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히 11:22]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믿음으로 요셉은 임종 시에 이스라엘 자손들의 떠날 것을 말하고 또 자기 해골을 위하여 명하였으며 - 본문은 창 50:24, 25의 내용에 대한 인용이다. 요셉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애굽에서 탈출시켜 마침내 선조에게 약속한 가나안 땅에 이르게 하실 것과 그 때 자신의 해골을 가지고 갈 것을 유언하였다.
이러한 사실은 요셉의 믿음을 잘 예증해 주는 것으로 자신의 선조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을 통해 내려온 하나님의 약속이 성취될 것이라고 확신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이 출애굽하여 가나안 땅에 이르게 될 것을 예언하였다. 이는 요셉이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성취하신다는 믿음을 소유하였음을 시사한다.
[눅 23:43]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하시니라..."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 - 자신에게 깊은 신뢰감과 믿음을 갖고 있는 죄수에게 예수는 분명하고 확신에 찬 어조로 자신과 함께 낙원에 있게 될 것이라는 약속을 선언한다. 여기서 언급된 '낙원' 파라데이소스 은 '공원' '정원'의 뜻인 페르시아어 파르데스에서 유래된 것인데 칠십인역에서는 에덴 동산을 표현 할 때 사용된 단어이다
그래서 여기서 언급된 낙원은 사 51:3에 나오는 미래적 에덴 동산으로서 기쁨과 즐거움이 약속된 곳이라고 할 수 있다그러나 낙원이 의로운 사람이 사후에 잠시 안식을 취하는 중간적인 장소로 이해되기도 한다 참고로 신약 성경을 통해 살펴보면, 16:22-31과 고후 12;1-4은 죽은 의인들이 이미 낙원에서 주와 함께 거하고 있음을 시사한다.
그리고 계 2:7의 '낙원에 있는 생명 과실'은 부활 이후에 누리게 될 축복과 연관된다고 생각된다. 한편 '오늘'이라는 말은 구원의 즉각성과 현재적 의미를 강조하기 위해 사용된 단어이며, 죄인이 죽어가는 순간에 누리고 있는 믿음의 기쁨을 강조하고 그 기쁨이 죽음 이후에도 단절됨 없이 소유할 수 있는 것임을 확신시키는 의미로 이해될 수 있다.
[고후 12:4]
그가 낙원으로 이끌려가서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낙원으로 - 여기서 언급하고 있는 '낙원'이라는 말은 '세째 하늘'의 다른 표현이다. 그렇다고 이 표현이 유대인들의 '세째 하늘' 개념과 동일하지는 않다. 본절에서 바울은 자신의 신비적 체험을 객관화하여 표현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낙원'에 해당하는 헬라어 '파라데이손'은 페르시아어에서 파생된 단어로 '동산'을 뜻했는데 헬라어와 히브리어에서 이 단어를 차용했다.
구약성경에서 '낙원'은 아담과 하와가 거주했던 에덴 동산 또는 하나님이 계신 곳을 가리키는 데 사용되기도 했다. 또한 신약성경에서는 예수께서 회개한 강도에게 약속한 곳 또는 세상에서 신앙으로 이기는 자가 얻을 영생의 장소로 묘사되어 있다. 따라서 '낙원'은 유대 랍비들의 견해와는 달리 구원받은 자들만이 갈 수 있는 곳이다. 말할 수 없는 말을 들었으니 사람이 가히 이르지 못할 말이로다 - 바울이 경험한 환상과 계시는 너무도 신비로운 것이어서 그것을 인간의 언어로 표현한다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
그리고 바울이 들은 말은 사람들에게 알려져서는 안되는 신적 비밀이기 때문에 발설해서는 안 된다는 의미도 포함되어 있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근거는 구약에서 보여지는 봉인된 계시에 관한 사상이 있기 때문이다 이와 달리 바울이 분명하게 말하지 않은 이유가 그 체험이 바울 개인에게만 해당되는 내용이었기 때문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으나는 타당하지 않다. 어떤 면에서 바울은 묵시 문학이나 영지주의자들이 신비한 체험을 자세하게 진술하는 행위를 비판하기 위해서 의도적으로 더 이상 그 환상에 대해 진술하지 않았을 가능성이 크다.
