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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곳곳 구경하기 스크랩 터키를 다녀와서...
이경하 추천 0 조회 229 12.05.14 14:01 댓글 0
게시글 본문내용



터키를 다녀와서...


2006. 1.1 ~ 9


터키인들은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크'라고 부른다.
우리가 코리아를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것처럼.

고구려와 같은시대에 존재했던 '돌궐'이라는 나라가 있었다.
같은 우랄 알타이 계통이었던 고구려와 돌궐은
수,당나라시대에는 같이 중원을 견제하는 가까운 우방국이였다.
돌궐이 위구르에 멸망한 후, 남아있던 이들이 서방으로 이동하여
후에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건설하게 된다.
투르크는 돌궐의 다른 발음이며, 지금도 자신들의 나라를
투르키에 공화국이라 부르고 있으며
영어의 발음으로는 터키라고 부른다.

돌궐과 고구려는 우호적이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며
서로를 '형제의 나라'라 불렀고 세월이 흘러
지금의 터키에 자리잡은 그들은 고구려의 후예인 한국인들을
'형제의 나라'라고 부르게 된 것이다.
6.25전쟁 참전 후 부터가 아니고...

대부분의 터키인들은 한국인에게 우호적이며,
대한민국 '코리아'를 Brother's country라 부른다.
또, 한국말과 비슷한 단어가 많은 헝가리 사람들 역시
한국이랑 헝가리랑 sister다 라는 얘기를 합니다.

터키인들은 왜 아직도 한결같이 우리를 형제의 나라라고 부를까?
역사 교과서의 차이다.
우리나라의 중,고 역사 교과서는 '돌궐'이란 나라에 대해
단지 몇 줄만 할애하고 있을 뿐이다.
따라서 돌궐이 이동해 터키가, 훈(흉노)족이 이동해
헝가리가 됐다느니 하는 얘기는 전무하다.

터키는 다르다.
오스만 투르크 제국을 경험했던 터키는 그들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 BR>학교에서 역사 과목의 비중이 아주 높은 편으로
돌궐 시절의 고구려라는 우방국에 대한 설명 역시 아주 상세하다.
'형제의 나라'였다는 설명과 함께...




이스탄불
 


보스프러스 해협의 남쪽에 위치하고 있으며 해협을 중심으로
동 서의 이스탄불로 나누어지며 동쪽은 아시아, 서쪽은 유럽대륙에 위치한다.

보스프러스해협·골든혼(Golden Horn)·마르마라해(海)에 의하여
베욜루·이스탄불(파티프)·위스퀴다르의 3지구로 구분되며,
골든혼의 남쪽인 이스탄불은 지금도 비잔틴시대의 성벽이 서쪽 경계를 둘러싸고 있다.
아흐메드 사원(블루모스크), 성 소피아 사원, 톱카프 궁전,
도시의 전성기를 생각나게 하는 대시장(그랜드 바자르)이 있다.

그리스의 식민지 시대에는 비잔티움(Byzantium)이라고 불리었으나
로마의 테오도시우스 1세가 죽은 뒤 게르만민족의 대이동 결과 서방의 판도를
잃어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열되서
콘스탄티누스 1세가 330년 그리스 식민지인 비잔티움(지금의 이스탄불)에
동로마제국(비잔티움제국)를 세우면서 콘스탄티노플(Constantinople)로
불리우며 1453년까지 존속되다가,

오스만투르크제국의 술탄 메흐메트 2세에게 점령되어 투르크 제국이 멸망하는
1923년까지, 1,600년 동안 대제국의 수도였던 이스탄불에는 그리스·로마시대부터
오스만 시대에 이르는 다수의 사적이 분포해 있는 유구한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도시로서, 실크로드의 종착점이었던 곳이기도 하며
동양과 서양 문화의 교착지이기도 하다.


보스프러스해협을 가로지르는 다리는 독일회사(MAN AG)가 건설하여
터키 정부에 기증하였으며,
통행료는 양방향 모두 징수하는 것이 아니고 유럽쪽에서 아시아쪽으로
들어오는 경우에만 징수하는데 유럽에 거주하는 사람의 생활수준이
아시아쪽에 거주하는 사람보다 생활수준이 더 높기 때문이라고 한다.
터키 국토면적의 97%가 아시아 대륙에 있고 지중해의 사이프러스섬을 합하여
3%만이 유럽대륙이지만 아시아국이 아닌 유럽국가이다.



비잔티움(동로마제국)시대의 성
돌마바흐체궁전

프랑스의 벨사이유궁전을 모방하여 바다를 흙으로 메우고
1856년에 건축하여 토카프궁전에서 이곳으로 이전하였다.
1922년 오스만 제국의 마지막 황제인 메흐메트 6세가
이곳에서 영국 배를 타고 영국으로 망명하므로서
오스만 터키 제국 623년간의 왕조가 막을 내리게 된다.

바로크 양식의 건축물인 오르타쾨이 회교사원


성 소피아 성당


이스탄불이 콘스탄티노플이라고 불렸던 6세기에 건축되었다.
1453년 이후 터키의 지배 아래 들어가 이슬람교의 사원이 되고,
4기(基)의 미너렛(첨탑)이 추가되어 아야 소피아로 부르게 되었으나
본래는 하기아소피아 대성당이라 부르던 비잔틴건축의 걸작이다.

4세기 콘스탄티누스대제와 후계자의 시대에 건조된 성당(36년 헌당식)이
532년의 반란으로 파손된 뒤,
유스티니아누스제(재위 527∼565)는 전면 새로운 설계에 근거하여 재건을 시작하여
100명의 감독 밑에서 1만명의 공인이 5년 10개월만에 완성되어 537년에
헌당식을 거행하였다.

헌당식에 참석한 대제가 감격하여
'오오 솔로몬이여, 나는 그대에게 이겼도다!' 라고 외치며
경건한 기도를 올렸다고 한다.

