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년대 중반 삼성전자 종합연구소장으로 있던 윤 전 부회장은 현대전자로 자리를 옮긴다. 이어서 네덜란드의 필립스전자 본사로 스카우트 된다. 이런 그를 그룹 회장에 취임한 이건희 전 삼성 회장이 다시 불러들인다. 그도 좌절을 겪어 봤을까? “반세기 가까이 월급쟁이 하면서 그런 경험이 없겠습니까? 그럴 때면 묵묵히 인내했습니다. 절망하지 않고, 전화위복이 되겠거니 하면서 감사하는 마음으로 받아들였죠. 사실 좌절도 하고 실패도 해 봐야 훌륭한 리더가 될 수 있습니다.” (*1)
더디긴 했지만 운종용의 VCR은 제대로 된 모양새를 갖추기 시작했다. 그런데 아쉽게도 이병철 회장은 더 이상 기다려주지 않았다. 갈 길이 먼데 너무 굼뜨다는 것이었다. 윤종용은 VCR사업부에서 물러나왔다. 윤종용은 이 때 많이 방황했다. 어디서도 쉽게 자리를 잡지 못 하고 뿌리를 잃은 채 떠돌았다. 그러다가 86 아시안게임으로 전국이 한창 축제 분위기일 때, 더 이상 견디지 못 하고 한국 땅을 등지고 말았다. 네덜란드로 건너가 필립스에서 1년을 보냈던 것이다. 선진국에서는 배울 것이 너무나 많았다. 윤종용은 나날이 발전하는 한국의 모습을 TV로 보면서, 거기에 끼어 있지 못 하는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더욱더 일에 몰두했다. 하지만 마음은 언제나 두고 온 마음의 고향, 삼성전자에 가 있었다. 선진 유럽의 높은 기술을 한 가지씩 배울 때마다 자신도 모르게 삼성전자 공장이 머리 속에 늘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2)
이건희 회장이 몰아붙인 신경영 바람은 몇 년도 가지 않아 그 흔적조차 사라져 버리고 말았다. 철저한 위계질서를 자랑하던 삼성이 그 뿌리가 흔들리자 전체가 덜컹거리기 시작한 것이다. 1995년 말 겨울, 삼성그룹에 또 다시 심각한 분위기가 감돌았다. 반도체 메모리의 경기도 좋았고, 삼성전자는 세계를 놀라게 할 정도로 사상 최대의 이익을 안겨 주었으나, 그룹 전체까지 안이한 환상의 자락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개혁파였던 윤종용은 또 다시 자리를 옮겼다. 그에게 맡겨진 직책은 삼성그룹 일본본사 사장. 변방의 한직으로 가게 된 것이다. 타고난 공학도이며 기술자인 그가 현장을 떠나 그룹에서, 그것도 일본 땅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윤종용은 자신이 그토록 뛰어넘고 싶었던 일본 땅에서 갑자기 방관자가 된 것 같았다. 일본에서는 바야흐로 정보화의 신세대가 열리고 있었다. 일본인들은 특유의 적응력을 보이며 변화에 맞게 몸을 변화시키고 있었다. 윤종용은 넋이 나간 듯이 구경만 하고 지내야 했다. 시련을 기회로 삼으라고 했던 성현들의 말을 떠올리면서 일본어도 배우고 일본의 선진기업을 연구하면서 지냈지만, 늘 현장이 그립기만 했다. 10년 전에 밀려났을 때보다 아쉬움이 더 컸다. 해야 할 일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는데, 그 많은 일을 하지 못 하고 있다는 사실이 견딜 수 없었다. 초일류로 도약하기 위한 좋은 기회를 놓칠 것만 같았다. 한국과는 달리 일본은 하루가 다르게 변하는 새로운 환경에 잘 적응해가는데, 우리만 뒤쳐지는 것 같아 안타까웠다. (*3)
*1 「포브스 코리아」 인터뷰문(2009.4.7) ; 조인스닷컴(2009.5.6).
*2 홍하상, 「창조와 혁신의 리더 CEO 윤종용」(위즈덤하우스, 2007), 20-21쪽.
*3 위의 책, 46-47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