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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징(象徵)이란 누군가에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의도를 갖고 나타내는 기호를 말하 며, 그것을 상기시키거나 연상시키는 구체적인 사물을 상징물이라 한다. 인간의 정치, 종교, 경제 및 기타 모든 집단의 생활과정에서는 그 집단을 대표하는 상징물이 있다. 예를 들면 평화를 나타내는 비둘기, 종교를 알게 하는 십자가 등이 그것이며 한 나라를 대표하는 상징물로는 국기와 국가(國歌) 그리고 휘장(徽章), 훈장 (勳章)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상징물은 멋대로 만들어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랜 세월을 거치면서 역사성 과 전통 그리고 문화양식의 영향을 받아 집단에 의해 형성되어 집단의 각 구성원에게 공통의 반응을 불러일으켜 사회를 통합하는 역할을 한다. 나라꽃은 한 국가를 상징하고 있으며, 우리 나라의 국화인 무궁화에는 우리 겨레와 함께 겪은 민족의 흥망성쇠가 담겨져 있다. 일제 침략기에는 무궁화를 독립정신의 상징으로 하여 왔다. 나라꽃 무궁화를 고찰함에 있어 우리 나라를 대표 할 수 있는 각종 상징물 속에 나타난 무궁화를 찾아 보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작업일 것이다. 태극기 국기(國旗)는 한 나라의 권위와 존엄성을 표상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국가적 통일과 단결에 가장 중요한 역할을 한다. 국기의 기원은 고대 국가의 여러 부족이나 집단의 표시로 깃발을 사용한 데서 찾을 수 있다. 근대에 접어들어서도 중세시대에 사용되었던 문장(紋章)이나 기장(記章)등을 볼 수 있었지만 근대적 의미의 국가가 형성되면서부터 국기는 한 나라의 주권(主權)을 상징하는 표지(標識)로 발전하였다. 국기는 그 국가의 상징을 특정한 빛깔과 모양으로 나타내었기 때문에 각 나라마다 색깔과 모양을 달리하여 그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 국제 사회에서 활약 할 때에는 자국(自國)의 국기를 앞세우는 것을 볼 수 있고, 국제연합 빌딩 앞에는 각국의 국기를 게양하여 그 국가를 상징하고 있다. 또한 국기에는 그 나라의 역사와 전통이 담겨져 있다. 미국의 국기인 성조기는 미합중 국을 구성하는 주(州)의 수만큼 별이 그려져 있으며 주가 증가할 때에는 별의 수도 증가했다. 프랑스의 삼색기는 자유, 평등, 박애를 상징하고 있는데 이는 절대왕조(絶對 王朝)에 대항하여 일어난 시민혁명을 표상한 것이다. 우리 나라에서는 고대 국가로부터 새나 매, 봉황, 거북, 용, 호랑이 등 짐승의 모습을 기(旗)에 담아 사용하였는데 이들은 주로 왕권을 상징하는 어기(御旗)나 군대의 깃발로 사용되었다. 현행 국기인 태극기에는 우리 민족의 생활감정과 사상을 지배해 온 태극 (太極)의 정신이 들어 있고, 민족의 꽃으로서 겨레의 얼이 담긴 무궁화의 봉오리로 깃봉을 조작하였다. 국기의 제정 1882년 당시에 제작하여 사용하였던 태극기는 태극을 한가운데 두고 네 모퉁이에 4괘 를 배치하였을 뿐, 국기의 규격과 도식에 대해서는 분명한 규정이 없었다. 이후 1910년까지 사용되었던 국기는 통일된 도안 없이 개인이나 단체에 따라 다소 태극 4괘 도안으로 만들어 사용되었다. 