걷고 또 걸었다.
해가 뜨면 길 위에 있었고 날이 어두워 가야 할 길이 사라지면 미리 점 찍어둔 로지로 기어들어갔다.
때론 텐트를 치고 잠을 청했다.
처음 보는 네팔의 산야는 을씨년스러웠다.
하지만 간혹 만나는 마을을 더없이 평화로워 보였고 주민들은 순박했다.
끝없이 이어진 산길과 빙하가 녹아 흐르는 계곡을 따라서 멀리 설산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벼웠다.
행복했다.
베이스캠프까지 가는 보름간의 캐러밴이었다.
모든 것은 순조로웠다.
이대로 걸어간다면 굳이 베이스캠프를 거치지 않고도 에베레스트 정상에 이를 것 같았다.
지도에 새겨진 길이 맞는다면 베이스캠프에서 정상까지는 한나절이면 족했다.
기어서라도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길 위에서 쉴 때마다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카트만두를 떠나온 원정대는 지리(해발 1955미터)라는 산간마을에 도착해서 본격적인 캐러밴에 나섰다.
원정대는 루크라(해발 2840미터)~남체(해발 3440미터)~페리체(해발 4240미터)~고락쉡(해발 5140미터)을 거치는,
산간마을에서 산간마을로 올라가는 힘든 일정을 소화하며 서서히 베이스캠프에 접근해 갔다.
고도로 치면 다음 산간마을까지는 몇백 미터에 불과하지만 실제로 걸어야 하는 거리는 그 몇 배에 이르렀다.
아침부터 저녁까지 부지런히 걸어야 그날 목표로한 산간마을에 겨우 들어섰다.
에베레스트 첫 등반에서 캐러밴은 여러 가지 의미가 있었다.
혹자는 헬기를 타고 곧바로 베이스캠프에 진입하면
굳이 캐러밴을 하지 않고도 등반이 가능한 게 아니냐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고산 등반을 모르는 경우 그러한 생각은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고산 등반을 하려면 일단 신체를 고소에 적응시켜야만 한다.
신체를 고소에 적응시키려면 낮은 곳에서 차츰 고도를 높이며 올라가는 방법밖에 없다.
급한 마음에 한꺼번에 고도를 높이면 신체에 즉각 이상 반응이 나타난다.
당장 호흡곤란을 느끼면서 심장박동이 빨라지기 시작한다.
산소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해발 5000미터에 구축하는 베이스캠프 지역만 해도 대기 중의 산소량은
평지의 절반 정도에 불과하고, 8000미터를 넘어서면 평지의 3분의 1로 줄어든다.
고소에서는 뇌와 폐는 물론이거니와 소화기관이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한다.
흔히 '고소를 먹는다.'고 하는데, 제때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인체는 치명적인 손상을 입게 된다.
계속되는 두통과 기침, 각혈로 고생하다가 뇌수종이나 폐수종에 걸려 사망에 이른다.
제아무리 능력이 뛰어난 클라이머들이라도 신체를 고소에 적응시키지 않고는 고산 등반을 할 수 없는 것이다.
더구나 고산 경험이 없었던 나에게는 지리에서 시작한 보름간의 캐러밴이 그런 점에서 매우 중요했다.
끝없이 계속될 것 같았던 캐러밴이 베이스캠프에서 멈춰 섰다.
베이스캠프는 군대로 치면 최전방에 위치한 지휘통제소 같은 곳이다.
등정에 필요한 작전을 짜는 것은 물론 공격 명령과 철수 명령은 대부분 이곳에서 떨어졌다.
걸어온 길과 올라갈 산의 아슬아슬한 경계 지점에서 베이스캠프가 버티고 있는 것이었다.
원정대는 해발 5400여 미터 지점에 베이스캠프를 구축했다.
이 지점은 지극히 평온했다.
겨울 시즌이라서 당연히 밤낮으로 추웠지만 견딜 만했다.
밤이면 티끌 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 수많은 별빛들이 쏟아져 내렸다.
잠깐이었지만, 이곳에서 오래 살았으면 하는 생각을 했다.
만년설로 뒤덮인 에베레스트 정상이,
정상으로 이어지는 높고 낮은 봉우리들이 아침 햇살에 잠을 깬 듯
저마다 꿈틀거릴 때마다 천지간의 만물들이 서로 어울려 산다는 게 왠지 신비로웠다.
그러나 그런 한가로운 생각들도 루트 개척에 힘을 쏟으면서 이내 머릿속에서 사라졌다.
에베레스트 등반길에는 나를 포함해서 모두 8명의 대원이 참가했는데,
우리는 모두 히말라야에 처음으로 발을 디뎌보는 것이었다.
에베레스트 등반에서 처음인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국내에는 2000미터가 넘는 산이 없으므로 해발 5400미터까지 올라온 것도 첫 경험이었고,
베이스캠프에서 먹고 자면서 오랜 시간 함께 등반을 해보는 것 역시 처음이었다.
물론 원정을 떠나오기 전 장기간 합숙훈련을 하며 등반 기술을 익히고 손발을 맞췄지만 정작 에베레스트를 대했을 때,
그 위용 앞에서는 모두가 주눅이 들 수밖에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원정대는 에베레스트에서 가장 어렵다는 남서벽 루트로 정상에 오를 계획을 갖고 일정을 진행시켰다.
남서벽 루트는 1975년 가을 시즌에 영국의 크리스 보닝턴Chris Bonington이 처음 등정에 성공한 뒤로
1982년 봄에는 구소련 원정대가,
1983년 가을에는 일본 원정대가 그 루트를 이용해서 에베레스트 정상에 오른 적이 있었다.
그러나 겨울 시즌에 남서벽 루트를 이용해서 등정에 성공한 원정대는 단 한 팀도 없었다.
강풍과 혹한 때문에 겨울 등반이 어려울뿐더러 다른 시즌보다 사고의 위험이 한층 더했기 때문이었다.
그런 점에서 고산 등반 경험이 전무한 '초보 원정대'의 남서벽 루트 도전은 어찌 보면 무모할 수 있었다.
루트 개척이 시작되면서 나는 원정에 참가한 것을 몇 번이나 후회했다.
처음 겪는 에베레스트의 겨울 날씨는 견딜 수 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지옥이 따로 없었다.
등정은 고사하고 하산하는 것조차 두려웠다.
7800미터 지점까지 진출했다가 결국 되돌아올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캠프 2를 향해 하산하는 길에 돌풍에 휘말려 로프에서 떨어지면서 죽기 일보 직전의 상황에 내몰려야 했다.
당시를 떠올리면 지금도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은 느낌이 전해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