비잔틴제국의 마지막 황제 콘스탄티누스11세때에 이르러 이스탄불이
오스만트르크제국의 메흐메트2세에 점령되므로서
사방에 탑(미너렛:minaret))을 세워서 이슬람사원으로 500년동안 사용하였다.

건축한지 1500년이 넘었음에도 완벽한 모습으로 남아 있고
현재는 박물관으로 사용하고 있으나 진열된 소장품은 없고
성당내부만을 일반에 공개하고 있다.



'성스러운 지혜'라는 의미의 아야소피아(하기야소피아)는
터키에서도 가장 아름다운 건축물로 손꼽힌다.
가운데 돔은 지상 55m 직경이 31m에 달하며
사방의 4개의 탑(미너렛)은 이슬람사원으로 사용할 당시에
건축된 것으로 사원의 건물과는 어울리지는 않으나
이것도 역사의 자취이므로 철거하지 않았다고 한다.
성 소피아 성당 야경

성당의 내부


성당을 회교사원으로 개조하여 사용할 당시에 건물내부에 있는
모든 벽화나 장식물, 문양들을 이슬람교의 율법에 위배되어
두꺼운 회반죽으로 덮어 씌웠다.
500여년이 지난 20세기에 들어와서 미국고고학단원의 청소작업으로
모자이크벽화가 차례로 모습을 드러내었다.
그림 밑의 하얀부분은 복원되지 않고 회반죽으로 덮혀진 부분

아기예수을 안고 있는 성모마리아에게 재화를 헌공하는 모습이며
순금을 입힌 작은 타일로 정밀하게 묘사한 벽화이다. 기독교를 로마의 국교로 공인한 콘스탄틴 황제의 어머니 성헬레나(St Helena)가 페르시아에서(또는 성지에서) 발굴한 동방박사들의 유해를 콘스탄티노플에 가져와 소피아사원에 보관하였으나, 그후 5세기에 밀라노 대성당에 이관되었다가 1163-64년 신성로마제국 황제인 프레데릭1세에 의해 독일 라인강변의 쾰른에 있는 대성당(Koelndom)쾰른으로 옮겨졌다고 한다.






블르 모스크


소피아성당을 개조해 사원으로 사용하던 도중에
술탄 아흐메드가 소피아성당보다 더 크고 더 좋게 사원을 세우라고 해서
바로 소피아성당 맞은편에 1000년경 세운 회교 사원으로
소피아성당보다는 약 500년 젊고? 잘 관리해서 현재도 사원으로 사용한다.
건물의 외부은 물론 내부의 장식물이 파란색 일색이어서
블르 모스크(Blue Mosque)라고 불리우나
정식 명칭은 '술탄 아흐메드 자미'이다.
이슬람교을 상징하는 색은 파란색이라한다.

모스크가 자리한 이 곳은 로마제국시대에 커다란 경기장이 있었던 곳으로
영화 벤허에서 보여준 전차경주가 열렸던 실제 장소였다고 한다.


블르 모스크 전경

모스크입구

모스크 내부의 천정 천정과 벽면는 이즈닉타일로 장식하였다. 유리창의 색상과 터키전통문양으로 장식된 2만2천개의
타일이 햇빛에 반사되면 각각의 빛들이 완벽한 조화를 이루며
모스크 내부로 스며들어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한다.





토카프 궁전


동로마 제국을 멸망시키고 이 곳을 차지한 오스만 터키제국은
새로운 궁전이 필요했다.
골든 호른(Golden Horn), 마르마라 해(Sea of Marmara), 보스포러스(Bosphorus)
해협이 모두 내려다 보이는 언덕이 위치한 곳에 오스만 제국의 궁전을 건설하고
돌마바흐체궁전으로 이전하기까지 400여년간 24명의 술탄(황제)과
그의 가족들, 그리고 궁녀와 하인들이 사용했던 곳이다.

소장된 유물은 86,000여점으로 세계적인 박물관으로서의 명성을 얻고 있다.
본래 엄청난 보물이 있었으나 오스만 터키제국이 1차대전으로 멸망하자
오스트리아제국에서 많이 약탈해 갔으나 현재 남은 보물도 그 값어치가
엄청나서 판매할 경우 터키인 7700만명이 2년간 생활이 가능하다고 한다.

궁전 앞에는 언제나 커다란 대포가 놓여져 있어 19세기 중반부터
톱카프 궁전(대포문 궁전)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궁전의 정문

궁전의 규모에 비하여 정문은 마차 1대가 겨우 통과할 정도로 좁다.

궁전의 축소된 모형

오른쪽 제일 뒤의 뾰족한 부분이 주방의 굴뚝
궁전에 약5000명이 기거했는데 그중에 조리사가 2,000명 정도 였다고 한다

황제(술탄)의 황금마차
내부의 천정
세밀화-오스만 제국의 식사 풍경.
세밀화-중국인과 자기
궁전앞 공원에 있는 독일분수

오스만터키제국 당시 독일 황제가 만들어서 보냈다고 하며
외부에서 수돗물을 끌어와서, 궁전을 출입하는 사람들이
이곳에서 세수를 하고 몸을 단장하면서 궁전 출입 허가를 기다렸다.
이유는 제국의 권위와 왕의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서라 한다.


오벨리스크(앞) &콘스탄티누스의 탑(뒤)
3500년된 이짚트 오벨리스크

동로마제국이 건국하고 60년이 지난 390년에 테오도시우스왕제가
이집트 카르낙 신전에서 운반하여 세운 이래로 큰 지진에도
붕괴된 적이 없이 그대로이며, 운반할 당시에 너무 크고 무거워서
밑의 상당부분을 절단하여 버리고 운반하여 설치된 것이라 한다.

