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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무남(2004). 『교육학론』. 학지사.
제6장 교육학의 두 언어: 교육과 수업 중 pp. 166-1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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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업’은 영어에서 ‘teaching’이다. 그런데, ‘teaching’은 교육을 의미하는 ‘education’과 다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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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자는 다른 사람에게 무엇을 전달하는 활동과 그 장면을 가리킨다. 이에 견주어 후자는 구체적 사실이나 활동을 일컫지 않는다. 후자는 학교에서 교사들이 활동을 할 때 따라야 할 원리 또는 목적을 지칭하는 말이다. [각주 33: 다음의 영어 기사에서 ‘teaching’ 대신에 ‘education’을 썼다고 가정해보자. 그러면 얼마나 ‘teaching’과 ‘education’ 사이에 차이가 있는가를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Those with firsts continue to shun teaching for lucrative careers elsewhere. 교사는 ‘education’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하는 것보다 ‘teaching’에 종사하는 사람이라고 해야 옳다.] ‘수업’은 한글로 표현하여 ‘가르치는 일’이다. ‘가르치는 일’은 ‘teaching’의 한글 번역어로 손색이 없다. 그런데 우리는 ‘수업’이나 ‘가르치는 일’이라는 말을 항상 좋은 것으로 받아들이는 경향이 있다. 아마도 그 이유 가운데 하나는 ‘수업’이라는 용어를 주로 학교에서 사용하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수업’은 학교에서 사용하는 전문 용어 가운데 하나다. ‘가르치는 일’이라는 어구도 매한가지다. 우리는 ‘가르침’을 무엇인가 교육적으로 올바르고 훌륭한 것을 전달하는 일과 관련되는 용어로 이해하여 왔다. 아닌게 아니라, 우리는 ‘아무개 선생님은 우리에게 훌륭한 가르침을 주었다’는 말을 하거나 ‘아무개 선생님의 가르침은 참으로 훌륭하였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수업’이 우리에게 좋은 일로 인식되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이 사실은 ‘수업’의 교육적 문화적 용법 때문이다. 학교는 옛날이나 오늘날이나 수업을 하는 곳으로 인식되어 왔고, 학교의 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우리는 수업방법을 고도로 발전시켜 왔다. 학교에서 수업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하여 만들어낸 수단이다. 그러므로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은 가치를 수반한다. 이런 연유에서 수업은 규범적이고 처방적이라는 말이 우리에게 이상하게 들리지 않게 되었는지도 모른다.
심리학자 브루너(Bruner)가 수업이론의 특성을 규범적 처방적이라고 한 것은 ‘수업’의 교육적 용법을 따른 것이다. [각주 34: J. S. Bruner(1971). Toward a Theory of Instruction, p. 40.] 그가 수업이론은 규범적, 처방적이고 학습이론은 기술적이라고 하였을 때, 그는 분명히 ‘수업’의 심층에 자리하는 교육적 관념을 해석해냈다고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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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학교에서 수업이라는 활동을 이끌어 가는, 그리고 그런 활동의 밑바탕을 형성하는 교육적 관념이 있다는 것을 그는 인식하였다는 것이다. 언어의 용법이 그렇듯이, ‘수업’을 교육적 관점을 통하여 이해하고 이끌어간다면 거기에 교육적 관념이 부하(負荷)되기 마련이다. 이런 뜻에서 우리는 수업이론을 브루너의 견해를 따라 규범적이고 처방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수업’의 의미에서 부하적 의미를 제외시키면, 수업의 개념은 순수하게 기술적(記述的)인 의미로 구성된다. [각주 35: 용어의 기술적 의미와 규범적 의미 사이에는 커다란 차이가 있다. 전자는 가치와 정서가 배제되어 사실적인 요소로만 그 의미를 규정하는 경우이고, 후자는 기술적인 의미에 가치와 정서를 함께 포함하여 의미를 규정하는 경우다. 영어 표현으로 전자는 ‘descriptive meaning’이라 하고, 후자는 ‘normative meaning’이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수업’을 단순히 기술적 용법에 따라 쓸 수도 있게 된다.
