팥 죽
찐빵을 즐겨 먹었다. 뜨끈뜨끈한 것을 이리저리 쥐면서 갈라 입에 넣으면 그 맛에 취한다. 그 안에 든 팥이 씹혀 넘어갈 때 얼마나 좋은지 넘친다. 거리에 겨울 찬바람이 불 때 하얀 김이 무럭무럭 나는 찐빵집이 눈에 선하다. 찹쌀떡 찹쌀떡 밤 골목을 울리던 그 떡 속에도 팥이 들어있다. 물컹한 것을 한입 물면 살살 녹는다.
시루떡 팥고물 맛이 또 나를 부른다. 달거나 맵거나 시거나 한 것도 없으면서 그리 입맛에 착 달라붙는다. 찐빵과 찹쌀떡은 좀 단맛이 난다. 그래서라기보다 팥이 별나게 내겐 좋다. 접시에 남은 팥고물을 한술씩 입에 넣고 오물오물 먹으면 그 맛에 젖어 행복하다. 제과점에 팥떡이 있는데 빈속에 먹으면 생목이 올라 가슴이 쓰리다.
먹고 싶으면서도 참는다. 달큼한 팥 맛이 맴돈다. 마른 빵이나 호박죽 같은 것도 식도에 받친다. 밥이나 죽에 팥이 들어가면 섞이면서 입맛을 돋운다. 처음 단맛에서 댕겼는가 팥이 든 것은 다 잘 넘어간다. 붕어빵이나 호두과자에도 팥이 들어가 있다. 따뜻한 붕어빵은 파삭한 게 입안으로 솔솔 녹아든다.
정말 호두 조각도 들어있어서 함께 한입에 쏙 넣는다. 다 겨울에 먹는데 여름에도 있다. 팥빙수이다. 얼음을 저으면 안에서 팥알이 떠오른다. 무더운 날에 한 모금씩 우물대면 입안이 식으면서 시원함을 느낀다. 팥이 톡톡 깨지며 얼음과 함께 맴돌면서 내려간다. 더운 게 가시고 온몸이 서늘하다.
출출할 때 시장통에서 단팥죽을 먹는다. 시도 때도 없이 나온다. 참 맛있다 하고 먹는데 설탕을 얼마나 넣었는가 너무 달다. 팥칼국수가 있어서 들어갔다. 팥 자만 보이면 걸음을 멈춘다. 팥죽 맛이 난다. 어쩌면 올이 굵은게 짜장면 먹는 기분이다. 팥을 먹고 나면 속이 든든하다.
자주 먹고 싶어도 찾아보기 어렵다. 겨울에는 드문드문 있어 쉽지 않다. 다행히 본죽에서 죽을 판다. 동짓날 실컷 먹어보는데 늘 먹을 수 없을까. 죽이라 시답잖은 음식으로 여기는 것 같다. 또 나같이 그걸 좋아하는 사람이 적은가. 먹고 싶어도 일부러 하지 않으면 없다. 수많은 음식점이 있어도 죽 파는 데는 드물다.
시장 모퉁이에 찐빵 파는 곳이 있어 보니 주먹 크기가 아니라 얼굴만한 대형이다. 저걸 어찌 다 먹나. 지하철 가게에서 팥 넣은 호두빵을 팔고 길거리에서 팥이 든 동전같은 국화빵을 굽는다. 오다가다 잘 사 먹는다. 여러 개 먹으면 끼니가 된다. 팥빙수도 한 그릇이면 적당한 요기다.
달짝지근하지 않고 밍밍한 팥 음식이 있으면 좋겠다. 왜 자꾸 달콤하게 하는지 거북하다. 그게 먹기 쉬워도 당뇨로 부담이다. 맨날 밥이고 가끔 분식인데 팥죽은 동짓날에만 해 주니 기근이 든다. 많이 먹으면 물리는데 동지 뒤 여러 날 남은 팥죽을 먹었다. 데워서 뻑뻑해도 잘 넘어간다. 새알심이 일그러져도 맛있다. 있을 때 많이 먹어두자.
