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촌 이발사/ 나관주
훤칠한 풍모에 반짝이는 조약돌
날렵한 열 손가락 열 손도 한나절에
손으로
손 다루는 멋
웅변보다 미쁘다
부인인 듯 중년 여인 빗자루 들고 서서
이따금 허공만 가른 이 눈빛과 저 손짓
방긋이
터질 듯 닫힌
무공해 저 입술들.
*************
광화문의 봄/ 유헌
1.
초대형 스크린에
주홍빛 자막 한 줄
열다섯 벼린 음절
현대사를 쓰고 있다
광장도 목청 가다듬고
주문(主文)을 외고 있다
2.
홍매화 가지가
푸르르 떨고 있다
뻥 뚫린 수관(樹冠)의
물줄기 어쩔 수 없어
기어이 붉은 울음을
토해내고 있었다
************
층층나무/ 김강호
층층마다 마음을
활짝 열어 놓았다
아래위 할 곳 없이
갑질 을질 한 번 없다
봄 나절 흰 웃음소리가
넘쳐나는 초록 집
******
봄빛이 달다/ 박정호
봄빛이 달다. 들숨날숨 숨통이 트여 한 숨 토하듯,
허구한 날 지난 뒤에 물밑으로 내려닿는
봄빛이
아득히 달다
장꽝 가
지금, 매화.
************
비양도의 저녁/ 박현덕
도시에서 너덜너덜 찢긴 마음 보자기 싸
해거름 비양도행 철선 무작정 오른다
물컹한 바다 지날 때 폐부에 물이 찬다
민박집 옥상에서 죽은 듯이 혼술한 밤
한치잡이 배들의 불빛도 더 붉어져
앙가슴 가득 쌓인 울음, 바람을 슬쩍 부른다
생의 어느 한 굽이 돌아보면 저녁이다
혀짧은 울음들이 하늘에 총총 박혀
우물 속 잠긴 달 같은 비양도를 비춘다
************
견줄 수 없이/ 서연정
정상을 꿈꾸는 순례자의 신발에
희디흰 구절초의 맑은 피 묻어있다
저마다 삶의 무게를 가늠해 보는 순간
견줄 수 없이 경건한 빛이 태어난다
태양의 문진일까 무등산 주상절리들
미래로 들어가는 문짝의 부서진 돌쩌귀일까
걸어가야 할 곳을 바라보는 눈매에
오지 않은 것들을 기다리는 가슴에
설레며 두려워하며 그리움이 쌓인다
************
모래밭의 외로운 모래알/ 선안영
하늘 벼랑을 매달려 기어오르다 떨어지는
난장이 아버지의 아들은 또 난장이
이제는 날개 없이는
더 오르지 못하는
난장이 밥그릇이라고 간장 종지는 아니므로
철탑이나 송전탑 혹은 종탑, 광고탑을
수없이 깃발처럼 올라서도
눈을 찌른 먼 별빛뿐
우리끼리 뭉쳐도 쉬 부서지고 흩어져
의지 없이, 기약 없이, 얼굴 없이 밟힐 뿐
눈물이 다 흐르고 난 뒤
드러난 쩔은 심장!
*************
마을 앞 깃발 듀오· 2/ 송선영
새봄을 손꼽으며 허연 적막 휘감다가
새봄이 내 봉창 열쳐 벽겨울에 심방 왔네
새아침
춤사위 좀 보게
덩달아 벙근 동백도….
***********
화순 적벽/ 윤삼현
깎아 세운 저 대문은 언제 빗장을 열까
귀 잠그고 눈도 닫은 아뜩한 시간의 맞섬
몸을 푼 노을이 뚜벅뚜벅
보란 듯 걸어들어간다
************
귀를 열다/ 염창권
댓가지가 한쪽으로 휘인다
휘어들며,
그 안쪽에 텅 빈 둘레를 만든다
내부에 둥그렇게 팬
징소리의 구덩이
진창에 떨어진 채 반나마 묻혀 있는
새 발가락 모양을 오려서 붙여놓은
흉하게 구겨진 것이 탈피 덜된 껍질 같다
등 굽은 사람이 귀 모양을 하고 섰다
덧 대인 상처 위에 울림판이 두툼하다
환청의 벽을 긁어대는
미증유의 소식들
**********
외눈/ 이송희
한 쪽 눈을 잃고서야
양쪽 눈을 얻었다
한 쪽만 바라보고
한 쪽으로만 걸었던
외골수 외길의 시간,
외롭고도 더딘 길들
흑백의 담장 앞에서 밀고 당기며 새던 밤
앞에서 달려오는 그의 말을 자르던
편견의 깊은 동굴 속
뼈아픈 밤의 소리
이제 나는 외눈으로 내 깊숙한 곳을 본다
한 쪽 눈에 담겨지는 더 넓은 들판을
너와 나, 우리 사이를
가로지르는 말의 세계
************
떠난다는 것/ 전원범
떠나는 사람들이 저녁 강을 건너고 있다
새들도 마침내 집착을 버리고 날아간다
이별은 사금파리 같은 것
몇 조각의 아픔
그러나 잠시 눈을 뜨고 바라다 보면
얽혀있던 것들이 서로를 품고 있다
저렇게 사랑하고 또
미워하고 용서하고
모든 것 다 놓아두고 슬픔까지 털어버리고
끊어져 멀리 날아가는 연처럼…
사람의 뒷모습을 본다
가는 이의 자유를 본다
************
카페 게시글
함께 가는 길
광주전남시조문학 제16호/ 광주전남시조시인협회/ 2017
바보공주
추천 0
조회 113
18.01.11 10:22
댓글 1
다음검색
첫댓글 서연정 「견줄 수 없이」 2수 종장: 2017년 11월 발간한 시집 『광주에서 꿈꾸기』에는 “미래로 들어가는 문짝의”를 “미래로 들어가는 문,”으로 교정 수록함. 이 작품은 시집이 나오기 전의 형태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