하여튼, ‘수업’은 그 의미에 비추어 사실적 활동을 지칭하는 말이다. 사실적 의미로서 ‘수업’이 어떤 활동을 포함하는지 살피는 것은 정말 흥미로운 일이다. 우리가 ‘수업’을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으로 한정하지 아니하고, 또한 그것을 항상 좋은 활동으로만 생각하지 아니할 때, 그것은 정말 다양한 활동들을 지칭하는 이름이라는 사실을 확인하게 될 것이다. 전혀 놀라운 일은 아니지만, ‘수업’은 교수(敎授), 토론, 교화, 훈련과 같은 학교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활동은 물론, 선전, 고무시키기, 시범을 보이기, 감언이설을 늘어놓기, 설교하기, 설득하기, 환심사기, 타이르기, 속이기와 같이 학교에서는 허락할 수 없는 활동들을 포함한다. 이들이 모두 ‘수업’에 속하는 개념족(槪念族)이라는 뜻이다. [각주 36: B. P. Komisar(1968). Teaching: act and enterprise, in Concepts of teaching: Philosophical Essays (eds C. J. B. Macmillan and T. W. Nelson) p. 73.]
틀림없이, ‘가르친다’는 일상용어는 좋은 것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고, 좋지 않은 것을 대상으로 할 수도 있다. 우리는 ‘구구단을 가르친다’는 말을 하기도 하고, ‘소매치기를 가르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이때 ‘구구단’은 가르치는 일의 좋은 대상이고, ‘소매치기’는 그렇지 않은 대상이다. 따라서 ‘수업’이 비록 우리 사회에서 학교의 전문 용어로 사용되어 왔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본질적으로 가치중립적 용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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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권에서 ‘teaching’은 가치중립적인 용어로 쉽게 이해된다. 우리는 이제 ‘수업’이 그 대상에 따라 좋은 일에도 사용되고 그렇지 않은 일에도 사용된다는 사실을 확인한 셈이다. 수업은, 맥인타이어가 그렇게 주장하였듯이, 기술이나 정보를 전달하는 방법일 뿐이라는 사실 말이다. [각주 37: A. MacIntyre and J. Dunne(2002). Alasdair MacIntyre on education: in dialogue with Joseph Dunne, Journal of Philosophy of Education, 36(1), pp. 5-7.]
여기에서 우리가 주시해야 할 사항이 있다. 그것은 ‘수업’이라는 말이 브루너가 주장하듯이 항상 규범적 의미만으로 사용되지는 않는다는 점이다. 그것은 본질에 있어서 기술적 의미로 쓰인다. ‘수업’의 기술적 의미는 정보와 기술을 전해주는 일이다. 그리고 이 일은 우리가 보기에 좋은 것일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것일 수도 있다는 것을 위에서 언급하였다. 교육적인 것도 있고 비교육적인 것들도 있다는 뜻이다. ‘수업’은 가치중립적이다. 따라서, 그것은 인간의 의도에 따라 좋은 일을 위해 쓰일 수도 있고, 나쁜 일을 위해 쓰일 수도 있다. 그것이 학교에서 교육적 관념을 따라 사용되면 좋은 일에 쓰이는 경우가 되고, 불량자 집단에서 소매치기 기술을 습득시키는 데 사용되면 나쁜 일에 쓰이는 경우가 된다. 조지 오웰(G. Owell)의 『1984년』은 전체주의 정부가 ‘수업’을 좋지 않은 일에 사용하고 있는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묘사해 낸 걸작품이다.