일제 점령기에는 태극기의 사용이 금지되었으 나 독립운동가들이 태극기를 국권회복을 위한 독립운동의 중심 깃발로서 줄곧 사용하 여 왔다. 1945년 8월 15일 해방이 되어 다시 국기를 찾게 되었으나 여전히 통일성이 없어 여러 종류가 혼용되다가, 1948년 1월 4일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이승만 대통령의 국기시정통일지시에 따라 1월 7일 국무회의에서 국기를 제정할 '국기제정 위원회'를 구성할 것을 의결하여 이를 문교부에 위촉하였다. 문교부에서는 1월 4일 국기제정위원회 구성을 위한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2월 3일 행정부 관계부처와 국회, 법원, 학계, 언론계 및 공공단체 등 각 방면에서 42명의 국기 제정위원을 선출하였다. 국기제정위원들의 회의에서는, '대한민국이 재건된 오늘에 있어 국기는 반드시 새로 재정되어야 한다'는 의견이 제출되기도 하였으나, '과거 36년 동안 우리 겨레가 태극기 를 상징하여 일정(日政)과 싸워 왔으며 또한 수많은 애국지사들이 순국하였으므로 태극기는 겨레의 마음을 연결하는 단 하나의 표지(標識)인 만큼 남북이 통일된 뒤에 양쪽이 합쳐 국기문제를 재론하기 전에는 이를 개정해서는 안된다'는 의견이 압도적 이었다. 회의 결과, 태극기를 우리 국기로 쓰되 도형의 잘못된 부분을 시정하여 통일 하도록 결정을 내려 국기제정위원회는 '국기시정위원회'로 변모하게 되었고, 더욱 전문 적으로 연구·검토하여 이론적 근거를 새우고자 12명의 특별심사위원회를 구성하였다. 수차례의 회의를 거듭한 끝에 3월 25일 당시 워원회에 상정된 5개의 도안 중 현행 태극기를 채택하기로 의결하였다. 3월 26일 회의에서는 국기의 깃봉도 다시 규정키로 하여 과거에 써오던 연꽃 봉오리 에서 우리 나라의 국화인 무궁화 봉오리를 깃봉으로 하고, 그 빛깔은 국기의 기면 (旗面)과 조화를 이뤄 금빛으로 결정하였다. 국기시정위원회의 연구결론 보고서가 국무회의에 제출되었고, 국무회의에서 이를 접수 하여 문교부에서는 10월 15일 문교부 고시 제2호로서 국기 제작법을 공포하였다. 1950년 1월 25일에는 문교부 개정고시 제3호로 국기의 종류와 규격을 제정하여 보완 하였다. 이로써 종래 통일성이 없이 여러종류가 혼용되어 오던 태극기는 확고한 도안과 규칙을 갖추어 통일되고 정확한 모습으로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태극기에 담긴 뜻 우리 나라 국기의 흰 바탕은 백의민족의 순결성과 평화를 애호하는 민족성을 표상 하고 있다. 우리 민족은 스스로를 배달(倍達) 겨레, 백의민족이라 불러 왔으며, 유교를 국교로 삼고 있었던 조선시대에는 흰 꽃인 이화(李花)를 왕가의 휘장으로 사용한 것에 서도 알 수 있듯이 흰빛을 숭상하였다. 흰빛은 순결과 순박을 뜻하는 평화를 상징하고 있어 조상 대대로 아껴 왔다. 태극기의 중앙에 위치하고 있는 태극도형은 우리의 고대 문화유적에서도 사용 흔적을 많이 찾아 볼 수 있다. 문헌상으로 태극기에 대해 최초로 언급되어 있는 중국 송나라 의 주염계(A.D. 1017∼1073)의 '태극도설'보다 약 400년이 앞선 신라시대에 건립된 감은사지(感恩寺址 A.D.682 건립)의 석각(石刻)에 새겨진 태극도형이나, 고려 인종때의 고위관리인 허 재(A.D. 1062∼1144)의 석관, 고려 공민왕(A.D.1352∼1374) 왕릉의 태극 도형 등이 그 예이다. 이는 우리 조상들이 고래로부터 음과 양이 원만한 조화를 이상 적인 상태로 여겨 태극도형과 이념을 널리 사용해 온 증거라 하겠다. 태극도형과 4괘는 음과 양의 상호작용에 의하여 우주만물이 생성·발전하는 대자연의 이치를 나타내고 있다. 