이짚트 오벨리스크 기단의 조각상
콘스탄티누스 황제때 세운 콘스탄티누스의 탑 (높이 34m)

벽돌로 만들어졌으며 같은 장소에 있는 이짚트 오벨리스크와는
다르게 파괴된 부분이 많고 총탄자국이 많이 보인다




이스탄불 그랜드 바자르




실크로드의 종착역이었던 그랜드 바자르(현지 이름 : 카팔르차르식)는
돔 모양으로 지붕을 씌운 옥내 시장으로 상점의 수가 5,000여개에 이른다.
원 건물은 비잔틴 제국 때 지은 것인데 이스탄불이 오스만 투르크 제국의
수도가 되면서 번성하여 오랫동안 동서양의 물건이 만나는 장소가 되었다.
터키는 지진이 많은 나라이다. 그랜드 바자르는 12번의 강한 지진과
9번의 대화재로 소실되었다가 복구되어 오늘에 이르렀다고 한다.
옛날의 분위기는 없어졌다고는 하지만 터키에 온 관광객이라면
누구나 한번쯤은 들르는 곳이다.




전통 음식 -케밥 -




이스탄불 구시가지의 도로가에 있는 음식점앞에서

4각의 돌로 포장을 한 도로는 로마시대의 포장방법중 하나이고
지금도 이 도로위로 버스도 달리고 전차도 다닌다.
속을 든든하게 해주는 터키식 스프 - 타북 초르바

스프의 향이 짙으며 매콤새콤하다.

가장 보편적인 닭고기 케밥 - 타북 쉬쉬
가장 작은 케밥 - 최프 쉬쉬

몇개의 양고기조각에 꼭 기름고기를 한개정도를
같이 꾀어 불로 구어낸다.

요구르트와 함께 먹는 - 이스켄데르 케밥
매콤한 맛이 일품이라는 - 아다나 케밥
쇠꼬챙이에 다진 고기를 붙인 후 구워 나오는 - 우르파 케밥

다진 고기를 주재료로 하고 여기에 갖은 양념과 향료를 혼합하여 만든 것을
케밥이라 부르고 '최프 쉬쉬'와 같이 순살고기로만 구어낸 것을 티카라고 구분하여
부르는 이슬람권의 나라도 있다.
일반적으로 케밥의 주재료인 양고기는 티카에 비하여 저급의 고기를
다져서 혼합후 손으로 주물럭하여 불로 구어 낸다.
양 가슴살로 만들어 가장 맛이 있다는 - 피르졸라
삶아 나오는 케밥 - 오스만 케밥

여기서는 밥이 주식이 아니고 반찬이다.


우리나라의 케밥... ^^


로쿰이라는 달콤한 과자 차이(홍차의 한 종류) 터키식 아이스크림



카파도키아




카파도키아로 가는 길목의 소금호수에서...멀리 뒤로 하얗게 보이는 부분이 소금호수

이스라엘의 사해(死海)나 미국의 솔트레이크(유타주에 있는 Salt Lake)는
소금의 농도가 진하여 사람이 물위로 뜨지만 이곳은 소금의 농도가
그 보다는 못하여 사람이 물위에 뜨지는 않는다.




소금호수 앞의 휴계소

소박한 모습에서 친근함이....

카파도키아는 도자기산업이 발달되었다 장인의 정성과 혼을 담아서...
자연으로 돌아가는 토기들 카파도키아 괴레메 계곡의 버섯바위와 바위동굴


마치 스머프가 사는 마을 같기도 하고, 외계인이 사는 마을 같은 곳.
영화 '스타워즈'의 외계인 마을로 배경이 된 가파도키아의 괴레메계곡은
화산재로 형성되어 동굴을 파기가 좋아 이런 모습의 마을이 되었으며
313년 로마교황이 기독교를 공인하자 근처의 지하도시에서 은거하며 살던
기독교인들이 나와서 바위동굴을 파서 교회를 짓고 집으로 살던 마을이다.

최근까지 주민이 거주 했으나 너무 많이 바위를 파고
동굴이 오래되어 일부가 무너지기 시작하자
터키정부에서 퇴거 명령을 내려서 대부분 비어 있으나
일부 바위동굴에는 주민이 거주하거나 창고로 사용하고
일부동굴은 호텔과 카페로 개조되어 사용하고 있다.




이스탄불의 공원에는 꽃이 피었는데
이곳은 내륙에 위치한 곳이여서 눈이 내렸고 날씨도 쌀쌀하다.




내 등에 올라 기념사진 촬영하라고
관광객을 빼꼼이 바라보고 있는 낙타.



버섯 바위는 오랜 풍화와 침식작용으로 자연이 빚어낸 걸작품.








터키의 지하도시 중 하나인 데린쿠유



터키에는 여러곳에 지하도시가 있으며 그중에서 규모가 가장 큰 데린쿠유이다.
'깊은 우물'이라는 뜻의 데린쿠유는 최대 4만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지하도시였다.
적의 공격을 피해 마치 개미굴처럼 땅 속을 파고들어 지하 120미터까지 내려가며
옆으로 혹은 아래로 계속 파고 들어가 복잡한 미로의 형태를 띄게 되었다고 한다.

데린쿠유에는 층마다 그 깊이를 알 수 없는 큰 구멍이 있어 예전의 우물 역할 뿐 아니라
지하 내부 공기 환풍기, 그리고 동시에 통신 역할도 했다고 한다.
지하 1층과 2층에는 양이나 가축이 기거하던 마굿간과 곡물 저장 창고,
비상시 식수로 사용하기 위해 만들어졌다는 포도주 만드는 기구들,
긴급한 일이 발생할 시에 모여서 대책을 논의했던 집회 장소,
지하도시에 모여서 살고 있는 아이들을 위한 교실이 위치하고 있고,
지하 3,4층에는 거주지와 성당, 병기고, 터널 및 고해소등이 있었으며,
그 외에 특징적인 것은 죽은 자의 시신을 보관하는 곳이
따로 마련되어 있다.

모든 통로와 여러 개의 방들은 복잡한 미로처럼 되어 있으며
적의 침입시 속히 동굴를 차단할 수 있도록 경사지게 설치하여 만든
대단히 큰 둥근 맷돌모양의 방지문이 빗장으로 고정되어
유사시 쉽게 밑에 있는 빗장을 제거하면 굴러내려 입구를 차단하려고
동굴의 주요통로에 설치되어 있으며, 또다른 지하도시로의
대피나 통신을 위해 만든 연결 비밀통로의 길이가 10km나
이어지는 곳도 있다고 한다.

