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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여인들(34):
억울하게 무시당한 여인,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
대상8:29~40(9:35~44)/사무엘상14:49~51
사울의 가문에 속한 여인들을 계속 살펴보고 있습니다. 오늘은 그 아내에 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하지만, 먼저, 사울의 가문에 대한 비밀 한 가지부터 먼저 공개하겠습니다.
1. 사울가문의 비밀1
사울이 어느 지파입니까? 베냐민지파입니다. 이 지파에 대한 기록이 역대상을 보면 이상하게도 두 군데나 나옵니다. 역대상8장29~40절과 같은 역대상9장36~44절입니다. 9장의 족보는, 8장의 마지막 두 절에 기록된 인명들이 없습니다. 이런 차이가 왜 있는 것일까요? 그리고 왜 거의 동일한 명단이 이렇게 두 번이나 반복해서 기록되고 있는 것일까요? 잘 아시는 것처럼, 역대기서는 바벨론포로생활 후에 고향에 귀환한 사람들을 위하여 기록한 것입니다. 과거의 가문의 역사와 명단을 기록하면서 과거의 일들을 잊지 말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두 번이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부분은 역대상1~9장까지 나오는 지파들의 족보들 중에서 거의 유일합니다. 유다지파인 다윗의 족보도 이렇게 기록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사울의 족보 기록 중에서 눈여겨 보아야 할 너무나도 중요한 것이 있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 같습니다. 이 족보기록에 무엇이 눈에 띄입니까? 그것은 첫째, 사울의 가문조차도 계속 이어지고 있다는 점입니다. 누구를 통해서입니까? 요나단의 아들 ‘므립바알’(므비보셋)을 통해서입니다. 그 후손들의 이름이 이렇게 계속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무엇이 강조되고 있습니까? 다윗이 사울의 아들 요나단과 맺은 언약이 성취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묘하게도, 사울가문의 족보에 이상하게도 ‘기브온’에 대한 언급이 나옵니다. ‘기브온’주민과는 사울가문과 악연이 얽혔던 것을 지난 번에 살펴보았습니다. 그리고 기브온주민과 맺은 언약을 하나님은 무척이나 중요하게 여기셨음도 살폈습니다. 바로 그 ‘기브온’입니다. 기브온주민들은 베냐민지파에게 주어진 기업의 경내에 있었습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그 기브온의 조상인 ‘여이엘’과 자녀들을 몇 명의 목록을 적은 뒤 사울의 가문을 적고 있습니다. 이 ‘여이엘’과 사울의 관계는 어떻게 될까요? 분명히 사울은 베냐민지파인데, 가나안원주민들 중의 한 주민인 ‘기브온’의 조상 이름이 병행되어서 기록되고 있는 것입니다. 사울은 가나안원주민들의 후손일까요? 아마도, 사울의 가문과 이 기브온주민의 후손들이 비슷한 곳에 있다 보니, 서로 뒤섞여지게 되었을 것입니다. 피도 섞였을 것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울이 이 기브온주민들을 죽였다고 하는 것(삼하21장)은 한편 이해가 되면서도 그 언약을 잊어버린 것은, 더욱 악한 일임을 알 수 있습니다. 가까이 있고, 피가 섞여서 혈족관계가 형성된 기브온주민이라면 더욱 사랑하고 이해해야 하는데, 그들을 무슨 이유인지는 모르지만 죽여버린 것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서 언약이 더욱 강조되는 족보인 것입니다. 역대기족보의 의미가 더욱 분명해집니다.
2. 사울가문의 비밀2 ?
사울가문의 또 다른 비밀 하나는, 바로 사울의 아내에 대해서입니다. 사무엘상14:49~51에 기록된 것을 보면, 사울의 아내에 대해서 이렇게 기록합니다: “사울의 아내의 이름은 아히노암이니 아히마아스의 딸이요.” 이것이 사울의 아내에 대해서 기록하고 있는 모든 것입니다(현재까지는). 사울의 아내된 아히노암의 아버지 아히마아스에 대해서는 성경 다른 곳에 언급된 적이 없습니다. ‘아히노암’이란 말뜻은, ‘내 형제는 아름답다’입니다. 참으로 흥미로운 것은, 다윗의 아내들 중의 한 명의 이름이 ‘아히노암’이라는 것입니다. 삼상25장43절에 나옵니다: “다윗이 또 이스르엘 아히노암을 아내로 맞았더니 그들 두 사람이 그의 아내가 되니라.”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보면서 흥미로운 추측을 합니다. 곧 사울의 아내였던 ‘아히노암’이 다윗의 아내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언듯 보면, 말도 안되는 것 같습니다. 다윗의 아내는 ‘이스르엘 아히노암’이라고 기록하기 때문입니다. 이스르엘지역출신이란 뜻입니다(대상3:1). 아마 차이를 강조하기 위해서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사울의 아내인 ‘아히노암’은 어느 지역 출신일까요? 이상하게도 이것을 밝혀놓지 않고 있습니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성경구절들을 근거로 해서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은 다윗의 아내 아히노암이라고 여기기도 합니다.
