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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5회 친일파는 살인자(미발표)
류연산
2003년 연변대학 북산 언덕 소나무 숲 속에 <<항일무명영웅기념비>>가 세워졌다. 새하얀 대리석으로 합장 묘처럼 둥글게 만든 기념비 뒷면에는 <<항일구국투쟁 중에서 용감히 헌신한 수천만 무명영령들을 기리어 이 비를 세웠다(爲紀念在抗日救國鬪爭中英勇獻身的成仟萬無名英靈特立此碑)>>라는 글이 새겨져 있었다. 일제강점시기 연변에서 나라와 민족을 위해 이름을 남기지 못하고 희생된 사람이 무려 5만 명이나 된다고 한다. 광복이 나던 해에 연변의 조선인 인구가 60여 만, 12명 중 한 사람이 희생되었다는 계산이다. 식구가 많았던 당시로 보면 거의 가구 당 한 사람씩 목숨을 바친 셈이다. 그래서 연변의 특징의 하나를 <<산마다 진달래, 마을마다 기념비>>라고 하는 것도 명실(名實)에 부합되는 표현이다.
연변은 일제가 만주를 강점하기 십 년 전 1920년부터 토벌을 당해왔다. 일제의 토벌방침은 모조리 죽이고 모조리 빼앗고 모조리 불사르는 삼광정책(三光政策)이었다. 박은식(朴殷植)선생께서 1920년 상해 대한민국인ㅁ시정부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여 편찬한 <<조선독립운동지혈사(朝鮮獨立運動之血史)>>에는 이런 구절이 있다.
왜적들은 교포가 사는 각 촌락을 습격하여 가옥, 교회, 학교 및 곡식 등을 닥치는 대로 불질러 잿더미로 만들었으며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학살하였다. 우리 동포들은 할아버지와 손자가 또는 부자가 함께 죽었으며 남편을 죽이고 그것을 아내에게 보이거나 아우를 죽여서 형에게 보이었으며 상제가 신주를 가지고 도망하다가 형제가 함께 피살당하였으며 산모가 갓난 아이를 안고 달아나다가 모자가 함께 학살당하는 일이 허다하였다.(제241-244페지)
일제의 야수적인 학살방식에 대해 <<대한국독립운동공훈사(大韓國獨立運動功勳史)>>에서는 이렇게 썼다.
붙들어온 남자를 일렬로 세워놓은 후 소총사격연급의 과녁으로 삼았으며 또는 총살 보다 총 창으로 죽이기를 즐겨하였다.
총 창으로 찌른 후 고통을 호소하며 죽어가는 것을 보기를 좋아하기 때문이었다.
또한 산 사람의 얼굴 껍질을 완전히 벗겨내고 팔 또는 다리를 절단하거나 눈을 칼로 찌르는 등 천인공노할 만행을 자행하였다.
더욱 참혹한 것은 2, 3세 되는 어린 아이를 창에 꾀어 들고 다니는 것이었다.
그리고 서양 선교사들의 눈을 피하기 위하여 죽은 시체는 반드시 소각하여 흔적을 없애버렸던 것이다.
이것은 1920년 경신년 대토벌에 대한 기록이다. 그런데 친일파들은 일제의 죄악을 덮어 감추기에 급급했고 무고한 양민들을 살인강도로 표현하는 등 몰염치한 자태를 보였다. 그리고 그 시체가 썩어서 진토가 되기도 전에, 친인을 잃은 사람들의 그 마음의 상처가 아물기도 전에 박석윤, 조병상, 전성호, 최윤주와 같은 민생단 설립자들은 조선총독부에 군사요청을 하였고 친일 문인들은 일제의 침략을 비적 토벌이라고 미화하는 선전에 광분했다.
이른 바 친일파들이 말한 비적들이란 어떤 사람들이었던가?
그들의 논리대로라면 일제의 총칼에 죽은 사람들은 비적일 것이다. 그렇다면 5만 명 무명 영웅 모두가 비적이란 결론에 빠진다.
그렇다면 친일파의 눈에 비친 <<비적>>의 형상을 살려보기로 한다.