수업의 기술적 의미를 우리가 인식하면서 그것의 내재적 가치를 묻는 것은 잘못이다. 왜냐하면, 수업은 하나의 사실에 속하는 것으로서 교육을 위하여 우리가 고안한 수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수업의 내재적 가치를 묻는 것은 수업이 수단이라는 점을 망각한 결과다. 수단은 그 자체로 가치로운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수단은 오로지 그것을 고안하게 된 목적, 즉 외재적 목적에 의해서만 평가된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이 점을 우리가 잘 파악하면 수업이 좋지 않은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도 사용될 수 있다는 점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상한 일인지 모르지만, 이런 현상은 인간의 활동을 면밀히 관찰하면 결코 찾아보기 어려운 일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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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맥락에서 맥인타이어는, 던과 달리, 수업이 그 자체로 하나의 실제(praxis)가 될 수 없다고 말한 것이다. 수업은 오로지 다양한 목적에 이바지하기 위해서 수단으로 고안한 일종의 기술이다.
‘수업’은 그 자체로 선한 것이 아니라는 주장은 교육의 실제에 매우 중요한 점을 시사한다. 왜냐하면, 이 주장은 수업이 비록 학교의 교실 안에서 이루어진다 할지라도 그것을 모두 교육적으로 가치있다고 말할 수 없다는 점을 함의하기 때문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라 할지라도 그것은 때때로 교육과 무관하게 이루어질 수 있다는 뜻이다. 말하자면, 수단으로서의 수업이 목적으로서의 교육적 관념으로부터 분리되었을 경우의 이야기다. 사실이 말해주듯이, 수단이 목적으로부터 분리되었을 때, 수단은 그 존재의의를 상실하고 역할이 왜곡되기 마련이다. 학교에서 이루어지는 수업이 교육의 목적에 메어있지 못하다면, 그것은 교육적 가치를 실현할 수 없다는 뜻이다. 이러한 경우는 두 가지 유형으로 나타난다. 그 한 가지 유형은 교사들이 수업을 하는 동안 교육적 관념으로부터 이탈하는 경우다. 이는 교사들의 노력에 의해서 해결될 수 있는 문제의 유형이다. 다른 한 가지 유형은 수업이론 자체로부터 문제가 발생하는 경우다. 잘못된 수업이론에 의해서 교육적이지 못한 수업이 이루어진다는 뜻이다. 이 문제는 걱정스럽게도 오늘날의 수업이론에 역력히 드러나 있다.
오늘날의 수업이론은 그 나름대로 발전을 거듭하여 왔다. 수업이론이 전문화되었다는 뜻이다. 세상의 일이 그렇듯이, 전문화된 수업이론은 독자적인 행보를 거듭하기 마련이다. 수업이론이 독자적인 행보를 취한다는 말은 그것이 스스로의 법칙을 가지고 있다는 뜻이다. 그리고 이 법칙을 더욱 정교하게 만들고 그 결과 효율성을 극대화하려고 한다. 그래서 수업이론은 과학의 부류에 속하는 인지공학과 전자공학에 크게 의존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이는 오늘날 수업이론이 교육적 관점으로부터 점점 멀어지고 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것은 이미 교육이론이 아니라, 정보기술이나 정보공학이라는 이름을 부여받기에 충분한 단계에 들어서 있다. 그러나 정보기술과 교육, 정보공학과 교육학 사이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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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널 수 없는 큰 간극이 존재한다.