지하 1층과 2층은 고대 힛타이트인(BC1400년경 인류최초로 철기를
사용하였던 힛타이트제국이 존재하였으며 수도는 터키 핫튜사지역으로
에집트의 람세스왕과 패권을 다투었던 고대국가)이 살았던 흔적이 있으며,
로마제국에서 기독교를 공인하기 이전에 기독교를 박해 하다보니
이를 피하기 위해 기독교인들이 이곳에 들어와 지하도시를 건설해서 살았으며
정확한 규모는 알수 없으나 대략 20,000~ 40,000 여명이 살았을 것으로
추정된다고 한다. 지하 20층까지 발굴했으나 그 아래에도 계속 연결되어 있고,
현재 개방은 지하 8층까지 되어 있다.

건장한 남자들만 동굴에서 나와 먹거리를 구하러 다니고
어린이나 여자들은 동굴에서 나오지도 않고 살았다 한다.

1980년대 양치기 소년이 양을 잃었는데
땅속에서 양의 울음소리가 들려서 들어 갔다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지하동굴도시로 들어가는 입구

동굴이 산속을 파고든 것이 아니고 평지의 땅속에 위치하고 있다.

지하굴은 외부인의 침입을 막기위해서 미로로 연결되고
지하 7층 한쪽에 있는 교회(십자가 모양의 굴)
끝없이 연결되는 일부 굴은 철문으로 출입을 막고.
돌로 만든 의자
깊이를 알 수없는 곳에서 부터 올라오는 환기 구멍
올라온 환기구는 외부로 연결되고...
동굴카페에서의 민속춤 공연

근래에 관광객을 위하여 만든 동굴이라 한다.



실크로드의 대상숙소


실크로드의 종착점인 이스탄불로 향하는 당시의 실크로드에는
약 35km 마다 대상이 쉴수 있는 대상숙소가 있었는데
대부분 가까운 곳에서 물을 확보할수 있는 곳에 설치하였다 한다.

35km마다 숙소가 있는 이유는 낙타와 사람이 하루에
이동할 수 있는 보통의 거리라 한다.

많은 대상숙소중의 한곳으로 아치 한개가 하나의 커다란 방(약 15평~20평)

건축물의 돌들이 이곳저곳의 오래된 유적지에서 철거하여 오거나,
지진으로 폐허가 된 다른 유적지의 건물 잔해들을 옮겨 지어졌다고 한다.
그래서 멋진 문양의 조각도 있고, 일부 깨진 모습도 있고,
큰 조각, 작은 조각등 멋대로...생긴대로...
아취공법을 이용한 건축물구조가 특이하고 아름답다.





파묵깔레와 히에라폴리스(Hierapolis)



기원전 190년경 페르가몬의 왕조였던 유메네스2세시대에 만들어져
로마시대의 온천지로 번영하다 지진으로 폐허가 된 곳이다.
고대시대부터 현재까지 변함없이 시냇물이 흐르듯이
많은 양의 온천수가 솟아 나오고 있으며,
온천물의 석회성분이 산을 이루어 하얀 목화꽃 같이 보인다 하여
목화성(파묵깔레)으로도 부르는 곳.

하늘 빛을 그대로 투영해낼 만큼 맑고 깨끗한 파묵칼레의 온천수는
심장병, 소화기 장애, 신경통에 탁월한 효과가 있어
클레오파트라를 비롯해서 로마의 황제나 귀족, 세계 각국에서
부유한 자들이 병을 치료하기 위해서 왔다고 하며,
병이 치료되면 고국으로 돌아가고,
치료를 못하면 생을 마감하여 호화로운 무덤을 남겼는데
현재 발굴된 석관만 1,700여기가 된다고 한다.
그래서 이곳을 죽은자의 도시, 신성한 도시로 '히에라폴리스'라 부른다.

터키는 지정학적으로 유라시아판과 아프리카대륙판이 부딛치는
경계지점에 위치하고, 양 대륙판과의 충돌로 지진이 자주 발생하며,
특히 몇십년만에 한번정도는 주기적으로 대지진이 발생하고 있다.
1999년 8월의 강도7.8의 대지진시에는 3개시를 폐허로 만들고
40,000여명의 희생자가 발생하였다.

터키 유적지가 온전하게 남아있지 못하고 파괴된 것은
전쟁이나 화재로 인한 것이 아니고 대부분이 큰지진으로 파괴되고
땅속에 매몰되었기 때문이라 한다.

매년 수백만명의 관광객이 찾아 오는 곳이지만
포장되지 않은 석회붕 온천 입구의 진입도로.
이른 아침 해뜰무렵 비가 내린 직후
자욱한 안개속에서의 석회붕온천
안개가 걷히면서...
온천물이 산위에서 흘러내리면서 온천수의 성분인 석회가 응고하여
마치 우리나라의 다랭이논과 같이 계단같은 층을 만들어
온천물이 고여 있어 노천온천탕으로도 이용된다.
로마시대의 온천 목욕탕 건물
도미테우스 로마 황제가 다녀간 것을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도미테우스 기념문
하드리아누스 로마 황제(재위117~138년)에 의해 세워진 극장

건축물이나 도로포장의 자재는 모두 대리석을 사용하였다.
터키는 대리석자원이 풍부하여 유적지 어느곳이나
모두 대리석을 사용하여 건축된 것임을 볼 수 있다.

수백년 동안 묘지로 사용하다보니 지진등으로 흙에 묻히고
그위에 또 무덤이 생겨났으며 발굴해보니 이렇게 이중으로 무덤이
형성된 것이 여러곳에 있다.(윗부분은 작은 다른 석관 )

지진으로 매몰된 석관을 발굴하여 복원한 여러형태의 석관들


동양인의 무덤 / 내부는 석실형태임

이곳의 주인은 누구였을까?
병을 치료하기 위하여 온 사람이 고향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이역만리에서 쓸쓸이 생을 마감한 사람인지,
실크로드를 따라 무역을 하던 대상이었는지,
중국인으로 추정된다고는 하지만 한국인은 아니였을까?