한 예로, 사울왕과 요나단의 대화 중에 요나단이 자꾸 다윗을 감싸는 것에 화가 난 사울이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삼상20:30):“사울이 요나단에게 노를 발하고 그에게 이르되 패역부도의 계집의 소생아 네가 이새의 아들을 택한 것이 네 수치와 네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됨을 내가 어찌 알지 못하랴.” 사울은 지나치리 만치 부인에 대한 욕을 합니다. ‘패역부도의 계집’, ‘어미의 벌거벗은 수치’란 말을 통해 이미 사울왕의 아히노암에게 어떤 사건이 벌어졌음을 암시하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성경신학자 ‘로버트 쿠트’는 다윗이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을 자기 부인으로 훔쳐 갔다고 합니다([성서와 정치권력], 45쪽). 더욱이 사무엘하 12장에는, 나단이 밧세바를 범한 다윗을 꾸짖으면서 다음과 같은 말을 남깁니다: “네 주인[사울]의 집을 내게 주고 네 주인의 처들을 네 품에 두고 이스라엘과 유다 족속을 네게 맡겼느니라.. 그런데 네가 칼로 헷 사람 우리야를 치되,,, 그의 아내를 빼앗아.."(삼하 12:8-9).
말이 되는 것 같습니까? 이렇게 생각하면 다윗에 대한 평가가 새로워져야 하는 것 아닐까 싶기도 합니다. 하지만, 이런 해석은 아무래도 지나친 것 같습니다. 만일 그렇게 본다면, 다윗은 사울의 딸 미갈과 사울의 아내인 아히노암을 동시에 아내로 맞는 패륜아라고 보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더욱이나, 사울의 아내인 아히노암의 자녀들 중의 맞이가 누구입니까? 요나단입니다. 다윗이 이 요나단과 무엇을 맺습니까? 언약을 맺습니다. 그리고 그 언약이 성취되는 것을 강조하는 것이 성경(역대상의 족보)입니다. 이런 면에서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이 다윗의 아내 아히노암이라고 보는 것은 너무 지나친 추측이라고 보아야 하겠습니다. 사울이나 나단의 말은, 그 당시의 습관적으로 사용하는 상용어구들이 아닐까 싶습니다(우리도 자녀들을 보고 ‘망할 놈아’ 한다고 해서, 꼭 그 문자의 뜻대로 사용하는 것은 아닌 것과도 같습니다).
3. 억울하게 무시당한 여인, 아히노암
사실, 제목은 ‘사울의 아내 아히노암’이라고 해놓고, 아히노암에 대한 이야기는 하지 않았습니다. 아히노암이 사울을 어떻게 만났을까요? 사울이 첩 리스바를 들일 때의 마음이 어떠하였을까요? 사울과 그 아들들 세 명이 길보아전투에서 모두 몰살당해버린 것을 들었을 때에 이 여인의 심정은 어떠하였을까요? 자신의 사랑을 일부분 빼앗아갔을 연적 리스바가 남편의 사촌동생과 바람이 나서 놀아날 때 어떤 생각이 스쳐지나갔을까요? 넷째아들 므비보셋이 왕이 되었지만, 결국 죽임당하였을 때는 어떤 느낌이었을까요? 과연 이때까지 살아있었을까요? 리스바의 두 자녀가 목이 베어 죽임당하고, 그것을 슬퍼하다가 리스바가 결국은 다윗왕에게 감동을 주어서 그 남편 사울과 아들 요나단의 뼈까지 그 조상의 묘에 정중히 묻히게 되었다는 소식을 듣기는 들었을까요? 아히노암은 침묵만 하고 있습니다. 성경이 침묵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분명한 것이 하나있습니다. 무척이나 사울에게 무시당하였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자식을 몇 명이나 낳아줍니까? 네 명이나 낳아줍니다. 사울이 첩을 들이는데, 그 아내 아히노암이 불평했더라는 말이 한 번도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그런데, 그녀에게 남겨진 말은 “패역무도한 계집”이라는 말입니다. 사울이 요나단에게 하는 말 중에 나옵니다. 아히노암이 패역무도한 짓을 한 것이 무엇입니까? 그렇게 한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그런데도, 지금 사울은 요나단에게 자신의 감정을 퍼부으면서 애궂은 아내 아히노암을 들먹거리는 것입니다. “패역무도”하다는 것이 무엇입니까? 우리들이 쉽게 사용하는 말로 하자면, “화냥년”이란 말이겠지요? 자녀 네 명 나아준 것이 “화냥짓”이었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참으로 억울한 인생이었겠다 싶습니다.