교사들이 채택하고 있는 수업은 매우 뚜렷한 체제를 갖추기 마련이다. 그 체제는 주어진 목표를 성취하기 위하여 요구되는 기능과 요소들이 유기적 관계를 유지하도록 되어 있다. 이런 체제를 꾸미는 과정에서 수업이론가들은, 지금이 그렇듯이, 인지공학과 전자공학에 크게 의존하게 될 것이다. 이렇게 하는 것은, 모든 공학적 모형이 그렇듯이, 수업의 효율성을 위해서다. 타일러는 ‘학습 경험을 선정하고 수업을 이끌어 갈 체제를 구축할 수 있는 형태로 수업목표를 진술해야 한다’고 교사들에게 권고한다. [각주 38: R. W. Tyler(1949). Basic Principles of Curriculum and Instruction, pp. 43-62.] 수업목표를 세분화하고 행동 용어로 진술하라는 뜻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수업목표는 교사가 수업체제 속에서 무엇을 할 것인가를 명료하게 제시하여 줄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른바 수업체제의 공학적 효율성이다. 그리고 이런 특성에 따라 교사들의 활동이 공학적 모형에 의해서 통제를 받기 마련이다. 교사의 활동이 공학적 과정 속에 투입된다는 뜻이다. 이와 같은 수업체제 접근은 체제분석 → 체제종합 → 체제운용 → 체제평가의 절차를 거치면서 점차적으로 세분화되고 발전될 것이다. 이렇게 발전되면서 수업체제는 자체의 공학적 효율성은 물론, 이에 의지하여 학교 수업의 과학적 경영 원리의 폭을 더욱 확보하게도 될 것이다.
사실, 이런 경향은 20세기 초 미국의 교육 연구에서 어렵지 않게 찾아볼 수 있다. 이때는 미국에서 과학적 방법을 교육학 연구에 적용하는 절정기였다. 타일러와 블룸 이전에 보비트(Bobbitt)는 교육에서 제일 먼저 지향해야 할 것으로 체제의 효율성을 들었다. [각주 39: 보비트는 최초로 ‘교육과정’이라는 말을 사용하여 책을 쓴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F. Bobbitt(1918). The Curriculum 참조.] 이는 교육에서 선의 추구를 넘어 과학적 경영을 통한 효율성을 가치롭게 생각한 전환점을 표시한 역사적 흔적이다. 보비트는 교육과정 운영에서 효율성을 제일의 가치로 삼았던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발전된 수업체제는 교육에 이로운 점을 주기도 하지만, 그것보다는 교육으로부터 자꾸만 멀어지는 경향을 보인다는 데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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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런 이론들이 교육목적과 교육이 추구하는 가치가 자리해야 할 위치를 점점 더 점유하게 될 것이라는 점도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수업에서 공학적 효율성과 교육적 지향점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점은 물론, 이 양자가 빚어내는 결과가 동일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공학적 모형에서 ‘좋은 것’과 교육적 관점에서 ‘좋은 것’은 항상 같다고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를 구분하지 못하면, 교육이 지향하는 점이 공학적 효율성에 의해서 왜곡되거나, 그것에 자리를 내어주는 역사적 변고가 머지않아 닥칠 것이라는 점을 예측하기는 과히 어려운 일이 아니다.
타일러의 수업체제는 점차 공학적인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많은 수업이론가들이 타일러식의 수업체제에 더욱 복잡한 공학적 체제를 더하였다. 무엇인가를 산출하려는 사람은 그 산출을 극대화하기 위해서 체제를 더욱 정교하게 다듬어 그 효율성을 높이려고 한다. 그런데 이런 부류에 속하는 인간 활동을 아리스토텔레스는 생산을 목적으로 하는 ‘테크네’로 분류하였다. 수업이론은 일종의 ‘테크네’다. 이런 점에서 맥인타이어가, 던과 달리, 수업을 실제적인 것이 아니라 기술적인 것이라고 판단한 것은 정말 그의 예리한 식견 때문일 것이다. [각주 40: A. MacIntyre and J. Dunne(2002). Alasdair MacIntyre on education: in dialogue with Joseph Dunne, Journal of Philosophy of Education, 36(1), pp. 5-7.]
