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조世祖 [1417~1468]조선 제7대 왕(재위 1455∼1468).
<세종의 적2남>
정식칭호 : 세조혜장승천체도열문영무지덕융공성신명예흠숙인효대왕
(世祖惠莊承天體道烈文英武至德隆功聖神明睿欽肅仁孝大王)
휘 유. 자 수지. 시호 혜장. 세종의 제2왕자. 어머니는 소헌왕후(昭憲王后) 심씨, 비는 윤번의 딸 정희왕후이다. 무예에 능하고 병서(兵書)에 밝았으며, 진평대군 ·함평대군 ·함양대군이라 칭하다가 1428년(세종 10) 수양대군에 봉해졌다. 세종의 뒤를 이은 문종이 재위 2년 3개월 만에 승하하고, 12세의 어린 나이로 단종이 즉위하였다. 수양대군은 권람 ·한명회 ·홍달손·양정 등 30여 인의 무인세력을 휘하에 두고 야망의 기회를 엿보다가, 1453년(단종 1) 10월 무사들을 이끌고 김종서를 살해한 뒤 사후에 왕에게 알리고 왕명으로 중신들을 소집, 영의정 황보 인, 이조판서 조극관 ·찬성 이양 등을 궐문에서 죽이고 좌의정 정분등을 유배시켰다.
그리고 안평대군을 강화도로 유배시킨 뒤 사사(賜死)하였다. 이와 같이일거에 실권을 잡은 수양대군은 영의정부사(領議政府事), 이조 ·병조판서(吏曹兵曹判書), 내외병마도통사(內外兵馬都統使) 등을 겸하면서 병마권을 장악하고 좌의정에 정인지(鄭麟趾), 우의정에 한확(韓確)을 임명하고 집현전으로 하여금 수양대군 찬양의 교서를 짓게 하였다. 1455년 단종이 선위(禪位)하게 하고 마침내 왕위에 올랐다. 그러나 그의 치적에는 괄목할 만한 것이 많다.
■부인
▶ 정의왕후 윤씨(貞熹王后)[1418 ~ 1483]
파평 윤씨 파평부원군(坡平府院君) 윤번의 딸이고, 어머니는 인천 이씨 문화의 딸이다.
1418년 11월 11일에 홍주 군아에서 태어났으며, 1428년(세종 10) 당시 진평대군이었던 세조와 가례를 올리고 낙랑부대부인(樂浪府大夫人)에 수봉되었다.
1452년(단종 즉위년) 수양대군이 김종서(金宗瑞) 등의 제거를 위한 거사를 할때, 용병(用兵)이 누설되어 손석손(孫碩孫) 등의 만류가 있었으나, 수양대군이 중문에 이르자 정희왕후가 갑옷을 들어 입혀서 용병을 결행하게 하였다.
1455년(세조 1)왕비에 책봉되었고, 1457년 존호를 자성(慈聖)이라 하였으며, 1469년(예종 1) 흠인경덕선열명순휘의(欽仁景德宣烈明順徽懿)의 존호를 더하였다.
또 1471년(성종 2) 원숙신혜신헌(元淑愼惠神憲)을 가상하였다. 예종이 14세로 즉위하자 정희왕후가 수렴청정하게 되었는데, 이는 조선왕조에 들어와서 처음이다. 예종이 재위 1년2개월 만에 죽자 세조의 맏아들인 덕종(德宗:예종의 형)의 둘째아들 자을산군(者乙山君:성종)이 즉일로 즉위하였다.
그런데 성종 또한 13세의 어린 나이였으므로, 7년 동안이나 섭정을 계속하였다.
1483년(성종 14) 3월 30일 온양의 행궁에서 사망하였다. 소생으로는 덕종·예종과 의숙공주(懿淑公主) 등 2남1녀를 두었다.
능호는 광릉(光陵)으로 세조의 능과 함께 있다.
▶ 근빈 박씨 (謹嬪朴氏) [생몰년미상]
선산 박씨. 궁인으로 입궐하였고, 음악에 남다른 재주가 있고 춤을 잘 춘 덕에 세조의 눈에 띄어 후궁이 되었다. 세종 16년에 자수궁에 거처하였으며, 그곳은 창수중이라 불리기도 했다.
연산군 대에 이르러 80대의 나이로 머리를 깍고 비구니가 되었다. 연산군이 그녀가 춤을 잘 춘다 하여 연회에서 춤을 추게 하였고 근빈 박씨는 이미 연로하여 춤을 출 수가 없는 상태였으나 연산군이 두려워 춤을 추었다고 한다.
소생으로는 덕원군과 창원군이 있다.
▶ 소용 박씨 (昭容 朴氏) [생몰년미상]
소생은 없다.