따라서 태극기는 민족의 이상과 우주관이 담겨진 나라의 상징으로서, 우주와 더불어 길이길이 발전하고자 하는 우리 겨레의 이상을 집약한 표상물이라 할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나라의 국기 만큼 그 의미나 내용의 차원이 높은 것은 아주 드물 것이다. 애국가 한 나라를 상징하는 가곡이나 기악곡을 국가(國歌)라고 한다. 국가의 발생은 16세기에 비롯되었고 국가에 대한 명확한 개념은 19세기 후반 국가에 대한 국민의식이 고취되면 서부터이다. 국기가 국가적·집단적 통일의 상징이라면, 국가는 국민들의 정서적인 면에 직접적으로 호소하는 상징으로 커다란 효과를 발휘한다. 국제 사회의 의례(儀禮) 에서는 국가를 연주하는 것이 상례로 되어있고, 국제경기에서 승리했을 때 그 나라의 국기가 올라가면서 국가가 연주됨으로써 경기장 내(內)가 더욱 숙연해지고 그것을 지켜보는 국민들은 가슴 뭉클함을 느낄 것이다. 국가에는 국민의 번영과 자유를 기원하는 내용이 많고 신흥 국가의 국가(國歌)인 경우 는 국민의식을 고취시키는 내용을 담고 있다. 무궁화는 민중의 꽃으로 민족의 얼을 상징하며 '무궁화 동산'은 우리 나라를 뜻한다. 〈애국가〉의 후렴구인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은 일제 강점기에 각 애국 단체들이 조국의 독립을 위한 강연회 때마다 외쳤다고 하며 이 후렴구의 영향으로 무궁화는 국가의 공식적인 제정 없이도 오늘날 우리 나라의 국화가 되었다. 〈애국가〉는 구한말 나라가 위기에 처했을 때 처음 불리었고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국가로 사용되었다. 〈애국가〉에 후렴으로 반복되는 '무궁화 삼천리 화려강산…'은 우리 나라의 무궁한 발전을 기원하고 민족과 함께 한 무궁화를 노래함으로써 그 정신을 기리고 있어 우리 민족에 있어서의 무궁화의 상징성을 짐작케 해준다 〈애국가〉는 민족의 자주의식이 싹튼 구한말부터 계몽단체나 학생들이 부르던 〈무궁화가〉, 〈애국충성가〉가 모체가 된 것으로 국민들 사이에 자연스럽게 전파 되어 애창되고 있는 민족사적 전통이 있다. 일제시대, 광복, 6·25동란 등 우리 민족 독립사 ·애난사와 더불어 고난과 영광을 같이 해오면서 국민의식 속에 뿌리 깊게 새겨져 있다. 더욱이 법령으로 성문규정화하지는 않았으나 1948년 정부 수립 기념식상 에서의 연주 및 이후의 정부주관 공식행사는 물론 민간행사에 이르기까지 범국민적 으로 파급되어 사실상 국가로서 애창되고 있다. 처음 독립문 정초식에서 불렸던 〈성자신손 애국가〉는 1899년에서 1907년까지 〈무궁 화 노 〉, 〈무궁화가〉, 〈애국가〉로 각 신문과 책자에 소개되었다. 1903년 《기설》과 1908년《찬미가집》의발간을 기점으로 현행과 같은 노랫말이 영국 민요에 맞추어 불려졌다. 이를 안타깝게 여긴 안익태에 의해 1936년 애국가의 곡조가 작곡되었고 마침내 임시정부에서는 국가로써 공포하게 되었다. 우리가 임시정부의 법전통을 인정하고 또 정부수립 기념식 행사에서 연주했다는 점을 상기할 때 우리 나라의 국가는 현행의 애국가임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휘장 및 훈장 휘장(徽章)이란 신분이나 직무(職務) 혹은 명예를 나타내기 위하여 옷이나 모자에 붙이는 표장을 일컫거나 국가, 단체등을 상징하는 징표를 말한다. 이 중 가문이나 단체의 계보, 권위 등을 상징하는 장식적인 마크를 문장이라고 한다 여기서는 우리 나라를 상징하는 휘장으로 나라 문장과 대통령의 표장, 삼부의 표시 로서 무궁화를 사용하는 상징물을 살펴 보고자 한다. 