그럼에도 불구하고, 던이 수업을 ‘실제적’인 것으로 분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수업의 일상적 쓰임새에서 이는 분명히 잘못된 판단이다. 하지만, 그의 주장이 많은 사람들에게 잘못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 이유는 또한 무엇인가? 아닌게 아니라, 일찍이 슈왑도 수업을 기술적 활동이 아니라, 실제적 활동으로 이해하였다. 그런데 그가 이렇게 이해하게 된 까닭은 무엇인가? 그는 그 까닭을 이렇게 설명한다. 학교에서 수업을 진행할 때, 교사는 항상 교육적 가치를 따라 수업을 하기 때문이라고 말이다. [각주 41: J. J. Schwab(1969). The practical: a language for curriculum, School Review, 78, pp. 1-24.] 교육적 가치가 수업을 이끌고 간다는 뜻이다. 이런 경우에, 수업은 확실히 실제적 활동이 될 것이다. 슈왑의 주장은 정말 옳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가 주의를 기울여야 할 것은 ‘수업’ 자체가 ‘실제적인 것’이라고 믿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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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왑의 눈에 수업이 ‘실제적인 것’으로 보인 것은 그가 수업을 학교에서 하는 활동으로 국한하면서, 교사가 수업을 통하여 교육적 가치를 실현하고자 하였을 경우에 한한다. 하여튼, 그는 ‘수업’을 ‘교육’의 맥락에서 이해하고 설명한다. 이 점이 맥인타이어와 던 또는 슈왑이 수업의 본질을 다르게 보고 있는 각도다. 던과 슈왑은 ‘수업’을 교육적 관념으로 각색하였고, 맥인타이어는 ‘수업’을 그 자체의 특성에 따라 적나라하게 표현하였던 것이다.
수업의 원형은, 맥인타이어가 바르게 파악하였듯이, 기술적인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그것을 학교에서 사용할 때, 그것은 실제적인 원리와 활동의 지배를 받아야 한다. 말하자면, 우리는 수업을 교육적 관점에 따라 이끌어가야 하는 것이다. 오직 그런 경우에만 수업은 실제적 추구의 성격을 띠게 된다. 사실, 이와 같은 관점에서 수업을 이해하는 교육이론가들이 점차적으로 그 수를 더하는 경향이다. 스텐하우스는, 슈왑과 비슷하게, 수업이 학교에서 교육적 관념에 따라 진행될 때, 하나의 예술이 된다고까지 하였다. [각주 42: L. Stenhouse(1975). An Introduction to Curriculum Research and Development.] 의미있는 말이다. 그가 예술이라고 말한 이유는 교육적 관념이 수업 활동에 섬세하게 표출되기 때문이다. 그에게 있어서 이런 경우의 수업은 결코 기술공학의 부류에 속하는 것이 아니다. [각주 43: J. Rudduck and D. Hopkins(eds)(1985). Research as a Basis for Teaching: Readings from the Work of Lawrence Stenhouse, p. 97.] 쇤에 의하면, 기술공학이 그렇듯이 기술적 합리성을 교사들이 추구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그는 그 대안으로 ‘실천하면서 반성하는 모형’을 제시하였다. 그가 말하는 ‘반성’은 말할 필요도 없이 실제적 판단 또는 문제사태에서의 가치판단을 의미한다. 전문인으로서 학교 교사가 담당하는 수업은 실제적 판단을 요구하는 문제 사태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각주 44: D. A. Schön(1983). The Reflective Practitioner; D. A. Schön(1987). Educating the Reflective Practitioner.] 매한가지의 관점을 우리는 셜리 그런디(S. Grundy)의 책에서 읽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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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저서 『교육과정: 생산인가 실제인가』는 책이름 그대로 수업을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효율성을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삶의 실제를 이끌어 가는 것 자체를 목적으로 하는 것이라고 소개하였다. [각주 45: S. Grundy(1987). Curriculum: Product or Praxis.]
아이스너에 따르면, 수업은 교육적 가치에 의해서 그 방향을 취해야 하기 때문에 그것은 다분히 규범적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는 과학적 공학적 접근 방법 대신에 교육적 상상을 수업 활동의 중심 ‘테마’로 잡는다. [각주 46: E. W. Eisner(1994). The Educational Imagination: On the Design and Evaluation of School Programs.] 더욱 구체적으로, 데이빗 카(D. Carr)는 수업이 과학에 기반을 두는 공학이 아니라, 윤리적 바탕 위에서 이루어지는 인간 활동이라고 주장한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썼다.