■자녀
▶ <적장남> 덕종 - 정희왕후 윤씨 소생
▶ <적2남> 예종 - 정희왕후 윤씨 소생
▶ <적장녀> 세희공주
세희공주는 아버지 세조 즉위 후 세조의 앞에 나아가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에 오르면서 행한 모든 살생들을 낱낱이 고하며 잘못을 뉘우치라 간언했다 한다. 화가 난 세조는 세희공주를 폐서인하여 궁중 밖으로 내칠 것을 명령했고, 이에 어머니 정희왕후 윤씨는 세희공주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유모에게 많은 보물을 싸주며 공주를 데리고 멀리 피해가서 살도록 했다.
세희공주는 충남 공주 동학사로 쫓겨내려가 그곳에서 간신히 목숨을 건져 공주로 도망온 김종서의 손자(김승규의 아들 김행남으로 추정)를 만나 부부의 연을 맺었다. 훗날 세조가 피부병을 고치려 속리산으로 가는 길에 어린 남매의 얼굴이 딸의 얼굴과 흡사한 것을 발견했으나 세조가 다시 딸을 찾았을 때 이미 세희공주는 아버지를 버리고 가족들과 함께 울산쪽으로 갔다한다.
▶ <적2녀> 의숙공주(懿淑公主)[ ? ~ 1477]
하동 정씨 영의정 정인지의 아들인 하성부원군 현조에게 출가하였으나 소생은 없다.
▶ <서장남> 덕원군 서(德源君 曙)[1449 ~ 1498] - 근빈 박씨 소생
자는 정수(晶?M)이며 호는 종덕암(宗德菴). 1458년(세조 4) 10세 때 덕원군에 봉해졌고, 1468년(예종 즉위년) 남이의 옥사를 다스린 공으로 익대공신(翊戴功臣) 2등에 책록되었다. 성종 때에는 종부시 도제조의 직을 맡아 종실의 규찰업무를 담당하고 선왕 제향소의 일을 맡아 보았다. 성리학(性理學)에 심취한 세종의 유지를 받들어 성현의 학문을 익히고 <주역(周易)>과 <예기(禮記> 등에 밝아 한 때 유종(儒宗)으로 추대받기도 했다.
1472년(성종 3) 경기도 회암사(檜巖寺)에 머무르면서 공불(供佛)한 것이 문제가 되어 대간으로부터 탄핵을 받았다.시호는 소간(昭簡)이다.
부인은 세명으로 첫번째부인은 경주 김씨 지중추부사 김종직의 딸인 임천군부인이고, 두번째 부인은 봉산 윤씨 함안군(咸安君) 윤말손의 딸인 봉산군부인이며, 세번째 부인은 청주 양씨 참지(參知) 양일원(楊逸源)의 딸인 안성군부인이다. 이들에게서 2남 1녀를 얻었고, 여러 첩들에게서 8남 11녀를 얻었다.
▶ <서2남> 창원군 성(昌原君 晟)[1455 ~ 1505] - 근빈 박씨 소생
자는 광기(廣器). 1464년(세조 10) 창원군에 봉하여졌으며, 1471년(성종 2) 덕종의 맏아들 월산군(月山君)과 함께 고례(古例)에 따라 태안군의 주요한 자재(資財)를 지급받았다. 다음해에 형인 덕원군(德源君)과 함께 양인 방호련(方好蓮)의 교유(敎誘)를 받아 불사(佛事)를 행함으로써 종부시의 국문을 받기도 하였다.
1477년에는 온양에 목욕하러 갔다가 공주 등지를 돌아다니며 수령들을 능욕하고 역마(驛馬)를 함부로 타고 다니는 등 많은 폐단을 일으켜, 종부시의 국문을 당하고 노비를 모두 빼앗겼다. 1478년에는 은란하고 투기한다 하여 여종을 살해하였다는 죄로 다시 국문을 당하였다.
어려서부터 방탕하였으며, 오만하고 포악하며 음란하여 장인을 하인처럼 대하고, 궁중의 예법을 따르지 않고 재상들을 자주 능욕하였다. 정희왕후 윤씨가 이를 책망하였으나 뉘우치지 못하고 나라의 법을 어김이 많았다. 1481년(성종 12) 소덕대부(昭德大夫)에 올랐고, 1872년(고종 9) 영종정경에 추봉되었으며 시호는 장소(章昭)이다.
처음 교하 노씨 증찬성(贈贊成) 노호신의 딸인 덕양군부인(德陽郡夫人)과 혼인하여 자식을 얻지 못하자 다시 광주 정씨 익의 딸인 광성군부인(光城郡夫人)과 혼인하였으나 역시 자식을 얻지 못하였다. 그리하여 덕원군의 아들 덕진군 활을 양자로 삼아 후사를 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