우리 나라는 상고시대부터 무궁화를 가꾸며 생활해 왔으나 조선시대의 왕실문장이 이화인 까닭에 조선시대의 휘장에서 무궁화를 찾기는 어렵다. 구한말부터는 무궁화가 명실상부하게 우리나라의 국화로 되면서 조선소년군(현 보이스카우트)이 목에 두른 항건이나 월진회의 깃발 등에 무궁화를 도안하여 사용하기 시작하였다. 외국에 발신하는 공문서와 국가적 중요 문서, 기타시설, 물자등에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나라문장이 사용된다. 나라문장은 1963년 12월 10일 각령 제1671호로 '나라문장 규정' 이 제정 공포되었고 1970년 7월 3일 개정되었다. 대통령표장은 1950년 국무회의 의결에 따라 대통령기 제작위원회를 구성하여 제작하던 중 6·25동란으로 중단되었다가 1952년 완성하여 총무처에서 사용하던 것과 청와대 의전실에서 사용하던 두 가지가 있었다. 수컷을 봉(鳳), 암컷을 황(凰)이라고 하며 5색의 깃털을 지니고 5음에 맞는 소리를 내며 예천(醴泉 : 나라가 태평한 때에 단물이 나온다는 샘)을 마신다. 우리 민족도 이 새를 상서로운 새라하여 성군(聖君)에 태평성세를 상징하는 것으로 믿어 왔기 때문에 비록 실재(實在)하지는 않지만 국가 원수인 대통령의 표장으로 삼고 있는데 이렇게 전설적인 새인 봉황의 한가운데 무궁화가 위치하고 있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후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던 시기인 1949년 10월 15일 무궁화가 우리겨레의 표상임을 뒷받침하기 위하여 대통령의 휘장 및 삼부의 표식을 무궁화로 도안할 것을 문교부에서 정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하여 사법부에서는 법원을 상징하는 법원기에 관한 사항을 법원 내규로 정하였다.(법원내규 제44호, 1969. 11. 13) 기면 중앙에 두루마리 용지를 무궁화 형태로 표지(標識)하고 무궁화 속에 펼쳐진 책의 안쪽 에 '법원'자를 새겨 사법부의 위상을 나타내고 있다. 입법부에서는 국회를 상징하는 기의 중앙에 있는 무궁화 속에 '國'자를 새기었고 국회 기와 같은 모형의 국회배지를 국회의원과 국회공무원이 패용하고 있다. 행정부의 표장은 1960년대 이래 내각기가 사용되어 오다가 수차례 검토를 거쳐 1988년 11월 28일 '정부기에 관한 공고'를 발표하였다(대통령 공고 제99호). 무궁화 꽃 속에 '정부' 라는 글자를 쓴 정부기는 정부종합청사 등에서 사용할 수 있고 중앙행정기관은 문양의 중앙에 해당 기관의 명칭을 나타내는 약어등을 기관기로 활용하고 있다. 국가나 사회에 공로가 뚜렷한 사람에게 국가에서 훈장(勳章)을 수여하여 그 공적을 표창한다. 우리나라 훈장제도의 역사는 1900년(광무4) 4월19일 훈장 조례를 공포함으 로써 최초로 시행되었다. 당시 훈장의 종류는 금척대훈장, 서성대훈장, 이화대훈장, 태극장, 팔괘장, 자응장, 서봉장으로 7종류였는데 이당시에는 무궁화를 찾을 수가 없다. 일제 강점기에는 일본의 훈장 제도가 의용(依用)되다가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되면서 대통령령으로 공포하여 시행하였다.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에는 대통령령으로 건국공로훈장령, 무궁화대훈장령, 무궁훈장령 , 문화훈장령, 소성훈장령, 포장령 등을 종류별로 공포 사행하여 왔다. 1963년 12월 14일 각종 훈장령과 포장령을 통합한 상훈법을 공포 시행하였으며 그후 수차례 개정되어 현행 상훈제도가 완비되었다. 