발굴된 어느 묘비에는
"나 어제 당신과 같았으나 내일은 당신이 나와 같으리라"는
글귀가 쓰여져 있다고 한다.







헬레니즘시대의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는
[에페소](EPHESUS)]




기원전 1100년경 아테네 왕자 안드로클레스가 여인들이 다스리는
아마존족을 추방하고 에페소를 건설 하였다고 하며
그후 아테네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인들이 거주하여
고대엔 아테네 다음으로 큰 도시였고, 그리스도 시대에는
예루살렘 다음으로 가는 큰 도시였다.

2,000년전 로마제국 당시 많은 건축이 이루어지고
로마 황제 안토니우스가 클레오파트라와 이곳에 체류하기도 했으며,
클레오파트라의 죽음 이후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는 쇠락해지고
에페소가 소아시아의 수도가 됐다. 당시 인구는 25만 명이나 됐다고 한다.
이후 아우구스트스 시대에 더욱 번성하여 로마의 대도시로 성장하였다.

기원 후에는 크리스트교와 밀접한 관계를 맺으며
사도 요한과 바울이 예수의 복음을 전파한 곳,
성경의 '에베소서'와 '요한복음'이 쓰여진 곳이다.

7세기 부터는 오스만 제국의 힘이 커져 잦은 침략으로 피폐해 갔으며
이후에는 오스만 투르크의 통치에 놓이게 되었다.




중앙도로

바닥을 대리석으로 포장하였다.



작은 돌로 만든 아름다운 문양의 모자? 도로



셀슈스 도서관

이집트의 알렉잔드리아 도서관 다음으로 규모가 큰 도서관이었다.


바다(에게海)의 항구와 연결되는 아카디언(아르카디아) 도로

도로 양쪽가에는 당시 물건을 파는 상점들이 위치하여
이곳을 '아카디언(아르카디아)'의 도로라고 불리어 진 것이
지금의 '아케이드(arcade)'란 단어의 어원이 됐다고 한다.

당시에는 셀슈스 도서관을 지나 길을 따라 1km를 가면 바다의
항구와 연결되었으나 지진으로 땅이 6km나 바다쪽으로 밀려나
항구로서의 기능이 상실되어 도시가 쇠락의 길로 접어드는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한다.



원형극장

25,000명 수용이 가능한 반원형 대공연장은 기원전 3세기에
건축되었는데 로마시대에 수차 확대되었다.
서기 53년 이곳에서 사도 바울이 예수크리스도의 복음을 전했으며,
아르테미스 여신을 숭배하는 에페소인들의 미움을 받아
로마의 옥중에 갇혔을 때 에페소교인(성도들)에게 편지를 보낸다.
이 편지가 바로 성경의 '에베소서'이다.



2세기 로마황제 하드리아누스에게 바쳐진 신전의 입구

안쪽 문위 중앙부에 양손을 벌린 메두사가 조각돼 있는데
당시 메두사는 다산(多産)의 상징으로 숭배되었다.
로마교황이 다녀간것을 기념해서 세운 교황의 신전
로마황제가 다녀간 것을 기념해서 세운 분수대
고온탕, 온탕, 냉탕의 시설을 갖춘 목욕탕 내부



공중화장실

대리석 구멍위에 걸터 앉아 일을 보면 위의 목욕탕 폐수가
아래로 흘러서 자동 수세식으로 처리되도록 밑에 시설이 되어 있다.


니케 신상(승리의 여신상)

스포츠의류 메이커인 나이키(Nike) 상표는
이 신상의 좌측 옷깃부분에서 따 왔다고 한다.




옛모습은 사라지고 그 잔해들만 남아...






시청건물터

아르테미스(Artemis) 신전터

그리스의 역사가 헤로도투스가 이집트의 피라미드에 견주어
손색이 없는 걸작이라 극찬하였던 아르테미스 신전은 기원전 6세기 중엽
리디아 왕 크로이소스 때 착공하여, 120년이 걸려 완성되었고
높이 20m정도의 이오니아식의 하얀 대리석 둥근 기둥 127개를 세우고
지붕을 씌운 신전으로 그리스의 파르테논신전의 4배로 큰 규모였다.

에집트 쿠푸왕의 대 피라미드와 같이 '고대 7대 불가사리' 건출물에 속하며
지금은 흔적만이 이곳이 신전터였슴을 보여준다.

클레오파트라와 이집트왕권을 놓고 다투던 그녀의 여동생인 '아르시노에'가
패배하여 이곳 신전에서 유배생활을 하였으나,
후일 클레오파트라가 자신의 여왕자리가 위험해질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안토니우스에게 청하여 '아르시노에'가 죽임을 당한 곳이다.

수차례의 지진으로 파괴된 것을 그때마다 여러차례 복원을 거듭하였고,
5세기경 그리스도인들이 이스탄불(비잔티움)의 성 소피아 성당을 지을때
신전을 헐어 성당의 일부자재로 사용하였다고도 한다.
한개의 기둥은 터키정부에서 과거 신전터임을 나타내기 위하여
부서진 여러개의 조각들을 조립하여 세운 것이다.
아르테미스 여신상

셀슈스 도서관내에서 촬영한 것으로 팔과 다리에는
각종 동물로 가슴엔 많은 유방을 달고 있다.

아테네에서 이주해 온 그리스인들이 아르테미스여신을 숭상하며
수세기를 지배하여 왔으나, 기독교가 공인된 후에는 바오로와
요한의 복음전파로 성모마리아의 존경으로 대치 되었다.

아르테미스여신은 금욕과 사냥꾼의 신 아폴로의 쌍동이 동생이였고
수렵의 여신이기도 하며 젊음의 수호신이기도 하다.