텃밭에 팥을 심어봤다. 가로등이 있어선가 잘 안된다. 붉은 게 참 예쁘다. 가운데 흰 띠가 있어서 더 귀엽다. 콩도 큰 콩 작은 콩이 있듯이 팥도 큰 것 작은 것이 있다. 작은 것이 소출이 좋아 많이들 재배한다. 동북아시아인 중국 일본 한국이 원산지이다. 모심기 한 뒤 논두렁에 많이 심어 거둔다. 잎은 말려 양식 달릴 때 같이 먹었다.
콩은 대두(大豆)라 하고 팥은 소두(小豆)라 한다. 몸에 콩팥이 있는데 콩처럼 생기고 팥처럼 붉다. 강낭콩처럼 생긴 좌우 신장이다. 찹쌀과 멥쌀가루를 익반죽한 경단 옹심이가 들어오면 먹는 재미가 있다. 성주와 조왕, 삼신, 용단지에 떠놓고 역신 축사라 해서 동네 괴목과 대문, 벽에 뿌린다.
음력 11월 초순에 들면 애동지, 중순에 중동지, 하순엔 노동지라 한다. 애동지에는 죽 대신 팥 시루떡을 먹는다. 죽은 동치미와 함께하면 맛나다. 겨울이 깊어져 간다는 동지에 계피와 알토란, 잣, 호박, 생강을 넣으면 맛이 더 난다. 초상난 집에 보내 위로하고 손님 대접을 하게 한다.
일 년에 동지나 상가에만 쑤어 먹고 보내던 것인데 일본인 거주지역이었던 부산과 군산에는 이 죽을 일상으로 즐겨 먹는다. 전라도에는 팥칼국수와 밤팥죽을 한다. 고려 말 이색의 목은시고(牧隱詩槀) 두죽(豆粥)에 팥죽 얘기가 나온다(冬至鄕風豆粥濃). 신라 헌강왕 때 울산 바닷가에 살던 아라비아 상인 처용도 처용가에서 아내와 동침한 역신이 쫓겨가면서 탈이나 팥죽을 보면 무섭다 했다.
이삭의 아들 야곱이 팥죽으로 형 에서의 장자권을 받는 구약성경 창세기의 말씀이 있다. 팥 비슷한 열매여도 딱히 번역할 말이 없어서인 것 같다. 요즘에는 미주나 유럽, 서아시아에서도 팥이 생산된다. 아마 팥 닮은 것이리라. 부모상을 돌보잖고 팥죽 들어오는 것만 헤아린다는 말이 재미있다.
어디 시내 그런 음식점이 있으면 좋겠는데 없다. 사 먹는 사람이 흔치 않으니 그런가. 나만 식미가 별나 구석진 것을 좋아하는가. 예전엔 그걸 잘 먹었는가보다. 초상집에서 손님에게 내었으니 말이다. 씨앗 중에 팥이 예쁘다. 과실은 붉은 게 많다. 딸기와 수박, 감, 토마토 등이 있지만 주식 열매인 쌀과 보리, 밀, 귀리, 피, 옥수수, 수수, 감자는 대개 회색인데 저리 잘 생긴 자줏빛이다.
첫댓글 선생님 감동입니다 어찌그리 해박하신 글이 되는지요
팥죽 한 그릇 먹었으니 머리에 한 해 더 올려 놓았네요
예전 상을 당하면 상주들이 식음을 전폐하고 죄인으로
몇날을 보내야 하니 상주의 기력을 차리기 위해 이웃에서
팥죽 부조를 하였지요
제 할아버지 상에 팥죽 얻어 먹은 기억도 새롭습니다
감격하여 읽었습니다
박회장님 날이 찹습니다.
감기 조심하세요.
들어가는 재료는 다 같은데도...어릴적 엄마기 해주시던 팥죽맛에 반에반도 못따라 갑니다. 아버님이 동짓날이라고 부르셔서 한그릇먹고 왔는데....이맛 또한 제솜씨로는 따라갈수 없는 맛일것 같습니다. 나이는 저 어릴적 팥죽만드시던 엄마보다 훨씬 많은거 같은데, 이상합니다 솜씨는 왜 따라가지질 않는지..ㅋㅋ 건강하십시요!!
그때는 배고파 모든게 맛있어서 그런지 그때 음식이 모두 좋았습니다. 그립습니다. 오솔길 일그러진 초가집 토장 냄새가 솔솔 납니다.
자주 놀러오세요 많이 기다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