훈장에 무궁화가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에 있었던 '무궁화대 훈장령' 에서이다. 무궁화대훈장은 각종 훈장령의 통합으로 1964년 3월 24일 개별 훈장 령은 폐지되었으나, 이후에도 계속해서 우리나라 최고 훈장으로서 대통령이나 우방의 원수에게 수여하고 있다. 이 외에도 훈장은 거의가 무궁화 도안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이러한 훈장을 수여할 때 동시에 대통령으로부터 전달되는 임용장(任用狀) 한가운데 커다란 무궁화가 그려져 있다. |
상징물에 나타난 무궁화 나라꽃 무궁화는 공공장소나 관공서에서만 접할 수 있는 꽃은 아니다. 무궁화가 겨레 얼의 표상물로 떠오른 것이 우리 민족의 존립마저 위기에 처한 위급한 상황이었고, 우리말과 글도 쓰지 못하고 태극기마저도 함부로 지닐수 없었던 시대에 독립지사들에 의해 지켜져 왔기에 자칫 관념속의 국화로만 인식되기 쉽다. 하지만 무궁화는 국민의 민의에 의해 국화로 정해졌고 무궁화가 지나온 자취가 그러하기에 더욱 국민 대중과 친근해 질 수 있는 꽃이라 생각된다 화폐와 우표는 우리 일상생활에서 흔히 대하는 물건이다. 어느 누구도 동전 한두 개는 지니고 다닐 것이고, 언제든지 손쉽게 구할 수 있는 것이 우표이다. 그런 것에 비해 화폐나 우표만큼 시대적 예술성을 반영하고 있는 것도 흔지 않다. 이러한 화폐와 우표에 주도안으로 혹은 부도안으로 무궁화가 들어가 있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나라꽃 무궁화는 단지 관념 속에서 국화로 인식되기보다는 우리 주위 에서 친근하게 대할 수 있는 꽃으로 피어야 한다. 그런 의미에서, 생활주변과 역사의 숨결이 흐르는 곳에서 다시 한번 무궁화를 찾아보는 것도 나라꽃을 사랑하는 또다른 방법일 것이다. 화폐에 나타난 무궁화 우리 나라 화폐의 역사를 살펴보면 고대에는 자급자족하는 농업을 기본 경제로 하였기 때문에 곡물과 배를 중심으로 교역이 이루어지다가, 상업이 발달함에 따라 화폐의 필요성이 생겨나 고려 성종 15년(996) 우리 나라 최초의 화폐인 건원중보(乾元重寶)라 는 철전(鐵錢)이 주조(鑄造)되었으며 공양왕 3년 (1391)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지폐인 저화(楮貨)가 발행되었다. 우리 나라 근대 화폐는 대동은전(大東銀錢)의 발행으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는데, 대동은전은 주조화(鑄造貨)이므로 만든 방법은 근대 이전의 화폐에 속하지만 모양은 둥근형에 네모 구멍이 뚫려 있는 엽전형을 벗어나 근대 화폐를 닮고 있기 때문이다. 화폐에 도안된 무궁화를 고찰(考察)함에 있어 우리 나라 최초의 근대 화폐인 대동은전 이 주화이므로 편의상 주화, 지폐, 기념화의 순으로 살펴보았다. O 주 화 우리 나라 근대 주화의 시작은 최초의 근대 화폐인 대동은전으로부터 비롯되고 주화 에 그림 도안된 것은 1885년 을유 시주화(乙酉 試鑄貨), 일냥화(一兩貨)에서 이화(梨花) 와 도라지, 오얏[李花] 휘장이었다. 1892년 (고종 29) 인천전환국에서 제조한 오냥 은화 에서 무궁화(가지:枝) 도안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이 은화는 당시 세계 각국의 무역 결재용으로 사용하던 크라운(CROWN)화의 규격을 채택하여 제조한 대표적인 대형 은화이다. 