뒤로 보이는 산위 성곽이 있는 곳에 예수크리스도의 제자인 사도 요한이
예수크리스도 사후에 기독교 박해를 피해 성모 마리아와 함께
도피하여 106세에 생을 마감하기 까지 거주하던 곳으로
요한복음도 이곳(에페소)에서 쓰여졌으며, 요한과 바울의 묘소가 있다.




트로이 유적지



트로이에 관한 관심은 호머의 서사시 '일리아드 오디세이'로 증폭된다.
약 3500년전에 고대 그리스와 트로이사이의 트로이 전쟁은
고고학 배경이 전혀 없는 독일사람(Schliemann, Heinrich,1822~1890)에 의해
처음 발견되어 1860년부터 유적지를 발굴하였으나,
처음부터 체계적인 발굴이 아니어서 오히려 많은 역사적 사실이 훼손되었다 하며,
발굴에 따라 두 나라 사이에 충돌이 있었다는 역사적인 근거를 확인하여
신화가 아닌 실제의 역사로 탈바꿈하게 되었다.


'트로이의 목마

인구에 회자되는 트로이는 에게해(海)연안에 위치한
매우 오래전의 역사를 가진 유적지나 실제 발굴되어 보여주는 것은
사진에서 보여 주는 것 이외는 볼 수가 없고, 터키 관광청에서 세운
목마의 모형도 어울리지 않는 어색한 느낌은 어째서 일까.



신전터 두개의 우물

하나는 제물(주로 양과 염소)을 청결하게 씻는데 사용하고
하나는 제물로 잡은 동물의 피를 씻는데 사용했다고 한다. 원형극장 트로이 전쟁후 2000년 지난 로마제국시대에 건설되었으며 1000명정도 수용이 가능한 크기

옹 관

시신을 옹관으로 장례를 치루었다.

비슷한 시대에 존재하였던 현 이락의 유프라테스강 유역의 바빌론
제국에서도 옹관으로 시신을 안장하였으며, 그곳에서는 화려하게
채색한 옹관으로 매장한 것을 1980년에 현지에서 본적이 있는데
당시 주위의 모든 국가들이 옹관 매장방법을 사용한 것으로 추정된다




1930년대에 미국의 블레겐이 트로이 유적에 대한 과학적인 재조사를
시행한 결과, 시대를 달리하는 여러 유적층이 발견되었으며
트로이전쟁이 사실성을 갖는다면 9층으로 이루어진 유적 가운데
BC 1250년의 것으로 추정되는 제7층이 여기에 해당한다고 하니,
트로이전쟁 훨씬 이전의 또 다른 역사 흔적이 있었슴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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콘야시의 고속도로 휴계소에서


메블라나교의 '세마춤'을 추는 모습의 조형물이 보인다

셀주크 투르크시절(오스만 투르크이전의 시대)의 수도였던 콘야지방에서 발생한
이슬람교 종파중 하나인 메블라나교는 신비주의적이고 참선중심의
교리를 가지고 있다. 그 참선의 매개체가 바로 '세마춤'인데
한 손은 하늘로 향하고, 다른 손은 땅을 향해 계속해서 원을 돌며 추는 춤이다.
심장을 중심으로 오른쪽에서 왼쪽으로 도는데, 돌 때에는
오른손은 신의 축복을 받기 위해 하늘로, 왼손은 사람들에게
축복을 나눠주기 위해 땅을 향한다.
속도가 점차 빨라지면서 1초에 한번씩 돌 정도로 빨라진다.
1시간을 넘게 돌면 무아지경에 빠지게 되고 그 때 신을 만나게 된다고 한다

이슬람 원리주의자들은 세마춤을 금지 시키고 있으나 터키의 콘야 지방에서는
이슬람 신비주의를 추구하는 이슬람교도들이 모여 신앙생활을 하고 있다.


터키 사람들은 사람을 볼 때는 제일 먼저 보는 것이
그 사람이 싣고 있는 구두라 한다.
그래서 구두는 항상 청결하게 신고 다닌다고 한다.

집을 방문 할 때는 먼저 보는 것이 그 집의 유리창이라고 한다.
유리창이 얼마나 깨끗한지를 먼저 본다고 한다.
그래서인가 길가 상점의 유리창들도 반짝 반짝 윤기가 날 정도로
항상 깨끗한 것을 볼 수가 있다.

고속도로 휴계소에 버스가 정차하면 제일 먼저 달려오는 사람은
버스 외부를 청소하는 세차원이다. 물론 유리창까지도...
세차비도 받지 않는다.
비가 오는 날임에도, 출발하면 곧 차가 다시 더렵혀 지는 것을
모를리가 없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정성껏 청소하여 준다.



휴계소 상점에는 화려한 원색에 의미를 알 수 없는
무늬가 있는 물건들이 소박하게 진열되어 있다.