가르치는 일에는 규범적이고 평가적인 요소가 들어 있다. 여기에는 기술과학적이고 공학적인 면도 있지만, 그보다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면이 더 많다. 훌륭한 가르침이란 그 결과가 효율적이고 매력적인 것을 지칭하는 것이라기보다는 도덕적 심리적 신체적 행복을 최대한으로 증진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각주 47: D. Carr(2000). Professionalism and Ethics in Teaching, p. 9.]
수업에 도덕적인 관념을 부여하거나 수업을 도덕적 시각을 통하여 이해하는 데이빗 카는 학교의 수업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프락시스’ 속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라는 점을 매우 강력하게 주장한다. 이런 뜻에서 데이빗 카와 던은 아리스토텔레스의 노선을 따르는 대표적 주자가 된 셈이다.
수업의 의미 해석에 관한 이러한 경향은 이론가들이 연구의 초점을 수업이론의 실제적 특성에 맞추면서 더욱 두드러지고 있다. 윌프레드 카는 수업의 의미에 대한 새로운 경향을 소개하면서, 수업이론을 ‘기술적 담론’이 아니라 ‘실제적 담론’으로 규정한다. [각주 48: W. Carr(1989). Introduction: understanding quality in teaching, in idem(ed.). Quality in Teaching.] 그에 의하면 ‘실제적 담론’이라는 말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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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제가 항상 잠재되어 있는 학교 학습사태에서 교사들이 교육적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결정하고 정당화하는 언어다. [각주 49: 48: W. Carr(1989). Introduction: understanding quality in teaching, in idem(ed.). Quality in Teaching, p. 5.] 또한 데이빗 카는, 슈왑과 같은 어조로, 수업에 관한 기술공학적 접근이 가져다주는 결함을 제거하기 위하여 지금까지 수업이론가들이 사용하고 있는 과학적 언어를 실제적 언어로 대치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각주 50: D. Carr(2003). Making Sense of Education, pp. 19-34.]
최근에 철학자들은 ‘수업’의 용법에 규범적 의미를 더하고 있다. 이는 기술적이고 공학적인 수업 활동에 교육적 관념을 부하하고 있다는 뜻이다. 이는 수단으로서의 수업을 목적으로서의 ‘교육’에 붙들어 맨다는 뜻이다. 왜냐하면, 수업의 규범적 의미는 교육의 목적과 논리적으로 동치(同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러한 관점으로 수업이론을 볼 때, 그것은, 브루너가 그렇게 이해한 것과 같이, 규범적 이론의 속성을 부여받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각주 51: J. S. Bruner(1971). Toward a Theory of Instruction.] 그러나 그런 경우는 부하적 의미의 한계 안에서 일 것이다. 맥인타이어와 던의 대화에서 맥인타이어가 ‘수업’을 ‘테크네’로 인식하고, 그 결과 ‘수업’을 실제적인 활동으로부터 떼어놓은 것은 옳다. 그리고 맥인타이어의 주장에 회의적인 태도를 보이면서, 수업을 실제적인 것이라고 애써 설명한 던의 입장 또한 옳다. ‘수업’에 대한 맥인타이어의 분석은 논리적이고, 그것을 교육적 관점에서 이해한 던의 입장은 해석학적이다. 던은 물론이거니와 그와 동일한 노선에 서있는 철학자들은 수단으로서의 수업이 다른데서가 아니라 학교에서 사용된다면, 그것은 마땅히 목적으로서의 교육적 관념으로부터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는 당위적 언명을 교육의 실제로부터 읽어내고 있는 셈이다. [각주 52: 던과 더불어 또 하나의 아일랜드 철학자 호건(P. Hogan)은 수업과 학습을 삶의 한 과정으로 해석한다. P. Hogan(2003). Teaching and learning as a way of life, Journal of Philosophy of Education, 37(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