도안 중앙 상부에 이전의 일환은화(一 銀貨) 나 10문(十文)·5문(五文) 동화에 나타난 태극장(章) 자리에 왕실의 휘장인 이화장이 들어갔고 우측은 원래대로 오얏나무 가지(枝)이나 좌측에는 무궁화의 가지가 들어 있다. 이 주화에 나타난 무궁화는 활짝 핀 꽃은 아니지만 무궁화의 도안이라는 데 의의가 있다. 이 오냥 은화와 같은 무궁화 도안의 주화는 1895년 5푼(五分) 동화, 1905년·1906년 번환(半 ) 은화, 오전 동화, 반전 동화로 계속해서 제조되었다. 1959년 제조된 십환 동화에는 주화에 최초로 무궁화의 꽃이 도안되었다. 1966년과 1983년에 제조된 일원 주화에는 활짝 핀 무궁화 한 송이가 그려져 있다. 지폐에 무궁화가 도안된 것은 주화인 오냥 은화가 1892년에 제조된 것에 비해 반세기 나 뒤떨어진다. 조선시대는 왕가의 휘장이 이화(李花)였고, 화폐는 타(他) 인쇄물에 비하여 정밀한 인쇄를 필요로 하므로 당초문양(唐草文樣)을 즐겨 쓰던 당시에는 태극 과 이화가 주도안을 이루었고 무궁화는 도안으로 사용되지 못하였다. 무궁화가 도안된 최초의 지폐는 1932년 일본 내각 인쇄국에서 발행한 10원권(拾圓券) 이다. 일제 강점기였던 당시에 어떻게 도안될 수 있었는지 알 수 없으나 '拾圓(십원)' 문자를 기준으로 중앙에 무궁화가 도안되어 있다. 해방된 이후 발행된 지폐에는 무궁화가 선명하게 그려졌다. 특이한 것은 6·25동란시 북측에서 불법으로 발행한 천원권 지폐의 상단·하단·우측 세 곳에 무궁화가 한 송이 씩 그려져 있다는 점이다. 1962년 이후 발행된 지폐에는 대부분 무궁화 도안이 들어 있다. 1962년 영국에서 인쇄 하여 발행한 5종의 화폐에는 태극문양과 무궁화를 의장화한 마크가 그려져 있으며 1973년 발행한 만원권과 1975년 발행한 천원권 지폐에는 실물에 가깝게 그려진 무궁화 가 들어 있다. 기념주화 기념주화는 국가적·국민적 차원에서 중요한 일을 기념함과 동시에 내외에 알리기 위하여 발행되는 화폐이다. 이러한 기념화에 무궁화가 도안되어 제조되었다는 것은 무궁화가 진정한 의미의 대한민국 국화임을 증명하는 한 예일 것이다. 1970년 대한민국 오천년 영광사 기념화가 발행된 이래 1988년 올림픽 기념화까지 각종 각종 기념화에 무궁화 도안이 들어가 있다. 우표에 나타난 무궁화 우표는 그 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 예술, 자연에 걸쳐 시대상을 대표하는 예술품으로 의 가치가 있다. 오늘날 세계 각국에서 우표의 중요성은 날로 더해가고 있으며 이에 따라 우리 나라에서도 한해 발행할 우표를 발행 전년도에 각 부처로부터 자료를 수집 하여 원로 화가, 대학 교수, 언론인, 우표 전문가등으로 구성된 우표심의위원회 심의를 거쳐 발행하고 있다. 우표에 나타나는 도안은 국제 행사로서 국제협력, 친선외교 강화 및 인류 발전에 기여 할 수 있는 사항, 국가적·범국민적 행사로서 영원히 기념하고 동행사를 국내외로 널리 홍보하며 국가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사항,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는 인물 또는 행사로서 50주년, 60주년 또는 100주년 단위의 기념행사와 기타 자료가 주제로 선정 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중요성을 인식할수 있다. 우리 나라의 우편제도는 신라 소지왕 9년(487) 각지방에 우역(郵驛)을 설치한 것을 시초로, 고려시대와 조선시대를 거치면서 여러 형태의 우편제도가 발달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제도는 일반 국민이 이용한 것은 아니었고 군사용(軍事用)이나 관용(官用)으로만 이용되었다. 