을 받았다. 허 도령은 목욕재계하고 별실에 금줄을 쳐놓은 다음 탈을 만들기에 정성을 기울이고 있었다. 이 허 도령에게는 그를 사모하는 고운 마을 처녀가 있었다. 날이 가고 달이 감에 이 처녀는 허 도령의 안부와 그리운 정을 참지 못해서 그의 금기를 어기고 창구멍을 뚫어서 그의 모습을 엿보았다. 가면의 완성을 서두르던 허 도령은 아직도 마지막 이매탈의 턱을 맞추지 못한 채 바로 그 순간에 피를 토하고 죽어갔다. 처녀의 연정은 뜻 아니한 곳에서 그 연인을 죽였고 열두 개 하회탈 중의 마지막 이매탈은 턱이 없는 채로 오늘날도 전해 온다고 한다.
이 전설로 친다면 각시 중 초랭이 양반 선비 이매 부네 백정 할미 떡달이 별채 총각 등 열 두개의 하회탈은 고려시대 중엽에 이 허 도령이 지었다는 말이 된다.
지금 이 탈들이 한국 안에서 다시 예를 볼수 없는 고격을 지녔고 또 그 됨됨이가 뛰어난 탈이라는 사실은 이 전설과 함께 아마도 이 탈들의 나이를 고려 시대에 까지 잡아 올릴 수 있는 좋은 조건이 된다고 해야겠다.
이 열 두개의 하회탈 중에 떡달이 별채 총각 등 세 개의 탈은 일제시대 때 삼파이길이란 일본인이 가져갔다는 항설을 남긴 채 지금은 간곳이 없지만 우리는 남아있는 다른 탈들의 모습위에 떡달이 벌채 그리고 총각 탈의 궁금한 모습들을 겹쳐 그려 보는 것이다.
하회탈 중에서 지금 가장 완전하게 남아 있는 탈은 아마도 양반과 각시탈인 것 같이 생각된다.
이 두개의 탈 중에 ‘양반’에 대해서는 중이라고도 하고 백정이라고도 해서 모두 이설이 있는 모양이지만 나는 여기에 그대로 양반이라고 해두는 것이다. 원래 양반과 상놈이란 경우에 따라선 백지 한 장 차이도 못 되는 것이고 또 옛날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도 역겹게 바라보던 양반탈이 오늘날 뒤바뀌어 백정이 되고 백정탈이 양반탈 행세를 해 본다는 것도 도시 세상만사가 일장춘몽인 바에야 장자의 말처럼 사람도 되어보고 나비도 되어 봤다고 해서 무슨 탓을 삼을 수 있을 것인가.
만약에 가지런히 찍힌 이 탈들이 정말 중과 각시였다면 하회별신놀이 속에 서 주책없는 파계승에게 업혀갔던 각시가 지금 서울에서 의좋게 기념촬영을 한 격이 되는 것이다. 이쨌든 하회탈의 얼굴들을 사념없이 바라보고 있노라면 이러한 망상도 해보리 만치 마음이 턱없이 너그러워지기만 하는 것이다.
그리고 금년 들어 이 탈들이 국보로 출세하였으니 양반 상놈 다틀 것 없이 우리나라 탈로서는 처음 겪는 파격적인 국가적 은전이었고 또 하회탈과 하회마을의 경사임에도 틀림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