그런데도, 불평 한 마디도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 이름 뜻이 무엇입니까? “내 형제는 아름답다”입니다. 그녀의 아버지 아히마아스가 가족들이나 친척, 아니면 공동체에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지었을 이름입니다. 공동체를 귀중하게 여기고 소중하게 보는 관점이 이 이름에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 이름을 가지고 살았을 아히노암은, 억울한 욕도 듣고, 어쩌면 (사울이 첩을 드리는 과정에서)누명도 뒤집어 썼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평이나 원망을 하지 않고, 스러져가는 가문이지만, 망할 가문이지만, 그래도 자신에게 주어진 몫을 묵묵히 감당하였을 것입니다(이런 것이 지나친 추측일까요?)
권찰들로 부름을 받은 우리들에게 적용시켜 생각해 봅시다. 혹시, 이렇게 억울하다고 여겨질 수 있는 욕을 듣고 있지는 않습니까? 사실, “그리스도인”이란 말 자체가 욕이었습니다. 예수쟁이, 예수꾼이란 말이 그렇듯이 말입니다. 가정에서, 교회에서 애매하게 오해를 받고, 억울하게 여겨지는 경우는 없습니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럴 때에 아히노암의 어떤 면에서 배워야 할 교훈같은 것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경의 이곳저곳을 볼 때에 어떻게 하라는 것을 우리들은 모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이런 인생들의 억울함을 기억하고 계시며 결단코 무시하지 않으시는 하나님이십니다.
둘째, 아히노암을 통한 직접적인 교훈은 아니지만, 간접적으로 혹은 그 배경에 대한 지식을 통해서, 우리는 언제든지 하나님과 이웃과 맺은 언약을 소중하게 여기는 권찰들이 되어야겠습니다. 사울이 실패한 것은 하나님과의 언약에 실패하였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신앙인으로서 실패하는 것도, 권찰로서 실패하는 것도 모두 하나님과의 언약에 대한 실패일 수 있습니다. 이 언약을 하나님은 소중하게 보십니다. 그래서, 언약에 신실한 사람들에게 복을 주십니다. 이 복을 놓치지 않는 권찰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겸손한 신앙적 권찰이 됩시다. 성경이 분명하게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에 대해서는 우리도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이 가라고 하면 가고, 멈춰라면 멈추는 것입니다. 이상하게도 성경이 가라고 하는데도 멈춰서고, 멈춰서라고 하는데, 가는 유형의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울의 아내가 다윗의 아내라는 결론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너무 지나친 결론입니다. 이렇게 이상한 결론에까지 이르지는 않아도, 우리들도 자주 성경의 가르치는 교훈들의 결론에 미진하거나 지나친 경우들이 있습니다. “죄”(하마르티아)는 과녁을 빗나가는 모든 것입니다. 빗나갈 때에, 못미채서 빗나가가기도 하지만, 너무 지나쳐 버려서 빗나가기도 합니다. 못미치는 것만 죄가 아니라, 지나치는 것도 죄입니다. 주님 주시는 명령을 지키는 못하는 것도 죄이지만, 지나치게 행하는 것도 죄입니다. 이런 죄 중에 이 시대에 흔한 것이 바로 신비주의의 죄입니다. 하나님을 버린 뒤에 생기는 공허를 메꾸기 위해서 초자연적인 존재들을 그 빈 공간에 채우려는 모든 노력이 이 신비주의에 해당됩니다. 우리 권찰들이 이런 죄를 조심하고, 하나님의 과녁을 정확하게 맞춥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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