김순희(1910 - 1931)는 현재의 화룡현 두도진 약수동촌에서 야학을 꾸리고 반일교육을 해온 여성 혁명가였다. 1931년 음력 동지 달 초나흘 새벽 일본군 수비대는 마을을 포위하였다. 당시 현장을 목격했던 사람들의 구술을 최현숙씨가 정리하여 쓴 <<장백의 투사들>>(제1집 연변인민출판사 1982년 출판)에서의 그녀의 최후는 눈물 없이는 볼 수 없는 비장한 모습이었다.
---날창을 받쳐든 왜병들이 줄지어선 마당에는 동리에 남아 있던 군중들까지 붙잡혀와 서 있고 그 앞에는 순희가 태연하게 서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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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는 뭣이 들어 있느냐?>>
놈들은 순희의 뚱뚱한 배를 가리키며 물었다.
<<네놈들을 잡을 영웅이 있다.>>
<<닥쳐라, 식량은 다 어디다 감췄냐?>>
<<모른다.>>
<<빨갱이들은 어디 있느냐?>>
<<기다려라. 너희들을 잡으러 곧 올게다.>>
---순희의 가슴 속에서는 새 생명이 꿈틀거리고 있었다. 세상에 태어나지도 않은 생명마저 불행을 당해야 하니 어머니로서 심장은 칼로 에이는 듯 아팠다. 그러나 순희는 이를 악물고 추호도 드팀 없이 참고 견디었다.
---놈들은 매로써 순희의 입을 열어보려고 꾀하였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아무 말도 들을 수 없었다.
순간 순희의 얼굴은 새파랗게 질렸다. ---순희는 자기로 혀를 물어 끊었다. 놈들이 알려고 날뛰는 비밀을 말하지 않기로 작심한 것이었다.
---참대는 꺾을 수 있어도 순희의 절개는 굽힐 수 없었다. 놈들은 순희를 널판자에 동여매어 순희의 백부인 정태준노인네 집안에 들여다 놓았다. ---뒤이어 놈들은 피투성이 된 김득봉이와 정태경, 이덕길, 황익두, 그 외 두 사람마저 끌어다가 한 집안에 처박았다.
기관총이 일시에 불을 토하자 불이 일었다. 김순희와 그 외 동지들이 불길 속에서 영용하게 희생되었다.(157 - 160페지에서)
김순희의 남편은 항일 유격대원이었다. 그녀는 마을 사람들을 조직하여 항일하도록 하면서 유격대의 식량과 필수품들을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녀는 산 속에 감추어둔 유격대의 식량을 보존하고 마을 청년들 속에 있는 유격대원들을 살리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바쳤던 것이다.
김순희와 같은 사람들의 후원을 받아 성장해온 유격대는 오라지 않아 항일연군으로 성장했다. 그들은 앞사람이 쓰러지면 뒤 사람이 이어가면서 나라의 독립과 민족의 해방을 위해 피 어린 투쟁을 하였다.
바로 김순희의 정신이 살아있는 약수동 마을에서 필자는 1983년에 한 항일열사 박상활의 동생을 만났다. 그한테서 들은 박상활의 최후는 감동 없이는 들을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그 사적을 글로 썼고 <<장백의 투사들>>(제2집 연변인민출판사 1985년 출판)에 <<장백의 불사조>>라는 제목으로 수록하였다.
박상활(朴相活 일명 박순일 1904 - 1937년)은 화룡현 용수향 석국촌에서 태어났고 1936년 동북항일연군 제1로군 제2사의 군수부장이었다. 1937년 초 그는 제6사로 파견되어 가던 중 발에 엄중한 동상을 입고 헤이샤즈거우(현재 장백현 경내)와 홍두산 사이에 있는 바위굴병원에 체류했다.
---병원이래야 우뚝 솟은 칼바위미테 대여섯 들 수 있는 천연바위굴로서 의사도, 아무런 의료설비도 없었다. 병원에는 <<4사 아바이>>(이름 미상), 이계순, 이두수 그리고 한족 왕씨와 박상활까지 모두 다섯이 있었다.
박상활의 상처는 대단히 심했다. 언발은 만투처럼 팅팅 부었는데 살색은 숯처럼 까맣게 죽고 발가락은 이미 썩어 앙상한 뼈가 들여다보였다.