구한말 고종 21년(1884) 서구식 우편제도의 도입으로 우정국(郵政局)을 개설하여 우편 업무를 개시하고, 태극마크를 주도안으로 최초의 문위(文位:화폐의 단위) 보통우편을 발행하였다. 하지만 우편업무를 개시한 지 얼마 안되어 갑신정변으로 우편사업이 폐쇄 되고 정국의 혼란으로 우편제도는 과거의 역마제도로 환원되었다. 그후 1893년 전우총국(電郵總局)이란 기구로 우편 업무를 재개하고 태극 보통우표 4종 을 인쇄하여 1895년 7월 22일부터 사용하였다. 이 태극 보통우표에서부터 태극기가 이씨 왕가의 문장인 이화(李花)와 함께 등장하였다. 1905년 한일통신 합동조약 체결로 우리의 우편 업무가 일본에 강제 접수되어 우표를 발행하지 못하였고 1945년 해방이 될 때까지 일본우표를 사용하게 되었다. 해방 직후에도 사전 준비가 없었기 때문에 일본 우표를 그대로 사용해 오다가, 전국에 남아 있는 일본 우표를 모아 한글로 국호와 액면을 가쇄하여 새로운 우표가 발행될 때까지 사용하기도 하였다. 1946년 11월 10일 미군정 하의 과도정부 시기에 최초로 발행한 보통우표 중에 무궁화가 도안되어 있는데 이는 당연한 일이라 하겠다. 이후로는 보통우표나 기념우표 모두 무궁화를 주도안으로 사용한 우표가 많이 나타나 무궁화의 국가적 상징성을 증명하고 있다. 이상 우표에 그려진 무궁화를 찾아보는 데 있어서 보통우표와 기념우표를 구분하여 시대순으로 살펴보았다. 〈해방직후〉 해방 직후 미군이 한반도에 주둔하던 시기에 발행된 미군정청 가쇄보우표에 옅은 다색 바탕의 한가운데 활짝 핀 무궁화가 한송이 그려져 있다. 1948년에서 1949년 사이 에 제1차 보통우표가 다양한 소재로 발행되었는데, 애국지사 이 준(李準)의 초상 아래 좌우로 한 송이씩 그려진 것과 붉은 바탕에 두송이의 만개한 무궁화를 주도안으로 한 두 종류가 발행되었다. 이 시기에 발행된 기념우표 '한글500년'과 '국회 개원' 기념우표 는 한글자모와 국회의사당 주위를 무궁화로 장식하고 있다. 1948년 8월 15일 정부수립 을 기념하는 2종의 우표가 발행되었는데 하나는 평화를 상징하는 비둘기이고 다른 하나는 붉은 바탕에 흰색으로 활짝 핀 무궁화가 그려져 있다. 〈6·25동란기〉 전쟁으로 우편 업무가 어려웠던 시기에는 화폐가치의 하락으로 인하여 액면가를 첨쇄 하여 사용하였다. 이때 '이 준 열사' 우표와 '무궁화' 우표는 2차례에 걸쳐 첨쇄되었다. 그리고 전쟁중 조국의 동일을 기리면서 '국토통일' 기념우표를 발행하였는데 이중 이승만 대통령의 초상 주위를 무궁화 꽃으로 장식하고 있다. 〈1950년대〉 그동안의 우표는 몇몇 민간 인쇄소에서 인쇄하였는데 1952년 9월 10일 '제2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로부터는 한국조폐공사에서 인쇄하게 되었다. 1956년 발행된 '무궁화' 우표는 활짝 핀 두 송이의 무궁화를 우표의 전면(全面)에 기득 채워서 무궁화의 아름 다움과 상징성을 잘 표현하고 있다. 1957년에는 이 우표와 같은 도안으로 용지와 액면 가를 달리하여 세 차례에 걸쳐 발행되었다. 50년대에 발행된 기념우표 중에서 '국제 로타리 50년'과 '정부수립 10년' 기념우표에 무궁화가 사용되었다. '정부수립 10년'기념 우표는 열 송이의 무궁화로 10자 모양의 무궁화가 화환을 만들어 정부 수립 10주년을 축하하는 뜻을 표현하였다. 〈1960년대〉 이 시기에는 기념우표에 무궁화 도안이 많이 사용되었다. 1960년 제2공화국이 탄생 되면서 참의원이 개원되어, 좌측 상단에 활짝 핀 무궁화와 개원 광경이 그려진 기념 우표가 발행되었다. 