[마 28:20]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 마태복음에서 예수의 공생애는 `가르침', `전파하심' 그리고 `병 고침'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런데 예수께서 일찍이 제자들을 파송하면서 `병을 고치고', `전파할 것을' 명하셨지만지금처럼 `가르치는 것'에 대한 직접적 명령은 하시지 않았다. 그 이유는 예수께서 살아있는 유일한 선생으로서 가르치는 권세가 그분에게만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는 승천하실 때가 되었으므로 당신의 뜻을 받들어 천국 일꾼으로 계속 매진해야 할 제자들에게 `가르칠' 책임과 권위를 부여해 주고 계신 것이다. 제자들은 이제 세상에 나아가 생전에 스승이 가르쳐 주신 계명들과 교훈을 가르칠 수 있는 권리와 동시에 의무를 갖게 된 것이다. 한편 `가르쳐'는 현재 분사형으로서 지속적인 가르침을 강조한 말이다.
즉 예수의 가르침은 오고오는 세대들에게 전달되고 보존되어야 할 것이었다. 실로 처음 예수의 가르침에 접했던 제자들`눈의 목격자들이 예수께서 가르치신 것들을 주의깊게 전달하여 줄 때 다음은 `귀의 목격자들을 낳게 된다.이러한 역동적이고 생명력 넘치는 전달 과정을 통해 하나님의 나라는 더욱 든든히 서 갈 것이다. 한편 제자들이 가르치는 바는 단지 추상적이고 이론적인 교리로 끝나서는 아니되었다.
그것은 반드시 `지키고' 순종해야 할 그리고 전의지적 결단과 실행이 동반되어야 할 살아있는 가르침이어야 했다. 볼지어다 - 마태가 자주 사용하던 간투사로서, 예수께서 지상 대명령을 마치시면서 그에 곁들여 당신의 위대한 약속을 주시고자 제자들의 주의를 환기시키고 계신 것이다. 따라서 이 `볼지어다'는 본문에서 `확실히' 정도의 뜻이 될 것이다. 세상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
본서는 예수의 탄생이 선지자의 예언을 성취하는 것이며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는 말로 시작되었다.`임마누엘' 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말씀은 이제 본서의 마지막에 강조적으로 다시 언급되고 있다. 이 약속은 성도들에 대한 넘치는 위로와 힘이 아닐 수 없다.비록 그분은 잠시후 승천하실 것이지만 무소부재하신 그분은 여전히 당신의 사람들의 형제요 친구요 구원자요 상담자요 안내자로서 모든 공간 모든 시간을 초월하여 `함께' 계실 것이다.
진정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지니신 그분이`함께' 하신다는 것은 모든 지식과 권능과 사랑를 가지고 언제라도 돕고 위로해 주실 것이라는 초월한 약속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단 매일매일의 삶 속에서 그분의 계명을 지킴으로써 그분의 임재를 체험하고 그분의 주권을 인정하는 자에게만 그분의 약속은 실현이 될것이다.
한편 여기서 `세상 끝날까지'(헤오스 테스 쉰테레이아스 투 아이오노스)란 복음이 땅끝까지 전파되어 주께서 재림하시는,세상 역사의 종말을 가리킨다. 그리고`항상 파시스 타스헤메라스이란 신약에서 여기에만 나오는데 직역하면 `모든 날의 전체'가 된다. 이는 우리의 먼 장래만이 아니라 우리가 현재 살고 있는각각의 날들 모두를 가리킨다. 실로 주님의 임재는 이 `세상 끝날까지' 지속될 것이다.
즉 하나님 나라가 완성될 그때인 역사의 종말 때까지 게속될 것이다. 여기에는 심판에 대한 묵시적 경고가 내포되어있다. 주와 더불어 살아가는 성도 내지는 신앙 공동체는 그 궁극 지향점이 종말이므로 감히 더불어 계신 주님을 떠나 제멋대로 행동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한편 주님의 지상 명령과 그것의 성취 사이의 기간은 추정하기가 어렵다.
어쨌든 그 기간은 교회가 지속적으로 선교해야하는 활동 기간이며, 또 교회가 주의 재림을 예비해야 하는 준비 기간인 동시에 교회가 주의 잔치를 현재적으로 누려야 하는 희락의 기간이기도 하다. 이상으로 본서는 지속적인 선교와 가르침에 대한 기대와 명령으로 끝이 난다. 앞에서 보아왔듯이 본서에 기술된 다섯개의 강화들은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동일한 내용과 함께 끝을 맺고 있다
반면 예수의 수난과 부활 기사는 그의 제자들에게 동일한 사역을 수행하도록 위임함으로 끝이났다. 즉 십자가와 빈 무덤, 그리고 부활하신 주의 영광스런 승리의 현현과 승귀에 비추어서 그 사역을 수행하라는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본서는 주의 명령이 완성되는 `세상 끝날까지'는 종결되지 않는 미완의 책인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