---박상활의 상처는 점점 악화되었다. 생명을 살리자면 절단 수술을 해야 했다. 그러나 아무런 수술도구도 없고 더구나 마취약은 상상도 할 수 없는 정황에서 큰 수술은 엄두도 낼 수 없었다. ---박상활은 통졸임통을 펴서 가위로 베어 톱을 만들었다.---
<<나는 두발을 잃더라고 살아야겠소. 살아서 끝까지 항일을 해야겠소. ---이제부터 우리 함께 절단 수술을 합시다.>>
모두들 놀랐다. 차마 생발을 어떻게 자른단 말인가? 마취제도 없이, 의료경험도 없는 사람들이 양철로 만든 톱으로 발을 자른다는 것은 너무도 황당한 일이었다.
<<동지들, 전선의 동지들은 우리가 완쾌되어 하루 속히 대오로 돌아올 것을 기다리고 있소. 그런데 내가 박지약행으로 죽음을 기다려서야 되겠소. 난 오늘의 일시적 고통이 두려워 장래를 잃을 순 없다오.>>
모두들 고래를 숙였다. 흐느낌 소리가 간간이 울렸다.
<<동무들이 이러면 난 정말 섭섭하나디. 나는 죽게 내버리고 동무들만 살아서 싸우고 승리할테요. 고약하기루 너무하다니까. 자 전투를 시작합시다.>>
박상활동지는 껄걸 웃으며 톱을 쥐어 들었다.
사륵사륵---뼈를 끍는 톱소리에 박상활의 몸을 잡은 동지들은 몸서리를 쳤다.
박상활동지의 얼굴에서는 줄땀이 낙수물처럼 흘렀고 사려문 그의 입술에서는 피가 송골송골 솟아 올랐다.
동지들은 그의 고통을 짐처럼 나누어 가질 수 없는 애탄 마음에 눈물을 머금었다. 이계순동지는 북받쳐오르는 울음을 흡흡 속으로 삼켰다. ---
하루가 지났다.
또 하루가 지났다.
수술톱이라면 한참이면 끝을 보련만 밤낮 사흘간에 겨우 한쪽 발을 잘랐을 뿐이었다. ---옹근 엿새동안의 전투를 거쳐 절단수술은 끝났다. 그것은 격동 없이는 들을 수도, 볼 수도 없는 격렬한 전투였다. 그것은 또한 전대미문의 영웅 서사시였다.
그 해 음력 12월 4일이었다. 왕씨와 이두수가 관솔을 하러 간 사이에 변절자를 앞세우고 토벌대가 들이닥쳤다. 박상활은 동지들을 구하기 위하여 눈 판을 기어 바위께로 적들을 유인했다. 박상활은 그가 남긴 자취를 밟아서 온 적들의 총탄에 희생되었다. 그 후 이두수와 왕씨가 살아서 부대로 돌아갔다.
김순희와 박상활의 사적은 일찍 영화로 각색되기도 했다.
김순희와 박상활처럼 연변 명 유명 열사들 저마다 백절불굴의 감동적인 이야기를 가지고 있다. 그들의 모습은 하나 같이 항일성전의 최후의 승리를 위해 하나밖에 없는 보귀한 생명을 초개같이 버렸다. 웽그리아 시인 뻬떼피가 시로 읊조렸듯이 사랑을 위해서 생명도 바치고 자유를 위해서라면 사랑도 달갑게 바쳤던 것이다.
그러므로 무명영웅기념비 앞에 서면 저절로 머리가 숙어지고 마음은 숭엄한 감동에 사로잡힌다. 동시에 이들을 살해한 야수같은 일제와 그 친일주구에 대한 적개심으로 가슴이 불타오른다.
만주의 경우 일제의 토벌대 앞에는 친일주구가 있었다. 연변에서 가장 악질적이고 대표적인 토벌대를 든다면 간도조선인특설부대와 <<신선대>>라고 하겠다. <<신선대>> 역시 친일 무장부대이며 명월진에 본부를 두고 있다는 것으로 특설부대와 같다.