고대 투르크인의 역사


투르크(돌궐)족은 BC 220년 이후 수많은 국가를 이룩하였는데 이중에는 그 영토가 1,800만㎢ 이상에 걸친 경우도 있었으며, 10∼11세기경 현재의 아나톨리아 반도에 정착하여 셀죽 제국을 건설하였다. 초기의 투르크인들은 돌궐족, 흉노족이라고 하였으며, 지금의 오르혼강 하류인 바이칼호 주변에 본거지를 이루었다. 돌궐은 몽골계 민족인 유연에 속해 있었으며 돌궐의 수장인 토문은 '이리가한(伊利可汗)'이라고 자칭하며 6세기경 유연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이와 동시에 돌궐이 독립하였으므로 터키 공화국은 그 해를 건국의 해로 본다. 돌궐은 유목민족이므로 말을 잘탔기 때문에 아주 빠른 기동성을 갖고 있었다. 중앙 아시아에 살던 그들은 알타이에서 카자키스탄지역으로 그곳에서 남하하여 지중해까지 이르렀다. 다른 투르크족들은 우랄산맥을 거쳐서 핀-오굴족과 만나게 된다. 또 다른 부족은 중국북서부에서 칸수지역으로 이동해 아시아 흉노국을 세운다. 다른 부족은 시베리아쪽으로 퍼져나간다. 또 인도의 인더스, 펀잡지역을 공격한 부족도 있다. 중국의 기록에 의하면 투르크족은 BC 17 세기 경에 국가를 세운 것으로 나온다. 훈(흉노)이라는 국가는 투르크족이 세운 국가인 것이다. 진시왕의 만리장성도 바로 이 투르크족을 막기위해 세운 것이다. 그렇게 강대했던 흉노도 BC36년 북 , 남흉노로 갈라지면서 북흉노는 멸망하게 되고, 남흉노는 중국의 속국이 된다. 멸망한 흉노들은 점차 서쪽으로 이동해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일으킨다. 그후 흉노족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유럽의 트라키아에 들어서게 된다. 그들은 유럽에 훈제국을 건설해 동로마와 서로마로부터 조공을 받아낸다. 유명한 왕은 아틸라였다. 유럽 훈제국은 아틸라 이후 힘을 잃고 사라지게 된다. 이상이 고대 투르크인들의 역사인데 꽤나 복잡하다. 셀죽 투르크
오우즈 부족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오우즈의 부족장 두칸이 죽고 나서 그 뒤를 이은 셀죽, 그리고 그 손자 투룰, 차으르가 그 뒤를 있는다. 차으르의 지휘하에 1018년 아나톨리아에 진군해서 아르메니아를 물리치고 아니에까지 진출한다. 얼마 후 셀죽 투르크는 카라한르도 패배시킨다. 1035년에는 가즈네리를 이겨서 호라산까지 진출한다. 그후 투룰은 스스로 술탄이 된다. 중요한 이란 도시중 하나인 이스파한을 얻고, 셀죽인들은 동부 아나톨리아에서 계속적으로 비잔틴에 피해를 주기 시작했다. 다음에 바그다드에 들어간 투룰은 칼리프로부터 지배자로 인정받는다. 투룰이 1063년에 죽자 투룰의 형제 차으르의 아들 알프 아스란이 그 뒤를 잇는다. 아제르바이잔, 카프카시아까지 원정을 떠난 알프아슬란은 아르메니아의 수도 아니까지 포위한다. 그때 투르크멘 그룹이 영토내에 이주해오기 시작한다. 그들을 위해서도 아나톨리아에 진출할 필요가 있었다. 이때 비잔틴 제국도 내부혼란을 겪고 있었는데 이것을 해소하기 위해 여황제가 루마니아인 디오게네스와 결혼한다. 비잔틴의 새황제는 계속해서 비잔틴을 괴롭히는 셀죽 투르크를 아나톨리아에서 몰아내고 싶었다. 그래서 직접 군대를 이끌고 셀죽 투르크를 공격한다. 1071년의 말라스기르트전투에서 비잔틴은 패배를 당하고, 셀죽 투루크의 아나톨리아 진출을 방관할 수밖에 없는 상황으로 몰린다. 알프아슬란의 뒤를 이은 아들 메릭샤는 아버지의 훌륭한 재상 니자뮬 뮬큐와 손잡고 계속적인 정복사업을 벌여 시리아와 팔레스타인을 얻는다. 아나톨리아의 토착민들은 셀죽 투르크인들의 발전을 그렇게 불편해 하지 않았는데 그 이유는 비잔틴 제국의 높은 세금 때문이었다. 그 후 사판자에서 비잔틴제국은 다시 패배를 당하고 아나톨리아는 서서히 투르크화한다. 또한 슈레이만 샤에 의해서 안타키아(안디옥)까지 셀죽 투르크의 영토가 된다. 메릭샤는 드디어 영토를 흑해까지 넓힌다. 그리하여 셀죽 투르크의 영토는 동쪽으로는 중국근방까지 서쪽으로는 이스탄불 근방까지 넓힌다. 메릭샤가 죽고나서 셀죽 투르크에 왕권을 두고 혼란이 생긴다. 그리고 얼마 후 십자군 원정이 벌어진다. 산잘이 1141년 카라하이트에 패하고 나서 셀죽 투르크는 없어지나 아나톨리아의 셀죽 투르크는 그 역사를 이어간다. 십자군과의 직접적인 전쟁을 벌인 것은 바로 아나톨리아의 셀죽 투르크이다. 셀죽 투르크 말기에 역사에 등장한 몽골과의 쿄세산 전투에서 완패를 당하고 셀죽 투르크는 일한의 점령하에 들어간다. 그 뒤 셀죽은 역사의 무대뒤로 사라진다. 오스만 투르크
오스만 투르크는 셀죽 시대에 세워져 셀죽 투르크가 없어지자 독립을 선언한 부족국가 중의 하나이다. 셀죽 투르크가 멸망하고 많은 이재가 몰려왔고, 또한 많은 부족들이 경쟁하는 중부 아나톨리아로부터 떨어져 부르사, 이즈닉 지역에 정착했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견제를 덜 받았고, 이미 비잔틴제국은 약해질때로 약해진 상태였다. 오스만은 1299년 국가를 세운다. 그리고 1324년 죽을 때가지 차근차근 영토를 확장해서 말마라해의 아나톨리아지역을 석권한다. 그 뒤를 이은 아들 오르한은 1326년 부르사를 점령하고 1335년 일한이 멸망하자 독립국의 제일인자가 된다. 오르한은 계속적으로 서쪽으로 그러니까 비잔틴제국으로 처들어가길 계속한다. 1354년 오르한의 아들 슐레이만이 겔리볼루를 지나서 비잔틴제국의 유럽쪽 영토에 들어가기에 이른다. 이것은 오스만 투르크의 유럽땅에 내딛은 첫발자국이다. 