광복절을 기념하여 1963년과 1965년에 무궁화를 도안한 우표를 발행하였다. 특히 1965년에는 매월 15일 식물을 주제로 시리즈 우표를 발행하였는데 8월 광복절을 기하여 무궁화를 주제로 발행하였다. 무궁화가 도안된 우표 중에서는 최초로 천연색으로 인쇄되었고 활짝 핀 무궁화와 그 봉오리가 조화를 이루고 있다. 우방 국가원수의 방한을 가념하는 우표에는 한국의 상징으로 무궁화가 많이 등장한다. 1968년 이디오피아 황제가 방한했을 때 발행된 기념우표에는 양국 원수의 초상을 무궁화로 감싸고 있다. 1969년 말레이지아 국왕의 방한을 기념하는 우표에는 각국 원수 옆에 무궁화와 부용을 그려 각 나라를 대표하고 있다. 〈1970년대〉 1970년 박정희 대통령의 초상이 든 '대통령 대형 보통우표'에는 무궁화가 문양으로 도안되었다. 1970년 '7대 대통령 취임' 기념우표에는 박정희 대통령의 사진과 함께 대통령 휘장이 그려져 있는데 대통령 휘장 한가운데 무궁화가 위치하고 있다. 1978년 '국민교육헌장 10년' 기념우표에 나타난 무궁화는 기관이나 기구의 상징 마크 도안으로 사용된 형태로 그려진 것이다. 〈1980년대〉 1981년 제3차 그라비아 보통우표에 나타난 무궁화는 초록의 잎이 바탕이 되어 활짝 핀 한 송이의 무궁화가 단심선까지 세밀하게 표현되어 실물과 가깝게 그려져 있다. 이 우표는 근래에 발행되어 널리 사용되었기 때문인지 선명한 무궁화가 인상적이다. 제12대 대통령 취임을 기념하는 우표에는 대통령의 초상이 흑백인 데 비해 선명한 꽃 잎 속에 경제부흥을 상징하는 듯한 건물이 들어 있어 국가의 상징인 무궁화에 대한 뚜렷한 인상을 준다. '제60회 어린이날' 기념우표는 중앙 전면(全面)에 선명히 그려진 무궁화 꽃 위로 어린이날 노래의 악보가 곡선을 그리며 펼쳐져 있어서 어린이들의 마음속에 나라꽃에 대한 사랑을 심어 주고 있는 듯하다. 이 시기에는 외국 국가원수의 방한이 많았는데 이를 기념하는 우표에 양국의 국기나 국가원수의 초상과 무궁화를 조화시킨 도안이 주를 이루고 있다. '광복 40주년'기념우표는 백두산 천지와 무궁화를 조화시켜 백두산에 피어난 무궁화를 표현하여 국가 통일의 의지가 잘 나타나 있다. 역사 현장에 새겨진 무궁화
무궁화가 국화가 되는 과정이 그러했기에 일제 강점기를 이겨낸 우리 역사의 현장에서는 어떤 상징물보다도 무궁화는 애국의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무궁화가 우리 나라의 국화임을 모르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언제 어떻게 국화 로 정착되었는지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있는 사람은 드물며 역사의 현장 곳곳에 무궁 화화형(花形)이 새겨
무심히 지나쳤던 독립기념관의 애국 시·어록비들, 새로 중주(重鑄)된 보신각 종, 서울역 천장에 그려진 무궁화 그림 등 주의를 기울여 보았더라면 찾을 수도 있었 던 무궁화 꽃이다. 여기에서 그러한 역사의 현장 몇몇 곳을 찾아서 살펴보았다. 하지만 아직 밝혀지지 못한 사적(史蹟)이 무수히 남아 있고, 또한 그곳에 발굴되지 못한 무궁화 조각(彫刻)이 묻혀 있을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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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학창시절로 돌아가 보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