대장은 이도선(李道善), 본인은 물론 수하 대원 상당히 변절자들이었다. 그는 원래 독립운동 당시에 항일운동에 참가하였으며 줄곧 항일연군에서 활약하다가 일본군의 포로가 되어 혁명을 배반하고 안도현 치안대에 적을 두었었다. 대원들 상당수가 이도선과 같은 변절자들이라 항일연군의 내막과 백두산 일대의 지리에 대해 손금보듯 했다. 그 외의 대원들은 포수 출신들이라 불질을 잘하였다. 하여 치안대는 <<나는 새도 떨군다>>는 용력으로 일본군 토벌대의 앞장에서 혁혁한 공적을 세웠다. 안도현 치안대는 마안산밀영을 포위하고 항일연군 제2군 정치부 주임 이학충과 부상자들을 살해했고 처창즈, 황니거우, 석문자, 호로계자, 두도구, 흥륭 등지를 수차 토벌하여 무고한 백성과 항일투사들을 무수히 학살했다. 그로 말미암아 이도선은 훈장을 탔고 치안대는 <<신선대>>라고 불리게 된 것이었다.
반대로 항일연군에서는 이도선을 <<저승에서 보낸 악귀>>라고 불렀고 끝내 저승으로 돌려보냈다.
그것은 1937년 4월이었다. 동북항일연군 제2군 4사 1퇀의 3개 연과 2퇀 3연, 6사 9퇀, 사 직속인원 근 3백 여명이 사장 주수동과 최현, 김홍범 등의 지휘아래 두만강연안에서 무송현 동강을 향해 가던 중 안도현 대사하에서 <<신선대>>와 조우전을 벌렸다.
당시의 전투상황을 이천록은 <<이도선토벌대의 끝장>>(<<중국 조선민족발자취 총서 4 <결전> 제97 - 99페지)이라는 글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아군의 보초가 적정을 발견하고 신호총을 쏘았다. 적들은 이미 40 - 50미터 가까이에 접근해왔다. 놈들은 휴식하고 있는 아군부대에 기관총과 보총사격을 퍼부었다.
주수동사장이 적탄에 맞아 장렬히 희생되었다.
사태는 위급하였다.
기관총수 이달경은 --- 총소리에 놀라 깨어나 적들에게 불벼락을 안기었다.
뜻하지 않은 기관총사격에 놈들은 갈팡질팡하였다. 아군 전사들은 금전 구덩이나 버럭 더미 같은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맹렬히 반격하였다. 적들은 삼대 넘어지듯 쓰러졌지만 물러갈 염은 하지 않고 결사적으로 대들었다.
--- 전투는 치렬하였다. --- 적아간의 거리는 20 - 30미터밖에 안되었다.
최현퇀장은 <<수류탄을 던졋!>>하고 명령하였다. 수류탄이 적진으로 날아갔다. 여기 저기에서 적들의 비명소리가 들려왔다.
<<돌격!>>
최현퇀장의 명령이 내리자 돌격나팔소리와 함성이 골짜기를 메웠다. ---
전투가 끝났다.
전사들은 전장을 수습하면서 짐꾼들한테서 아군이 악명 높은 이도선부대와 싸웠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이때 한 중년 농민이 놈들의 시체사이에 누워있는 한 군관을 발견하였다.
그 놈의 목에는 금으로 만든 인형이 걸려 있었고 호주머니에는 도장이 들어 있었다. 놈은 죽지 않았으나 짐짓 죽은 체하고 누워 있었다.
<<철천지 원수 이도선을 붙잡았다!>>
누군가 이렇게 비분에 넘쳐 외쳐댔다.
짐꾼들은 한결같이 이런 악귀는 죽여 버려야 한다고 하였다. 누군가 달려가 그놈을 발길로 찼다. 그래도 그놈은 죽은 체하고 꼼짝하지 않았다.
이도선은 싸움이 가장 치렬할 때 도망치다가 아군의 총탄에 허벅다리를 맞고 시체더미 속에 죽은 체하고 누워있었던 것이다.
중년 농민은 꽁무니에 찼던 도끼로 이도선의 목을 내리쳤다. 놈의 대가리가 뭉텅 끊어져 땅위에서 뒹굴었다. 짐꾼들은 몽둥이와 돌로 그놈의 시체를 죽탕을 만들어 놓았다.
안도현 노진창에서 참패를 당하고 이도선이 죽었다는 말이 돌자 사람들은 앓던 이를 빼버린 것처럼 시원해들 했다.
그러나 주구를 잃은 일제는 그를 영웅으로 받들어 명월구에 기념비를 세워 주었다.
이같이 친일파한테 분명한 것은 인민의 적이자 일제의 벗이라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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