슐레이만은 그후 앙카라를 점령하나, 사고로 죽게 되자 그의 형제 무라트의 영토는 아나톨리아의 북동부와 에게해의 일부, 트라키아의 일부였다. 1362년에 왕위에 오른 무라트 1세는 발칸 반도쪽의 점령을 시도해서 에디르네(아드리아폴리스)를 점령한다. 그리고 수도를 에디르네로 옮긴다. 1389년 무라트1세는 코소바 전쟁을 승리로 이끈다. 그해 예니체리를 구성하는데 예니체리는 기독교집안의 자제들로 구성된 술탄의 친위대였다. 1396년 전체 유럽이 참가했던 십자군을 니볼루 전투에서 물리치고, 연합유럽조차도 이제는 오스만 투르크를 유럽에서 몰아낼 수 없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와 더불어 비잔틴의 함락은 그야말로 시간문제로 변해버렸다. 그렇게 전성기를 치달리던 오스만 튀르크는 불의의 기습을 당하는데, 그것은 몽골족의 후예 티무르의 등장이었다. 티무르와의 전투에서 패한 오스만 투르크는 재기불능의 상태로까지 빠졌다. 이것을 극복하는데 약 20년의 세월이 걸린다. 그 후 무라트 2세때 힘을 다시 회복한다. 1422년 헝가리, 폴란드 왕은 성경에, 무라트 2세는 코란에 맹세하며 협정을 맺고 무라트2세는 왕권을 아들 메흐메트 2세에게 물려준다. 그러나 헝가리와 폴란드는 이 서명을 어기고 투르크의 영토로 쳐들어온다. 이에 메흐메트2세는 아버지의 도움을 요청하나, 무라트2세는 아들의 권위를 손상 시키지 않기위해 이 청을 거절한다. 그러자 메흐메트 2세는 아버지 무라트에게 "내가 왕이라면 와서 군대를 지휘하고, 당신이 왕이라면 당신의 나라를 구하소서" 라는 말을 한다. 이에 무라트2세는 달려와 적군을 물리친다. 아버지 무라트가 죽고나서 왕위에 오른 메흐메트 2세는 콘스탄티노플을 공격해 점령하는데 그때가 1453년이다. 학자들은 이때를 기준으로 유럽의 중세가 막을 내렸다고 한다. 야우스 술탄 셀림은 카이로를 점령해 이집트의 맘루크 왕조를 무너뜨리고 칼리프를 이스탄불로 데려와 칼리프직을 양도받아 오스만 투르크는 명실상부한 이슬람의 종주국이 된다. 카누니 술탄슐레이만은 오스만 투르크를 최전성기로 이끄는 사람인데, 그 당시의 영토는 북부 아프리카 전체, 동부 유럽 전체, 중동지역 전체를 확장한 로마 이후 최대의 영토를 지니게 된다. 그 후로 점점 오스만 터키는 기울기 시작하고 점점 전쟁에서 지는 횟수가 많아지게 되는데, 그래도 오스만 투르크는 그 명을 이어간다. 이어간다고 표현했지만 역시 당시에는 최강 중의 하나였다. 그러다가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과 오스트리아편에 선 오스만 투르크는 전쟁에서 져서 패전국으로 전락하고, 그 많던 영토는 이미 다 상실하고 아나톨리아마저 점령된 상태가 돼버렸다. 이 와중에 나타난 사람이 바로 터키의 초대 대통령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다. '아타투르크'라는 이름은 터키인의 국부라는 말로 국회로부터 받은 칭호이다. 아타투르크에 의한 독립운동은 성공해서 1923년 공화정이 들어서게 되고 왕정은 막을 내리게 된다. 오스만 제국 시대 (1281-1922)
오스만제국은 1281년 성립된 이후 1354년 유럽에 진출, 여러나라를 정복하였으며, Sultan Mehmet이 1453년 콘스탄티노플(현재의 이스탄불)을 정복함으로써 오스만제국의 팽창정책은 절정기에 들어섬. 16세기에는 에게해와 흑해가 오스만제국의 내해로, 이디오피아, 중앙아프리카, 예멘, 크리미아가 국경으로 되었고, 유럽의 비엔나까지 그 영토가 확장되었다. 오스만제국은 17세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1912∼1913년 발칸전쟁으로 영토가 그리스의 Maritsa강 지역까지 축소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시에는 패전국인 독일측에 가담, 1920년 8월 연합국측과 체결한 Sevre 강화조약에 의해 콘스탄티노플의 背後地와 아나톨리아 고원만을 보유하게 되어 있었으나, 무스타파 카멜 파샤(Mustafa Kemal Pasha)의 영도로 실지회복 전쟁을 성공적으로 완수한 후 1923년 7월 연합국측과 Lausanne 조약을 체결함에 따라 현재의 영토를 보유하게 되었다. 1071년 셀주크족은 만지케르트 전투에서 비잔틴을 쳐부수고 아나톨리아에 정착했다. 당시 쇠퇴기를 맞은 비잔틴 제국은 투르크족의 위협이 매우 심각하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비잔틴 제국은 경제적 위기로 쇠약해진데다 로마 황제 디오게네스가 암살된 후 자신들이 원하는 왕을 등극시키고자 하는 도당끼리의 싸움으로 분열된 상태라, 아주 뒤늦게 서야 투르크족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었다. 알렉시스 콤네노스가 권력을 장악한 1081년에 소아시아는 거의 투르크족의 수중에 들어가 있었다. 당시 투르크족은 점령한 영토를 분할해 나누어 가졌다. 반도 중앙부의 콘야(KONYA)는 13세기 전반에 융성기를 맞았던 아나톨리아의 셀주크족이 지배했다. 셀주크족은 중앙아시아에서 계속 밀려들어오는 유목민들을 서쪽 국경지대에 머물게 하고는 국경수비를 맡겼는데, 이미 아나톨리아 고지에 정착한 투르크의 도시인들이 그들을 서쪽으로 내몰았다. 그로 인해 코니아의 술탄은 400개에 이르는 천막을 이끌고 소아시아에 도착한 오스만족의 선조인 에르토그룰에게 세습 토지이자 가축들의 여름 목초지로 사용하던 아나톨리아 북서쪽의 소유트 촌락을 양도해야만 했다. 여기서 에르토그룰의 아들 오스만이 오스만 제국의 시조가 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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